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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정의와 시적 정의의 통섭에 대하여우리 시대와 페스탈로치(4) - 페스탈로치의 <입법과 신생아 살해>
이은선 (세종대) | 승인 2017.01.19 10:54

시작하는 말

오늘 2016년 10월부터 본격화된 대한민국 촛불정국의 현실은 여전히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미궁과 혼동 속에 놓여있다. 특검의 수사가 진행될수록 최순실을 비롯한 비선실세들과 그와 함께한 부역자들의 국정농간이 어느 정도였는지가 속속 드러나면서 심지어는 사드배치나 일본군위안부 협상에까지 그들이 개입했다고 하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취임초기부터 그전의 이명박 정부가 무색할 정도로 법과 정의, 공정을 내세우며 그를 통한 민생회복을 거론하더니 그 속의 실상은 거의 반대수준이다. 우리 시대의 많은 비참과 비인간적 현실이 바로 이러한 정치와 법질서의 훼손과 깊이 관련이 있고, 거기서 기득권자와 지도자층의 부패와 탐욕이 끝모르게 진행되어 왔으니 우리 시대는 그래서 다시 올바른 입법을 요청한다. 

자신들은 드러나지 않게 온갖 방식으로 법을 농락하지만 그런 정부와 특권층일수록 겉으로는 법의 수호를 강조하고, 그들의 법 정신은 점점 더 신화적으로 굳어진다. 온갖 편의주의와 기계적 제재와 규칙으로 굳어져버린 서구 근대 관료주의의 폐해는 그 이후의 일이지만 페스탈로치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 구제도 사회가 어느 정도로 내적으로 부패했고, 거기서 어떻게 법의 경직과 훼손으로 민중들의 삶이 비참과 파멸로 내몰렸는지를 밝힌다. 그의 「입법과 신생아살해, 1783」라는 작품이 그것이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도 온통 우리의 담론을 채우고 있는 것이 특검, 검찰조사, 헌법재판소 등, 온통 법과 관련된 것이므로 페스탈로치가 이 작품에서 진정한 법 정신과 법 정의가 무엇이고, 어떻게 새로운 입법을 통해서 당시 유럽사회의 구원을 찾았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의미 있다. 

지난 연말의 한 일간지에 한 법학교수의 『법정에 선 문학』이라는 책이 소개되면서 거기서 등장하는 ‘시적 정의’와 ‘법적 정의’란 말이 다시 회자되었다. 시적 정의란 말은 원래 미국의 여성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 Nussbaum)의 『시적 정의-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이라는 책에서 깊이 있게 성찰된 언어인데, 그녀는 문학적 상상력과 시적 정의 감각이 결코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법관들이 더욱 더 진정성 있고, 깊이 있게 법 규정들을 해석하고 판정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문학적 상상력과 시적 정의, 그리고 법적 정의의 긴요한 관계를 밝히는 것인데, 이 관계에 대한 한 선배 여성신학자의 주목을 들으면서 나는 바로 페스탈로치의 이 작품을 떠올렸다.

중세의 처벌 도구

이번부터 삼 회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하는 페스탈로치의 작품 「입법과 신생아 살해」는 1783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그 첫 출판의 표지에 『리엔하르트와 게르투르드(Lienhard und Gertrud, 1780)』 와 같은 저자에 의해서 쓰여진 글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페스탈로치는 이미 이 유럽 최초의 농민소설을 통해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생아 살해’란 아기를 낳은 여성들이 자신의 손으로 아기를 죽이는 사건을 말하는데, 당시 이 비참한 범죄는 유럽 전역에서 빈번하게 발생하여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것으로써 계몽주의 유럽의 자존심은 심한 타격을 입었고, 그래서 괴테를 비롯한 지성인들이 이 문제를 다루면서 해결을 모색하려고 했다. 독일의 한 휴머니스트는 ‘어떻게 풍기를 문란하게 하지 않으면서 신생아살해를 방지하는 최선책을 구할 수 있겠는가?’ 라는 현상 논문공모를 시행하였다. 당시 급진적인 사회 변동의 와중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신세대들의 고통에 함께 하려는 것이 자신 삶의 탐색이었던 페스탈로치에게 있어서 이 주제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글은 원래 그 논문공모를 염두에 두고 시작된 것이라고 하나 글이 진행되면서 그 범위를 훨씬 넘었다. 

이 글의 제목대로 페스탈로치는 국가 입법과 법철학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서 혁명적인 법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고통과 비참에 빠진 가난한 여성들의 편에 서서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한국 페스탈로치 연구가 김정환 교수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법학 분야에서 이 논문이 깊게 다루어져서  근대 법정신의 발달에 있어서도 페스탈로치가 어떻게 기여했는지가 연구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과거 응징적인 차원이나 격리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법집행이 아니라 교육적이고 선도적인 차원의 법집행을 주창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법집행이야말로 인간법이 지향해야하는 참된 목표라는 것을 밝혀주었다는 점이다. 

당시 유럽은 계몽주의가 활짝 꽃을 피우던 시기였고, 그래서 자신들의 시대를 ‘새시대(Neuzeit)'라고 하면서 인류 진화의 역사상 가장 최선봉에 있는 시기로 자신하던 때였다. 그런데 그 시기에 여성들이 아기를 낳자마나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고, 또 그 일이 발각되면 예외 없이 그 여성들을 교수형에 처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이래도 계몽된 사회인가를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비참한 일들이 왜 일어나고 있으며, 거기서 진정한 범인은 누구이며,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들을 막을 수 있는가를 탐색한 것이 페스탈로치의 『입법과 신생아 살해』이다. 그는 당시의 여러 법정의 사례들을 수집했고, 여성들의 육성을 직접 들려주려고 노력했으며, 그 가운데서 독자들의 인간애에 호소했다.

‘신생아 살해’-어떻게 이해하면 좋은가?

“신생아 살해! 내가 꿈을 꾸고 있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진짜 일어났는가? ... 이 시대여, 당신의 얼굴을 가리시오! 유럽이여 고개를 숙이시오! 당신의 법정으로부터 들립니다. 수천의 나의 아이들이 그들을 낳아준 어머니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있다고. ... ”(KA9:7)1)
   
이러한 절규와 더불어 시작하는 페스탈로치는 유럽으로 하여금 무엇이 그녀의 산모들을 자신 아이들의 살인자로 만드는지를 묻는다. 출산의 그 순간에 손을 뻗어서 아이들을 죽이다니! 그러한 일은 결코 제정신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 가슴속의 깊은 절망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그 절망이 오는가? 페스탈로치는 외치기를, 

“너의 칼을 다시 꼽아 넣어라, 유럽이여. 네가 그녀들을 사형시킨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깊은 절망의 분노 없이 어느 소녀가 자신의 아이를 죽일 것이며, 그렇게 되었을 때는 이미 너의 칼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KA 9:8)  

페스탈로치는 유럽이 이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여성들을 잡아서 교수형 시키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선포한다. 오히려 그녀들의 절망의 근원을 찾아서 그것을 치유하지 않으면 결코 아이들을 구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해서 그녀들이 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게 되었는지, 결코 그녀들이 악해서, 계획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거의 제정신을 잃은 상황에서 행한 일임을 그려낸다. 당시 유럽은 근대 산업문명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고, 전통의 농촌문화가 해체되면서 가난한 농촌의 젊은이들이 도시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특히 여성들은 도시귀족의 가정에서 식모살이 등을 하면서 그 집주인이나 군인들, 대학생 등 남성들의 욕망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당시는 결혼하지 않고 임신한 여성들의 출산이 가정적으로, 국가 사회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극히 터부시되던 때이므로 이들의 비참은 극심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 한 남성을 믿고서 잠자리를 같이 하여 임신을 했지만 그 남성은 도망가 버리고 여성은 절망 가운데 홀로 남겨졌을 때, 그녀는 당시의 상황에서 임신한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하고 극심한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지낸다. 그러다가 시간은 점점 가서 어느 순간 해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면서 거의 제정신을 잃고 살인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임신의 열 달을 고통 속에서 홀로 보냈으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하는 끝없는 방황 속에서 완전히 지쳐버렸고, 그렇게 철저히 무기력하게 만드는 절망은 바로 갓 태어난 아기를 죽이는 발작으로 표현된다고 페스탈로치는 그리고 있다. 

따라서 페스탈로치에 의하면 여기서 살인을 한 것은 그녀가 아니고 그녀의 절망이며, 그녀가 절망한 것은 도망간 남자를 믿었기 때문이고, 그러나 그녀가 얻은 배신과 모든 선한 것들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결국 살인을 저지르게 했다고 밝힌다. 페스탈로치는 당시 유럽에서 풍기범에 대한 국가의 처벌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그려주고 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서는 그 이전까지 교회가 담당하던 풍기에 대한 컨트롤을 국가가 맡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오늘날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의 개인에 대한 폭력과 간섭은 심했다. 당시 남녀들은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성관계를 가진 것이 발각되면 잡혀가게 된다. 거기서 상당한 액수의 벌금을 물어야 하는데, 식모살이를 하던 농촌출신의 가난한 여성들은 그것을 감당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들은 목에 종이 달린 채 거리에 끌려 다니며 자신의 몸으로 거리를 청소해야 하고, 그때 사람들은 그녀에게 오물을 던지고, 계란을 던지며 조롱하고 마침내 감옥에 갇히게 된다고 한다(KA 9:14). 

페스탈로찌에 따르면 이러한 끔찍한 벌이야말로 영아살해를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장한다. 남성들보다 훨씬 더 불리한 처지에 있는 여성들에게 똑 같이 벌금을 매기고, 이런 잔인한 법으로 국가가 대응하기 때문에 오히려 여기서 여성들은 더욱 절망하고, 자신 속에 가지고 있던 모든 희망과 인간 선함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극단으로 가게 된다고 지적한다. 페스탈로치는 이 시대의 이러한 풍속을 기만적인 가식이라고 비판하고, 겉으로는 윤리와 도덕을 중시하는 것 같지만 속은 교만과 이기심에 가득 차서 국가가 오히려 공공법으로 범죄를 조장하고 착취하는 모양이라고 역설한다. 

‘신생아 살해’의 원인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해 던지는 두 가지 전제적 질문

이상에서처럼 당시 풍기를 범했을 경우 가해지는 처벌의 가혹함을 설명한 페스탈로치는 이것을 피하기 위해 영아살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한 여성들을 매우 동정한다. 그러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이 범죄의 원인을 파헤쳐 들어가기 전에 다음의 두 가지 전제적 질문을 던진다. 첫째, 모든 임신한 소녀들의 궁극적인 목적인 그들의 치욕을 가리고, 아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그 자체로 악한 것이고 나쁜 것인가 라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 페스탈로치는 다시 두 가지 시각에서 대답을 시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결혼하지 않고 임신한 소녀들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향하는 것인가를 물을 때, 페스탈로치는 이 소녀들이 그들의 치욕을 가리고 아이로부터 벗어나고자 소망하는 것 자체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으로서 자신들의 행위가 밝혀지게 되면 앞으로의 모든 사회적인 삶과 행복, 결혼 생활 등이 물거품이 되는데 어떻게 그것을 거기서부터 벗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 속에, 특히 여성들의 마음 속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성적 치욕에 대한 혐오와 아버지 없는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은 마음이란 바로 인간 자연의 현실적인 요청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들을 살인에로 이끈 것이다. 만약에 당시의 풍기법이 그렇게 혹독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녀들은 그렇게 절망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살인에 대한 공포, 피 앞에서 떠는 여인의 떨림, 이 비참 속에서도 완전히 꺼지지 않은 어머니 마음, 이런 것들이 만약에 조금만 상황이 좋았더라면 그녀들을 살인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페스탈로치는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급진적인 질문을 국가와 사회에 던진다. 즉, 이렇게 국가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아기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금지하는 것이 과연 옳은 행위인가 하는 것이다.

페스탈로치의 대답은 결단코 ‘아니오’이다. 국가가 좋은 법을 통해서 풍속을 정화하고 신장시키는 일은 해야 하지만 풍기죄를 여성들의 공개적인 참회를 통해서, 영아살해를 그 절망 가운데서 행한 소녀들을 처형함을 통해서 다스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국가가 결혼하기 전에는 아이들을 절대로 가져서는 안된다고 법으로 정했다면 아이들로부터 벗어나려고 살인을 행한 그녀들의 행위란 바로 법을 지키기 위한 준법 행위였고, 그런 의미에서 국가는 같이 살인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녀를 절망 가운데 빠뜨리고 도망간 남성이 바로 마찬가지로 살인자이듯이.   

페스탈로치는 이 살인이 발생하게 된 처음 시작인 결혼하지 않은 사람의 동침이란 결코 국가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로서는 가지기 어려운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다. 그는 성장한 사람들의 같이 자고 싶다는 몸의 요구를 자연스럽게 인정하라고 요청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결혼하지 않고서는 같이 잘 수 없고, 아기를 가질 수 없다고 금하는 국가의 법이야말로 영아살해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법을 어겼을 때 소녀는 앞으로의 모든 삶의 안식과 존엄, 즐거움을 박탈당하는데, 어떻게 이 불행을 막으려고 발버둥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녀가 궁지에서 행한 일종의 “정당방위(Selbstverteidigung and Notwehr)"이고, 그녀의 행동은 그렇게 큰 위기와 절망 가운데서 행한 난센스이지 살인이 아니라고 대변한다(KA 9:32). 

이어서 페스탈로치는 아주 생생하고 리얼하게 그녀의 해산의 진통이 시작되는 시각부터 갓 태어난 아기를 죽이기까지 겪었을 단말마의 고통을 그림처럼 그려주고 있다. 얼마나 그녀는 스스로가 분해되어버리기를 바랬으며, 자신이 태양을 본 날을 저주했고, 간절히 구원을 바랐던가! 그런 가운데서 그녀는 미쳐갔고, 절대로 아이를 가져서는 안되었기에, 그래서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버린 아기를 스스로의 손으로 제거했다는 것이다. 

페스탈로찌가 전제 물음으로 묻는 두 번째 질문은 만약에 위의 결혼하지 않고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치욕을 덮고, 아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갖는다면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해가 되는가 라는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루도록 도와주지 않아서 영아살해가 줄을 이었다면 이것을 도와주는 것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라는 지적이다. 페스탈로치는 그러한 처지에 빠진 여성들에게 도움의 손길과 조언을 주지 않으면서 단지 창피만 주고 몰아칠 때 결국 그녀들의 절망은 영아살해를 부르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래서 당시 경직된 풍기 법원의 판사, 경직된 법률가, 영아 살해의 소식을 듣고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기만 하는 교회의 성직자들, 그리고 그런 그녀들에 대해서 더욱 나쁜 소문만을 퍼뜨리고 욕하는 모든 제삼자들이야말로 이 끔찍한 일에 같이 동조한 사람들이라고 비판한다. 

그렇게 약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절망으로 내모는 법이란 결코 인간의 필요에 부응하는 법이 아니며, 또한 인간의 자연에 부응하는 법도 아니라는 것이 페스탈로치의 법 정의이다. 반대로 모든 선한 입법이란 인간의 진정한 필요에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그래서 법이 진정으로 영아살해를 방지하기를 원한다면 이 불행한 여성들로 하여금 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고, 그들의 슬픈 일들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역설이다. 즉, 국가가 그 아버지 없는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주어야 하며, 보호해 주고 자랄 곳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화려한 고아원을 세운다거나 공공탁아소를 세우라는 것이 아니라 농촌의 건강한 보통 가정들을 찾아서 아이를 위탁하고 키울 수 있게 하고, 또한 임신한 소녀들이 드러나지 않고 해산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하여 처벌의 위험 없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KA 9:42). 페스탈로치 입법의 진정한 실용주의와 인간주의를 다시 한 번 잘 볼 수 있는 장면이고, 지금부터 거의 3백여 년 전의 그의 법의식이 어느 정도로 앞서 갔는지를 잘 알려주는 모습이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도 해외입양이 재고되고 있고, 미혼모가 자신의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권리가 더욱 강조되며, 또한 어떻게든 한 인간의 처음 성장을 관료주의적으로 운영되는 공공탁아소가 아니라 작고 친밀한 가족적인 분위기와 반경 속에서 이루어주려는 혜안을 여기서 본다. (다음 호에 계속) 

*각주 설명 1) Pestalozzi Saemtliche Werke (Kritische Ausgabe) Band 9.

이은선 (세종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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