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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性,誠 통합영성을 21세기 보편영성으로"[에큐 신년인터뷰] ② 이은선 교수
윤인중 목사 / 김령은 기자(정리) | 승인 2017.01.24 14:20

2017년 새해를 맞아 <에큐메니안>은 교계 인사들을 만나 지난 2016년을 돌아보고 새해를 조망해 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 광장 민주주의, 촛불 정국, 대통령 탄핵으로 뜨거웠던 2016년이 가고 그 여파를 이어받아 2017년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새출발을 바라는 염원이 식지 않고 있다. 교계 안으로는 종교개혁 500주년, 밖으로는 조기 대선을 준비하는 해 이기도 하다. 

<에큐메니안 신년인터뷰> 첫번째 주인공이었던 이해학 목사의 바톤을 받아 두번째 주인공은 이은선 교수다. <에큐메니안>에 <이은선의 집언봉사>를 연재하기도 했던 이은선 교수는 '한국적 여성 신학자'로 기독교와 유교의 대화를 시도하는 '기독교적 유교인, 유교적 기독교인'이다. 저서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를 통해 독자들에게 유교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은선 교수는 교육자이기도 하다. 현재 세종대학교 교육학과에 재직중이기도 한 그에게 교육이라는 키워드는 유교, 기독교와 더불어 큰 화두이다. 현재 그가 <에큐메니안>에 연재하고 있는 <우리시대와 페스탈로치>는 암흑같은 시대를 비추는 빛으로서의 교육에 대한 그의 고민이 담겨 있다. 

교육자이자 유교와 기독교를 잇는 여성 신학자로서 이은선 교수가 내다보는 2017년은 어떤 해일까? 이은선 교수를 지난 12일(목) 부암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아래는 <에큐메니안> 운영위원장이 윤인중 목사와 이은선 교수가 나눈 대화다. 

이은선 교수 ⓒ에큐메니안

새해가 밝았다. 2017년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이 어떤지? 

2016년은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쉽지 않았다. 작년 세월호 2주기를 준비하며 4월에 <기독교세월호원탁회의>에서 ‘세월호 2주기기독인포럼’을 열었다. 그때 포럼에서 발제 준비를 하면서 세월호 가족들의 팟캐스트(‘팟방416의 목소리’)를 들었다. 1주기를 지내는 동안에도 공동으로 책도 내고, 여러 장에서 유가족들의 삶을 접하긴 했지만 팟캐스트를 통해서 특히 안산 단원고 학생들 가족의 깊이 있는 속살들을 보면서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세월호 가족들의 아파하는 모습뿐 아니라 그 이전에 그들이 안산이라는, 어쩌면 오늘 우리 시대의 변방이라면 변방일 수 있는 곳이지만, 그곳에 우리 시대의 깊은 인간성이 살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족 간의 사랑을 나누면서 정겹게 일상을 살아왔던 모습들을 들으면서 2015년에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특히 많이 났다. 오랫동안 아프신 어머니를 더 가까이 돌보지 못했다는 죄스러운 마음이 그런 유가족들의 삶을 접하게 되면서 더욱 또렷이 부각되어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연구학기도 맞이한 터라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조금 걸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조카가 있는 파리로 갔다. 거기서부터 부실한 준비가운데서 시작한 산티아고 순례길이었지만, 특히 한 달 동안 스페인의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혼자 순례길을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많이 회복되어 돌아왔다. 

그 힘으로 7월에 아들의 결혼식도 치르고, 신학위원장으로 함께하고 있는 <생명평화마당>의 ‘한국적 교회론 정립을 위한 세미나’도 마무리 했다. 남편 이정배 교수가 2월 감신대 사태로 조기은퇴를 하게 되었는데, 그 후의 삶의 변화에 대한 적응을 위해서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또 지난 11월 WCC가 초청해서 홍콩에서 열린 '한반도 평화통일에 관한 국제 에큐메니칼 포럼'에도 다녀왔다. 또한 우리 부부의 과제인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이어가는 일로 해천(海天) 윤성범 선생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21세기 보편영성으로서의 誠과 孝』라는 책도 동연출판사를 통해서 낼 수 있었다. 

'한반도 평화통일에 관한 국제 에큐메니칼 포럼' 에서 ⓒ이은선

 

산티아고 순례 이야기에 대해 조금 더 듣고 싶다. 

처음에 산티아고가 그렇게 예루살렘과 로마와 함께 기독교 삼 대 성지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잘 몰랐다. 그 길을 걸으면서 서구 기독교 2000년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 문명과 교회가 어려움을 겪었을 때 마다 그 순례길을 개척하고 걸으면서 다시 새로운 힘을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번에 개신교 신학자로서 스페인의 가톨릭 전통을 매일 접하며 서구 기독교 문명의 핵심과 가톨릭이 의미하는 ‘보편교회’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그러면서 가톨릭과 개신교, 서구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 한국적 신학이라는 것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더욱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또 그 안에서 한국 여성신학자로서의 나의 길을 더욱 고민하게 됐다. 

그곳에서 돌아와서 낸 책도 앞에서 말했듯이 ‘21세기 보편영성(common religiosity)’이라고 하는 물음에 대한 공동 저술이었다. 동서가 함께 어우러지는 보편영성을 통해서 오늘날 특히 트랜스휴먼을 말하면서 지금까지 사람들을 종교나 성, 인종이나 민족, 문화 등으로 나누는 일이 점점 무색해져 가는 상황에서 공통으로 인간 문화를 묶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그것은 동서의 삶을 함께 묶을 수 있는 기초적 덕목이자 이치가 될 터인데, 그 ‘보편’을 찾아야 하는 때가 바로 오늘의 때가 아닌가 싶다. 

물론 산업문명 시대 이후로 서구 기독교 문명이 제시한 근대적 보편들로 인류 삶이 한 번 크게 통합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요즈음 그것들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다시 새로운 통합의 원리를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그 길 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서양 중심적, 서구 기독교 문명 중심적인 것을 보면서 한국 여성으로서 동서 통합적으로 사고하고, 거기에 한국적이라는 요소를 첨가하려는 것이 무엇일까를 많이 생각했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아직 남북 분단이라는 근대 냉전이데올로기도 청산하지 못했으니 우리는 더욱 더 그 분열을 뛰어넘는 큰 화합과 통일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이은선
산티아고 순례길 ⓒ이은선

<생명평화마당>에서 한국적 교회론, 한국적 신학에 대한 화두로 고민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다. 특히 삼성 성(聖), 성(性), 성(誠)의 세 가지 키워드 가지고 통합적 영성에 대해 이야기하시는데, 자세히 말씀해 달라. 

이 세 가지 성의 글자는 지금까지 유교와 기독교 문명의 대화를 시도하는 한국 여성사고가로서 그 대화의 가능성을 여러 가지로 탐색해 오는 가운데 얻게 된 개념들이다. 이 세 개념을 이후 사고의 여러 영역에 적용하면서 계속 실험하고 있는데, 먼저 신학적으로 첫 번째 성(聖)은 주로 ‘통합성’으로 해석하면서 전통적 기독교 신(神)의 이름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기독교 문명의 하나님은 그 초월성에 대한 강조로 성(聖, the sacred)과 속(束, the profane)을 엄격하게 이분한다. 더군다나 이 구분이 시간과 더불어 점점 더 실체론적으로 굳어지면서 오늘 한국 교회가 고질병으로 앓고 있는 것과 같은 가부장적 성직자 중심주의, 교회 중심주의, 반생태적 사고, 몸의 물화 등을 야기해 왔다. 

그 대안으로 전통의 유대기독교 신앙에서보다 훨씬 더 세계내적(世間的)으로 거룩과 초월을 세상 안으로 끌어오는 동아시아 유교전통의 聖의 개념을 가져왔다. 聖은 그런 의미에서 두 영역을 보다 긴밀하게 연결시키려는 통합적 사고의 언어이디. 또한 나의 경우는 예를 들어 20세기 여성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악(惡)의 평범성”을 말하면서 악이라는 부정성의 보편화를 통해서 세상을 치유하는 길을 찾고자 했다면, 나는 여성종교가로서 聖의 평범성을 말하면서 온 세상을 거룩의 영역으로 화하게 하는 “聖의 평범성의 확대”라는 긍정성의 일에 주목하고자 한다.   

두 번째 성(性)은 그리스도성의 보편에 관한 일이다. 즉 새로운 인간론(身)과 구원론을 말한다. 여기서도 전통의 기독론과 인간론이 우리의 몸과 정신, 신체와 마음, 세상과 그리스도를 과격한 이원론으로 나누고, 그 그리스도성을 2천 년 전 역사의 한 시점에 고정시킴으로써 점점 더 하나의 생명 없는 이데올로기로 화하는 것에 대한 대안을 찾는 일이다. 동아시아의 ‘성(性)’은 그 글자 ‘性’에서도 드러나듯이 인간 속의 내재적 초월로서의 ‘살아있는, 또는 살리는(生)’ ‘마음(忄)’을 역설한다. 그것이 인간 본래의 ‘본성(nature)’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것은 모든 인간의 그리스도화의 가능성을 훨씬 더 역동적이고 보편적으로 지시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과 행위의 원리로 작동할 수 있다. 

또한 거기서 그 性은 몸(意)이기도 하고 마음이기도 하고, 그 마음을 감정(情)으로도 이해하고 이성(理)으로도 파악하여 더욱 다면적인 인간 이해를 가능케 한다. 그것을 통해서 특히 오늘날 몸의 물화와 물질과 정신의 배타적인 이원론을 넘어설 수 있도록 한다.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은 자신속의 만물을 살리는 본성(性)에 대한 깊은 자각으로 그 마음을 온 세상으로 확장해 갔기 때문이라고 해석해보고자 하는데, 17세기 조선의 성리학자 정하곡(鄭霞谷, 1649-1736)은 그 마음을 특히 ‘생리(生理)’라는 말로 표현했다. 여성들이 매달 몸으로써 경험하는 ‘달거리(생리, menstruation)’와 같은 단어인 것이 의미심장하다. 유대 전통에서는 생리를 속(俗)되다고 여기는데, 사실 그 생리야말로 생명을 낳고 삶을 살리는 힘이 그 안에 들어 있다는 말이다.  

마지막 ‘성(誠)’ 자(字)는 성실 성, 진실과 참됨의 성 자이다. 이것을 나는 여러 가지로 풀어왔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서의 ‘신앙(信)’에 대한 말로 쓰기도 했고, 참된 성령론을 지시하는 언어로, 또한 ‘지속성’으로 주로 해석하면서 앞의 두 성이 종교(聖)와 정치(性)의 영역을 가리킨다면 이 성은 ‘교육’(誠)을 지시하는 말이라고도 보았다. 즉 전통 기독교의 신앙이 행위와 많이 유리되면서 단지 말뿐이고, 생각뿐이라는 비판에 대해서 믿음과 행위가 하나 되는 지경까지 지속하는 믿음, 구체적인 현실로 만들어내는 실천(行), 참 성령의 진위는 그 구체적 열매로써 판가름 한다는 대안적 성령의 의미로 보는 것 등이다. 

‘말씀 언(言)’ 변에 ‘이룰 성(成)’ 자가 붙어 있다는 것은 내가 믿는 것을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우리 몸으로, 현실로써 이뤄낼 때까지 믿음을 지속하라는 의미이다. 또는 내가 받은 계시, 믿음을 끝까지 지속해서 삶과 현실로 이뤄내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믿음과 상상의 힘이 필요하고, 그래서 誠은 믿음과 행위, 상상과 실천 모두를 포괄하곤 한다. 이것은 종교와 정치가 한 사회에서 열매로 맺어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교육’으로 실천되지 않고서는 되지 않는다는 지혜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誠은 지성(聖)과 인성(性)을 모두 포괄하는 참된 ‘영성(誠)’이라고도 여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서구 기독교 전통의 ‘신(神), 신(身), 신(信)’의 세 언어를 그 대안적, 또는 상환적 의미로 ‘성(聖), 성(性), 성(誠)’의 세 가지로 연결하여 사고하면서 나름의 ‘한국적 신학’, ‘한국적 여성신학’을 구성해보려고 시도한다.

촛불 시민혁명은 세계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넘어 21세기 새로운 민주주의의 확장 모델로 삼을 만한 합법적, 공개적, 대중적 시민혁명이다. 촛불 시민혁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듯이 이번 촛불 시민혁명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 단순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훨씬 더 이른 시절로 돌아가서 근대기에서만 보더라도 동학혁명, 3.1운동. 4.19혁명, 6.10항쟁, 오늘의 촛불 시민혁명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민들 속에서 한국 고유의 초월 경험(무교, 도교, 불교, 유교, 기독교 등)과 연결되는 어떤 원초적인 선함의 씨앗이 촉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평소 때는 눌릴 때까지 눌려 있다가,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의 삶의 원리는 먼저 자기감수와 자기희생, 오래 참음이었다가 어떤 지점에 오면 더 이상 ‘이건 아니다’라고 싶을 때 그것이 크게 폭발한다는 것이다. 그 폭발은 도도한 저항과 분노, 변혁의 힘으로 일어나서 큰 새로움을 가져온다고 본다. 유영모 선생이나 함석헌 선생은 이것을 ‘씨’의 자유의식으로도 그리셨는데, 나는 인간의 원초적인 자발성과 선한 생명력(仁),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不忍之心)’ 등으로도 표현해보고자 한다. 

이번에도 나는 그것이 건드려 졌다고 생각한다. 그 원초적인 선함을 건드리면 사람들은 놀랍게 하나가 되면서 다 같이 선해진다. ‘나의 원래 모습은 이렇게 비겁하게 억눌린 모습이 아니고 찢겨진 모습이 아니었는데’ 라는 것을 기억해 내면서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근본적인 자존감이 훼손되었다는 것을 자각하며 분노한다. 그래서 폭발하고, 다시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함께 단결하면서 거칠 것이 없이 일어서는 모습이 보여준다. 

사람들이 광장에 가면 굉장히 착해진다. 두려움을 극복한 모습이고, 스스로가 선 모습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것 같은 명쾌한 모습인데, 그런데 관건은 그 모습을 어떻게 광장을 떠나서도 지속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른 힘과 모멘텀이 있어야 한다. 나는 그 일이 그 선한 마음이 우리 매일의 일상과 판단력이 되도록 하는 일과 관계된다고 보는데, 그래서 ‘입법’과 ‘정치’, ‘교육’의 일과 긴밀히 연관되므로 더 깊은 성찰과 인내와 실천과 희생이 요구된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선거와 입법을 말하고, 법적 정의와 더불어 우리의 원초적 상상력을 지속하는 시를 말하며 여러 가지로 모색하고 있다. 한 가지 다행한 일은 시민들의 높은 지적 역량이다.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유교 문명권 속에 배태되어 있는 배움에 대한 존중(好學)이 하나의 문화로 축적되어서 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지적 능력이 이만큼 높은 나라를 찾아보기 어렵다. 스마트폰과 같은 테크놀로지의 역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진행과 구체적인 측면에서 우려도 많이 있다. 시민들의 원초적이고 선한 인간적인 힘을 묶어서 그것을 지속적인 사회 변혁의 힘으로 모아내고 구성해내기 위해서는 동시에 리더십의 역할이 긴요한데, 이 일을 누가 맡을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다. 오늘 리더십에서 제일의 관건은 전혀 다른 길을 가겠다는 소수자의 용기와 자기포기, 이미 기득권자가 되어서 얻은 많은 것을 내려놓는 자기희생일 터인데, 그렇게 다른 길을 갈 수 있는 리더를 만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진정으로 보수, 진보를 떠나서 기득권자들이 자신을 내어 놓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가야한다. 스스로를 내려놓고 희생하는 진보권 기득세력, 이런 힘들이 모아져야 역사적인 모멘텀이 얻어질 수 있기 때문에 시대의 고민이 정말 깊다.  

곧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한국교회도 새롭게 개혁되어야 할 때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계의 진보와 보수는 시민적 양식에서부터 멀어지고 있다. 현재 시청에서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보수교계 단체의 탄핵 반대집회가 열리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보수 기독교계와 더불어 한국 기독교는 종교적 의미를 실천할 수 있을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기독교가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그것은 큰 ‘다름’이었고, 오늘의 대한민국은 당시 그 다름을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에 의해서 가능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다름이 이제는 다시 자신들을 절대화하고 보수화되어서 이후 시간 속에서 또 다르게 등장하는 새로움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미 정답으로 확정난 것들에 매달리면서 그것만을 절대화할 때 거기에는 분명 부패가 일어난다. 오늘 교회 밖과 세상은 급속도로 변화하는데, 보수 기독교계 신자들은 그와는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조차 차단되어 예전의 것을 문자적으로만 되뇌고 있기 때문에 점점 더 쌓이는 것은 두려움이고, 자기 경직일 뿐이다. 그런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가진 것의 보존(conservation)과 유지, 안정일 뿐이고, 그래서 점점 더 ‘보수적(conservative)’이 되어간다. 

그러한 삶은 ‘과거’에만 묶여 있는 것이든지 아니면 ‘미래’만을 위해서 사는 ‘현재’가 없는 삶이다. 그래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더욱 쌓이는 것은 욕심이고, 두려움과 외로움이다. 나는 한국 개신교가 배출한 문화의 한 모습이 강남 대형교회 출신의 최순실이고, 이명박 정부이며, 그 안의 또 다른 꼭두각시 박근혜 정부라고 여긴다. 우리가 올해 종교개혁 500년주년을 기념하고자 하지만 사실 루터 종교개혁의 3대 원리,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서’가 그동안 많이 형해화되었고 경직되었다. 지금까지 지적한 한국 교회의 깊은 병과 왜곡이 그 결과라고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있어서의 종교개혁 500주년은 바로 그 세 가지의 원리들을 앞에서 말한 한국적 초월의 세 원리(聖․性․誠)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일이다. 이미 촛불 시민항쟁과 그 이전 세월호를 겪으면서 그 유족들이 기성교회를 탈출해서 스스로 새롭게 주체적으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희망의 근거를 보았다. 그런 것들을 함께 엮어서 오는 5월에 독일 베를린과 비텐베르크에서 열리는 독일 ‘교회의 날(Kirchentag)’ <The Centre for Reformation & Transformation>라는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이제 기독교 제2의 종교개혁은 동아시아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나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드러내보려고 한다. 한국의 새로운 에큐메니칼 운동인 ‘작은교회운동’도 그 구체적 모습 중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어쩌면 한국 보수 대형교회들의 부패가 오늘보다 더 극심한 형태로 가지 않고서는 스스로 정화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세습과 성 중독, 정치와 문화의 영역까지 넘나들며 나라 전체의 일에서 이익을 챙기려는 끝없는 탐욕, 심지어는 약물중독 등, 그 끝이 어딜까를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요즈음 최순실과 그 아버지 최태민 등으로부터 그 자녀들의 파행까지 이어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유사한 형국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고, 절대화된 신앙이 어떻게 악마화 되는지를 우리는 많이 경험한 것처럼 그런 파국을 겪고서나 새로움이 있을까,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한가 라고 묻곤 한다. 더 끝까지 가서 대형교회의 타락상을 보고, 특히 거기서의 남성 목회자들의 패행과 적폐가 곪을 대로 곪아서 터져야지만 변화가 오지 않을까?  

ⓒ에큐메니안

현재 <에큐메니안>에 <우리시대와 페스탈로치>를 연재하고 있다. 교육운동은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다. 유교에 대한 화두도 던지지만 교육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 교회교육의 방향, 사회교육 방향에 있어서 본 연재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번 연재를 통해 페스탈로치를 다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그가 한국 교육뿐만 아니라 신학계에도 의미가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새로운 세계관적 구조에 따른 세계 의미실현의 방식을 나는 페스탈로치라는 사상가에게서 보았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아주 동양적이고, 유교적이며, 여성적인 사고가라고 생각했다. 페스탈로치 교육의 핵심은 왕좌에 앉은 사람이건 시골 초라한 오두막에 사는 사람이던지 누구나 그 안에 거룩의 씨앗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교회가 페스탈로치적인 목회를 하고, 교육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가장 먼저 그동안의 인간이해, 기독론을 크게 바꿔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예수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지금까지의 하나님 이해와 그리스도 이해를 바꾸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다 보면 목회와 설교가 자연스럽게 교인 개개인의 성장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고, 그러면 목회자 중심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교인들이 사고할 수 있는 힘, 교회를 이끌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각각의 개인들이 그리스도의 모습까지 도달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거기서 교회 안에 독서모임이 생기고, 토론 모임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자발적인 예배로 이어지고....교회 자체가 공동체의 살아있는 배움의 장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교회교육에 있어서 페스탈로치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교회가 또 하나의 사교육장처럼 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근본적인 신학적인 전제를 바꾸고,  “노력의 종교(日步)”로서 거듭남이라고 할 수 있다. 

페스탈로치는 300년 전 사람이다. 오늘 한국 민중들의 지적, 영적 능력은 그 당시와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지만, 오늘 우리 시대도 그의 시대처럼 또 하나의 새로운 시대로 가는 시점이어서 인간 삶과 정치, 교육의 기본적인 구조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내재적 인간’을 간과하지 말고, 그 자연적인 가능성의 성장을 위해서 성장과정 속에 안정된 작은 그룹의 함께함의 경험이 긴요하다는 것이 그렇다. 나는 이 두 가지 요소(“신적 불꽃”, ‘가족’과 같은 삶의 작은 반경)를 誠의 길, 살리는 길, 거룩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교육학자, 종교학자, 여성신학자, 3중의 역할이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여성대통령에게서 부정적인 여성성을 경험했다. 여성의 긍정성이 전혀 발휘되지 않는 시대다. 여성성의 의미가 21세기 긍정적, 진보적 의미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적 여성성에 대해 이야기 해 달라. 또 여성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참 어려운 문제다. 지금의 나도 많이 힘든 것이 사실이다. ‘생리(生理)’라는 말로 다시 돌아가 보면, 세상에 새로 태어난 생명이 자라서 활짝 꽃피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집중적인 돌봄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없이는 어렵다. 그런데 그런 집중적 돌봄은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철저히 자기를 소멸시키는 경험을 요구한다. 이 일을 지금까지 여성들이 해왔고, 아직까지도 여성들이 그 일을 주로 담당하고 있고,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을 모성이라고 부른다. 

그런 역할은 여성의 몸으로부터 출발한다. 열 달 동안 자기 몸을 가지고 한 생명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모두 내어주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공동체가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는 그러한 모성을 여전히 한 개인한테만, 한 가정에게만 그 책임을 모두 부과한다. 그렇게 하기에 그 일은 너무도 중요하고, 너무도 귀하고, 너무나 힘든 일인데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그 일을 나눠야하고,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우리 공동체가 더욱 더 적극적으로 함께 해 주고 보상해 주어야한다. 

어린이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들이 너무 적은 임금을 받는다. 한명 씩 맡는 것도 아니고 수 명씩 맡겨놓고 CCTV까지 달아놓았다. 그것은 교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잔혹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성의 역할을 더 이상 생물학적 여성에게만 한정해서는 안되고, 마음의 모성, 사회적 모성의 역할을 더욱 확장시키고, 그 일들이 가능해질 수 있도록 우리 공동체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21세기 삶의 정황이 급격히 달라지고 있다. 이제 곧 여성의 자궁조차도 인공으로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다. 

우리 사회가 그런 모성의 역할들을 훨씬 더 귀중하게 생각할 때 모성이 유지되어 나가는 것이지, 그렇게 되지 않고서 우리 사회가 모성적이지 않다, 대통령이 긍정적인 여성성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식의 비판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한 물음이 아니고, 보다 더 복합적인 시각 속에서 나눌 이야기이다. 모든 다른 요소들은 놔두고 그들이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프로파간다식으로 논하는 것은 우리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여성 후배들에게 자기 자신을 좁은 의미의 여성으로만 한정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자신의 몸으로 모성의 역할을 하는 것도 본인의 성찰과 판단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수운 선생의 언어대로 그것을 선택했으면 그것을 이루는 동안에 그 일에 집중하는 것이 ‘믿음’이다(定之後言 不信曰信, 한번 작정한 뒤에는 다른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일이 개인적인 믿음으로 모두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더 공동체적인 도움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 교회의 도움도 필요하다. 

이미 오바마 대통령도 그 퇴임식에서 강조했지만, 나도 무엇보다 네 속에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믿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앞에서 밝혔듯이 ‘21세기 보편영성으로서의 誠(성실성)’이라는 것은 스스로 성찰해서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그리고 파악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창조력이자 하나님이 이간에게 주신 가장 기본적인 생리(生理)이다. 그 한 좋은 예를 최근 <한겨레신문>에서 연재를 시작한 <김미경의 그림나무>의 주인공 김미경씨에게서 본다. 

이은선 교수는 김미경 작가의 기사를 스크랩해와서 직접 읽어주었다 ⓒ에큐메니안

그녀는 27년간의 직장생활을 하다 쉰네 살에 그만두고 2014년에 전업화가를 선택했다. 그러나 어떤 전문적인 미술선생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펜과 스케치북을 들고서 지금까지 오래 살아왔던 동네 골목의 옥상에 올라가서 그 옥상에서 바라보는 서촌의 풍경들을 그려냈다. 그 일을 통해서 그녀는 지금까지 쭉 거기에 있어왔지만 아무도 발견해 내지 못한 동네의 실재들을 참으로 세밀하게 세상으로 불러왔고, 그래서 새로운 화풍을 창조해내는 중이며, 그녀 스스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인왕산, 나무, 진달래, 새, 기왓장, 전봇대, 골목길, 햇볕, 구름, 바람 등등. 그녀는 자신을 “세상미술대학4학년생”이라고 소개하고, 교수님으로 인왕산님, 기와집님, 나무님 등을 소개한다. “앞으로 어떤 새 친구들을 만나게 될지, 새로 만나게 될 또 다른 원초적인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바꾸어놓을지 궁금해 죽겠다.”(<한겨레신문> 2017.1.7.20면)고 말하며 “오래되었으나 새로운 내 원초적인 것들과의 사랑”에 푹 빠져 춤추며 살고 있다고 고백한다.

앞에서 21세기 보편영성으로 말한 또 다른 하나, 孝에 대해서 언급하고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싶다. 나는 효라고 하는 것을 오늘의 더욱 보편적인 의미로 ‘겸비’와 ‘겸손’이라고 해석하고자 한다. 나의 생각이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하지만, 동시에 그 창조는 상대적이며, 그래서 무근거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괴물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기 것을 절대화하기 쉽다. 그런데 특히 여성들에게 이 겸비 내지는 효를 말한다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어쩌면 이것을 우리가 이제 진정으로 다시  돌아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의 지금 생각은 그렇다. 

앞으로 굉장히 빠른 변화가 있을 것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날 미국 전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그에 반대하는 여성들과 여러 모양의 소수자들의 행진이 있었고(Women's March), 한국에서 우리의 촛불행진도 계속되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트럼프로 대변되는 백인 남성우월주의, 제국주의적 기독교 근본주의,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다시 부르는 강자의 힘으로서의 정의와 경제/군사제일주의 등, 우리가 더욱 더 싸워야 할 것이 그의 등장을 통해서 좀 더 분명해졌다는 것이 하나의 역설적인 희망이라면 희망일까? 

한국 여성들에 대한 기대가 크다. 박근혜, 최순실의 경우 같이 부정적으로 표현되기도 했지만, 그들 역량의 물꼬를 터주면 큰 가능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세계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한국의 젊은 세대 여성들은 지금까지의 누구보다도 우수한 교육을 받았고, 뛰어난 역량을 길러왔다. 국제적 감각도 있다. 앞으로 그들의 힘, 세상을 살려내는 생리(生理)의 힘으로 인류와 지구의 생명이 한 차원 더 업그레이드 될 것임을 나는 믿고 희망한다. 가야할 많은 다른 길이 있다.

윤인중 목사 / 김령은 기자(정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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