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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혈통주의 (마가 3:31~35)2017년 2월 5일 주현절 다섯째 주일 설교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 | 승인 2017.02.06 12:13

1. 목회자 가족의 애환 

1) 목회자의 가족

교회공동체 안에서 목회자 가족은 심적으로 특별한 부담감을 지니고 있다. 일반 교인들이 볼 때는 특권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당사자들은 목회자의 식구라는 부담감으로 작용한다.

1995년~2007년까지 수원에서 목회할 때, 교인들이 힘들어하니 식사와 청소를 목회자 가정이 도맡아 했다. 아내는 95년부터 5년 동안 매주 식사를 혼자서 준비하면서 거의 매주 토요일 밤을 새다시피 했다. 그래도 교인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며 힘들어하지 않고 준비했다.

어느 날, 교인들 중 일부이지만 주일 식사에 대해 타박하는 것을 보고는 그 동안 아내 혼자 준비하던 주일 식사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교인들이 식사 당번을 돌아가면서 담당하라고 했다. 어린이까지 7~80명 분 주일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하려면 만만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당번에 따라서 국수도 하고 컵라면으로도 하고 공동 식사 안하고 가족별로 나가서 알아서 먹는 것 등 별 방법을 다 썼지만, 결국 그래도 돌아가면서 식사 당번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다시 공동식사를 전처럼 준비하게 되었다. 그 뒤로 그 교회에서 공동 식사 준비는 상당히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어느 교회나 주일 식사 준비 때문에 고민이 많다. 군목 할 때도 가는데 마다 주일 식사 그만하자고 했지만 나는 끝까지 주일 공동식사를 강행했다. 그래서 주일 식사에 대해서 한 마디 하고 싶다. 그냥 산술적으로 계산해서 50주 중 한번 담당하면 나머지 1년은 매주 편하게 식사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게 생각대로 운영이 잘 안 된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도 아니고 내 먹을 점심 식사 당번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데 무슨 이웃을 섬길 수 있겠는가?

주민교회도 매주 식사 준비 담당자를 자원 받고 있는데 기대만큼 자원하지는 않는다. 매주 쌀과 식사 준비비용 10만원씩을 교회 재정으로 지급하는데도 자원자가 없는 주일이 꽤 있다. 예배당 앞에 올해 식사당번 자원 신청 현황을 보고 있으면 갑자기 설교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이것 하나 고치지 못하면서 설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마음이다.

또 주일 전 교회 청소도 오랫동안 목회자 가정이 다 했다. 우리 큰 아이들이 초등학교 5~6학년 때 매주 토요일마다 아빠 엄마의 부름을 받고 청소해야 했다. 물론 나는 그 때 청소 마치고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 주는 것으로 대가를 다 지불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커서 아이들에게 들으니 매주 토요일마다 청소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고, 토요일에 학교 갔다 와서 오후가 친구들하고 한창 신나게 놀 시간인데 딱 그 시간에 교회 청소를 해야 하니 신나게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대놓고 못 하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고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회상했던 적이 있다. 요즘도 우리 아이들은 농담 삼아 말한다, 자신들은 평생 해야 할 교회 청소를 이미 초등학교 때 다 했으니 교회 청소하라고 강요하지 말라고!

사실 제일 피곤한 것이 사람 대하는 것인데, 목회자는 교회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감정을 마땅히 풀 데가 없다. 취미도 별로 없고 마땅히 어디 갈 데도 없다. 제일 만만한 데가 가정이다. 아내에게 큰소리 치고, 아이들을 윽박지르게 된다. 결국 목회자 가정의 식구들은 교회 안의 기대와 시선에다가 목회자의 잔소리까지 들어야 하니 사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그래서 목회자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교회는 목회자 가족들에게 과도한 기대를 걸거나 교회 봉사와 노동에 대해 당연한 것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감사한 것은 그럼에도 목회자 가족으로서의 어려움을 대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2) 가족의 품

독신주의를 고수하는 천주교 사제 서품식

목회자 가정의 이런 요소들을 예견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기독교는 11세기부터 성직자 독신주의를 법으로 정했다. 어떤 제도가 천년 이상 이어온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한국교회, 특히 대형교회 문제의 대부분이 목회자 가정의 이익을 위한 탐욕에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하면 성직자 독신주의가 맞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내가 독신주의를 주장하는 천주교 신부가 아니라, 이를 과감하게 부정하고 성직자의 결혼을 합법화한 개신교 목사가 되기를 잘했다 싶은 때는, 모든 주일 프로그램이 끝나고 집에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을 때의 그 공허함이 아픔으로 다가올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걸 진짜 사택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기를…

주일 오후 4~5시에 집에 들어갔는데 애들도 어디 가고 아내도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 이제 곧 조금 있으면 들어올 것인데도, 아무도 없는 집의 적막함이 싫다. 크고 중요한 일을 다 마쳤을 때의 후련함과 안도감과 함께 나 자신 내부적으로 무언가 막 무너질 것 같은데 아무도 없음, 이것이 주는 외로움을 순간적으로 느끼는 때가 있다. 그러면서 천주교 신부들은 정말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몸으로 느껴져 온다. 무언가 그냥 편하게 받아줄 수 있는 가정의 품이 목회자에게는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있다. 그래서 목회자는 교인들의 가정이 평화롭고 사랑이 넘치도록 기도해야 하고 교인들도 목회자의 가정이 평안하도록 기도하며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2. 예수님의 가족

1) 확인하기 어려운 예수님 가족관계

예수님에 대한 유일한 자료인 성경에도 예수님의 가족 관계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목수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는 분명한데 요셉이 언제 사망했는지 마리아는 예수님 외에 다른 자식은 낳지 않았는지 등이 역사적으로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복음서에 예수의 형제들과 누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이것이 친 형제인지 사촌들을 가리키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동정녀 마리아를 강조하고 신성시하는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오로지 예수님만 출산했지 그 외에는 낳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상대적으로 마리아를 천주교만큼 추앙하지 않는 개신교는 예수님 탄생 이후에도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아이들이 탄생할 수 있고 또 그래야 정상적인 것이 아니냐는 분위기가 강하다.

2) 출가(出家)의 충격

어쨌든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 그리고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예수님의 가정생활은 품위 있고 멋지고 사랑스러운 아들이요 형이요 오빠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기적이고 폭력적이고 무례한 가족으로서의 예수님은 상상할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 없는 가정의 장남으로서 마리아에게는 남편 같은 장남이었고, 넉넉하지 않은 시골 가정의 맏이로서 동생들에게는 아버지 같은 형/오빠였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정에서 늘 든든한 존재였을 것이다. 19세기부터 수많은 예수 전기 작가들이 그려온 예수는 모두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없는 이상 그랬을 것이라 믿는다. 괴팍하고 무례하고 폭력적인 메시아를 상상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행하기 때문이다.

이런 예수님이 어느 날 집을 나갔다. 가출한 것이다. 어머니와 식구들 다 버리고 집을 뛰쳐나간 것이다. 오늘 청소년들의 철없는 가출과 구별하기 위해 출가(出家)라고 하지만 그거나 이거나 뭔 차이가 있겠는가? 식구들 버리고 집을 나간 것은 같은 거다.

이 자체가 식구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식구들은 서운하고 실망하고 분노했을 것이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2천 년 전 유대 땅 갈릴리 촌구석에서, 바람결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식 또한 일반적이지 않았다. 배운 것도 별로 없는데 뭘 가르친다 하고, 귀신을 내쫓는다는 말도 있고 반대로 귀신이 들렸다는 말도 있었다. 불안해진 식구들이 작심을 하고 예수를 직접 찾아 나섰다.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리고 어떡하든지 옛날의 자랑스럽고 따뜻하고 든든한 아들이요 형/오빠로 되돌아오도록 설득하고 싶었을 것이다. 당연한 심정이다.

3) 누가 내 가족이냐?

어렵게 수소문하여 찾아간 장면이 오늘 본문이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가르치는 예수님을 멀찍이서 발견하고 너무나도 반가왔지만 어머니와 식구들은 침착하게 예의와 절차를 지킨다. 어떤 이들은 반갑다고 가족이라고 특별한 관계라고 예의 절차 모두 무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들은 정중하게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께 살짝 귀띔하도록 했다. 비록 식구들의 기대를 버리고 예수님이 가출을 했지만, 여기까지 찾아온 사랑하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진심으로 반기며 미안한 마음도 표현하고 안부도 묻고 이해를 구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예수님의 대답은 가히 충격이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이 말을 듣고 돌아서는 마리아와 형제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실망과 분노가 가슴 깊이 차올랐을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기까지 예수님 가족들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 살아생전 그 식구들이 예수님 공동체에 쉽게 합류하지 못했던 이유일 것 같다. 물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었던 지도자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알려진 야고보였던 것으로 보아 주님 사후 식구들은 예수님의 출가와 냉철한 행위들에 담긴 뜻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3. 가족 해체? 가족 확대!

1) 혈통주의의 폐해

예수님의 대응 중에서 충격적인 것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하는 부분이지만 예수님의 본래 뜻은 여기가 아니라 후반부에 방점이 찍혀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예나 지금이나 어디나 만연해 있는 혈통주의가 하나님 나라를 역행하는 요소다.

삼성이 최순실을 지원하고 그 대가로 박근혜 정부와 정치적 거래를 한 정황들이 밝혀지고 있는데 그 핵심 이유는 삼성 그룹 경영권을 혈통에 따라 물려주겠다는 것이다. 경영 능력이나 기업인으로서의 가치관이 아니라, 이병철-이건희로 이어지는 혈통에 따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강력한 혈통주의가 만들어낸 비극이다.

한국 교회가 부패했다는 결정적인 증거 중의 하나는 개인 기업도 아닌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고백하는 교회에서도 이 혈통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의 모델이 되고 있는 여러 대형교회들이 단지 설립자 목사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대를 이어, 기업 물려받듯이 교회를 세습하고 있다. 교회 안과 사회에서 강력하게 지탄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사회적 비난보다 하나님 앞에 설 두려운 심판보다도 자기 자식에게 이 권한을 넘겨주어야 하겠다는 혈통주의가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2) 기독교 혈통주의

사실 기독교야 말로 피에 대해서 가장 강력한 혈통주의를 지니고 있다. 세상의 혈통주의가 내 유전자를 지니고 있는 내 자식들을 모든 가치의 첫 번째에 놓는 것이라면, 기독교 혈통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인류의 뿌리 깊은 죄까지 용서한다는 고백을 목숨 걸고 수호한다. 19세기 이후 서양의 소위 교양 있는 지식인들 중심으로 기독교 복음을 아주 고상하고 품격 있는 도덕 교훈 정도로 격하시키려는 운동이 지속되고 있고, 한국에서도 소위 진보적이라는 이름으로 예수 복음을 개인 도덕이나 사회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도구 정도로 제한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예수님이 다른 이들보다 더 도덕적이고 개혁적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이웃 사랑하고 양심적이고 정의를 위해 몸 바쳐 싸운 역사적 인물들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이 도덕적이었고 사회 개혁적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이러한 점들 때문이 아니라, 그가 태초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간의 보편성 속에 담겨 있는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음으로써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시대, 인종, 언어, 문화, 성별, 계급, 지식 이런 것들과 무관하게 모두가 다 예수의 가족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보편적인 기독교 혈통주의다.

예수님은 오늘 육신의 혈통을 지닌 가족들이 서운해 할지라도 기독교가 추구하는 새로운 세상의 원칙을 뚜렷하게 천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혈육을 사랑하고 아끼고 축복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가족주의를 해체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소중하고 사랑하는 혈육을 육신의 내 가족에 한정함으로써 탐욕의 장이 되어가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진정한 혈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믿는 이들이 진정 한 가족으로 사랑하고 존중함으로써 가족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 기독교 복음이라는 것이다. 메시아의 나라는 여기서부터 우리 앞에 동터올 수 있다.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  webmas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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