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믿지 마라!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 공짜 밝히다가 코 꿰인다.” 

넉넉함이나 속 편한 삶과는 다소 거리가 있게 자란 나는, 어린 시절 내내 이 말을 참 많이도 들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어린 시절이라는 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남들 도와주고 함부로 믿다가는 손해볼 터이고, 길 가는 사람이 붙잡으면 뿌리치고 가야 하는 것이며, ‘독하게’ 행동하고 주변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라는 지혜를 자주 배운다. ‘너무 냉정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뉴스에 간간히 등장하는, 인심 좋은 노인의 고독사 소식이나 인신매매, 유괴 사건 보도를 보자면 새삼 세상의 무서움을 깨닫기도 한다. 집에서도, 뉴스에서도 주변인들과 거리를 가져야 함을 역설했다.

학교에서는 경쟁의 ‘위대함’을 줄곧 가르쳤다. 가장 효율적인 사회 발전 수단, 정의롭고 공평한 결과를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 자유민주주의가 수호해야 할 단 하나의 기준, 내가 배운 경쟁은 그런 것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경쟁 없이 어떻게 발전을 하겠나. 그 위대한 헤겔이 말한 ‘변증법적 역사 발전’도 경쟁 없이 어떻게 이루어지겠으며, 신채호 선생도 나와 나 아닌 것의 투쟁을 말했지 않나? 그런 경쟁에 반대하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이해되어서는 안 될 이들이었다. 자유주의의 적들, 빨갱이, 히피, 불온사상자 … 잘은 몰라도 경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우리들의 적이 누구인가? 이번 연재는 이 질문으로 시작했으나, 이 질문의 답은 이미 우리 곁에 있었다. 우리의 적은 우리 외의 모두였던 것이다. 모름지기 경쟁이라 함은 적과의 싸움이며, 나 말곤 믿을 사람 없는 우리네 세상에서 그 적은 남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분명 그들은 나를 침략하고, 한계 지으려 하는 이들이었지만 동시에 ‘그 아닌 이들’을 보며 벌벌 떨고, 피곤해하는 이들이었다. 사르트르가 말하듯 “타자는 지옥”이겠으나, 동시에 “타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는 또 하나의 “타자”=“지옥”이었던 것은 아닐까?

너희들과 “너”의 싸움이었음을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프롬은 종교개혁과 동시에 생긴 사회 변화를 논한다. 그에 따르면 근대적 의미의 ‘개인’은 종교개혁에 따라 개신교회가 분리되면서 비로소 탄생한 개념이었다. 물론 종교개혁 이전에도 ‘한 사람’으로서의 개인은 있었겠으나, 여전히 사회, 그리고 교회와 분리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개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인이 더 이상 관계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도 그 ‘개인’ 들이 전부 동일한 개인들임을 뜻할 것이다. 이 개인은 시스템과 기계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숫자 1이다. 그는 그래프 위의 한 점이었고 사회 현상을 이루는 하나의 입자였다. 이렇게 자유주의와 시민 혁명이 꽃피던 시기, “개인은 홀로 남겨졌다.”¹⁾ 그리고 수많은 원자들이 사회에 나앉음과 동시에 “경쟁의 역할 증대”²⁾는 자연스럽게 발생했던 것이라고 프롬은 말한다.

에리히 프롬

프롬이 “자유주의의 적”처럼 느껴지시는가? 사실 프롬은 우리가 경쟁을 옹호하던 표현을, 뉘앙스만 살짝 바꾸어 부정적으로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을 발견하고 그 개인에게 경쟁을 부추긴 것이 시민 혁명 이후 강조된 ‘자유’의 가치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이 ‘경쟁’이라는 것이 근대 정신이 낳은 경쟁 이념이라는 것을 생각하자면 우리는 개인으로서 또 다른 개인들과 싸우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적과 싸우고 있고 그 적만이 타자 내지 환경이라고 줄곧 믿어왔었다. 그러나 경쟁의 이러한 이면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의 싸움은 우리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와의 싸움이 된다. 그리고 그 이름은 내가 아닌 타자가 붙인 이름이다. 다시 말해, ‘너희들과 “너”의 싸움판’ 위에 검투사마냥 던져진 것이다.

명망있는 정치학자 존 롤즈의 주장을 잠시 생각해 보자. 그는 ‘무지의 베일’에서의 일반적인 판단을 통해 정의를 구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그 방법이 결국 타자와 나를 하나의 점으로 환원 가능한 ‘개인’이라는 원자로 만듦으로써 실현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무한 경쟁 궤도’에 싫증이 나 새로운 정의를 찾겠다는 시도마저도 결국 경쟁의 출발점인 ‘개인’을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롬의 생각을 따르자면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도 결국 우리는 경쟁 구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말 대로라면 근대적 ‘개인’은 여전히 경쟁하든지, (나치와 같은)힘 아래 뭉치든지의 선택을 할 것이기에 그렇다. 개인으로의 환원, 이는 롤즈의 것 외에도 많은 현대의 정치담론이 갖고 있는 우려다. 어쩌면 우리는 개인이라는 동일성의 기호에 갇혀버린 것은 아닐까? 경쟁에 염증 난 이들이 도피할 곳은 피안 외에는 영영 없는 것인가?

“적”과 동침하기=“너”와 너희들의 화해

시간이 흐르며 우리는 점점 자유를 얻어가는 듯 보인다. 크게 인류는 원시 사회에서 현대 사회로 오며 자연으로부터의 자유를 쟁취했다. 개인의 역사로 한정시켜도 그렇다. 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의 경쟁을 통해 대학에 진학하는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취업 전선에서 경쟁하고, 승진 경쟁을 거쳐 우수한 실적을 증명해야만 비교적 안정적인 지위를 얻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발칙한 상상을 해 보자. 경쟁에서 승리하고 또 승리하며 나아가도 경쟁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영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전히 우리의 승리는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 채 그 안에서 확장시키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에겐 자유가 있다기보다는 오직 자유 내지 승리를 향해 뻗어가야 한다는 욕망만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들뢰즈는 이런 우리 사회를 “분열증적”이라고 부른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적인 분열증을 위해 “리좀”이라고 불리는 유기체적 모델을 제시한다. 이는 덩이식물의 뿌리에서 착안된 용어로 그물이나 신경계 조직마냥 서로 사이에 부단한 연결망을 두는 체계다. 관료주의적인 나무 모양의 구조나, 중심이 없는 듯 보여도 결국 줄기와 뿌리의 대립이 존재하는 수염뿌리 모양의 구조(이는 현대 사회의 단면을 잘 드러낸다)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나무에는 항상 계보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의 방법이 아니다.”³⁾ 나와 너, 아와 비아의 대립을 넘어서 그런 이분법 자체를 무너뜨리는 노력을 들뢰즈는 요구한다. 

우리를 이끈 근대정신의 목소리와 달리, 개인은 결코 그 자체로 존재하는 하나가 아니다. 이미 우리는 타자들과 이어져 있으며, 우리가 만드는 체제는 그런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인위적인 체계화나 조직화에 갇혀 있는 한 우리는 경쟁의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울 것임을 실패한 혁명의 역사가 이미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제 그 역사를 낱낱이 드러내고 “나”-“너”의 대립 밖의 어느 지점으로 나가는 길인 것 같다. 그렇다면 진짜 우리“들”의 적은 다름 아닌 “너희들”을 적으로 규정하게끔 한 무언가가 아니겠나.

예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마10:34, RNKSV)고 말한다. 막상 보자면 부담스러운 말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소위 Q라고 불리는, 그의 구전 전승에 기반한 “복음”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그렇다면 예수가 이 말을 한 것은 어느 정도 확실할 텐데, 어떻게 이 주장을 이해해야 할까? 나는 그 요지가 참 자유의 회복에 있다고 믿는다. 권위에의 맹목적 복종이라는 “평화”에서 더 나아가, 자연 선택에서도 드러나는 창조 질서의 회복, 즉 동일성에서 해방된 참 자유를 찾으라는 말씀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자유가 약육강식의 비참함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예수가 끝까지 강조했던 “서로 사랑”, 심지어 세리나 창녀와도 나누었던 그 사랑을 다른 한 손으로 잡을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제 사랑은 “너”와의 사랑이 되어야 하고 손에 든 칼은 그 “너”와의 사이에 있는, 누군가가 쌓은 장벽을 향해야 한다. 이렇듯 우리가 “적”과 연대한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그 “적” 또한 누군가가 규정한 적에 불과했음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예수의 뜻에 닿을 길은 아닐까? 발칙한 상상을 해 본다.

“바로 얼마 전, 이 사람은 노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워드 패스트, 『스파르타쿠스』 中

*각주설명

1) 에리히 프롬/원창화 옮김, 『자유로부터의 도피』 중판, 서울: 홍신문화사, 2012, 54 page.
2) 같은 책, 55 page.
3)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김재인 옮김, 『천 개의 고원』, 서울: 새물결 출판사, 2001, 52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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