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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Day] 2017년 2월 5일 주현절 후 다섯째주일 마태복음 5:13-20<말씀의 잔치>
홍상태 목사 | 승인 2017.02.21 13:52

신학적 관점

오늘 본문은 지난 주일 본문(5:1-12)에 나온 제자로의 부름의 내용을 확장한 것이다. 13-14절에서 예수는 두 가지 은유를 사용하여 제자는 어떤 사람이며 이 세상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첫 번째 은유는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13절)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 땅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소금이 음식의 맛을 조절하고 향상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처럼 제자들에게 주어진 능력은 <5:3-10에서 묘사된 방식으로> 그들이 참여하는 이 땅에서 막대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한다. 제자들은 권리를 박탈당한 자를 세워주고, 상실에 고통당하는 자를 돌보고, 정의를 추구하고, 자비를 베풀고, 정직하게 행하며, 평화를 도모하고,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신념을 지키면서 사회의 현상태를 변혁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그 사명을 망각할 위험도 있다. 이 땅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실천을 하지 않는 제자는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

두 번째 은유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이다.(14-16절) 이 은유는 제자들의 공동체적인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빛은 우리가 사물을 볼 수 있게 한다. 빛은 일종의 에너지로서 사물에 다양한 색깔을 주고, 식물을 성장하게 하고, 태양광발전을 통해 전기를 만든다. 또한, 특별한 처리를 통해 레이저 광선과 같이 유용하게 이용된다. 제자 공동체는 모든 민족과 나라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빛을 굴절시켜 비치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 제자들이 공동체로서 이 세상에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참여할 때 그들은 빛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양성을 증진하기 (사물에 다양한 색깔을 주듯이); 세계를 친환경적으로 건강하게 돌보기 (식물을 성장하게 하듯이); 환경정의에 근거한 정책을 세우기 (태양광발전처럼); 특별한 필요에 따라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레이저 광선처럼).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선한 일들이다.

17-20절에서 확인되듯이, 제자들이 각자, 그리고 공동체로서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 그리고 예수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이라고 이해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예수가 제자가 된 이들에게 당신이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 온 것이라고 밝힘으로 예수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키겠다는 언약을 이루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맥락 속에> 위치시킨다. 예수는 이 과정에서 전통을 부인하거나 언약을 파기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선민에게 주어진 사명을 확장한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는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는 것이 아니고 완성한다. 예수 자신이 <오늘과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뜻과 연관하여>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해석학적 열쇠가 된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스스로 계명을 어기거나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인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더 나가 20절은 오늘 본문 전체를 그 앞의 이야기의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6,10절 참고)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10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 구절의 “의”는 무엇인가? 그리고 구절이 6절과 10절에 나오는 “의”와 어떻게 관련되고, 어떻게 그 구절들을 더 깊게 이해하도록 돕는가? 20절에서 예수가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오지 않았다고 선포한 것에 근거해 볼 때 “의”는 예수가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을 해석하고 그에 따라 사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전통수호, 자신의 경건의 공적 과시, 율법의 문자적 준수와 관련되어 있다. 예수의 의는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그 관계가 제자들과의 관계의 기반이 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의의 인습적이고 제도적인 실천을 넘어서도록 명령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신다. 인습적 의를 넘어선다는 것은 <의롭게 사는 삶>이 <하나님 예배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14, 10절 참고)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고,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다.(3-9절 참고)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정의를 위한 열정이 없고 인간의 삶을 개조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사실상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예수를 통해 모든 인간에게 확장된>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파기한 것이다. 언약적 관계가 깨질 때, 그들의 미래에 하나님은 없다 -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b)
 
5:1-12와 5:13-20에서 우리는 일종의 제자도의 신학을 찾아볼 수 있다. 제자도의 신학은 예수가 제자들(특별한 부름을 받은 사람들)과 무리들(예수를 보고, 그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따라온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 신학의 첫 번째 요강은 하나님의 축복과 총애가 예수를 따르라는 부름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요강은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의 뿌리가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요강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의 때문에 인간의 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끝으로, 인간의 의는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소금처럼,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 우리의 인격이 형성되도록 맡길 때 우리는 예수의 제자가 된다. 빛처럼, 우리가 믿음 때문에 이 세상에서 멸시당하는 자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그 때문에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의 제자가 된다.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의 제자로서, 우리는 예수께서 율법을 해석하신 방식을 본받아 오늘날 의롭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Marcia Y. Riggs, J. Erskine Love Professor of Christian Ethics, and Director of the Th.M. Program,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Decatur, Georgia
 

주석적 관점

오늘 본문은 두 개의 도입 구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5:13-16절로 팔복과 이어지는 설교의 윤리적 부분을 연결하는 본문이다. 이 윤리적 부분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예수와 율법(5:!7-48), 예수와 제의(6:1-18), 그리고 예수와 사회적 문제(6:19-7:12)들이다. 두 번째 도입구문은 5:17-20절로 첫 번째 부분의 서론과 예수의 가르침이 모세의 율법과 모순된다는 5:17-48의 부정확한 해석에 대한 안전판이 되는 두 가지 역할을 한다. 
 
이 본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예수가 말한 본래의 맥락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의심의 여지없이 마태는 예수의 가르침을 첫 번째 기독교공동체에 적용하고자 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산상설교로 알려진 설교를 예수가 했을 때 그의 청중은 이스라엘사람이었다. 더구나 예수의 설교는 일반적 윤리적 규칙에 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설정하고자 하는 정치적 종교적 방향에 대한 뜨거운 논쟁에 개입한 것이다. 이 논쟁의 직접적 맥락은 로마제국에 의한 이스라엘 땅의 점령이다. 더 큰 맥락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유수로부터 이방제국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조상의 땅으로 몸은 돌아왔지만, 유배는 계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땅과 도시 그리고 성전은 goyim에 의해 지배되고, 온 나라에 군인들이 활보하고, 하나님의 왕권이 이루어지는 예언자적 약속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정치와 종교가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 문화에서 이것은 여러 열망적 질문들로 인도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와 성전이 어떻게 정복당할 수 있는가?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기를 원하실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1세기 유대교의 여러 분파들은 다양하게 반응했는데, 정복자와 현실적으로 협력했던 사두개파부터, 무기를 들고 제국과 투쟁했던 젤롯당까지 있었다. 바리새인들도 후자로의 선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예수 당시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분열되었다. 어떤 파들은 무기를 들었지만, 다른 파들은 게토를 선택했다. 작은 유대나라가 제국의 광대한 군사적 힘에 대항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토라에 대한 개인적 연구와 실천으로 방향을 잡았다. 만약에 한 사람이 정치적 독립을 얻을 수 없다면, 최소한도 자신의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하나님의 통치가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져 하나님의 정의가 말해질 때까지 사람들은 계약적 정의로 살아가야 한다.​1)
 
이러한 열망적 질문들에 대해 분열되고 혼란스러운 백성들에게 예수가 설교를 통해 한 폭발적 대답들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도전”​2)이었다. 예수는 한편으로는 젤롯당의 의제들을 거부했는데, 원수들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며, 저항하지 말고 위해 기도하라(마5:43-44)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바리새인들의 전략도 또한 헛된 것이라고 했다. 누구의 의가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5:20)는 것이다. 이 본문의 해석자나 설교자들에게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제에 대한 예수의 비판의 본질을 이해하고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점은 울법 자체를 지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5:18). 도리어 바리새파 사람들의 전략이 이스라엘 상황에 대한 구식의 해석에 의거하는 것이 문제이다. 바리새파사람들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약속의 성취가 미래에 있다는 가정 하에 일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말하자면 유배 또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게토(ghetto)를 선택하여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실 때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예수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였는데(마4:23), 하나님이 이미 새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동경위에 놓아두어 온 집안에 환하게 해야 한다(마5:15).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으로, 제사장의 나라로 부름 받았고,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며 이때는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되어야 한다”(사2:2). 또한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다”(사2:3). 그것이 이스라엘이 제국을 대하는 길이다.
 
이렇게 사는 것은 율법이나 예언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완성한다는 것”은 종말론적 카테고리이다(1:22;2:15,17,23;4:14; 8:17; 12:17;13:35; 21:4; 26:54,56). 예수가 바리새인들의 의제를 거부하는 것이 율법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을 다른 관점에서 읽고 해석한다는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을 죄가 지배하는 세계의 맥락에서 읽는다. 율법은 점령된 이스라엘이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다. 비슷하게, 율법 자체는 죄의 맥락에서 윤리를 설정하고 있고,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특정한 관습을 허용한다(마19:8). 예수는 더 이상 율법을 죄의 맥락에서 읽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읽는다. 이제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기에, 척도는 더 이상 인간의 하잖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충만함이다. 
 
Edwin Chr. van Driel, Assistant Professor of Theology, Pittsburgh Theological Seminary, Pittsburgh, Pennsylvania

목회적 관점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님이 서서 교회 문을 두드리는 잘 알려진 장면이 있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예수를 받아들일 것이냐 거절할 것이냐에 초점을 맞춘 복음적인 삽화로 사용되었다. 이 해석은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그 장면에 앞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미지근해서 책망을 당한다(계 3:16). 이것은 분명히 칭찬은 아니며, 특히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칭찬은 아니다. 교회가 미지근한 것보다는 뜨겁거나 차가운 것이 더 낫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견지하시는 관점이다.
 
팔복을 제시한 후에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이 소금과 빛처럼 될 것이라는 비유를 함으로 설교를 시작한다. 이것들은 흥미로운 선택이며, 양쪽 다 선교와 목회 사역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한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 목회적인 관계에 “맛”을 가져다주어야 함을 의미한다. 소금은 만족스러운 맛과 함께 예리한 맛을 가졌다. 소금이 없었다면 무미건조하고 개성이 없었을 것을 살려낸다. 어떤 경우에는 소금을 방부제로 사용하여 장시간 신선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소금은 또한 갈증을 자극하는 데 사용된다. 우리는 이런 소금의 이미지가 사역의 실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 가지 유비가 특히 중요해 보인다.
 
적어도 지난 30 년 동안 안수 받은 목회자와 평신도 전문가에 의해 실행된 목회 사역은 이른 바 치유 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인간의 거의 모든 상태를 다루는 심리적 통찰력의 인기는 이 영향에 기여했다. 그로 인한 한 가지 결과는 목회 사역이 상황에 관계없이 거의 배타적으로, 서로를 지지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는 것이다. 지지와 인정이 확실히 필요하지만, 가장 목회적으로 대응해야 할 때가 있다. 예수는 개개인을 인정하거나 그 사람의 행동에 도전했다. 예수는 부유한 청년을 받아들이셨지만, 그의 소유물을 포기하라고 도전하셨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받아들이시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다.
 
인정은 상황에 관계없이 사람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반면 도전은 행동 변화를 더 잘 유도한다고 말할 수 있다. 효과적인 목회 사역을 위해서는 두 가지 응답이 모두 필요하다. 변화에 대한 도전은 영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짠맛이다. 목회자의 지팡이에는 두 개의 끝이 있다고 한다: 사람을 양무리와 가까이 있도록 붙잡는 고리와(지원), 자극하고 격려하기 위한 뾰족한 끝(도전)이 그것이다. 두 번째가 함축하는 것은 다소 역설적인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에 대한 도전의 짠맛이, 살아있게 해주는 방부제가 된다는 것이다. 한때 쓴 맛이었던 것은 적어도 달콤쌉싸름하게 된다. 도전은 인내로 이어지는 변화로 이끈다.
 
예수께서는 추종자들에게 그들이 세상의 빛이며, 이 빛은 숨겨서는 안 되고 드러나야 한다고 알려준다. 우리는 종종 이 말씀을 우리의 은사와 재능을 양동이 아래 놓아서 감춰두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공동기도서에서 선호하는 봉헌문 가운데 하나는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격려하여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그/그녀의 수줍음을 버리게 하고, 숨어있는 곳에서 나오게 하기 위하여 이 접근법을 사용했던 수많은 사례가 있다. 그렇지만 빛을 비쳐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삶에는 안과 밖에 어둠이 있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어둡고 무너진 세상에 빛을 비추라고 격려하신다. 빛은 복음의 빛이며, 모든 사람들을 그 온기와 광채로 이끈다. 이 임무는 태초부터 모든 시대에 걸쳐서 우선적인 것이었다. 윌리엄 템플 대주교는 종종 “교회는 세상에서 회원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조직”이라고 말한다. 빛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어둠이 있는 곳으로 기꺼이 가야한다. 어둠 속으로 들어가서 어둠 속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제 때에 빛이 어둠을 정복하게 해야 한다. Annie Dillard는 다음과 같이 썼다. “밖에 나가 어둠 속에 앉아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별을 보고 싶다면 어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3)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품고 그 어두운 곳으로 가야 한다. 빛은 우리의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 주어지지 않았다.
 
효과적인 목회 사역은 영혼의 어두운 밤을 찾기 위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어둠을 응시해야 한다. Parker Palmer는 이 과정을 우리 내부의 풍경을 보거나 읽는 것이라고 말한다.​4)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필수적이다.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자신의 마음 어디에 비쳐야 하는지를 모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비출 수 없다. 목회 지도력은 내면에 있는 어두운 곳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외부의 어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내면의 탐험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소금과 빛일 때, 예수가 말씀하신 법을 성취할 가능성이 더 높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영혼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
 
Charles James Cook,  Professor Emeritus of Pastoral Theology, Seminary of the Southwest, Austin, Texas

설교적 관점
 
오늘 본문은 인생에 있어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이나 교인들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마태공동체의 상황은 오늘날 우리들과 비교해서 생각할 수 있다. 마태는 예루살렘과 성전파괴에 따르는 신학적, 사회적 갈등이라는 시대에 살았다. 유대사회는 유대교의 미래와 유대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설교자는 회중들에게 북미 제도교회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있음을 인식하도록 해도 좋다.[북미교회에서] 이전의 가치나 활동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페기되고 있다. 역사가 깊은 교단들의 교인수가 점차 감소하고 있고 사회적 영향력도 약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설교자는 마태복음 5:13-16을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기 위한 신학적 전거로 사용할 수 있다. 마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13절a)라고 시작한다. 유대교에서 소금은 계약을 상징한다. 마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종말적 시기 바로 직전에 자신의 공동체가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마태에게 있어 계약공동체는 그래서 종말적 공동체를 뜻하고 있다.  설교자는 교인들에게 우리교회를 이런 공동체로 상상해보도록 도와줄 수 있다.
 
마태는 13절b를-짠 맛을 잃고 버려짐-종말적 상황과 연관해 예상되는 마지만 심판에 견주어 설명한다. 만일 마태공동체가 신앙을 간직하지 못한다면 마지막 심판 때 책망을 받을 것이다. 만일 설교자가 마지만 심판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본문의 이 부분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점을 강조한다:신앙을 유지하지 못한 사람은 새로운 삶을 기대할 수 없다.  
 
계약이라는 주제는 5:14-16에서 더 강화되는데 여기서 복음서 저자는이스라엘의 역할을 서술한 이사야 42:6로부터 "너희는 세상의 빛" 이라는 표현을 도입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상 (이방인)의 빛이 되도록 불렀다. 이스라엘은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계약을 보여주는 모델이 된다. (사 42:1-6, 창12:1-3) 이와 마찬가지로 마태공동체는 1세기에 빛의 역할을 하였고 오늘날 교회는 인간사회에서 그러한 빛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교인들이 가치있는 삶이나 양식을 실제로 보여주는 생활을 하는지  아니면 그냥 덕목으로만 생각하는지[그대로 살지는 못하고]라는 도전을 주어도 좋을 것이다.  
 
14b-15절은 빛의 목적이 환하게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당시에 램프는 작았지만, 팔레스타인의 어두운 작은 집에서는 -작은 램프라도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추었다" (15절). 비유적으로 말하면 [세상을 비추기 위해] 애쓰고 있는 교회나 교단에서 나오는 빛은 작거나 희미하더라도 누군가의 집을 환히 밝힐 수 있다.
 
구체적으로 공동체가 그 빛을 어떻게 비출것인가? 선한 일 곧 (16절) 즉 사랑, 자비 그리고 정의라는 이름의 계약을 이행하는 실천을 통해서이다. 북미 교회라는 상황 하에서 의로운 실천을 말할 때, 설교자는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함이 아니고 그 나라를 선물로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설교를 통해 설교자는 이 하나님 나라의 빛을 비추는 선한 일이란 무엇인지를 구체화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17-20절은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상세히 설명한다. 여기에서 교인들이 놀랄지 모른다. 공동체는 그 나라를 기대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로 율법을 지킴으로써이다(마태가 해석한 것 처럼).
 
이 귀절은 예수나 예수를 추종했던 초기공동체가 율법과 유대교를 거부했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에게는 강한 충격이다.확실히 마태는 율법(즉 바리새파) 몇가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나 공동체 내의 유대인 구성원들은 율법을 잘지켜야 하고 이방인 구성원들은 율법의 핵심적인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이 17절에 강하게 나타나 있다. 율법과 예언자를 완전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목적을 공동체의 일상적 삶에서 완전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가 종말의 때를 기다리면서 사는 것이고 마태는 18절에 그 직접적인 근거를 말한다.
 
설교자는 19절을 교인들과 연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북미에 있는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는 유대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면서 율법의 명령을 폐기했을 뿐만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적극적으로 가르쳤던 교인이나 목사들에 대한 경험이 있다. 20절은 앞으로 남은 11개월을 마태복음으로 [2017 성서정과 복음서는 마태복음] 설교할 설교자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전달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 본문 ("더 나은 의"라는 구절을 제시하는)을 보면 마태공동체와 몇몇 전통적 바리새파 사이에 갈등이 있었음을 알 수있다. 설교자는 교인들에게 마태가 바리새인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역사적인 면이라기보다 그들과 마태의 논쟁상황을 대변하고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설교자는 율범의 어느 부분이 (영적, 현실적 표현 모두) 오늘날 이방인 공동체에도 중요한 것이 되는 건가를 교인들이 생각할 수 있도록 이끌 필요가 있다. 설교자는 또한 교인들에게 유대교도 존중할 만한 것이 있음을 알려주어도 좋을 것이다. 아마 교인들은 15-16절에 나온 선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근처 회당에 가입할 수도 있다. 마태복음 5:17-20은 기독교인의 정체성과 삶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기 쉽게 보여주는 설교재료가 될 수있다. 그러면서도 이 본문은 교인들이 율법,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관계, 그리고 예언과 성취라는 주제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가질 것인가를 도와주는 설교에도 도움을 준다.
 
Ronald J. Allen, Nettie Sweeney and Hugh Th. Miller Professor of Preaching and New Testament, Christian Theological Seminary, Indianapolis, Indiana
 
1)  이러한 바리새인의 아젠다에 대한 해석은 N. T. Wright, The New Testament and the People of God(London: SPCK, 1992), 182-95 참조.
2)  N. T.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London: SPCK, 1996), 288.
3)  Annie Dillard, Teaching a Stone to Talk: Expeditions and Encounters (New York: Harper Perennial, 1992), 43.
4)  Parker Palmer, “Leading from Within: Reflections on Spirituality and Leadership,” Meridian St. United Methodist Church, Indianapolis, March 23, 1990.

 

홍상태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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