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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Day] 2017년 2월 12일 주현절 후 여섯째주일 마태복음 5:21-37<말씀의 잔치>
홍상태 목사 | 승인 2017.02.21 13:51

신학적 관점

예수는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의 성취자이다. 이 예수가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 및 그를 따르는 이들을 위해 율법을 새롭게 해석해서 전한다. 이 구절들 속에서 예수는 당시 중요하게 여겨지던 주제들에 좀 더 집중한다. 그 주제들은 분노(21-26), 간음(27-30), 이혼(31-32), 맹세(33-37)에 관한 것들이다. 우리가 직전의 본문(13-20)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때,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때 그들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뛰어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셈이다.
 
분노에 관한 구절은 살인금지에 관한 계명을 확장하여 해석한 것이다. 예수는 복수나 처벌과 연결된 분노가 살인으로 발전되는 경우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원래의 살인금지에 관한 계명의 의미를 확장한다. 우리가 같은 공동체 구성원을 판단하거나 모욕할 때, 혹은 우리가 어떤 사람과 법적인 다툼을 할 때 (이 두 경우 모두 분노가 생길 수 있는데),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사과하거나 소송 이외의 방법으로 화해함으로 상황을 완화할 기회가 주어진다. 이 모든 경우 의도하는 목표는 같다. 화해의 행위를 통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가 살인금지 계명을 무효화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예수는 살인을 분노 표출과의 연속성 상에서 이해한다. 더 나아가, 예수는 인간이 분노할 수 있음을 인지한다. 예수는 분노를 금지하기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행동을 함으로 - 평화를 도모하는 삶을 삶으로(5:9 참고)- 분노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다음 구절들은 간음과 이혼에 관한 것이다.(27-30) 간음에 관해서 예수는 그 의미를 행동을 넘어서 동기(의도)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간음은 단지 잘못된 육체적인 관계뿐 아니고 그것에 관한 욕구,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아내를 탐내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 여성주의 성서학자 Amy-Jill Levine에 의하면 간음의 의미의 이와 같은 확장은 여성들에게 더욱 중요하다: “생각과 행동 사이의 구분을 제거함으로, 음욕까지도 간음으로 여기는 이와 같은 계명의 확장은 어느 사람도 성의 대상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여기서 짐은 남자에게 지워진다. 남성을 유혹하여 성적 일탈을 하게 된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는 주장은 통하지 않는다.” 눈을 빼내고, 손을 찍어서 내버리라 하는 과장법을 통해 예수는 의도와 행동, 태도와 행태 간의 일치를 통해 인격의 온전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도 예수는 간음에 관한 계명을 폐하는 것이 아니고, 의도까지 포함함으로 그 계명을 확장한다.
 
이혼에 관한 구절(31-32)에서 예수는 이혼을 허용하는 전통을 일단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혼을 할 수 있는 근거에 관해 제한을 가한다. 다른 말로, 예수의 해석은 이혼에 관한 질문을 <타락 이전에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연합하게 하셨을 때 갖고 있었던 원래의 뜻>과 관련시킨다. 원래의 뜻은 그 연합이 영원할 것이라는 점이다. 유대 율법이 이혼장을 허용하지만, 이혼은 영적으로는 아니고 법적으로만 타당하다.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원래의 뜻에 근거해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결혼을 유지하려는 방식으로 결혼생활에 임해야 한다. 특히 남편들은 이혼을 통해 혼인 서약을 깨뜨리고 아내들을 간음죄 누명을 쓰기 쉬운 상태로 버려둬선 안 된다. 특히 당시 유대 사회의 상황 속에서, 예수는 27-32절에서 책임소재를 여성에서 남성에게 옮김으로 율법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마지막 구절들(33-37)에서는 맹세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1) 예수가 모든 종류의 맹세를 반대하는가? (2) 맹세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여기에 적용되는 해석의 원리는 37a에 나온 것처럼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진실함(truthfulness)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수립하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진실함에 근거한 수준 높은 의를 실천하는 삶을 산다면, 맹세를 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이 구절은 맹세가 전혀 필요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보다는 “진리 말하기” 자체로 충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말해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세 구절들은 예수가 율법을 해석하는 방식을 보여줌과 동시에 예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어떻게 그 생활 속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실천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지침을 보여준다. 본문을 통해 독자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에 근거하여 (전통에 의해 정설로 굳어진 해석을 확장하거나 재구성함으로) 끊임없이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예수를 만나게 된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해석의 열쇠가 된다. 예수는 전통을 무시하지 않고 그 속에 서 있다. 그러나 전통에 최종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 구절을 상기하게 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요1:1) 지난 주일에도 그랬듯이 주현절 절기의 본문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본성과 인류를 향한 뜻을 밝힌다. 예수의 제자인 우리가 계속 추구해야 하는 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의 말씀에 계속 경청하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Marcia Y. Riggs, J. Erskine Love Professor of Christian Ethics, and Director of the Th.M. Program,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Decatur, Georgia
 
주석적 관점
 
본문을 문학적 구조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번 주 본문(마5:21-37)과 다음 주 본문(마5:38-48)의 배분은 약간 당혹스럽다. 윤리적 권고의 처음 부분인 마5:21-48은 21-32절과 33-48절의 두 개의 ‘세 개 한 벌’(triads)로 나뉜다. 마태가 의도한 그러한 분류는 본문의 여러 면에서 명확하다. 세 번 반목하여 “너희가 들었다”(21,27,31)고 한 후에 33절에서 두 번째 ‘세 개 한 벌’을 “너희가 또한 들었다”는 말로 시작한다. 더구나 21-32절에서 매번 ‘들었다’는 말은 ‘너희가’ 다음에 나온다. 하지만 33-48에서는 그러한 구조가 나타나지 않는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너희가 들었다”는 구절은 5:21,33에서만 두 번째 ‘세 개 한 벌’의 시작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5:21-32의 세 가지 문장 각각 구약 신명기를 언급하고 있고, 5:32-48의 세 가지 문장 각각 레위기를 인용한다.
 
이전의 도입부분에서(17-20절) 이 부분의 예수의 설교가 제시한 윤리가 모세의 율법을 뛰어넘을 만큼 모순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예수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율법을 지키고 살도록 권고했는데, 죄의 위험을 방지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종말론적 왕권의 풍성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한 것이다. 
 
처음의 권고(21-26절)는 화해에 관한 것이다. 율법은 살인을 금하는데(출20:13;신5:17), 예수는 살인뿐만 아니라 성내는 것도 심판을 받는다고 말했다. 주석가들의 성내는 것에 대한 심판이 절대적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흥미롭다. 예수의 말을 절대적인 명령으로 보는 입장은 성경 여러 곳에서 화내는 것을 정죄하는 데 있어 강경하다(엡4:31;골3:8 비교 딤전2:8;약1:20;시37:8;잠14:29;전7:9)것에서 지지받는다. 이에 반하여 어떤 주석가들은 성경에는 어쨌든 하나님과 예수도 분노했다고 기록하고 있음을 지적한다(마23:17;막3:5).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생물학적으로 분노가 불가피하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예수의 관심은 분노를 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무엇을 하느냐이다. 분노가 우리의 관계를 형성하는가? 또는 화해하지 못하게 하는가? 이런 점에서 예수는 그의 가르침대로 살아간 사람이다. 
 
또한 예수의 권고의 정치적 맥락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구절들에서 묘사된 갈등은 대인관계(22-24)나 경제적 관계(25-26)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런데 고소하는 사람, 형무소관리, 지옥 불 속 등의 용어 속에는 로마정복자의 얼굴이 반영되어 있고, 분노라고 말한 것에서도 무력저항을 하는 젤롯당의 모습이 나타난다. 예수는 그러한 분노의 표현이 마침내 예루살렘에 넘쳐나는 “지옥 불”(22절)과 같은 군사적 파괴로 귀결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들의 지배자들에게 관용과 화해를 나타내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5:16)는 것일까? 
 
두 번째 권고(27-20절)는 예수가 말하는 요점이 어떻게 우리가 생리적인 삶을 살아가느냐에 생물학적 기능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28). 여기에서도 예수는 다시 율법의 문자적 가르침(출20:14;신5:18)을 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동으로 만이 아니라 종말론적 관점에서 동기와 의도로서 훈육하도록 권고한다.
 
율법은 이혼을 허용하지만(신24:1-4), 예수는 이 규정을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으로 규정짓는다(마19:8). 이것은 율법(신24:4;레21:7에서 제사장이 이혼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한 구절)이나 예언서(겔44:22,말2:16 하나님께서 이혼을 미워한다고 말한 구절)의 다른 말씀들과 긴밀히 연결된다. 세 번째 권고(31-32)에서 예수는 모든 이스라엘백성들이 제사장의 민족이 되도록 권고한다.  
 
네 번째 권고(33-37)는 구약의 규정에 대해 더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약에서는 맹세가 진정으로 할 때에는 일상적으로 허용되었다(출20:7;레19:12;민30:3-15;신23:21-23). 그러기에 주석가들은 본문이 제시하는 대로 예수가 맹세를 절대적으로 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져왔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증인으로 요청받는 경우에 맹세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지지받는다(롬1:9;고후1:23;갈1:20;빌1:8;계10:6). 더구나, 성경 전체를 보면 인간만이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맹세 하신다(창22:16;출6:8;사45:23;눅1:73;행2:30).
 
하지만 예수가 구약에서 이혼을 허용하는 것에 대해서 말한 것과 같이 맹세에 대해서도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허용된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한 가지 방식은 맹세를 이용하여 어떤 진술에 대한 한 사람의 진실을 결정한다고 말하는 것은 화자가 두 가지 발화내(發話內:화자가 말하는 것으로 알 수 있는 언어 행동에 대해 말함;조언 경고 약속 질문 등
 
역자주)행동을 실제로 사용한 것이다: 어떤 것은 전념한 것이지만 다른 것에는 별로 전념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의 말에 진정으로 헌신한다는 의미로 화자는 맹세를 사용한다. 그런데 예수는 모든 말에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기대한다. ‘예’ 할 때는 ‘예’라는 말만하고, ‘아니오’ 할 때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바라보는 다른 방식은 비록 어떤 사람이 진실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듣는 사람이 믿지 않으려고 하면 화자는 맹세로 이를 강조하는 것이다. 후자의 상황은 물론 전자의 결과이다. 완악한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기에, 말이(하나님의 말까지 포함해서) 더 이상 자동적으로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는 그의 청중들에게 모든 것이 진실한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로서 말하도록 도전하신다. 
 
Edwin Chr. van Driel, Assistant Professor of Theology, Pittsburgh Theological Seminary, Pittsburgh, Pennsylvania
 
목회적 관점
 
우리에게 예수의 가르침과 대립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예수는 우리가 형제나 자매 중 한 사람과 갈등을 겪는다면 우리가 제단에 제물을 가져오기 전에 가서 그 사람과 회복하거나 화해해야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성찬을 받기 위해 거룩한 식탁에 모이기 전에 오래된 원한이 해결되고 상처가 치유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 각자가 깨끗한 양심과 가벼운 마음으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기 위한 이상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이상적인 것이 즉시 가능하지 않은 순간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화해와 용서의 과정은 종종 시간이 걸리고 양쪽 당사자 모두에게 적지 않은 인내심이 요구된다. 만약 사람들이 아직 개선되지 않은 채 풀리지 않은 관계 때문에 그들의 제물-“우리 자신, 즉 우리 영혼과 우리 육신”-을 바치기를 거부한다면, 모든 관계된 사람들에게 상황은 까다롭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쓸모없다”는 느낌으로 제단으로 나아갈 것이고, 그래서 용서가 현실적으로 필요해질 것이다. 용서는 화해를 향한 첫 걸음이다. 그것은 우리가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와 갈등하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한다.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마음과 영혼에 가장 가까운 것은 예배의 경험일 것이다. 예배는 고백과 용서, 이웃과의 재결합, 세상의 변화를 위한 삶의 갱신을 경험하는 곳이다. 참된 신자에게 상처를 주면 사랑의 예배만큼이나 사랑의 교리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교리는 나중에 생기지만 종종 믿음의 경험에 형태와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다면 예배가 사람들의 삶에 가져올 수 있는 능력, 서로 화해하게 하는 능력을 잘 사용해야 한다. 여기 공동체 전체를 위한 목회적 의미가 있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통찰을 회복한 사람은 성공회 주교 John A. T. Robinson이었다. 그는 다소 급진적(또는 케임브리지 학자만큼 급진적)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성만찬을 간단하게 “평범한 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했다.​1)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삶의 총체-어둠과 빛-을 하나님께 드리면, 그것이 곧 축복이고, 우리 삶은 거룩해지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빵과 포도주로 이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화해를 점차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전에 성취할 수 없었던 것이 이제는 가능하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이 할 필요가 없다. 이런 이해는 우리 각자 (또는 우리를 위해서 부모와 조부모님)가 세례 서약에 “나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때 시작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임재 없이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는 것이다.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으로 알려진 영국의 위대한 역사적시기에 교회의 예배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 특히 성직자들은 예배에서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선교를 수행 할 수 있는 촉매제를 보았다. 이들 성직자들은 예배에서 화려함을 찾는 대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수프와 식료품을 가졌다. 예배와 굶주리는 세상 사이에는 깊은 관련이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무언가를 배워야만 한다. 먼저 해야 할 일을 준비하고 싶다면, 예배로부터 시작하면 된다. 우리는 제단에 있는 빵이 세상의 기아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빵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옥스포드 그룹 멤버 중 한 사람은 성만찬이 유일하게 참된 민주적인 순간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제단에 모여서 우리 자신을 완전히 바치고, 우리가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돌려받기 원할 때, 우리는 현저하게 다르지만 핵심적인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서로에게서 소외된 사람들을 포함하여, 관계가 있는 사람들과 아직 관계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위와 여론이 사라지는 궁극적인 수평계(leveler)이다.
 
우리가 예수의 이상을 위해 노력하지만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할 때, 제단에 와서 제물을 바치는 것은 새롭게 시작하는데 있어서 나쁘지 않다. 예수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식탁을 초대하여 하나 되는 경험을 하게 하셨다. 그것은 또한 식탁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신실하고 조화롭게 사는 삶에 헌신하여 새롭게 살기 시작하도록 격려하는 역할을 했다.
 
가톨릭 노동운동의 창시자 Dorothy Day는 특히 힘들고 스트레스가 많은 시기에 동료 노동자들에게 말하곤 했다. “우리 각자가 우리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당연히 더 많이 사랑하기 원하게 될 것이다.”​2) 거룩한 제단 앞에서 어깨를 맞대고 서서, 손을 잡고, 우리는 다시 한 번 기억한다. 하나님의 영역에는 소외된 사람이 없다. 모든 제물이 허용되고, 모든 사람의 제물을 받으신다.
 
그렇게 하면 목회 사역이 어려워지기 시작하지만,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이제는 가능해진다. 그 때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새롭게 듣게 될 것이다. “자, 가서 화해하여라.”
 
Charles James Cook,  Professor Emeritus of Pastoral Theology, Seminary of the Southwest, Austin, Texas

설교적 관점
 
기독교인들은 때때로 구약의 율법주의와 예수의 새롭고도 고귀한 의가 대조된다는 가정 하에 이 성서정과 본문을 반대명제로[구약 율법에 대한] 이해한다. 이러한 태도는 반유대주의를 키우는 것이다. 설교자는 교인들이 신학적으로 잘못이해하는 내용을 바로잡아주어야 한다. 마태는 산상수훈을 구약을 대체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적으로 연속선 상에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마태에게 있어 새로운 요소는 예수가 하나님의 종말적 예언자라는 것이고 그의 사역은 현존하는 시대의 종언을 알리고 임박한 종말 곧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될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의 사역은 그 나라를 기대하고 부분적으로 실현한다. 오늘의 성서정과는 이런 종말론적 시각으로부터 몇가지 유대적 가르침을 설명하고 있다. 마태는 이런 가르침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대신 이런 계명이 지닌 깊은 의도가 그 나라에서 어떻게 구현될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래서 본문은 회중들을 마치 그 나라에 살고있는 것처럼 초대하고 있다.
 
본문은 맨 앞에 4가지 주제를 놓고 있다: 화해 (21-26), 간음(27-30), 이혼 (31-32) 그리고 맹세 (33-37). 설교자는 이 전체를 다룰 것인지 아니면 이 중 몇 가지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4가지 주제는 하나의 공통적인 요소와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나라[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보았을 깨어진 관계들(broken relastionships)이다. 설교자는 파괴된 관계가 무슨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살기를 바라신다. 마태에 따르면 그 나라가 부분적으로 현존하게 되면 사람들은 이 “깨어짐”을 넘어서서 그 나라의 “서로 도움”을 지향하며 사는게 가능해진다.
 
설교자는 교인들에게 그들이 살고있는 개별적이고 상호적인 세상 속에서 깨어진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깨어짐을 넘어서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그 나라에서는 어떻게 가능한가? 설교자는 4개의 주제에 관해 고대세계의 사례를 통해 한꺼번에 다루고 그런다음 오늘날 세계 속에서의 사례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잘못된 관계는 어디에 있는가? 그 나라에서는 이 관계들이 서로 돕는 것으로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설교자는 또한 이 주제 가운데 어느 하나에 집중한 설교를 만들 수가 있다. 이 경우에 설교자는 어느 주제가 현재 상황에 가장 적합하게 연관이 되는 지를 결정해야한다. 마태복음 5:21-26은 분노(anger)라는 이슈를 다루고 있다. 이 구절을 보면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하나는 분노는 살인과 유사한 방식으로 관계를 파괴한다는 점이다. 둘째로 관계에 있어서 원인제공자가 누구든지간에, 불편함을 인식한 사람이 화해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교인들에게 분노로 인해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잘못되게 하는 상황(개인적, 공동체적)에는 무엇이 있는지 말해보도록 하고 화해를 요청할 수 있다. 마태는 화해에 이르는 데 있어 특별한 방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설교자는 화해를 위해 아마추어적인 심리학에 의존하는 것을 피하고 교인들이 구체적인 단계로 화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료들을 제시할 수도 있다. 마 5:21-26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설교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대하는 일이 소중하다는 것에 중점을 두는 설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모욕하거나 바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런 태도를 지니게 될 때 그 나라의 문턱은 낮아지게 된다.
 
마 5:27-30과 관련하여 설교자는 교인들이 고대세계에서 간음의(adultery) 의미를 이해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간음은 결혼을 통하여 그 나라에서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을 배우기를 기대했던 하나님의 계획을 파괴한다. 마태는 다른 사람을 음탕하게 바라보는 일은 마음 속에 간음을 하는 일이고 그것은 결혼이라는 상호성을 파괴한다고 설명한다. 물론 설교자는 엄격한 해석은 피해야 한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마음 속에 불쑥 떠오르는 생각은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 사람이 깊이 생각하는 주제는 통제가 가능하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29-30절을 과장법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교인들이 배우면 안심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가르침은 공동체의 파괴로 갈 수 있는 충동을 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 5:31-32은 목회활동에서 또 다른 어려움을 설교자에게 던져주는데 그 이유는 오늘날 절반의 결혼이 이혼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설교는 고대 유대사회에서 이혼의 의미와 결과를 말해주고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라는 구절을 설명해주어야 한다. 나아가 설교자는 이 본문을 그 나라에서의 새로운 삶을 방해하는 율법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되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 본문은 결혼관계는 그 나라의 현존에 의해 형성될 것을 가정한다. 몇몇 결혼은 그렇지 못하고 그럴 때 그 나라의 목적은 부부가 다른 관계로 살도록 해줌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설교자는 교인들이 마태의 이 본문을 단순히 이혼을 금하고 있는 보다 초기 형태인 마가복음 10:10-12과 비교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마태는 음행을 예외로 규정하는 구절을 추가했다. 아마도 마태는 공동체가 [이혼을]절대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오히려 그 나라의 삶과 역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추가한 것 같다. 설교자는 오늘날 마태의 관점을 확대하면서 보다 목회적 접근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 5:33-37로 보면서 설교자는 고대사회에서 맹세의 의미를 설명해주어야 한다. 이 주제는 설교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사적영영과 공적영역 모두에 있어 일관성을 생각하게 한다. 그 나라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진실되게 말할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신학적인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본문의 목적은 서로 돕는 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마태는 그 나라를 향한 삶에 실패하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고 심지어 지옥 곧 잘못된 관계의 자리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고 말한다. 비록 설교자가 종말적 심판이나 불타는 지옥을 믿지 않더라도 갈등이 심해지는 것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보편적인 사랑과 도움을 주고받는 그 나라를 추구하면서도 사람들을 지옥에 두는 하나님이라는 이 두 가지 개념 안에 내재된 긴장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신학적 성찰을 돕는 설교를 할 수도 있다. 그러한 설교는 지옥이라는 개념이 신학적으로 적합한 것인가를 보다 폭넓게 생각하게 할 것이다.  
 
Ronald J. Allen, Nettie Sweeney and Hugh Th. Miller Professor of Preaching and New Testament, Christian Theological Seminary, Indianapolis, Indiana
 
1)  John A. T. Robinson, Liturgy Coming to Life (London: SCM, 1964), xii.
2)  Paul Elie, The Life You Save May Be Your Own (New York: Farrar, Straus & Giroux, 2003), 275.
 

 

홍상태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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