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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Day] 2017년 2월 19일 주현절 후 일곱째주일 마태복음 5:38-48<말씀의 잔치>
홍상태 목사 | 승인 2017.02.21 14:01

신학적 관점

산상수훈의 문구는 너무 친숙하고 아름다워서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많은 요구를 하고 있는지를 잊기도 한다. "다른 뺨을 돌려대어라."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원수를 사랑하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얼마나 자애롭고, 얼마나 포근한가? 그러나 사실 얼마나 불가능한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주먹질하는 자에게 더 주먹질을 당하게 방어하지 말라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그것으론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완전하라고? 마치 부차적인 지시 투로 던져지는 마지막 명령은 이것이다. "아, 맞아. 그리고 다른 어떤 것보다도 아무 흠이 없어야 해." 맞는다는 말 외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불가능하고 도전적인 명령을 회피하기 위해 정교한 대책을 개발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다른 뺨을 대라는 예수의 훈계는 역사에 대한 무지에 묻혀있다고 말한다. 고대 세계에서 오른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모욕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 다른 뺨을 돌리면 같은 식으로 뺨을 때리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갑자기 그 명령은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성경 본문의 손을 꼭꼭 묶어 버린다면 교인들이 안도의 숨을 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휴, 다행이다. 나는 예수님이 정말 말씀하신 데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길 바랐었어." 우리가 어떻게 꾸려는 모든 사람의 청을 들어주라는 명령을 쉬운 형태로 변형할 수 있겠는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완전하라는 명령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그 명령을 변형했다: 이 계명들은 영적인 훈계다. 우리의 영혼에 관한 것이지 우리의 육체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재물을 쌓아 두거나, 적을 폭탄으로 공격하거나 하는 것은 영적인 사안이 아니다.
 
산상수훈은 그 교훈을 주는 분과 분리해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충고인데, 이 충고를 주는 예수님은 최고로 고약해 보인다. "너희가 ... 라고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방식으로 예수가 제시하는 지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내용의 측면에서, 예수님은 그가 마리아의 무릎에서 배우지 않은 것은 하나도 제시하지 않는다. 같은 말들이 급진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들리는 이유는 화자 때문이다. 강력하고 특별한 성품을 가진 예수를 홀마크 카드에나 어울리는 유약하고, 모호한 성인으로 순화시키려는 끊임없는 유혹은 완전히 실패하게 된다. 그런 순화된 예수는 성경에 묘사되고, 구체적인 요구를 하는 유대인 예수와는 아무 상관 없다.
 
어떤 고대 기독교 사상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인생길에 동행하시는 주님은 때리려는 손에 자신의 뺨을 대주고, 채찍에 자신의 어깨를 맡기심으로 더 큰 영광을 받으신다."​1)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것은 우리 자신만의 능력으로는 수행할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은 더 열심히 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참으로 절망만을 보장할 뿐이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45절)가 될 것이라는 약속에 근거를 둔 실천계획이다. 이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가장 깊숙한 마음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가 받을 최악의 고통을 당하시고,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부활하셨다. 다른 뺨을 돌려대고, 겉옷까지 주고, 십 리를 가고, 꾸어주고, 원수를 사랑하라 -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안에서 이런 모습으로 성육한 하나님을 따르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배우기 전에, 이런 식의 실천을 즐기는 삶의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이 본문이 분명히 의도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 훈계를 따르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심판에 관한 말씀은 우리를 은혜의 품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그 명령을 마치 마라톤 선수처럼, 자신만의 결심을 통해 외롭게 도덕적 훈계를 성취하기 위해 달려가야 하는 영웅이 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실패가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교회의 삶을 위한 청사진, 새로운 사회의 원칙으로 여긴다면,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다.
 
한 친구가 브라질 빈민가에서 선교사 부모 아래서 자랐다. 그녀의 가족이 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강도당할 공포에 휩싸이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간단해. 우리는 누군가가 훔칠만한 것을 소유할 수 없었어." 꿔달라는 사람들에게 꿔주고, 빌려달라는 사람들에게 빌려주라.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의 가난한 백성과 함께 무소유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육하신 하나님인 예수님은 우리의 심령 외에는 소유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은 그 어려움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수를 낭만적으로 그리거나 보복금지의 어려움을 축소하는 것이다. 성경은 잔인한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 의해, 그런 사람들을 위해 작성되었다. 로마와 같은 강력한 제국의 압제 아래 살았던 힘없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은 효력을 발휘했다. 우리는 이메일로 우리를 괴롭히는 교인들을 우리의 "적"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 대신 당신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당신에게 강제 노역을 시키는 군인을 생각해보아라. 그가 요구한 것의 두 배를 하겠다고 당신이 제안하겠는가? 다른 현대적인 비유를 들자면, 우리에게 더 적은 보장을 제공하면서 더 큰 비용을 요구하는 보험회사를 생각해보자. 본문은 말한다. 그들이 얼마를 원하는가? 달라는 대로 더 줘라. 하나님은 성육신과 십자가를 통하여 원수를 신성한 친구로 만들고, 고아를 딸과 아들(45절)로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헤프게, 때로는 말도 안 되게 과분하게 주신다. 우리가 어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존 웨슬리의 감리교 부흥운동과 그가 촉발했던 다양한 성결운동(나사렛, 성결교, 하나님의 성회)의 핵심은 5장 48절의 완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수님이 그런 명령을 내렸겠는가? 물론, 죽음의 문턱에서 그런 완전한 성화를 경험한 성자들이 더러 있다. 죽기 하루 전에는 그런 일이 불가능할까? 일 년 전에는? 완전은 만찬 테이블에서 항상 올바른 포크를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전지(全知)와 같은 신적인 능력을 보유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숨을 쉬는 순간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듯이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가능할까! 너무 많은 요구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얼마나 쉽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외치고 싶어 하는지를 잘 알고 계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능력과 진리와 믿음을 주셔서 우리에게 능치 못한 일이 없게 하신다."​2)
 
Jason Byassee, Executive Director of Leadership Education and Director of the Center for Theology, Writing, and Media, Duke Divinity School, Durham, North Carolina
 
주석적 관점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부엌에 들어가 식료품을 내려놓고 음성녹음전화를 틀었다. 10살 된 내 딸 Erin이었다. “아빠, 이번 주 주일에 성경봉독 차례야. 오른 빰을 치면 왼 빰마저 돌려 대라는 예수님이 말한 본문 알지. 다른 복음서에도 그런 것 있어요? 다른 복음서에는 다르게 나와 있나요? 알려 주실래요? 공격하지 말라고, 그런데 예수님이 잘못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어린의 문제제기는 어떻게 교회가 이 본문을 해석해 왔는가라는 점이다. 해석의 역사는 우리가 시끄럽게 떠들지 않았던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예수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말을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해왔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열망해야할 일련의 가치들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들은 불가능하지만 중요하다. 그것들을 향해 노력하는 것을 통해 그렇지 않을 때 보다 더 낫게 살아 갈 수 있다.
 
산상설교의 전반적인 말씀은 인간의 의의 불가능성을 나타내고, 우리가 은혜의 기다림을 준비하게 한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개인적으로 말한 것이다. 현대의 복잡한 관계나 세계 경제, 폭력적인 군사적 위협 등으로 그의 충고는 단순히 유지되기 어렵다.
 
예수는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실용적 충고를 하고 있다. 사람들이 당신을 공정하게 대해주지 못할 때, 상황에서의 부정의를 노출할 수밖에 없다. 보복이 당신만을 해친다면, 공격자를 복수하지 않고 대면하라. 당신의 빚이 너무 많을 때 당신의 가난이 어떻게 사회적 위험들로부터 보호가 없이 내버려두는 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정복자들이 당신의 노동을 요구할 때 그에게 일반적인 기대를 넘어서서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해야 한다. 비록 명민하고 통찰력이 있지만, 모든 이러한 해석들은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 마태복음 전체적으로, 특별히 산상설교부분은 반복해서 예수는 그가 말한 것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가 말한 것을 실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발췌에서 예수의 어려운 이야기들을 설명하려는 한 가지 고려는 배제된다. 예수는 가르치기 위해 신학적 원칙들을 제공한다. 이러한 원칙들은 여러 차원에서 작동한다.
 
요점: 제자들은 자신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의 이웃과 적들을 사랑해야 한다.
 
원칙:이런 방식으로 제자들은 의인이나 악인들에게 똑같이 축복하시는 하나님(혹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닮아간다.
 
부수적 원칙: 하나님을 닮는 것은 제자들을 다른 사람과 구별시킨다. 그들의 행동은 달라야만 한다.
 
목적: 하나님을 닮는 것은 단지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제자도의 목적 그 자체를 제공한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48).
 
이러한 발췌의 목적은 산상설교 전체의 목적을 제공하는데, 유명한 반명제이다(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5:21-48). 이 모든 도전적인 말은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데, 하나님의 길의 완전한 닮음이다. 발췌와 반명제를 넘어서는 산상설교의 맥락이 있다. 설교의 배경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은 것을 상기시킨다. 마태에서 예수는 그의 연설을 산에서 전달하는데, 율법에 따라 행해진다. 마5:17-20은 설교의 주제를 보여준다. 주제는 울법학자들과 바리새파사람들을 넘어서는 율법준수를 포함한 옳은 행동을 주장한다. 5:17-20의 결정적 원칙과 함께 반석 위와 모래 위에 지은 집에 관한(7:21-27) 예수의 말씀은 산상설교를 결론짓는다. 이 말씀들은 예수가 말한 것을 행하도록 강조한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7:21). 한편으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7:24).
 
마지막으로 마태의 전체 이야기의 큰 맥락이 있다. 복음서 마지막에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을 사명을 주어 보내면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 만들도록 했다. 그 메시지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28:20)이다. 발췌의 논의에서부터 산상설교의 큰 맥락과 복음서의 마지막에 까지 마태는 예수의 가르침을 지키자고 주장했다.  
 
발췌는 원칙으로 가기 전에 다섯 가지 특정한 경우로 시작한다(38-42). 처음의 세 경우에는 제자들을 억압의 희생자로 그린다. 마지막 두 경우에는 제자들이 사랑의 일을 행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으로 묘사한다. 다섯 가지 예에서 모두 사랑은 개인적 권리와 특권을 희생하면서 제자들의 모든 행동을 좌우한다.
 
38-42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악의 현존에서 그들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요청한다. 율법은 희생자들에게 죄에 맞는 배상을 찾도록 한다(출21:24;레24:20;신19:21).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성경의 본문들이 잘못한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도록 결정하는 목소리들이 있는데(레19:18;잠20:22;24:29), 다른 유대와 이방 자료들도 같은 정서를 증언한다.​3) 같은 방식으로 예수의 가르침은 자신의 주장을 넘어서서 외투를 주거나 십 리를 같이 가주도록 가르치신다. 율법은 채권자들이 개인의 외투를 가지는 것을 금지한다(출22:26-27;신24:12-13). “십 리를 가는 것이” 로마의 법 원칙을 어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요구를 넘어서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는 것은 의무가 아니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그렇게 해야 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그들은 사적 소유권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불행하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제공한 신학적 원리보다는 전통적으로 자기 자신의 원리대로 다섯 가지의 경우를 실행하고 있다. 마태의 예수는 그가 말한 것을 의미하기에 그의 가르침은 기독교 윤리의 토론에서 정당하게 무게를 가져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5:38-48의 구조는 제자도라는 큰 방향에서 다섯 가지 경우를 따른다.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의 적도 사랑하는 제자들은 하나님을 닮기 위해 자신들의 개인적 권리를 희생한다. 현대의 제자들은 어떻게 다섯 가지 경우를 적절히 행할 수 있는가? 그들의 행동에 상관없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오늘의 질문이다.
  
Greg Carey, Professor of New Testament, Lancaster Theological Seminary, Lancaster, Pennsylvania
 
목회적 관점
 
예수님은 종종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말한다; 그는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로 제자들을 자극한다. 산상수훈의 이 부분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른 뺨을 돌려대고, 복수를 그만 두고, 소송에서 요구하는 것 이상을 주고, 더 많은 거리를 가며, 달라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고, 한계 없이 빌려주고,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고, 낯선 사람을 환대하라고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특징짓는 놀라움을 강조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평범하고 합리적이라고 보이는 것과 반대로 해보라고 도전한다.
 
“모든 것은 나를 위해서”라는 세상에서 예수는 우리가 상상하고 구현하기 어려운 대안을 제시한다. 오늘날 누가 완벽할 수 있는가? 야비해지고, 원한을 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이 더 쉽다. 달라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면, 나 자신을 위해 남겨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내가 다른 뺨을 돌리면, 나는 다시 맞게 될 것이다. 고소를 당하면, 나에게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수 있는 최고의 변호사를 고용할 것이다. 원수를 사랑한다면, 나는 더 박해받을 것이고 심지어 살해당할 수도 있다. 내가 너무 좋은 사람이 되면, 나는 약자로, 만만하게, 우습게 여겨질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을 마음 속에 품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감정이 정당화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아직도 노예 제도와 인종 차별의 잔재를 겪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수감되었던 일본인과 일본계 미국인은 수감번호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 "영어 전용"을 요구받으며 차별받는 히스패닉계 미국인; 동일한 일을 하는 남성보다 적은 돈을 버는 여성; 결혼할 권리를 거부당하는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 성전환자; 그리고 전 세계에서 압제자들의 손에 고통 받는 사람들.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예수의 요청은 공허하게 들리고 악에 대하여 단념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는 그 보상이 어떻게 될지 선언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용서하고, 친절하고, 은혜를 베풀며, 관대함을 베푼 대가로 무엇을 얻는가? 어떤 사람은 결과를 너무 의심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기를 거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우리를 다시 학대하거나 억압하지 못하도록 더욱 주의해야 한다. 우리 중 일부는 너무 완고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옳은 사람이 되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완성된 전체에 집중한다. 또 다른 복잡하고 성가신 문제가 우리를 불편하게 하거나 짓누른다. 어떤 사람들은 완전을 추구하며 일생을 보내다가 실패하고 좌절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깨를 으쓱하고 “나는 인간일 뿐이야”라고 하면서 우리가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실패를 정당화한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 도전을 한다. 첫째,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에 관해 가르친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다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결정과 행동은 공동선을 위해 수행된다. 각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매 또는 형제이며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을 한다.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능력 때문이다. 우리는 은혜와 자비와 사랑과 보호를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은혜와 용서와 친절과 관대함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이제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다. 하나님의 관용이라는 선물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이제 그것을 가진 게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시대에 살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
 
둘째로, 예수는 청중들에게 자신이 이러한 가치들을 구체화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는 우리를 “너희는 말한 것을 들었다”로부터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로 이동시킨다. 더 이상 하나님과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에만 의지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를 보고 그가 하는 말을 들어야만 한다. 예수는 권위를 그 자신에게로 이동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존재하고 있고 완성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 우리 안에는 이미 하나님이 완전히 받아들이시고 하나님의 뜻으로 능력을 부여받은 자들의 흔적이 있다. 예수는 우리가 성숙해져서 행동과 동기에서 좀 더 하나님을 닮게 되라고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이 본문의 말씀으로 예수는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하려는 것도 아니고, 완벽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제시한다. 그곳은 참되고 무조건적인 사랑이 통치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의 인격으로 시작되며,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예수의 증언에 힘입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 본성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사이의 긴장에 놓여 있다. 완벽하게 되는 것은 이미 억눌린 삶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우리가 세상에서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속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는 것이다. 완전은 일을 바로잡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에 대한 것이며,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모범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본능을 무시하는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 폭력적인 범죄의 생존자가 그녀를 고문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이 옛 압제자들과 함께 그들의 나라를 재건한다; 난민들에게 사심없는 봉사를 하는 세상의 테레사 수녀들; 겸손하게 살면서 운이 덜 좋은 사람들의 복지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무작위로 친절을 베푸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 우리는 사심 없는 사랑과 보살핌의 사례들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찾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그가 제자들을 가르친 것을 우리가 엿듣게 했다. 우리도 하느님의 나라에서 자매와 형제로 살도록 격려 받는다. “완전하라”는 것은 공격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풍요하게, 풍성하게, 완전하게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해주는 약속이다.
 
Barbara J. Essex, Minister for Higher Education and Theological Education, United Church of Christ, Cleveland, Ohio
 
설교적 관점
 
좋은 설교는 좋은 들음에서 즉 청중이 살아가고 있는 지역문화에 주목하고 거기에 응답하는데서 시작한다. 설교자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 교회생활 그리고 넓은 의미로 창조세계에 응답하는 성령을 청중이 속해있는 자리에서 듣는다. 설교자는 먼저 이 ‘들음’(this listening) 후에 강단에 올라가 청중들이 들을 무언가를 전달한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롬 10:17)라고 쓰고 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그것을 반복한다: “너희는 말한 것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설교학적 관점에서 마5:38-48에서 찾을 수 있는 첫 번째 것은 예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데서 설교를 시작하지 않았다는 기본적인 생각이다. 오히려 그는 아주 익숙하고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청중들이 들어왔던 것들로부터 시작한다. 이런 면에서 그는 정확하게 청중들이 있는 그 자리에서 만난다. 그는 청중들을 듣고 그들이 잘 알고있는 관습적인 지혜를 설명하고 그런 다음 “하지만”(but)이라고 강조하며 시작한다.  
 
다른 말로 예수는 널리 당연하게 인정되는 것을 거론하고 그 다음에 그것에 반대하여 말한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서 그리고 산상수훈 전체를 통해서 청중들이 이제껏 들어왔던 교훈을 말하고 그것에 반대하여 자신의 것을 말하는 반어적인 형태로 설교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는 먼저 성서와 주석에서 비롯된 두 가지 관습적인 지혜를[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웃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말한다. 어느 선한 랍비처럼 예수는 뛰어난 주석가이다. 그래서 그는 이 율법을 잘 설명해준다.
 
예수께서 언급하는 이 관습적인 지혜의 첫 번째 요소는 소위 lex-talionis (보복법, law of retaliation)으로 출애굽기 21장, 레위기 24장, 그리고 신명기 19장에 나타나 있다. 이 원리와 분명히 대비되는 것으로 예수는 능동적인 비보복 (actvie nonretaliation)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적대자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것으로 (39절,“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언뜻보기에는 다른 뺨도 돌려대고, 겉옷도 주고 오리를 더 가주어서 그래서 적대자에게 협력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러한 태도는 실제로 심오한 저항 곧 적대자가 만드는 적대적 싸움에 [적대자의]기대와 달리 그것을 거부하는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예를들어 자발적으로 오리를 더 가 줌으로써 첫 오리가[억지로 간] “강요된 것”(forced)으로부터 스스로 “선택한 것”(chosen)으로 재설정된다. 그래서 피상적으로는 순종하는 것처럼 보인 것이 실제로 깊은 면에서 보면 일종의 비적대적 저항 (nonadversarial defiance)이 되는 것이다. 간디(Mohandas Gandhi)는 산상수훈 그 가운데서도 이 본문을 매우 높게 평가했고 인도에서 영국식민지 치하에서 그가 취했던 비폭력 전략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썼다.     
 
한편으로 예수는 보복법 곧 “눈에는 눈”이라는 잔인한 방식에 반대하여 능동적인 비보복법을 주창함으로 비판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보복법을 보다 깊은 수준에서 설명하고 있다: 만일 “눈에는 눈”이 잘못된 행동에 대한 적합한 배상이 똑같은 처벌이나 반전 (“네가 눈을 취하면 너도 눈을 잃을 것이다”)을 의미한다면, 예수는 이 원리를 효율적으로 채택하면서도 적대자에 대한 진정한 반전은 (reversal) 또 다른 형태의 적대행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진정한 반전은 비적대적행동(an act of nonopposition)으로 이것은 적대자(opponent)가 아닌 적대행동(opposition itself) 그 자체를 없애는 것을 지향하는 창조적인 응답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는 표면적으로는 공격자에게 저항하지 않는 제자도를 가르치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실제로는 뺨을 치고 겉옷을 빼앗고 억지로 오리를 가게하는 것과 연관되어있는 적대적이고 모욕적인 패러다임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간디나 마틴 루터 킹등과 연관되어 있는 비폭력저항운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예수의] 이 기본적 저항패러다임에 잇닿아있다. 결국 예수의 교훈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는 보다 깊고 보다 근본적인 저항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악을 행하는 것과 연관된 미움, 잔인함이라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에 협력하지 않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44절에 요약되어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가장 악한 적대자들(적들, enemies)과 적대행위 (박해, persecution)를 마주하면서 예수는 저항을 가르친다. 이 저항은 직접 적들을 대상으로 하는게 아닌데 그 이유는 직접적 저항이 적대적 관계를 통해서 악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보다 심오한 저항은 이런 적들을 만들어내는 악하고 영속적인 순환의 고리를 향하는 직접적인 저항이다. 불로써 불과 싸우지 말라고 예수께서는 말한다; 오히려 물로써 불과 싸우라 그리고 상처를 입히고 지배하려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구조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라. 
 
이것은 간결하고 도전적인 가르침이다. 설교적 상황에서 이것이 안고있는 중요한 위험요소는 이러한 입장이 폭력과 해를 끼치고 있는 상황에서 수동적으로 단순하게 순응하라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교인중에는 그러한 해로(harm) 고통을 당하는 사람도 있고 그 전에 당했던 사람 또 앞으로 곧 해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단순하게 우리의 상처를 받아들이고 우리를 공격한 사람을 받아주라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반대로 이 가르침의 핵심은 해를 끼치는 여하한 것들과 협력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교훈이 악한 체제를 영속시키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이 이 교훈은 악한 사람들이 해를 끼치는 것을 허락하거나 가능하게 만드는 체제를 중단시키는 가능한 일을 할 것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Matthew Myer Boulton, Associate Professor of Ministry Studies, Harvard Divinity School, Massachusetts
 
1)  Hilary of Poitier, On Matthew 4.25, quoted in the Ancient Christian Commentary on Scripture, ed.Manlio Simonetti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2001), 118.
2)  JohnWesley, Explanatory Notes upon the New Testament, 11th ed. (London: Mason, 1831), 1:31.
3)  W. D. Davis and Dale C. Allison Jr. Matthew,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Edinburgh: T.&T. Clark, 1988), 1:540-41.

홍상태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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