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대학원에 입학하고 몇 년 간 ‘영성’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 하는 궁금증에 매달렸던 적이 있다. 그러다 2년이 지나서야 아주 간단하고도 명쾌한 정의를 만난 적이 있는데, “은혜에 대한 감각”이란 말이었다. 그런데 이 말은 그 얼마나 유물론적인가!

먼저 우리는 ‘유물론’이라는 말과 ‘유물론적’이라는 말을 구별함으로써 “이 말은 그 얼마나 유물론적인가!”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을 당신의 마음을 위로해 보도록 하자. ‘유물론’은 하나의 보통명사라면, ‘유물론적’은 형용사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엄청난데, 이 둘이 어떤 대상을 설명하는 보어로 기능할 경우에 그렇다.

예를 들어, “침대는 과학이다.”라는 말과 “침대는 과학적이다.”라는 말을 비교해보자. “침대는 과학이다.”는 범주에 관한 표현이다. 즉, 침대가 과학에 포함되고, 그렇기 때문에 침대가 과학이라는 영역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명사는 무언가를 한정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배타적인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무언가는 포함시키고 무언가는 배제한다. 반면, “침대는 과학적이다.”는 불일치와 일치 사이의 긴장을 표현한다. 이 말에서는 침대가 과학에 굳이 포함되지 않은 채 과학의 어떤 속성을 공유한다. 물론, 침대가 전적으로 과학에 포함되는 경우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말은 침대가 과학에 의해 단지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의 불일치 가능성 속에서 과학과의 일치를 가늠하는 역할을 한다. 침대가 ‘과학적인’ 한, 침대는 과학에 걸쳐 있으면서도 과학을 벗어난다.

마찬가지로, “영성은 유물론이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영성을 유물론으로부터 구출해 낼 방법이 없다. 그러나 안심하시라. 영성은 ‘유물론’이 아니고 ‘유물론적’이다. 영성은 유물론에 걸쳐 있으면서도 유물론을 벗어난다. 하지만 어떤 당신에겐 영성이 유물론을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유물론에 걸쳐 있는 부분도 있다는 말이 여전히 마음에 거슬릴 수도 있겠다. 이런 당신을 위해 이번에는 위로가 아닌 설득을 시도해 보자.

영성이 “은혜에 대한 감각”이라는 정의는 이 설득을 위해 아주 유용하다. ‘은혜’가 포착되는 방식이 ‘감각’이라는 이 말은 영성이 어떤 식으로 유물론에 걸쳐 있는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말이다.

우선 ‘은혜’라는 말을 곱씹어보자. 루터가 감격해 마지않았던 로마서 3장 24절에서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 이 말에 의하면 은혜는, 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은 하나님 쪽에서 인간에게 작용하는 순간, 글쎄, 카이로스라고 할 것을 가리킨다. 신적인 것이 이 세상에서 일을 하는 순간 말이다.

물론 로마서 3장의 후반부를 읽는 또 다른 중요한 키워드에는 ‘행위(ergon)’와 ‘믿음(pistis)’이 있어서, 폼 좀 잡는 목사나 부흥사들은 일상적인 삶을 부정하고 교회 중심의 생활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려고 이 둘을 대립시킨다. 하지만 바울은 행위 일반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법(nomos)을 따르는 행위’(롬 3:28)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법은 단지 규칙이 아니고 언제나 주권 권력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바울의 믿음은 주권 행사와 대립한다.

그렇다고 모든 주권 행사가 나쁘다는 말일까? 그렇지도 않다. 바울이 말하듯 믿음이 법을 온전하게 한다면, 믿음이 법의 근거라면(롬 3:31), 그러한 법을 바탕으로 하는 어떤 주권 행사는 믿음과 대립하지 않을 수 있다. 바로 이 순간, 믿음과 주권 행사의 대립이 와해되는 순간, 은혜가 선물처럼 ‘일어나고,’ 정의가 실현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주권 행사가 믿음을 근거로 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정의로운 주권 행사일까? 바울은 명확하게 말했다. 믿음으로 드러나는 정의는 ‘차별이 없다’고 말이다(롬 3:22). 바울은 법을 통해 주어지는 힘이 가능한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지는 세상을 상상한 것이 아닐까?

광화문에서 국가 권력의 시민적 행사를 주장하는 촛불과, 시청 앞에서 시민의 주권 행사를 부정하며 대통령의 국가 권력을 지지하는 태극기(!) 중 무엇이 정의로운가? 만일 ‘은혜’라는 말을 가지고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도대체 세상을 등지고(그럼으로써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들이 자기들 멋대로 통치해도 상관 말라고 하면서) 교회에만 열중하면 믿음이라는 가르침을 우리가 계속 들어주고 있어야 하는가? 바울 선생에게 물어보라.

이쯤 되고 보니 ‘은혜’는 굉장히 구체적일 뿐만 아니라 단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나타나는,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대충 될 것 같다. ‘은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걸터앉는 순간이다.

그럼 이제 ‘감각’을 따져봄으로써 이 헛소리를 마무리 하도록 하자. 보통 영성가들은 영성과 관련한 감각을 ‘영적 감각’이라고 함으로써 물질적인 한계를 벗어난 감각을 제안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감각적인 세계를 벗어나 도약함으로써 신적인 무엇과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의 은혜론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로 정의가 이 땅에 진입해 들어오는 것이지,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천국론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들이닥치는 것이지, 우리가 그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 땅에서 발견해야 한다. 보물찾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감각’은 이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밝혀준다. 신경학적으로 볼 때 ‘감각’은 신체를 매개로 해서 뇌가 외부의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 최종적인 심급인 뇌는 이 상호작용을 물질과 정신의 상호작용으로 재배치한다. 따라서 ‘감각’은 물질들 간의 관계와 물질과 정신 간의 관계를 교차시킴으로써 그 경계를 넘나든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출발점과 바탕은 우리와 우리 주변의 모든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의 세계다. ‘감각’은 물질을 근거로 하지만, 물질에 안주하지 않고 물질을 넘어선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임하시는 ‘은혜’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을 ‘감각’해야만 한다. 이것이 ‘영성’이라면, 영성은 참으로 유물론적이지 않은가? 어쩌면 영성은 땅 짚고 헤엄치기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미련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신과의 만남을 발견하는 지혜다.

신익상(성공회대학교, 대구와 카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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