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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의 탄압에 저항하는 민족혼(民族魂) (22)<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7.03.02 11:14

장준하의 당선을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건 가면일 것이다. 그건 함석헌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장준하의 당선을 경험하면서 함석헌 역시 아니 기쁠 수가 없었다. 함석헌은 이제껏 세상과 이기는 싸움을 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은 늘 하늘에 두면서도 육신 살림은 늘 바닥에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이 땅에서 뭔가를 이루려면 생각도 이 땅에 있어야 할 것 이니 말이다. 

함석헌은 그런 점에서 표리부동(?)의 사람이었다. 몸 살림을 말할 때는 여기여기, 바닥바닥 하면서도 늘 생각은 하늘에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장준하의 당선이 함석헌에겐 엄청난 짐으로 온다. 

왠지 장준하는 함석헌에게 있어 이 역사에서 박정희의 흔적마저 지워낼 사람이었다. 함석헌에게 있어 일편 장준하의 당선에 기쁨이 있다면 그것이 장준하로 하여금 박정희의 흔적을 지워 낼 첫 걸음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준하의 당선은 함석헌에겐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아픔이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장준하의 길, 특히 그의 죽음을 보면 함석헌의 장준하관(觀)은 거의 예언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랬다. 함석헌은 둘도 없는 한국 현대사 예언자였다!

장준하, 「사상계(思想界)」를 떠나다.

장준하가 사상계를 떠난다. 떠나야 한다. 국회의원 겸직 금지조항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준하를 국회의원 만들기 위해 팔다리를 걷어 부치고 나섰던, 그래서 장준하 국회의원 산파역할을 해냈던 함석헌도, 당사자인 장준하도 국회의원이 되는 경우 사상계사 사장자리를 내 놓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상계의 운영이나 정치, 문화, 사회적 역할의 수행에 문제가 없었다면 장준하는 그곳을 천연히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66년, 장준하가 국회의원이 되는 전해부터 사상계는 박정희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언론탄압에 사상계는 ‘마치 죽이기로 작정된 양 같은’처지였다. 

장준하는 그저 한 사람 야권의 지도자요, 야당에 속한 한 국회의원이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타가 확실히 공인하는 박정희의 천적이었다. 박정희가 “땅에 있는 것을 절대로 용인할 수 없는 한 사람” 그가 장준하였다. 그래서 박정희는 사상계를 살려둘 수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일심으로 사상계를 말려 죽여가던 1966, 7년 사이 「사상계」의 편집부장직을 수행했던 유경환은 후에 당시의 사상계를 일러 ‘식물인간처럼 숨만 쉬는 잡지’였다고 토로한다. 저항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권력의 생리인지라 저항세력의 축(軸)이 되어있는 사상계를 두어둘 수는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멀리 사상계와 관계를 지니고 있는 협업자(協業者)들을 조지기 시작했다. 

인쇄업자, 판매업자, 은행은 물론 사상계에 자금을 빌려주는 금융업자들을 박정희 정권의 안보(?)를 위해 운영하는 비밀아지트로 불러댔다. 불러대는 이유는 아주 간명했다.
인쇄업자에겐 ‘앞으로 사상계인쇄는 안된다’
판매업자에겐 ‘앞으로 사상계는 판매해서는 안된다’
금융업자들에겐 ‘앞으로 사상계에 자금을 빌려줘서는 안된다’
멋모르는 이들은 장준하와의 인간관계를 말하며, ‘왜 인쇄를 못한단 말이냐?’

‘왜 사상계 판매를 못한단 말이냐?’, ‘아니, 돈 장사하는 사람이 돈 빌려주고 이자 받는데 왜 남의 장사를 막는거냐?’며 언성을 높이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 경우 그들은 곧 바로 끌려가 죽살이를 당해야 했다. 이런 유(類)의 불법을 지휘하는 기구가 중앙정보부였고, 그 중에서도 6국 3과 였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지만 ‘아니, 하늘아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며 가슴을 쳐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장준하는 한국사(韓國史)에 거의 유일한 저널리스트(Journalist)였다 해도 장준하와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로 ‘생각하는 백성’들이라면 아니라 할 사람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장준하는 저널리스트로서 생(生)의 명(命)을 받고 세상에 온 사람이었다. 

그가 첫 번째로 만들었던 잡지 「등불」은 일군(日軍)에서의 탈출도상에서 그리고 탈출에 성공, 중경(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까지였고, 두 번째로 발간한 잡지 「제단(祭壇)」은 해방직전, 해방은 상상치도 못한 때 무력으로의 해방을 계획, 특수훈련을 받는 중에서였다. 조국해방을 위한 상륙작전에서의 장렬한 전사를 맹세한 때였다. 

세 번째로 1952년 피난수도 부산에서 발행하게 되는 「思想」, 그리고 역시 피난수도부산에서 네 번째의 잡지 「思想界」가 창간된다. 그야말로 장준하는 저널리스트의 혼(魂)을 받은 사람이었다. 하늘의 중압과 땅의 진동 속에서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 그래서 그는 장차 도래할 시대를 미리 보았고, 그 깨닫고 본 바를 글로 실어 각 세대에 흘려보냈다. 그렇게 살아온 장준하는 그렇게 살아가기를 살(肉) 전체로 했다. 그러나 일제의 치하에서도 해방 후 공산당의 침략전쟁 중에서도 가능했던 장준하의 저널리스트로서의 살림이 박정희 정권에서는 허락되지 않았다. 「思想界」 창간 10주년이 되는 1963년 4월호 (통권 120호)에 실린 장준하의 글 ‘나와 잡지(雜誌)’ - 「思想界」 창간 10주년을 맞으며-는 장준하가 얼마나 빼어난, 타고난 저널리스트 인가를 증언해 준다. 그중 두 번째의 잡지 「제단(祭壇)」의 회고이다. 

유언집(遺言集)을 엮는 기분(氣分)으로 만든 제단(祭壇)

“「제단」은 나의 둘째 번으로 만든 잡지의 제1호로 중경에서 떠나 서안(西安)광복군 제2지대에 있을 때 만든 잡지다. 우리는 그곳에서 장차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앞두고 국내에 미리 잠입하여 사전 조직과 공작의 임무를 띄고 당시 중국전구사령부(中國戰懼司令部)의 웨드마이어장군 휘하에서 미군 특수부대와 함께 훈련을 받고 있었다. 임무가 임무니만큼 우리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오직 조국독립을 위해서 산제물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훈련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한  가지 후세에 흔적 같은 것이라도 남기고 싶은 생각으로 시작된 것이 곧 그 잡지로 제호(題號)도 되도록 실감을 내기 위하여 「제단(祭壇)」이라 하였다. 그러니까 이 「제단」은 먼저 했던 「등불」보다 더 비장한 각오로 시작된 것이었으며, 그 발간조건들도 「등불」보다 좋았다. 즉, 종이도 미군에서 얻어 쓰는 모조지를 썼기 때문에 그 지질이 아주 좋았고 등사도 이번에는 아주전문적인 필경인(筆耕人)이 담당해서 했다. 

편집내용도 물론 전과는 달랐다. 실제로 죽으러간다는 생각으로 그 유언집(遺言集)과 같은 것이니 만큼 그 내용들이 진짜 피로써 쓴 듯 실감이 있었다. 정말 우리는 유언으로써 하듯 그 「제단」을 통하여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모든 선배들의 단결과 행동 통일을 호소하였다. 초판에 3백부를 찍어 이번에는 그 배포 처도 전의 「등불」보다 더 확대하여 멀리 미주에 있는 우리 독립운동의 제(諸)기관에까지 보냈다. 물론 각층으로부터의 찬사가 자자했고 김구, 김규식 두 선생께서는 친히 격려사까지 보내주셔서 그것을 「제단」2호에 게재했다. 그러나 「제단」은 겨우 2호의 단명으로 그만두게 되었으니 그해 8월 15일 일본의 투항으로 우리의 임무가 끝났으므로 였다.“

장준하는 실로 저널(Journal)을 위해 이 땅에 온 저널리스트(Journalist)였다. 그런데 장준하가 그 고귀한 저널을 떠난 것이다. 장준하가 국회의원이 되고, 그 일을 위해 한국사(韓國史)속의 정신 함석헌이 어떻게 뛰었다 해도 장준하가 「사상계」를 떠난 것은 그저 비극이었다. 거기 있어야 할 사람이, 거기 있지 않고는 안 될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났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장준하로 하여금 그 성지(聖地)를 떠나게 한 것, 떠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 곧 박정희와 그 악의 세력들이었음을 말이다. 그래서 박정희는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역사의 주체는 민, 민중이고 민중은 ‘말’을 먹으며 자란다. 그래서 민의 역사, 민중의 역사에 제1요소가 언론의 자유라는 것이다. 장준하는 조선(朝鮮)전사(全史)에 유일한 인물이었다. 민중의 가슴 속에 흐르는 말들을 하늘이 시샘하리만큼 엮어 내고, 세계적인 학술들, 논리들을 끌어들이는 데까지 주위의 학인(學人)들로 혀를 내두르게 했다는데서 말이다. 그래서 그를 통해 높고 깊어진 민중의 시각, 청각, 생각들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역사에의 헌신이었다. 그런데 이 「사상계」가 쓰러진 것이다. 박정희가 휘두른 5.16의 칼부림에 의해서였다. 

아, 「사상계」의 죽음! 그것은 실로 한국사(韓國史)의 대변고(大變故)였다. 박정희가 살아 잇는 한 장준하의 「사상계」는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 이제, 장준하의 정계진출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장준하의 지인들은 들려준다. “왜 장준하가 정치를 하겠다는 거냐?” 장준하의 정계진출을 비난하고 성토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더 깊은 지인들은 장준하의 정계진출을 이해하는 편이었다. 

“야, 장준하가지고 너무 가타부타마라. 장준하, 역사의 병 앓는 이 아니냐?”
함석헌의 말이었다. 
“..........장준하, 역사의 병 앓는 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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