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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고한 삶에서의 구원 (로마서 7:21~25)2017년 3월 5일 사순절첫째·탈핵주일설교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 | 승인 2017.03.06 14:15

*영상 설교 : https://www.youtube.com/watch?v=0TtCGeyuGK0

주간 단상 : 창립44주년기념주일 

나흘 동안 이어진 창립 기념행사를 주님 은혜 가운데 잘 마쳤다. 기념주일예배-한반도 평화기도회-나라위한 에스더기도회-시국강연회와 시가행진 등을 연속해서 진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준비위원회를 비롯해서 모든 교인들이 마음을 합하여 뜻 깊은 기념행사가 되었다. 앞으로 50주년을 내다보면서 주민교회는 어떻게 지나온 역사를 정리하고 미래를 구상할 것인지 지혜를 모으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 성 바울의 고뇌 

1) 간단치 않은 기독교 신앙

기독교 복음은 한 마디로 ‘예수 믿고 구원받자!’는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것이다. 실제로 복잡하고 혼란한 사회일수록  이런 단순한 선언이 큰 효과를 본다. 그래서 방대한 성경 내용과 기독교 이론 체계를 최소화하고 단순화하여 쉽게 전달하는 것이 선교에서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구원한다는 기독교 복음이 그리 간단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방대한 내용과 체계를 필요로 한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학만 2천년 동안 이어와도 끊임없이 새로운 연구와 이론들이 등장한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 삶의 모습을 설명하는 데도 완벽할 수 없는데,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펼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결코 단순하지도 않고 쉽지도 않은 일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처음으로 설명하고 이론을 정립시키고 동시에 교인들을 돌봐야 했던 사도 바울은 늘 고민이 많았다. 

2) 렘브란트, 사도 바울, 1657년 경

사도 바울이 깊은 묵상에 잠겨 있다. 일부러 명상을 하는 것은 아니고 어느 교회인가에 보내는 편지를 쓰다가 멈추고 고민하고 있다.왼손으로는 이마를 감싸고 있어서 지금 생각하고 있는 문제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왼손으로는 이마를 감싸고 있어서 지금 생각하고 있는 문제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 손으로 펜을 쥐고 있는 모습도 이렇게 멈춘 시간이 짧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잠깐 멈춘 것이라면 펜을 저렇게 잡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고민의 중심에는 어떤 주제가 있었던 것일까!

렘브란트가 바울을 그린 여러 작품들 중에서 가장 건장하고 멋지고 강인한 바울 같다. 바울의 손은 크고 거칠다. 하얗고 고운 손이 아니다. 바울은 평생 천막을 만드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스스로 노동하며 복음을 전한 바울은 이후 모든 유급 성직자들에게는 하나의 걸림돌이다. 

이렇게 힘들게 편지를 써 내려간 책상 모서리에 화가는 서명을 했다. Rembrandt - 본인의 그림도 이런 고뇌를 겪은 결과물이라는 뜻일까?

3) 바울의 고뇌 : 믿음에도 발생하는 고민

 

오늘 본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로마 교회 안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목회적 교훈을 기록한 편지다. 오늘 본문에 드러난 바울의 고민은 자기 자신의 이중성에 대한 것이었다.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늘 이상적이고 완전한 삶을 말하고 가르친다. 성직자, 교수, 교사, 지식인, 언론인 등은 콤플렉스가 있다. 나도 잘 못 지키면서 남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나? 하는 물음이다. 이상과 현실의 간격은 너무나 커서 어떤 경우는 스스로 좌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실천하는 것만 가르친다면 그 내용이 얼마나 협소해질 것인가? 이런 고민이 가르치는 사람의 운명이다.

때로 사람들은 여기에다가 비수를 꽂기도 한다, 가르치고 말하는 것과 실제 삶은 너무 다른 인중인격자! 그러면 진짜 맥이 탁 풀리고 자신이 없어진다.

바울의 고민이 바로 이런 것 아니었나 싶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반대로 돌렸다, 예수를 핍박하던 자에서 예수를 증언하는 자로의 전환이다. 구원의 감격과 새로운 희망이 샘솟듯 솟아난다. 이 열정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서 가는 곳마다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다. 기쁘고 보람도 있고 결실도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자신이 말하는 것과 실제 자기 삶을 들여다보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싶은데 번번이 하나님과 반대의 삶을 살기도 한다. 왜 그런가 가만히 보니까 내 마음속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가 하나님 뜻을 실행하려는 나를 붙잡아가서 못하게 하더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 바울도 있고, 악을 즐기고 악마와 손잡는 바울도 있더라. 이거 어떡하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게 참 힘든 일이구나.’라는 탄식이다. 

2. 우리들의 탄식 

1) 우리의 이중성 

2천 년 전 우리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살았던 바울의 탄식이 21세기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이러한 바울의 고뇌가 이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보편적인 갈등이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를 믿는 순간, 이전의 모든 구습과 악행과 불신은 모조리 사라지고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세계가 한 번에 지속적으로 펼쳐져야 하는데, 실제 신앙생활이 꼭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더라는 점이다. 이 고뇌의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와 같은 운명이다. 

2) 사순절의 의미

기독교 복음을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 중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고난 주간과 부활주일이 기독교 달력으로는 가장 중심이다. 기독교 전통은 이처럼 중요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온전히 체험하기 위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준비해왔다. 

그것이 사순절이다. 사순절은 부활절 이전 40일 동안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그 의미를 깊이 내재하면서 우리 자신의 죄악을 참회하고 고난에 동참하면서 부활을 준비하는 절기다. 올해 사순절은 3월 1일부터 시작하고 부활주일인 4월 16일 전날에 마친다. 올해 교회력으로 사순절은 우리교회 생일과 3.1운동 기념일에 시작하고 부활주일은 세월호 3주기가 되는 4월 16일이다. 이 시기 우리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될 대통령 탄핵 헌재 결정과 지난 3년 동안 우리 사회의 가슴앓이였던 세월호 3주기가 겹쳐 있어서 더욱 진중하게 사순절을 맞이해야 한다. 

3) 탐욕이라는 악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 그리고 기독교인들도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중성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 마음은 원하지만 실제 삶은 따라가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오늘 로마서의 바울처럼 ‘나는 참 곤고한 사람’이라고 울부짖는다. 생각은 반듯하게 살자고 여러 번 다짐하지만 구체적인 삶 속에서 번번이 그 다짐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버려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도대체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 스스로 의아해 한다.

특히 오늘 우리들의 시대를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은 바로 탐욕의 유혹이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내다 판다. 혈연, 친구, 신의, 신념… 이런 소중한 가치들은 이들에게는 하찮은 구호에 불과하다. 80년대 수많은 대학생들과 지성인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인물들이 지금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 잘 해독이 안 된다. 당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들의 외침을 듣고 가슴이 뛰었고 학업을 팽개치고 노동현장으로 들어갔으며,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이 지금은 오히려 그 때 그토록 혐오하던 내용들을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주장하는 것을 보면 정말 어이가 없고 혼란스럽다. 그렇게 변한 이유를 모르겠지만 결국은 자신의 욕심을 관철시키기 위한 변절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3. 핵 세상에서 탈핵을 외치다!

1) 핵발전소 : 인간 탐욕의 집대성 

만 6년 전인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 지방 앞바다에서 대지진과 해일이 발생하여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침수되어 전원과 냉각 시스템이 파손되면서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방사선 누출로 이 지방은 한 순간에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지진이나 해일로 파손된 곳은 수리하고 복구할 수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방사능 누출 사고는 그보다 훨씬 더 참혹하다. 

NCCK에 근무할 때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지역에 한국교회의 헌금을 모아 여러 번 방문했었다. 사람들은 태어나고 자라난 고향을 한 순간에 떠나야 했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아이를 둔 젊은 부모는 아무 기댈 곳 없다 해도 어떡하든 다른 지역으로 가서 살았다. 아무리 막막해도 방사능 오염 지역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오는 부모는 거의 없었다.

후쿠시마 인근에 일본 정부가 지어 준 임시 가설주택 (2011.9)

그런데 연세 많은 노인들은 이제 살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그러느냐고 피폭 위험성을 무릅쓰고 후쿠시마 근처로 돌아왔다. 일본 정부는 이들에게 임시 가설주택을 지어주었다. 원룸 형식의 임시 주택에서 이 노인들은 외로움과 절망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한국교회는 헌금과 함께 복음 성가와 기도로 이들을 위로해 주었다. 

임시 수용소에 기거하는 피난민들을 위로하는 한국 복음성가 가수들 (2012.9)
임시 수용소에 기거하는 피난민들을 위로하는 한국 복음성가 가수들 (2012.9)

가슴 아픈 현실은 후쿠시마 출신들은 고향을 떠나 동경이나 대도시로 나가 살면서도 자기가 후쿠시마 출신이라는 것을 밝힐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피해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후쿠시마에서 왔다고 하면 결혼, 취업, 친구 관계가 단절된단다. 그렇다고 단절하는 이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나라면 사랑과 우정이 소중하니 방사능에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냥 결혼하고 친구 관계를 유지해도 좋다고 할 수 있을까? 

2) 핵발전소는 정말 위험한 것이다. 그럼에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세계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독일은 이 사고를 계기로 원전을 단계적으로 폐기하고 신재생 에너지 정책으로 지혜롭게 전환하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은 끄떡없이 원전 확대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2016년 핵발전소 가동 국가들의 흥미로운 사실들
1. 전 세계 193국 중 30 국가(15.5%)가 핵발전소 가동 중
2. 한국은 23기(시간당 20,717 MW 생산) 가동,  총 전력의 30.4%를 핵 발전에 의존
3. 미국은 100기 가동(시간당 99,244 MW 생산), 총 전력의 19.5% 핵 발전에 의존
4. 프랑스는 58기 가동(시간당 63,130 MW 생산), 총 전력의 76.9% 핵 발전에 의존
5. 세계 인구의 60.3%가 핵 발전국가에 살고 있고, 이 국가들은 지구 땅의 45.5% 차지
6. 세계 총 전력의 10.9%를 핵발전소에서 생산

왜 이러는 것일까? 한 마디로 권력자와 원전 사업가들이 원전 확대를 통해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은 이들의 거짓 해명을 그대로 수용한다. 어리석기 때문이다. 나와 내 자식들의 목숨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악마 같은 독임에도 별로 관심하지 않는다. 이 귀차니즘이 이 시대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3) 한국교회의 대응

한국교회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탈핵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이 시대의 생존을 위해 교회가 반드시 책임져야 할 과제라고 선언하고 이를 위해 기도하며 3월 11일 직전 주일을 탈핵주일로 정했다. 우리는 정말 핵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기도하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교회도 탈핵 교회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교회 탈핵기도회 (2017.2.28.) 경주 월성1호기 원전 앞

아담으로부터 유혹은 죽음처럼 강하다. 내 마음은 하나님 말씀 따라 살고 싶지만 실제로 나의 삶은 탐욕을 따라 죄의 삶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개인적인 문제일 때는 그 결과도 개인에게 영향을 주지만, 핵발전소는 개인이 아니라 세계 전체의 운명과 연결된 거대담론이다. 이제 더 이상 핵발전소 문제에 대해서만은 ‘아 나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자꾸만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탄식은 그만 두어야 한다. 아주 명확하게 핵발전소와 절연하는 길만이 우리 시대와 후손들을 살리는 길이다. 

생명을 택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굳게 믿고, 이럴까 저럴까 고민하고 마음은 원하는데 몸은 유혹에 따라가는 현실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주님이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탈핵을 위한 결단에 이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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