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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행동] 노예경제에서 평등경제로<기독교 대선행동 사순절 셋째주일 설교>
박득훈(기독교대선행동상임공동대표, 새맘교회) | 승인 2017.03.13 12:40
2017정의평화기독교대선행동은 민주적 정권교체 운동, 성서적 민주 시민교육, 공정선거 감시운동을 함께하는 기독인의 대선광장으로 단체의 4대의제인 민주회복, 경제평등, 평화통일, 생태환경과 사순절의 의미, 대선에서의 기독인의 역할등을 담은 사순절 공동설교를 집필하여 2월 27일부터 4월 3일까지 매주 월요일 6주간 연재합니다. 첫번째 사순 셋째 주일은 박득훈 목사의 설교문 <노예경제에서 평등경제로 > (출애굽기 16:13-31)입니다. 

 

지난 11일(토), 마지막 촛불집회에서 폭죽을 터뜨리고 있는 시민들 ⓒ에큐메니안

촛불시민이 추위 속에서 눈·비 그리고 칼바람을 맞아가며 지난겨울 내내 주말을 반납하고 광장에 나와 한 목소리로 외친 것은 국민주권의 회복이었다. 마침내 헌법재판소는 박근혜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우리는 촛불시민의 평화적 혁명을 통해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에 의해 짓밟혔던 민주주의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걸 목도하고 있다. 자랑스럽고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점에서 냉정하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3·1운동과 4·19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은 87년 6월 항쟁을 통해 쟁취된 민주주의가 왜 이렇게 취약했던가? 

가장 결정적인 건 정치영역에서 먼저 시작된 민주주의가 경제영역으로까지 확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영역에선 평등이 어느 정도 실현되었지만, 경제영역에선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되어 왔다. 1997년 외환위기로 말미암은 IMF관리체제의 수용, 2011년 한미FTA 국회인준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사회는 세상에서 가장 냉혹하고 억압적인 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부(富)가 특정의 소수 집단에 집중되어 중산층이 무너지고 대다수 국민이 항시적 경제적 위기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선 헌법과 법률이 아무리 민주주의를 보장한다한들 무용지물이 되기 마련이다. 거대한 부의 소유자 그룹이 정치, 언론, 학계, 법조계 심지어는 대중문화까지 실질적으로 지배함으로써 다수의 국민을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는 바로 그 일각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국민주권이 실현되는 민주주의를 확립해나가려면 경제영역의 민주화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을이 갑에게 굴종을 강요당하는 노예경제에서 경제주체간의 평등이 보장되는 평등경제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선 평등경제를 주장하기가 무척 어렵다. 교회 안에선 더욱 그렇다. 평등의 이름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비판하는 순간 용공, 빨갱이, 종북, 좌빨로 몰린다. 반국가, 반기독교, 반교회적 존재라는 낙인을 얻기 십상이다. 자본주의와 기독교는 자유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평등을 추구하며, 자유와 평등은 양립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분법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해방직후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이 남긴 치명적인 트라우마가 합리적 사고와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리스도인은 뒷걸음질을 치기보단 온유와 겸손으로 이런 상황을 돌파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바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걸어가신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평등경제를 훈련시키신다.

성경에는 평등경제를 명령하는 본문이 수없이 많다. 오늘은 그 중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의 노예경제에서 해방시킨 후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시는 광야여정에서 그들에게 각인시켜주신 평등경제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해방된 지 얼마 안 되어 신 광야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다. 먹거리가 똑 떨어진 것이다. 경제적 곤경에 빠진 이스라엘 온 회중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항의했다. 비록 노예경제였지만 이집트 땅에선 먹거리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으니, 차라리 그리로 돌아가 배불리 먹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불평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거리를 기적적으로 공급해주시면서 평등경제를 훈련시키신다. 

저녁엔 메추라기 고기를 먹거리로 주시고, 다음 날 아침에는 만나라고 불리게 된 빵을 공급해 주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선 만나 분배방식을 상세하게 제시하신다. 첫째, 각 사람은 자기 식구 수대로 한 명당 한 오멜씩 즉 대략 2.2리터씩 거둬야 한다. 둘째, 먹다 남은 것을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두어선 안 된다. 셋째, 엿샛날에는 다음 날인 안식일 양식까지 고려해서 각자가 먹거리를 두 배, 곧 한 사람이 두 오멜씩 거두어야 한다. 안식일엔 양식을 얻기 위하여 들로 나가선 안 된다. 모두 평등경제를 성취하기 위한 원칙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원칙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 중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식구 몫보다 많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식구 몫보다 적게 취했다. 그 결과는 불평등이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그날 취한 것 중 남은 것을 다음 날 아침 까지 남겨 놓았다. 그러면 다음날의 불평등은 그 만큼 커진다. 또한 어떤 사람은 안식일에도 만나를 취하러 들로 나갔다. 이 역시 불평등을 강화하는 행동이었다. 이처럼 인간은 가만 놔두면 이런 저런 이유로 평등경제보다는 불평등 경제로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단단히 훈련시키신다. 첫째의 경우, 자기 식구 몫보다 더 많이 거둬드린 사람들에게선 그 초과분을 제거하시고, 자기 식구 몫보다 더 적게 거둬드린 경우엔 부족분을 채워주신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꼭 한 오멜씩만 돌아가게 하셨다. 둘째의 경우, 다음 날 까지 남겨 둔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풍겨서 도저히 먹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셨다. 셋째의 경우, 안식일 날 만나를 취하러 들에 나간 사람들을 허탕 치게 만드셨다. 들판에 만나를 내려주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축적과 불평등을 향한 노력을 철저히 무력화시키셨다.

하나님은 이런 훈련을 무려 광야생활 40년 동안 내내 시키셨다. 평등경제를 향한 하나님의 절절한 마음을 읽어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평등경제의 정신을 만나 분배 뿐 아니라 다양한 경제생활의 영역으로까지 최대한 확대하는 율법을 제정해주셨다. 예컨대 희년규정은 50년 마다 만민의 토지 평등권과 평등한 주거권을 회복시켜주셨다(레25:10, 29-31). 금융관련 율법은 빈민 무이자 대부와(레 25:36) 7년 단위의 부채탕감을 명령하셨다(신15:1-4, 8). 노동관련 율법은 노동학대나(레25:39) 임금체벌을 금지함으로써(신24:14-15; 레19:13) 노동자의 인간평등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주셨다. 

그런가하면 7년(출21:1-6; 신15:12-18) 혹은 50년(레25:44-46) 단위로 노예노동자들을 해방시켜 자유를 획득하게 하셨다. 단순히 몸만 자유롭게 한 것이 아니라, 7년 단위의 경우엔 충분한 재정을 지원해주고 50년 단위의 경우 원래 소유의 땅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독립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실질적 자유까지 누리도록 하셨다. 토지의 평등한 사용권 즉, 경제적 평등 없이는 진정한 자유가 불가능하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그 반대로 생각하는 이유는 자유를 성경이 명령하는 포괄적 의미로 생각하지 않고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제한적 의미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경제적 평등을 확보하기 위해 부자의 소유를 제한하는 것은 부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차이는 희년의 하나님은 가난 때문에 토지사용권을 잃고 노예로 전락한 사람의 입장에서, 자본주의 옹호자는 부자의 입장에서 자유와 평등을 이해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입장을 열렬히 환영하고 지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등경제는 식·의·주에 해당하는 기본적 필요를 평등하게 충족시켜주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사회적 계층 간 불평등, 소유와 부의 집중현상을 최대한 해소하는데 까지 나아간다. 왕이라도 부를 사적으로 축적해선 안 된다(신17:17). 부자들은 특별히 다른 사람들보다 탐욕적이어서가 아니라, 구제에 인색해서가 아니라, 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자체 때문에 악인과 동일시된다(사53: 9). 빈부양극화 현상 자체가 불의이기 때문에 그 현상을 유지·강화하는 체제를 직간접으로 옹호하면서 부를 누리고 있으면 악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등경제란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자유롭게 펼쳐가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자원을 충분히 그리고 그 만큼만 누릴 수 있는 경제다(사65:21-22). 그런 경제를 위해 거대한 생산수단이 필요하다면 그건 개인이 소유해 이득을 취하면 안 되고 사회적으로 공유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계층 간의 불평등은 아무리 증대해도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옹호하는 사회의 모습일 뿐이다.  

물론 인간과 시대의 한계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서 조차 평등경제가 완벽하게 구현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와 주체적 선택을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하시기 때문이다. 저명한 영국의 구약학자 존 골딩게이가 잘 간파했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한계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신 후 최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 즉, 평등경제에 최대한 근접할 수 있도록 그들과 씨름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평등경제를 지향한다.

예수님도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셨다(막1:15). 누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한대로(사 61:2) ‘주님의 은혜의 해’ 즉 희년을 선포하셨다(눅4:19). 이를 종합하면 하나님 나라는 희년이 상징하는 평등경제를 지향하는 나라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기까지 온 몸으로 희년을 밀어붙이셔서, 인류가 평등경제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주셨다.  이 예수를 만나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들이 형성한 최초의 교회 즉, 에클레시아(민회)는 대안적 정치경제공동체로서 평등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즐겁게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사적 재산권을 신성한 절대법으로 간주하는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소유를 공동체적으로 통용하다보니 자연스레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행 4:32-35). 경제평등의 실현이다.

물론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경제적 존재양식 자체를 절대화할 수는 없다. 교회의 형편 그리고 교회가 처한 시대적 환경에 따라 다른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참된 교회라면 어느 시대나 하나님 나라의 뜻을 받들어 평등경제를 최대한 지향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도 바울 역시 그러했다. 그는 가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고린도교회에 호소하면서 그건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평등을 만나의 평등한 분배와 동일시한다(고후8:14-15). 

실로 평등경제는 하나님나라의 규범적 원리다. 그러기에 앞서 이미 밝힌 것처럼 경제적 평등은 단순히 만나, 즉 먹거리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되고 경제생활의 모든 면으로 최대한 확대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오늘의 한국자본주의에 대한 치열한 저항을 뜻한다. 한국자본주의는 미국자본주의와 함께 지구상 어떤 자본주의보다도 경제적 불평등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불평등은 세대 간 대물림된다. 오죽하면 금수저·흙수저론이 등장했겠는가? 한번 경쟁에서 밀리면 다시 살아남기 어렵다. 물론 가난한 사람도 형식적으론 자유를 누린다. 누구에게도 강제적으로 노예취급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 몸뚱이 외에는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을들은 갑에게 노예처럼 굴종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는 셈이다. 내용상 노예경제와 별다를 바가 없다. 평등경제를 지향하는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은 이러한 실질적 노예경제에 맞서 대항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마5:13-14). 노예경제를 평등경제로 바꿔나가는데 필요한 다양한 정책들을 제시하여 여론을 조성하고 정치권을 압박하여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맺음말

브라질의 까마라 대주교에 대한 일화는 그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복지사업에 열중할 때, 지배층은 그의 기부운동에 적당히 응해주었다. 하지만 그가 복지사업으론 가난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음을 발견하고, 가난을 고착화시키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자 지배층인사들의 태도는 돌변했다. 그를 국가전복을 획책하는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이에 까마라 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게 하자 사람들은 나를 성인으로 불렀다. 그런데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따져 물으니 사람들은 나를 사회주의자라고 부른다. 

한국교계의 상황도 별다를 바 없다. 하지만 움츠려 들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주님은 우리가 구제 수준에 머물지 않고 평등경제를 실현해나가기 위해 세상의 구조적 변화까지 추구하길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경제에서 해방시키신 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를 공급하시면서 평등경제를 훈련시키셨다. 다양한 법을 주셔서 평등경제를 사회체제로 만들어가도록 명하셨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은 예수님과 바울 역시, 비록 로마제국시대란 역사적 한계를 완벽하게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평등경제를 온 몸으로 밀어붙이셨다. 그 결과 지배동맹권력에 의해 심한 박해와 고통을 당하였다. 

새 하늘 새 땅으로 초대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사람들이다(계14:4). 그러니 우리 모두 놀라운 희망을 가슴에 품고 노예경제를 평등경제로 바꿔나가는 길을, 힘차게 걸어갈 수 있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아울러 곧 다가올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우리 국민이 평등경제의 기준을 잘 활용해 바른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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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하나님, 
이 땅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불평등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론 자유인이지만 실질적으론 노예나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땅의 지배동맹세력은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아니 온갖 거짓선전으로 자신들이야말로 그들의 희망이라고 우기며 겁박합니다. 
이에 많은 이들이 속기도 하고 두려움과 사기저하로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일어서게 해 주십시오. 
히브리 노예를 이집트의 노예경제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하소서.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평등경제를 훈련시키신 하나님의 뜻을 가슴 깊이 새기게 하소서.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우리도 이 땅에 평등경제를 실현하는 길을 걸어가게 하소서.
촛불시민혁명이 평등경제가 이 땅에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될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다가올 대통령선거에서 진실로 평등경제를 추구하는 이가 지도자로 선택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박득훈(기독교대선행동상임공동대표, 새맘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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