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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Day] 2017년 3월 12일 사순절 둘째주일 요한복음 3:1-17<말씀의 잔치>
홍상태 목사 | 승인 2017.03.13 13:52

신학적 관점
 
오늘의 본문은 신학적으로 깊이가 있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신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주제 중에서 다음 두 가지가 두드러진다: (1) 이야기의 배경, (2) 제자도와 거듭남의 의미.

본문의 이야기는 긴 배경 설명 없이 갑자기 시작된다. 독자들은 본문의 장소에 대해 알지 못한다. 시간에 대해서는 예수가 유월절 기간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라는 정도만 안다.(2:23) 요한은 니고데모를 자세하게 소개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가 바리새파 사람이고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산헤드린 회원이었다는 것을 알 정도이다. 요한복음 전체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니고데모가 7장과 19장에도 등장한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7:50에서 바리새인들이 니고데모에게 예수에 관해 묻는 장면이 나온다. 19:38-42에서는 니고데모가 아리마대인 요셉과 함께 예수의 시신을 찾아 향유를 바르고 무덤에 모시는 장면이 나온다. 3장과 19장 두 곳 모두에서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를 찾는 야행성 취향인 것으로 묘사된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여러 이미지 중에서 빛과 어둠의 이미지는 매우 중요하다. 니고데모는 밤의 어둠에서 나와 빛을 찾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고 믿고 있었던 선생님을 찾아왔다.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그는 갑자기 원래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지기 전에 예수는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은 니고데모의 말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였다.(3:9) 예수의 마지막 말은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였다.(21) 니고데모가 어둠에서 (19:38-42에서 보듯이) 빛으로 완전히 돌아오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께 온 인물이다. 그는 예수의 삶의 주변과 그늘에 머물렀다. 그는 예수를 가까이서 열심히 따르지도 않았지만, 멀리서 무관심하게 바라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니고데모가 대낮에 공개적으로 예수를 따라간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유대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고, 그들에게 예수는 귀찮은 존재이거나 정치적으로 처리하기 힘들고 위협이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신중해야 했고, 조심해야 했었다. 니고데모는 예수의 제자라 하지만 <조심해야 하는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선구자가 되었다.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요한은 니골라당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계2:6,15) 이들은 반기독교적 환경에서 자신들의 종교가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 기꺼이 이방 신과 로마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던 자들이다. 16세기에 칼뱅은 종교개혁에 동조하면서 공개적으로는 자신의 소신을 밝히지 못하는 사람들을 니골라주의자라고 비판했다. 독일의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의 대세 속에서 니골라당의 후예인 독일 기독교인들은 복음을 나치 이데올로기의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와 섞어 버렸다. 독일 고백교회는 1934년 바르멘 신학 선언 제2조에서 다음과 같이 그런 태도를 비판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의 용서에 관한 하나님의 확증인 것처럼, 예수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신다는 것을 똑같은 효력과 심각성을 갖고 확증하신다.”
 
니고데모는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고는 그런 표징(2:23;3:2)을 행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예수는 그가 묻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위로부터 난 자들은 – 성경의 능력으로 세례의 물로 거듭난 사람들은 - 예수가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사실 뿐 아니라 예수가 행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현존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니고데모는 “위로부터 난다”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역자주:한글 성경은 “새로 난다,” “거듭 다시 난다” 등으로 번역하였음.) 예수는 그에게 위로부터 나는 것은 영으로 나는 것이고, 영으로 나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고,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하였다.

위로부터 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오늘 성서정과 본문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18-21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위로부터 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고 예수를 믿어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가는 것이다.(3:19) 빛 가운데 혹은 어둠 가운데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어둠 속에서 살며 빛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악한 행동이 드러날까 두려워 그렇게 한다.(20절) 빛으로 가는 것, 즉 위로부터 나는 것은, 진리를 행하는 것이고(21),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분을 따르는 것이다.(14:6)

요한복음 3:16은 기독교의 핵심을 담은 말씀으로 사랑받고 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마음의 문제로만 여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위로부터 나서 예수를 믿는 것은 마음의 문제만은 아니고, 삶의 핵심, 삶 전체와 관련된 문제이다.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21절)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다. 니고데모는 그의 이야기 결론 부분 전에는 어둠과 그늘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마침내 이야기의 결말에서 또 다른 숨은 제자였던 아리마대인 요셉과 함께 공개적으로 나와서 예수를 장사지냈다.

George W. Stroup, J. B. Green Professor of Theology,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Decatur, Georgia
 

주석적 관점
 
오늘 본문은 성서정과 A해 사순절에 요한복음이 네 번째 연속으로 나오는데 첫 번째 것이다. 요한복음에 유일한 기사로 이 복음서의 핵심 주제를 잘 보여준다. 본문 주석의 첫 번째 이슈는 21절까지 연장해서 읽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재고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22절 “그 뒤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지방으로 가셔서”가 이야기의 뚜렷한 전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7절 이후도 연속적인 글이라면, 본문을 의도적 결론이 있는 데 까지 연장해야만 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되풀이되는 구조적 패턴은 표적, 대화, 담론이다. 예수는 표적을 행하고 난 뒤, 거기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다음에 표적을 해석하는 담론이 있다. 니고데모를 위한 표적을 행하지는 않았지만, 2절에서 니고데모가 표적을 말하면서 10-21절의 예수와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18-21절을 본문에 첨가해야 할 셋째 이유는 신학적인 것이다. 19-21절에서 예수는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인 빛과 어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빛은 신앙의 영역을 의미하고, 어둠은 불신앙의 영역을 뜻한다. 19절에서 예수가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 한다”고 말했을 때 이 말은  3장의 시작을 환기 한다: 니고데모는 예수를 밤(어둠)에 찾아 왔다. 니고데모에게 있어서 심판의 순간은 ‘지금-여기’에서의 예수와의 만남이다.
 
3:18-21절의 예수의 말씀은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만남이 기껏해야 모호할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마지막 한 말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3:9)였고, 예수와의 대화는 별 진척이 없었다. 비록 (요한복음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듯) 예수가 그에게 한 말은 의도적으로 중첩적이긴 했지만, 니고데모는 예수의 말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했다. “위로부터”(from above)라는 말은 “다시”, “새롭게”, “위로부터” 등 세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오로지 첫 번째로만 해석했다. 4장에서 우물가의 사마리아여인은 다음 단계의 이해로 갈 수 있었는데, 니고데모는 예수의 제안이나 더 중요한 그가 누구인지를 인식할 수 없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와의 만남은 구원의 순간이다.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예수 편에서는 단순히 설명이나 대화가 아니다. 말씀으로서 육신이 되신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을 알려 주신 것이다(1:18). 문제는 니고데모 자신이 고백했듯이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이라는(3:2) 예수에 대한 진리를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니고데모와 함께 가기 위해 그의 몰이해에 대해 예수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3:5) 개념을 도입하여 대답 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언급을 세례의 관점에서 해석하지만, 복음서 전체로 보면 다른 해석의 가능성도 찾아볼 수 있다. 4장에서 예수는 자신을 “생수의 원천”으로 제시하면서, 둘 모두를 자신이 제공하는(7:37-39) 물과 성령을 다시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기에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한 말을 예수가 주시는 물과 이 복음서의 고유한 성령의 이해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가 부활 이후에 자신을 계시하며 제자들에게 선물로 주신 성령은(20:22), 보혜사(Paraclete, 보호자, 위로자, 돕는 이)로서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신 뒤에 예수의 사역과 현존을 행하는 자이다. 그것은 예수가 말한 물과 성령으로부터 나온 사역이여야 한다.

니고데모의 못 믿겠다는 듯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3:9)라는 대답 이후에 그는 사라진 듯이 보이고, 독자들만이 남는다. 갑자기 예수의 말씀은 독자들을 향하고 있다. 11절에서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고 2인칭 단수를 사용하다가,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2인칭 복수로 바뀐다. 이로써 독자들도 니고데모와 마찬가지로 예수와 만나는 자리에 위치한다. 이 복음서는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신앙을(20:31-32) 지키고 유지하게 하려고 한다. “인자가 들려야한다”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는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 때문에 영생이 가능하지만, 성육신은 영생이 지금 예수와 같이 사는 것도 포함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니고데모는 이후 요한복음에 두 차례 더 나온다. 7:50-52에서 니고데모는 예수와 종교지도자들과의 치열한 갈등 가운데 예수를 변호하며 나타나는데, 그가 바리새파사람들에게 던진 질문을 보면 예수에 대한 미온적인 변호를 한다는 인상을 준다. 마지막으로 예수를 장사지낸 비밀제자인 아리마대 요셉을 돕는 장면에서 나타난다(19:38-42). 거기에서도 니고데모가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다고 상기시키고 있다(19:39).

한데 그는 예수의 시신을 위해 엄청난 향료(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근쯤 -약34kg) 어마어마하게 갖고 왔다. 이 니고데모의 마지막 출현이 마침내 그가 낮에 찾아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밤에 찾아와 예수의 시신을 향료와 함께 무덤에 누인 것일 뿐인가? 그의 복합적 성격과 모호한 위상을 고려해 볼 때, 본문의 해석은 이러한 복합성을 보여줄 뿐이지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니고데모는 그의 구원을 요구하거나 요청하지 않았다. 그의 예수와의 만남과 이야기 속의 그의 계속적인 역할은 믿음의 모호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명사형이 아니다. 믿는 것은 동사형이고(3:15-16), 인간의 모든 모호성, 불확실성, 그리고 비결정성의 영향을 받는다. 성육신한 하나님을 믿기 위해 성육신의 신앙이 필요하다. 믿음은 인간 자체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복합적이다.               

Karoline M. Lewis, Assistant Professor of Biblical Preaching, Luther Seminary, St. Paul, Minnesota


목회적 관점
 
성경의 인물 중에서 21세기 교인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니고데모일 것이다. 여러 면에서 그는 공감이 가는 인물이다. 성공하고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그는 지역 사회에서 리더십을 발휘한다. 그는 영적으로 열려있고 호기심 많고 이성적이다. 그는 예수를 직접 찾아가서 예수의 행동과 사회적 네트워크를 알아내려고 한다. 그는 헌신적이고 호기심이 많아서 예수와 마주앉아 이야기하기로 약속을 한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에 대한 관심을 공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한밤중으로 약속을 정한다. 그래서 앞으로 계속 그의 신앙을 비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상상력은 예수에게 사로잡혔지만, 그러나 그는 그것과 그가 가진 신앙을 구분하기를 원한다. 니고데모는 대낮에 자신의 신앙을 선언할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

좋든 싫든 우리는 매주 일요일 아침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의 눈을 본다. 주류 개신교인이 되는 것은 최신 유행이 아니며, 사람들이 때때로 교회에 나오거나 심지어 활동적인 회원이 될지라도, 우리가 교제하는 많은 신자들은 그들의 더 넓은 삶에서 니고데모이다. 그들은 믿음, 때로는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영적으로 호기심이 있지만, 그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신앙을 유지한다.

21세기에는 니고데모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신자들은 다른 인종간의 결혼이나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환경 속에 있어서, 신앙에 대한 관용과 상호 존중을 더 잘 하게 된다. 문화적 규범은 종교를 사적 영역으로 밀어 넣어 신앙을 가족과 개인의 도덕에 적합하지만 공공 문제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취급한다. 지난 2세기 동안 개신교 주류교단에서는 이러한 행동과 태도를 장려했다. 우리가 속한 종교는 자제력, 관용, 개인적인 도덕성을 증진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가치 있는 덕목이다. 우리는 공공의 도덕성과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참여도 물론 지지한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주류 개신교 교단들의 하락와 소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리 교회 교인이 니고데모와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은 개인적인 신자로서 실패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우리 교인들을 구획화된 신앙으로 밀어 넣어 왔다.

어둠 속에서 성장하는 믿음은 그 자체에 대해서는 칭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진실하고, 진심이며, 개인적이며, 종종 깊이가 있다. 요점은 이 숨겨진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 작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예수는 니고데모의 신앙이 불완전하고 미성숙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예수는 한밤중에 니고데모를 만난 것을 아직도 자기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안전하게 있는 아이에 비유한다. 당신은 아직도 잉태되어 있는 중이고, 거듭나야만 하며, 이 믿음을 백주에 선포해야 한다. 예수는 니고데모와 이야기 할 때 참을성이 없어 보인다. 그는 니고데모가 거듭남의 비유를 즉시 이해하지 못해서 화를 낸다. 그는 심지어 그 바리새인을 조롱한다.

예수님의 조급함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명령으로 읽는다: 당신은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거듭남을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자들에게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기로 긴급하게 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해석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더라도, 이 말씀을 명령으로 읽는 것이 유일한 선택은 아니다. 사실은, 이 말씀을 초청이라고 읽는 것이 정당할 수 있으며 확실히 목회적일 수도 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이 그의 인생에서 일하시게 하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Debbie Blue는 이 본문에 대한 훌륭한 설교에서 이 본문에서 출생의 비유가 놀랍고 도발적이라고 본다.​1) 그것은 너무 비합리적이며 실제로 육체적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다. 니고데모도 그렇게 말한다. 거듭나라는 초대는 무의미하다. 아무도 문자 그대로 다시 태어날 수 없다.

그 초대는 도발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상상력을 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우리를 초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본문과, 그리고, 사실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초대하셔서 낮의 빛으로 들어오게 하시고 성숙한 신자가 되게 하시며, 그가 제공하는 풍성한 삶에 온전히 참여하게 하신 것처럼, 니고데모를 초대하신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도 오늘의 신자도 이 일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거듭남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며,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려고 애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의 신앙을 위해 애쓰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잉태하고 우리 신앙이라는 자궁에서 안전하고 따뜻하고 비밀스럽게 우리를 양육하신다. 어느 시점에서 만삭이 된 임산부처럼 하나님은 출산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산도를 통해 그 아기를 더 큰 성숙으로, 삶의 충만함으로, 세상 속에서 온전하게 살아가는 믿음으로 들여보내려고 하신다. 그것이 바로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는 니고데모가 영적으로 탄생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는 지금이 많은 사람들이 다시 태어날 때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물과 성령으로 우리를 낳을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 교인(혹은 설교자)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21세기의 옷을 입은 니고데모일까?

우리 교회 교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니고데모의 조직화 된 버전일까? 본질적으로 사적인 영역에서, 말다툼을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번성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기관들 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잉태하고 있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우리의 신앙 안에서 성장할 여지가 있을까? 이 본문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숙과 새 생명으로 인도할 어렵고 지저분하고 땀을 흘리는 일을 열심히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Deborah J. Kapp, Edward F. and Phyllis K. Campbell Associate Professor of Urban Ministry, 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Chicago, Illinois
 

설교적 관점

-요한복음 3:1-17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고전적인 본문이다. 우리는 본문의 친숙한 구절, 그 신학적 정교함을 다루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복잡미묘한 것도 접하게 될 것이다. “거듭남” (born again)이라는 용어와 16절은 (“요 3:16”이라는 약자로 바로 인식되고 있는) 특히 자동차 범퍼의 스티커나 미식축구 경기등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 어떤 종교적 열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를 준비하기 전에 몇 가지를 정리해야한다. 먼저 이 본문이 불러일으키는 정형화된 것들과 잘못된 인식을 찾아내어 우리가 그 이미지를 새롭게 들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야 한다, 요 3:1-17은 한 부류의 그리스도인에게[거듭남을 강조하는] 배타적으로 주어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 본문이 주는 지혜는 우리 개개인을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십자가를 향한 사순절 여정에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필요로 한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세 가지 설교학적 과제가 있다.

용어를 정의하기 (Name the Terms)

먼저 본문을 살펴보자. 이 본문이 우리를 그룹으로 분류하기 위해 아주 좋지않게 사용되어 왔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Are you born again?)는 “당신은 우리들처럼 구원받았습니까?” (Are you saved, like us?)이거나 “당신은 저 사람들처럼 미쳤습니까?”(Are you crazy, like them?)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 표현이다. 내부자들에게 있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한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는 방법으로 기능하고 있다. 외부자들에게 있어서는 종교적 광신도들을 지칭하는 편리한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질문은 어떻게 하더라도 도움이 되거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둘 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고정관념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자가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거듭남” (born again)이라는 용어가 자신의 공동체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규명하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들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구절인가? 아니면 “우리”(us)를 “저들”(them)로부터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구절인가? “거듭남”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또 우리의 인식은 얼마나 그렇게 고정관념으로 이해하는가?  한 사람이 거듭난 것을 어떻게 결정하는가? 그 결정을 할 권한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하는 실천이 우리를 서로 결속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도록 하고 있는가 아니면 분열과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여기서 핵심은 용어들을 정의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공동체가 대화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웃에 작은 빛을 비추기(Shed a Little Light in the Neighborhood)

몇몇 예술가들은 좋은 고전을 재해석하는 시도를 좋아한다. 발레 안무가인 마크 모리스와 그가 각색한 호두까기 인형 (원작 The Nutcracker를 Hard Nut로 제목 변경) 혹은 화가 자스퍼 존스 (Jasper Johns)가 미국 국기를 변형하여 그린 것 그리고 지미 헨드릭스 (Jimmy Hendrix)가 미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 (Star Spangled Banner)를 각색하여 자신의 공연에서 연주한 것을 생각해보라. 고전적인 책(상징이나 노래 그리고 악보들)이 고전인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가 보고 듣기를 바라는 진리를 가져다 준다. 이것이 연기자들이 셰익스피어(Shakespeare) 를 암송하고 밴드들이 듀크 엘링턴(Duke Elington, 1923-1974. 미국의 전설적인 재즈밴드 리더)을 연주하는 이유이다. 당신은 시대를 앞섰던 이런 사람들처럼 뛰어나지 않아도 된다. 가장 중요한 일은 당신의 시대에 정확히 당신이 있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순절 기간에 당신의 현장에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살고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거주 신학자가 되는 것이다. 
 
유머를 발견하기(See the Humor)

-이 본문의 니고데모는 매우 답답함을 보여준다: 그는 이미 모든 어리석은 질문들을 하였다. 그 질문들은 실제로 아주 우스운 질문들이다. 10절에서 우리는 예수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이 단어들에서 부끄러움을 (shame) 들었을 수 있다(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하지만 유머는 종종 부끄러움보다 더 좋은 동기유발 역할을 한다. [예수께서 하신 이 말이 책망이 아닌 유머일 수 있고 그것이 오히려 니고데모로 하여금 진리에 이를 수 있게 한다는 의미-역자 주]

만일 예수께서 신적 심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짤막한 랍비적 풍자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우리의 관점도 달라지게 한다: 갑자기 우리들 역시 무지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니고데모를 통해 우리는 우리 중에 가장 좋은 교육을 받고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조차도 여전히 무언가를 찾고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바울이 말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할 때까지 그 온전함에 결코 이를 수 없을 것)을 놀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우리 자신들의 노력에 웃으면서 일어나 다시 시도하는게 더 낫다. 이 본문이 제공하는 지혜는 신비하고 역설적이다. 그것은 작은 공간 즉 거기에 있으면서 웃을 것을 요청하고 있다.
 
Anna Carter Florence, Peter Marshall Associate Professor of Preaching,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Decatur, Georgia

*각주*

1)  Debbie Blue, “Laboring God,” in Sensual Orthodoxy (St. Paul,MN: Cathedral Hill Press, 2004), 31–37.

홍상태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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