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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의 탄압에 저항하는 민중혼(民衆魂) (24)<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7.03.20 14:22

김지하의 5적(五敵)을 실은 것이 문제가 되어 사상계는 폐간 아닌 폐간을 당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의 대언론전략은 실로 절묘했다. 스스로 죽어가도록 유도했다는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상계」와 같은 언론을 폐간시킨다 했을 때, 그로 인한 잡음들이 얼마나 거세게 일 것인가를 저들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5.16구테타의 발발이 십년 째인데도, 이미 두 차례나 대선을 통해 국민들의 합의를 받아낸 민립정권(民立政權)인데도, 여전히 글 꽤나 쓴다는 것들, 말 꽤나 한다는 것들은 ‘군인정치’ 운운하며 불법적인 언사를 쏟아내고 있다. 그 대표적인 기구가 바로 그 「사상계」였다. 

그 결코 두어 둘 수 없는 사상계! 그런데 그 사상계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고 해야 할까. 5월호에 그 ‘오적’을 실은 것이다. 필자는 물론 사상계사 사장까지 잡아들였다. 이유는 반공법 위반 혐의였다. 이때의 사장이란 물론 장준하가 아닌 부완혁이었다. 검찰에, 중앙정보부에, 문화공보부에 청화대로부터 내려지는 소위 그 하명(下命)은 제(諸) 기관들로 하여금 오금을 펴지 못하게 했다. 

“다음달 「사상계」가 다시 나와서는 안 된다!”
소위 박정희정권의 전(全) 안보기관에 극비리에 내려진 특명이었다. ‘5적’의 필자는 두어두고 다룰 것 이지만 「사상계」사 사장만은 우선 단속을 해야 한다. 부완혁과 장준하와의 사이에 어떤 계약이 되어 있거나 간에 「사상계」가 더 이상 서점가에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이유 여하간 「사상계」계는 없애야 한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천명(天命)이었다. 
아무도 그 명에, ‘아니요’ 할 자, 하는 자 없었다. 

그 천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잡지가 없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미 국제적인 잡지로 자리를 잡은 「사상계」인지라 당국이 폐간을 시켰다 하면 다시 듣기 싫은 소리 듣게 될 것이다. ‘군인정치’운운하는 소리 말이다. 박정희는 부완혁을 투옥시켜두고 그 「사상계」는 고사시키기로 했다. 

함석헌이 장준하와 부완혁의 싸움을 ‘격전’이라 하면서도 ‘그것은 결국 박정희의 술수에 의한 것이었다’ 한 것은 그래서였다. 다음달 (1970.6) 「사상계」는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달도, 그 그 다음달도 「사상계」는 서점가에 모습을 들어내지 못했다. 박정희가 살아있는 동안 「사상계」는 나올 수가 없었다. 아니, 박정희가 죽은 후에도 「사상계」는 나올 수가 없었다. 박정희는 갔다해도 박정희의 군인정치는 새파랗게 살아있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으니...그러나 「사상계」가 그렇게 가지는 않았다. 아직도 「사상계」가 품고 있는 민주사(民主史)의 과제가 있어서였다.

박정희 김계원 그리고 방우영

6월 중순경 어느 날, 「조선일보」회장 방우영의 전화벨이 유달리 요란하게 울려댔다. 중앙정보부장 김계원으로부터의 전화였다. 김계(金桂元)은 평소 장준하와의 사이에 좋은 교분을 지녀오는 터였다. 그러나 그 김계원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이후엔 이 땅에 없는 사람으로 알고 사는 터였다. 박정희의 치하에 빌붙어 산다는데 대한 혐오에서가 아니라 딱히 만나야할 이유, 만나야할 자리가 없어서였다. 

삶이란 의미를 살아가는 것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그 김계원이 「사상계」일로 조선일보회장 방우영을 찾은 것이다. 물론 그것은 역시 그 하명(?)에 의한 것이었다. 
“될 수 있으면 속한 시일 안에 한번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깊이 상의할 건이 있는데 ‘윗분의 말씀을 따라’서라 했다. 천하의 방우영이라해도 별수가 없었다. 김계원이 ‘윗분 ’이라 한다면 ‘그 분은 이미 신이 되어가고 있는 이’, 지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방우영은 ‘지금이라도 좋다’했다. 

“아닙니다 이미 밤도 늦었고 내일 중정으로 좀 들어오시지요. 윗분의 명도 받으시고, 세상 이야기(?)도 좀 들으시구요...”
이래서 방우영이 중앙정보부 부장실을 방문했다. 방우영의 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이후에도 다시없었다.  

“윗분의 명(命)이라는게 무엇입니까?” 방우영은 정말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정권의 버팀목이라 할 중앙정보부장이 나를 공기관으로 불러 명을 전한다? 그리고 그 명을 내리는 자는 이미 신(神)이 되기 시작한자 아닌가?
드디어 김계원이 입을 열었다. 

“아마 이 일은 방회장께 아주 좋은 일이 될 거라고 생각되는 데요...”
“아니 무슨 일입니까? 말씀을 아주 턱 열어놓고 해주시지요.”
“음..방회장께서도 「사상계」라는 잡지 잘 알고 계시지요?”
“아, 그럼요. ‘지식층의 확실한 길잡이로 가장 높은 인기와 그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잡지’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

방우영의 「사상계」진단은 명료했다. 
“방회장께서 그 「사상계」를 좀 인수해 주시라는 겁니다. 물론 어른의 명(命)이십니다. 물론 모든 절차는 우리(?)가 밟도록 하겠습니다.”
“「사상계」라! 「조선일보사상계」....”
방우영은 속으로 “웬 떡이냐?”했다. 
“조선일보에 월간지 하나...”
이 수년간 「조선일보」회장 방우영이 수도 없이 뇌어 본 말이었다. 
그런데 「사상계」가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니...
왜 아니 기뻤겠는가?

「사상계」의 마지막 편집국장 유경환은 그의 “「사상계」15년 소사(小史) 1953-68”에서 사의 방침이라며 외부인들에게는 제공하지 않는 조선일보사의 사보(社報) 1995년 4월 1일자에 실린 회장 방우영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하고 있다. “생각나는데로”라는 주제아래 쓴 글인데, 「월간조선」 창간 15주년을 기념하면서였다. 

“월간조선이 이번 4월호로 창간 15년을 맞았다. 「동아일보」의 「신동아」와 「중앙일보」의 「월간중앙」보다 훨씬 늦게 출판한 「월간조선」이 짧은 시간에 타지를 압도하고 정상에 서게 됐으니 감회가 깊다. 그동안 수고해준 실무자들의 노력에 감사드린다. 「월간조선」이 탄생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박정권하에서 잡지 발행을 허가 받는 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3선 개헌이라는 호기를 타고 당시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일정 때 우리사가 발행했던 「조광」(朝光)잡지를 부활하게 해달라고 몇 차례 교섭한 끝에 마침내 허락을 받아 일이 잘 돼 가는가 했으나 선거가 끝나고 나더니 ‘각하의 허락’이 없다는 이유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렇게 써 내린 방우영은 이제는 「월간조선」사(史) 와는 전혀 다른 맥락인 「사상계」와의 사이에 있었던 비화를 소개한다. 「월간조선」 15년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를 말이다. 「월간조선」 15년 회고사에서 그 「사상계」의 비화를 밝힌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또 하나, 그 회고사속에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표현(?)이 있다. “3선 개헌이라는 호기”라는 말이다. 「조선일보」의 자매지였던 그 잡지「조광」(朝光)을 다시 복간 시키는데, 방우영은 박정희의 그 3선 개헌을 ‘호기’(好期)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방우영은 언론이었나?
방우영이 전하는 「조선일보」와 「사상계」사이의 비화는 이런 것이다. 

“70년 6월 들어 중앙정보부장 김계원씨가 「사상계」라는 잡지를 인수하라는 제의를 해왔다. 뜻밖이었다. 당시 이 잡지는 지식층의 길잡이로 가장 높은 인기와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이런 사연이 있었다. 원래 장준하씨가 발행인으로 있던 사상계는 경영난으로 부완혁(夫玩爀)씨가 위탁경영하고 있었다. 이 잡지 5월호에 실린 김지하의 담시 「오적」이 문제가 돼 발행인 부씨가 반공법위반혐의로 구속됐다. 그러자 사상계 발행이 중단되고, 정부가 잡지를 취소할 경우 언론탄압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는 문제가 대두됐다. 그래서 넘겨주도록 평소 장씨와 잘 알고 지내던 김부장이 중간에 들어 우리에게 내정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조선일보」회장 방우영은 넝쿨체 호박을 거두게 된 격이었다. 사상계를 통째로 먹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일이 김계원의 호언처럼 그리 쉽게 굴러가진 않았다. 선우휘 편집국장과 유진호전무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인 부씨를 찾아가 협상 중에 「사상계」의 양도각서를 받아올 때까지는 계획대로 진행돼 가는 듯 했다.

「조선일보사상계」(!)

그랬다. 이제 「사상계」는 「조선일보」의 것이었다.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최석채주필을 「사상계」주간으로 겸직시켰다. 한 때 이 잡지 편집장으로 있던 유경환씨가 마침 우리사의 조사부차장으로 일하고 있어 그를 편집실장으로, 인보길 기자를 차장으로, 박범진, 조연흥, 최준명, 정규만 기자 등을 편집실 근무로 발령했다. 70년 8월 1일자 사보에는 휴간중인 월간 「사상계」를 본사가 정식 인수하여 10월 초부터 발행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제 1호도 「조선일보사상계」로 개제하고 2개월에 걸친 제작을 마치고 10월 1일부터 발매한다는 사고(社告)까지 나왔다.”
그런데 아니었다는 것이다. 

유경환이 인용한 방우영의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났다. 원 소유주인 장씨와 판권소유자인 부씨가 양도를 눈앞에 두고 감정적인 대립을 일으켜 법정소송사태가 일어나고, 9월 25일에는 부씨가 일방적으로 양도거부를 표명했다. 최주필과 선우국장과 본인이 서대문형무소로 달려가 번의를 촉구했으나 거부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인수계획은 어이없이 무산되고 인쇄 직전에 있던 「조선일보사상계 제 1호」는 햇볕을 보지 못한체 한권의 기념물로 지금 조사부에 남아있을 뿐이다...”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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