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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Day] 2017년 3월 26일 사순절 넷째주일 요한복음 9:1-41<말씀의 잔치>
홍상태 목사 | 승인 2017.03.21 13:11

신학적 관점
 
죄나 악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죄나 악에 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다. 과연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죄악될까? 우리는 죄악됨의 정도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악을 더 심하게 경험하였나? 예를 들어 20세기는 앞선 세기들보다 더 많은 악을 체험했는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개인적인, 그리고 집단적인) 악의 체험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대한 신학적인 질문과 오랫동안 씨름해왔다. 첫째, 악이 실재한다면 어떻게 신의 선과 능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둘째, 악의 실재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에 관한 인간의 믿음을 부정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그의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가 그를 희생 제물로 드리려 했다. 천사가 이를 저지하고, 어린 양이 기적적으로 준비되어 희생 제물로 바쳐졌다. 아브라함은 그 장소를 “주님이 제공하실 것이다”(The Lord will provide.)라고 이름 지었다.(창 22:8,14). 더 나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계명을 지키면 “너희가 사는 곳에서 나도 같이 살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혹독한 포로생활도 불구하고, 때가 되면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제공하실 것이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와 유사하게 기독교인들도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하신 말씀에서 큰 위로를 받아 왔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 10:29-31)

고전적 기독교 신학은 종종 일반섭리(general providence)와 특별섭리(special providence)를 구분했다.[필자는 provide와 providence의 관계에 주목한다. 한국어로는 이 둘의 밀접한 관계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역자주] 전자는, 칼뱅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친히 창조하신 자연 질서를 존중하는 것이다. 후자는 “하나님께서 개별적 사건들을 각각 인도하셔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진행되고, 어떤 사건도 우연히 생겨나지 않는다”는 확신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확신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에도 반영되어 있다.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사도신경의 첫 구절에 관한 해설을 다음과 같이 한다: “하나님이 이 고통 많은 세상에서 나에게 허용한 어떤 악도 선으로 변하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신실한 아버지로서 그렇게 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인류가 겪은 비극은 –1차 대전 중의 참혹한 살상, 홀로코스트 인종청소를 통한 600만의 유태인 학살,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 사용, 캄보디아와 르완다의 킬링필드 등- 모든 개별적 사건들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는 신앙고백을 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20세기의 비극은 “하나님이 제공하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포기하게 만드는가?

요한복음 9장의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치유에 관한 이야기는 이런 당혹스러운 질문을 갖고 고민하는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본문은 오늘의 세계에서 섭리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해 기독교인들이 새로운 이해를 하도록 돕는다. 첫째로, 요한복음 9장은 현대적 상황에서 섭리에 관한 주장은 고전적 섭리론보다 좀 더 절제되고, 겸손하고, 덜 요란한 방식으로 제시돼야 한다고 우리에게 충고한다. 요한복음 9장은 모든 사건들이 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매우 구체적이고 특별한 이 사람과 관계된 사건에만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섭리- 가 드러난다. 이 이야기나 어떤 다른 이야기도 홀로코스트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

둘째로, 예수께서 이 사람이 왜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았는지 설명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의 섭리론은 설명의 언어보다는 고백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현대 신학자들이 사용하는 “자연적 악”과 “도덕적 악”의 구분에 대해 무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적 악 – 이 사람의 눈멂- 이 누군가의 죄 (이 사람의 죄, 아니면 이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즉, 그들은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예수는 죄라는 범주를 통해 이 사람의 눈멂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배격했다. 이 사람의 눈멂에 대해 설명하는 것과, 이 사람의 눈멂을 치유하는 것은 다른 목적을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3절) 오늘의 섭리론은 본문의 도움을 받아 모든 사건들을 설명하려는 거창한 꿈을 버려야 한다. 그 대신 구체적인 사건 하나하나가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는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셋째로, 이 눈먼 사람의 치유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은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적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드러나는(계시되는) 것이지, 인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의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만 드러난다. 요한의 이야기의 아이러니는 눈먼 사람이 시력을 찾게 되었으나, 다른 모든 사람들은 시력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시력은 신체적 시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목격한 것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웃, 바리새파 사람들, 부모 등 모두가 예외 없이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제공하신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치유받은 사람조차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했다. 믿음을 갖고 난 후에야 비로소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을 예배하였고(38), 시력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치유가 일어났다.

섭리는 역사에 관한 신학적 설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섭리는 20세기의 비극에 관한 합리적 해명이나 설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섭리는 하나님에 적대적인 사건이 있을 때, 하나님이 그 사건 안에서, 주위에서, 관통하여 일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믿음의 눈을 가신 사람들에 의한 신앙고백이다.
 
George W. Stroup, Professor of Theology,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Decatur, Georgia
 
주석적 관점

학문적으로는 요9:1-41은 전체적인 요한복음의 이야기와 내용적으로 그리고 중요성에서 분리된 채 다루어져 왔다. 주석가들은 한 번도 고쳐 달라고 요청하지 않은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의 치유 뒤에 일곱 장면으로 독립된 드라마로 장을 구분했다. 해석자들은 이야기의 의미를 기적 그 자체에 두지만, 10:1-21에서 예수자신이 치유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한다. 9:41이후에도 예수는 계속 이야기하는데, 10:1-21이 눈 먼 사람의 치유에 대한 해석의 담론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계속되는 구조적 패턴이다.
 
예수는 표적sign(요한복음에서는 기적miracle이 아니다)을 행하고, 이어서 대화가 진행되며 그 뒤에 표적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신학적 프레임을 제공하는 예수의 주석이 있다. 치유 자체는 대단히 간략하게 서술되는데 왜냐하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기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리어 표적은 그 자체를 넘어 예수가 의미하는 그 무엇과 만나도록 향하고 있다. 설화는 이어지는 대화와 담론에 무게가 주어진다. 

눈 먼 사람의 치유에 대한 담론이 9장의 해석에서 무시된다면 9장의 사건은 그것이 가진 의미와 영향력을 충분히 가질 수 없다. 성서정과도 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데 한 몫을 한다. 9장은 A해 사순절 넷째 주일의 본문이지만, 나머지 담론(10:11-18)은 B해 부활절 넷째주일 복음서 본문이다. 더구나 예수가 귀신이 들렸는지, 귀신이 눈 먼 사람을 고쳤는지에 대한 유대인들의 의견이 나누어진 것을 다룬 10:19-21은 포함되어 있지 않는데, 이 구절은 9장의 소경의 치유에 대한 10장의 예수의 말씀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치유가 일어난 것은 안식일이었다(9:14).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소경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점차 이해하게 되는데, 단지 여기에서는 예수와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와의 만남에 대한 증언을 통해서이다. 바리새인들의 심문에서 눈 먼 사람은 그 이야기를 반복하는 중에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33절) 알게 된다. 이 고백은 그가 회당에서 추방되는 자극제가 된다. 예수는 치유 이후로 설화의 장면에서 사라졌다가 35절의 회당에서 추방된 이 사람과 만날 때 다시 나타났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예수가 누구인지의 진리는 서론에서 이미 나타났는데 눈 먼 사람도 이제 볼 수 있게 되었다.

9:1-10:21을 한 단위로 해석하는 것은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치유에 대한 해석의 많은 주석적 통찰력을 낫는다. 이야기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은 아마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인식하는 눈뜸, 또는 영적 안목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치유의 중요성은 이야기의 담론에서 나타난다. 사실 눈 먼 사람은 첫 번째로 예수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예수는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7절)고 말씀하셨고 그는 그대로 했다. 그는 예수를 보기 전에 그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눈 먼 사람도 점차적으로 예수를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예수라는 사람”(11)이라고 부르다가 “예언자”(17)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33)으로, 그리고 마침내 “주님 내가 믿습니다”라고 말하고 엎드려 절하였다(38). 사실 37절에서 예수는 보고 치유하는 것이 믿는데 중요하다고 말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치유와 보는 것의 중요성은 눈 먼 사람의 치유와 함께 10:1-21의 예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충분히 납득이 된다. 이 담론에서 예수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믿는 것과 통합하고 있다. 예수는 그를 아는 양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따른다고 말했다. 요한복음에서 “아는 것”은 관계를 표현한다. 양과 목자의 비유에서 예수는 9장의 눈 먼 사람과 예수 사이에 일어난 일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보는 것과 듣는 것의 중요성을 재론하고 있다.

눈 먼 사람은 단지 예수가 치유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의 양, 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양과 같이 눈 먼 사람은 예수의 목소리를 들었다. 목자와 같이 예수는 그가 쫓겨났을 때 만나신다(35). 예수는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에게 보는 것 이상을 제공한다. 예수는 그에게 선한 목자와 같이 그의 양을 위해 모든 것을 준다. 무리로서의 보호(10:16), 좋은 꼴(9)과 풍성한 생명(10)까지. 결과적으로 듣고 보는 것은 한 사람이 예수를 알고 믿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예수와의 관계의 표현이고, 예수와의 관계는 또한 아버지와의 관계를 의미한다(10:14-15).

더구나 예수와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이미지화 되어 제자도를 대표하게 된다. 선한 목자인 예수는 그의 양, 그의 제자들을 무리에서 안전하게 보호하신다. 21장에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양을 치는 역할을 맡긴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예수가 눈 먼 사람의 치유에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이야기와 이 이야기 둘 모두에서 중요하다. 이 두 장을 통합하지 않고는 의미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어렵고, 눈 먼 사람의 눈뜸이 단지 모범이나 기적으로 축소된다. 사실 그는 예수가 10:1-18에서 말한 것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Karoline M. Lewis, Assistant Professor of Biblical Preaching, Luther Seminary, St. Paul, Minnesota
 
목회적 관점

지난 수십 년 동안 몇몇 문화평론가들은 미국에서 사회적 자본이 침식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이웃 관계의 붕괴, 부모-교사협회나 교회 같은 조직의 참여율 감소, 볼링 리그의 감소 등이 그것이다. “혼자 볼링하기”라는 책의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혼자서 볼링을 하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고 있다.1) 사람들에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 보다 기본적인 조직인 가족의 붕괴에 관한 보고서이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이혼율, 가족의 분산 및 새로운 가족 구성을 수용해야 한다는 압력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자본의 손실은 그러한 조직에 직접 포함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회평론가에게도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사회평론가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것이 지역 사회와 개인에게 미칠 수 있는 부작용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고립 된 커뮤니티는 덜 안전하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종종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고립될 때 안정감을 잃게 된다. 최근의 한 연구에 의하면 그들은 덜 행복할 수도 있다고 한다. 행복은 전염성이 있으며, 행복한 가족, 친구 또는 이웃과 연결되면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과거의 공동체에 대해 향수를 느낀다. 그 때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도와주었다. 그 때 사람들은 서로 돌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랬을까?

사회적 자본의 붕괴에 대한 불안감을 통해 요한복음 9장을 읽는 것은 직관적인 인식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흥미롭다. 우리가 이 본문을 읽을 때 옛날 공동체와 가족 체계가 강력하고 건강하다는 전제가 모두 무너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적재적소에 있다고 가정하고 있는 각각의 지원들이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본문은 예수가 태어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인 사람을 치료하는 이야기와, 그에 대한 지역 사회, 종교 당국 및 그의 가족의 반응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예상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처음 놀라게 되는 것은 지역 사회의 반응이다; 그들은 눈먼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것은 너무 이상하다. 그 사람은 평생 동안 그들 가운데 살았다. 그의 이웃들은 그와 함께 지내면서 길을 건너거나 물을 길을 때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와 함께 예배했다. 왜 그들은 그가 고침을 받은 후에 그를 알아보지 못할까? 그의 정체성의 유일한 표식은 그가 눈이 멀었다는 것이었기 때문일까?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에게서 볼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 그가 그들과는 다른 신체를 가졌다는 것이었을까?

이것은 다른 신체적 조건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이들에게 목회적 주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식별하고 알게 될까? 장애를 사람을 식별하는 표식으로 삼아도 될까? 아니면 장애를 넘어서 사람들의 인간성을 인정할 수 있을까? 다른 신체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의 시력은 얼마나 제한적이거나 예리한가?

두 번째 목회적 주제는 종교 공동체의 행동을 둘러싼 것이다. 종교 공동체에서, 지도자들은 이야기를 통제하고 싶어 한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나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하려고 하는 이야기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가 이 이야기에서 영웅이 아니라 죄인이 되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든 종교적인 가치와 예배를 통제할 수 있는 또 다른 설명을 원한다.

아마도 1세기에도 종교 지도자들이 교회의 정통성을 두고 싸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위안이 될 것이다. 죄를 규정하는 특권이나 은혜를 나누어주는 것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것이며, 종교 당국이 그것들을 탐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우리는 수세기 동안 이 특권들과 이 권력을 차지하려고 싸워왔다. 이 본문은 죄의 정의나 은혜의 선물을 두고 우리와 싸워왔고, 그 전투 때문에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모호하게 만든 종교적 적대자를 유죄 판결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전투에 휩싸일까? 어떤 쟁점 또는 선입견이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의 임재와 행동과 열정으로부터 돌려놓을 수 있을까?

거의 모든 사람이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에게 잘못한다. 그의 가족조차도 그에게서 멀어지고, 그의 부모는 그의 복지보다 자신의 안전을 우선한다. 나이 많은 부부가 아들을 위해 자기들의 집이나 직장이나 공동체를 희생하는 것을 꺼리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가 치유된 것에 대해 즐거워하며 그와 함께 축하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겠는가? 이 본문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 부모의 두려움은 그들의 기쁨을 압도하고 그들은 권력에게 아들을 넘겨준다.

공동체도 잘못한다. 종교 권력도 잘못한다. 가족도 잘못한다. 이 이야기에서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과 예수뿐이다. 시각장애인은 진실을 말했는데, 심지어 위협을 당하고, 공동체와 가족에게 버림받고, 추방당하지만, 그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시작장애인이었지만, 지금은 본다. 그 사람은 몇 번이고 거듭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한 구원의 은혜를 증언한다.

예수만이 그 사람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그가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은혜를 분산시키라고 주장하지만, 변화하게 하시는 분은 예수다. 치유하는 분은 예수다. 그가 고립될 때 마지막까지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분은 예수다. 그는 또한 우리와 함께 한다.

때때로 태양이 정말로 밝을 때, 또는 인공조명이 강할 때, 우리는 눈을 가늘게 뜨거나 감아야 한다. 밝은 빛은 우리에게 위험해 보이고, 그래서 자동적으로 반응한다. 은유적으로 우리는 요한복음 9장에서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을 본다. 세상의 빛이 밝게 빛나고, 공동체와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 사람의 가족들은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눈을 감았다. 그것이 직관적으로 인식해서 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틀렸다. 이 본문에서는 모든 것이 직관적인 인식에 어긋난다. 세상의 빛이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는 눈을 감을 필요가 없다. 사실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눈을 크게 뜨는 것이다. 우리는 그 빛 때문에 눈이 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을 것이다.
 
Deborah J. Kapp, Edward F. and Phyllis K. Campbell Associate Professor of Urban Ministry, 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Chicago, Illinois
 
설교적 관점

설교자는 이 이야기에 대해 반복해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말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에(time) 관한 이야기이다: [일이 일어나기] 전과 후 (before and after), 그 때와 지금 (then and now), 몇 년 전과 지금,  언제나 [있다가] 그리고 갑자기[발생]. 그 사이에(in between)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설교자는 그 일에 대해 적어도 비상식적으로는 진실되게 설명할 수 없다. 설교자는 어느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그 이야기 속에] 당신이 만났던 사람이 있다. 그가 당신을 진흙과 빛으로 만졌다. 그 나머지는 다음 노래에 나타나 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 다음에는 종교재판이 따른다: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다. 그들은 묻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너는 무엇을 했느냐? 그는 무엇을 했느냐? 너의 새로운 몸, 새로운 자아, 새로운 생명, 새롭게 보는 것등을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너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설교자는 이 본문에 대해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반복해서 말할 수 있으나 분명히 해야할 점이 있다: 그것은 설명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일들이나 기적들은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그것들을 서술하고, 우리가 알고있는 것을 이야기 하고, 일어난 일과 우리가 믿는 바에 관해 말할 뿐이다. 입증하고 설명가능한  일도 있지만 이 본문은 아니다. 이 본문은 시간에(time) 관한 이야기이다: 전과 후, 그 때와 현재, 오래 전에 함께 있던 사람들과 오늘 우리와 함께있는 사람들. 회심 (conversion)  그 자체의 순간은 그것이 가져다 준 변화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설교자는 바로 이 점을 말해야 한다. 설교자는 바로 이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 몇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설교적 관점이 있다.

앞 못보는 상황을 윤리적 눈으로 보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

나에게는 나면서부터 앞을 못보는 한 친구가 있다. 그녀로 인해 나는 연민이 어리석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나의 것을 바라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녀의 생활은 부유하고 풍요로우며 또 그러한 삶을 지향하고 있다. 필시 그녀는 일련의 적응해 사는 것을(adaptation) 배웠어야만 했다: 보는 데 불편함이 없는 사람들 중심으로 형성된 세상에서 앞을 못본다는 것은 [앞을 못보는] 그녀가 우리들의 방식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게 대처해야 함을 의미한다[그런데 그 친구는 그러지 않았다는 의미]. 또한 그녀가 언제나 우리에게 가르쳐주어야 하는 일은 그녀와 함께 사는 법 (돕는 법이 아닌)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our blindness)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 눈을 스카프로 가린 채로 걷거나 후천적으로 백내장이 악화될지라도[그래서 앞을 못볼지라도],  우리는 나면서부터 앞을 못보는 (born blind)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미묘한 점이 있긴 하지만 본문을 깊이 성찰해야한다: 우리는 다른 윤리보다는 다른 세상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많은 설교자들은 이 본문이 지닌 역사적으로 상세한 사실들에 관심을 갖거나 (예를 들어 예수 시대에 앞을 못보는 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여겨졌다는 중요한 사실) 질병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어디까지 전개해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한다. 이 본문은 우리가 윤리적 세계로 들어갈 것도 또 보지 못하는 세계 그 속으로 들어갈 것도 요청하지 않는다.

홍상태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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