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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암시난 살아져라", 제주 4.3사건 아픔은 언제까지기장 제주노회, '제주4.3평화기행' 진행..."기독인도 역사의 아픔에 몸부림 쳐야"
김령은 | 승인 2017.04.03 12:53

*살암시난 살아져라 : '살다보면 살아지더라'의 제주 방언

“우리나라에도 묻혀 있는 아픈 이야기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어요. 신학교에서 교수님들이 그러시잖아요. 이스라엘에 가서 당시 민중들이 겪은 고난의 현장을 봐야한다고. 그런데 굳이 다른 나라를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정작 우리나라에도 한 시간만 비행기를 타고 오면 이런 아픈 역사의 현장이 있는데...알면서도 아파서 꺼내지 못했던...이곳 사람들도 먼저 이야기하지 못했던.”

3박4일 일정에 그 흔한 ‘유채꽃밭에서 인생 사진 찍기’ 같은 시간은 없었다. 유명한 배우들이 등장해 인기리에 방영됐다는 드라마 촬영지를 가보는 시간도 없었다. 일정 내내 탄식소리가 새어 나왔다. 북받쳐 오르는 먹먹함을 누르느라 애쓰는 모습들이 역력했다. 불과 60여년 전, 일어났던 참혹한 사건과는 반대로 제주는 너무 평화로웠다. 
 

지난 3월 26일(월)부터 29일(수)까지 기장 제주노회 주최로 제주4.3평화기행이 진행됐다 ⓒ에큐메니안

지난 26일(일)부터 29일(수)까지 3박 4일간 진행된 제주 4.3평화기행에 목회자, 평신도를 비롯한 10명의 기독인이 모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 제주노회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송영섭 목사)는 해마다 4월 즈음에 4.3사건의 현장을 둘러보는 기행을 진행하고 있다. 송영섭 목사(진리실험교회)는 9년째 이 기행을 안내하고 있다. 14년 전 제주로 건너와 4.3사건을 접한 뒤 이 기행을 기장 제주노회에 제안하고 기획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제주 4.3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지난 2013년에 개봉한 영화 <지슬> (오멸 감독)은 대중들에게 잊혀 있던 4.3사건을 소환했다. 광주 5.18 민주화 항쟁과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공권력에 의한 학살로 평가되는 제주 4.3사건은 희생자만 약 3만 명, 대표 피해지역인 중산간 마을은 마을의 95%가 불타 없어졌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나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바다 건너 소식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부도 한동안 이 사건을 외면했다.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희생자들의 시신이 발굴 된 것도 2006년의 일이다. 김대중 정권에 들어서고 나서야 제주시 봉개동의 12만평의 땅에 제주 4.3평화 공원이 건립돼 희생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상설 전시관을 만들어 ‘평화, 인권의 장’으로 삼았다. 

3박4일 일정으로 진행된 이번 기행은 제주 4.3평화공원을 비롯해 다랑쉬굴, 의귀리 의장대 무덤, 현의 합장묘, 동광큰넓궤 등을 돌며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잊혀진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으로 마련됐다. 

첫날 늦은 저녁, 제주도에 도착한 일행들은 숙소에 모여 영화 <지슬>을 관람했다. 본격적인 기행은 둘째 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도로 시작됐다. 송영섭 목사를 비롯한 기행팀은 4.3평화공원과 봉안관, 북촌리 애기무덤, 다랑쉬 굴을 찾았다. 4.3평화공원 내에 있는 봉안관은 희생자들의 위패가 봉안된 곳이다. 봉안관 벽면은 마을별로 구분된 구역 안에 빽빽이 위패들이 들어 차 있었다. 모셔진 위패만 1만 4,095개다. 

봉안관 입구에서 희생자를 추모하는 향을 피우는 참가자 ⓒ에큐메니안

그런데 위패 사이사이에 이름이 없는 위패들도 있다. 송영섭 목사는 “이름 없는 위패들은 무장대원의 위패”라고 설명했다. 한때 ‘폭도’라는 이름으로 불려 졌던 이들이기도 하다. 당시 무장대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로 무장봉기에 참가했던 사람들이다. 미군정을 옹호하는 우익단체에 맞서 그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은 이승만 정부가 명령한 ‘초토화작전’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아직도 이들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다. 

봉안관 내부 ⓒ에큐메니안
예비검속 행방불명자 위령비 앞에서 '예비검속'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송영섭 목사. '예비검속'이란 구체적 혐의 없이 좌익세력에 가담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구속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예비검속'을 명분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옥에 갇히거나 학살당했다. ⓒ에큐메니안
무고한 희생자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모습을 표현한 조형물. 죽음의 문에 들어가기 전 삶을 뒤돌아 보는 희생자의 표정 ⓒ에큐메니안
희생자 변병생 모녀의 기념 조각을 촬영하고 있는 참가자. 토벌대를 쫓겨 아기를 안고 피신하던 변병생 모녀가 총살당한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에큐메니안

그 다음으로 둘러본 곳은 다랑쉬 굴이었다. 다랑쉬 굴은 다랑쉬 마을에 거주하던 20여 가구가 토벌대를 피해 숨어든 곳이다. 사람들이 숨어든 곳을 파악한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사람들을 질식사 시켰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뒤늦은 1991년에 발굴되어 유해가 수습됐다. 굴 입구는 현재 바위와 콘크리트로 봉쇄되어 있다. 

기행팀은 송 목사의 인도에 따라 다랑쉬 굴 입구에 둘러 앉아 당시 사건을 상상해 보는 시간을 가기지도 했다. 

“눈을 감고 그분들의 마음을 헤아려 봅시다. 내가 다랑쉬 마을 주민이 되어, 자녀의 손을 잡고 저 굴에 들어간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 심정이 어떨지...얼마나 두려웠을지..”

지금은 막혀 있는 다랑쉬굴 입구 ⓒ에큐메니안
다랑쉬굴 입구 옆에 앉아 당시 희생자의 마음을 떠올려 보는 참가자 ⓒ에큐메니안

토벌대를 피해 사람들이 숨어 든 곳은 다랑쉬굴 뿐만이 아니다. 기행 셋째 날 둘러본 동광큰넓궤는 영화 <지슬>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동굴 안에 넓고 큰 바위가 있어 당시 동광리 주민 120명 정도가 40여일을 이곳에 숨어 지냈다. 토벌대에 장소가 발각돼 입구가 봉쇄되기도 했지만 극적으로 탈출해 동굴 안에서 참사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탈출한 주민들은 곧 토벌대에 발각돼 학살됐다. 

기행팀은 입구가 봉쇄돼지 않은 동광큰넓궤에 직접 들어가 보는 체험을 하기도 했다. 헬멧과 무릎, 팔꿈치 보호대를 착용하고 좁은 통로를 따라 낮은 포복으로 들어가야 했다. 랜턴도 필수 장비였다. 동굴 안은 빛 한줄기 들어올 틈새 없이 어두웠다. 당시 주민들이 쓰던 옹기들이 깨진 조각으로 흩어져 있기도 했다. 좁은 통로를 엎드린 채로 기어가기를 몇 분, 넓은 공간이 나왔다. 기행팀은 그곳에 멈춰 앉아 랜턴을 끄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동광큰넓궤에 들어가기 위해 안전장비를 갖추고 안내문을 읽고 있는 참가자들 ⓒ에큐메니안
좁은 입구로 들어가고 있는 참가자. 동광큰넓궤는 굴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입구가 좁고 작았다. ⓒ에큐메니안
좁은 입구를 낮은 포복으로 10분 남짓 기어가다 보면 허리를 펴고 걸어갈 수 있는 통로가 나오기도 했다 ⓒ윤태현 목사
어두운 동굴 내부에서 랜턴은 필수 였다 ⓒ윤태현 목사

이 밖에도 기행팀은 송 목사의 안내에 따라 현의 합장묘, 의귀리 무장대 무덤 등을 돌러봤다. 현의 합장묘는 의귀리에서 희생된 주민들을 모신 곳이다. 당시 토벌대는 주민들을 의귀초등학교로 소집시켜 고문과 학살을 일삼았다. 소식을 들은 토벌대는 주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의귀초등학교를 습격 했으나 토벌대에 전멸하고 말았다. 결국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소집된 주민들은 끝내 모두 학살됐다. 

무장대 무덤터에 세워진 표지판. 빗물에 표지판에 새겨진 글자가 거의 지워진지 오래다 ⓒ에큐메니안

전사한 무장대원들을 희생자와 함께 수습되지 못했다. 이들의 무덤은 지금도 제대로 조성되지 않았다. 2004년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의 단장인 도법스님이 이곳을 지나며 벌초하고 표지판을 세웠다. 

“모든 생명은 존엄한 것이다. 옛말에 '적의 무덤 앞을 지나더라도 먼저 큰절부터 올리고 가라'고 했다. 바로 이곳은 제주 현대사의 최대비극인 '4.3'사건의 와중에 국방경비대에 의해 희생된 여령들의 유골이 방치된 곳이다. 
우리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은 우익과 좌익의 모두를 이념대립의 희생자로 규정한다. 학살된 민간인뿐만 아니라 군인, 경찰과 무장대 등 그 모두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때 희생된 내 형제 내 부모였다. 
평화의 섬을 꿈꾸는 제주도, 바로 이곳에서부터 대립과 갈등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우리 순례단은 생명평화의 통일시대를 간절히 염원하며, 모성의 산인 지리산과 한라산의 이름으로 방치된 묘역을 다듬고 천도제를 올리며 이 푯말을 세운다.“

일정이 마무리 된 후 소감을 나누는 자리에서 참가자들은 각자 유적지에서 느낀 감정들을 털어놨다. 대부분 50대였던 참가자들의 소감은 다음세대에 대한 고민이 주를 이뤘다. 

“지금 세대가 다음 세대에 4.3을 알리지 않는다면 부채로 넘어갈 것이라는 추모비에 새겨진 말이 마음에 많이 남습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게 하기 위해 많이 이 일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알려서 언젠가는 이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합니다. 상처를 부채로 넘기지 말고 회복의 단계를 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동안 그런 사건이 있더라, 하는 정도로만 알았는데 이번 기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이 느껴질 정도로 4.3사건에 대해 잘 알게 됐습니다. 젊은 분들도 제주도를 관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 역사의 아픔을 알고 가면 좋을 것 같아요. 특히 교회 안의 청년들이 이런 기행에 많이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제주도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목회자들은 4.3의 아픔이 여전히 도민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제주도 분들,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은 4.3사건이 언급되는 것 자체를 꺼려하십니다. 여전히 고구마 넝쿨 같은 상처들이 다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타인을 ‘빨갱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내가 빨갱이가 돼버렸던 과거 역사를 통한 트라우마가 이들에게 남았습니다.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깊은 상처들입니다.”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4.3 사건을 즈음해서 제주도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 중 설교에 이 사건을 한마디라도 언급하는 목회자는 거의 찾기 힘듭니다. 우리 교회에 가해자, 피해자의 자손이 있기 때문에 언급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제주도의 교회에서 4.3사건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말하려면 이념문제가 먼저 해결 되야 합니다.”  

“교회가 어떤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에게 십자가가 뭘까 생각해 봤을 때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고서라도 민족의 문제를 십자가로 여기면서 가야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기피하고 회피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제주도의 교회, 기독인들이 직면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기행을 이끌었던 송영섭 목사는 “제주4.3평화기행을 체험한 기독인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이 일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제주의 기독인들도 역사의 아픔에 몸부림 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제가 이 기행을 시작했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이런 의식을 일깨우는 일에 동참하기 바란다”말도 덧 붙였다. 

김령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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