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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시편 31:9~16)2017년 4월 2일 사순절다섯째주일설교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 | 승인 2017.04.03 15:37

■ 주간 단상 : 박근혜 구속과 특검의 절제

3월 31일,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 역사 상 또 하나의 기록적 사건이 발생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파면된 전임 대통령에게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곧바로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국민의 다수는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구속을 간절히 외쳤고, 또 일부는 집 앞에서부터 온 몸으로 구속을 반대하고 울부짖으며 저항하였다. 지난 4년 동안 벌어진 국정의 난맥상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무거운 책임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저런 행동이 나올 수 있을까 하고 참 의아하기만 하다. 저들도 분명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국민인데 그들의 머리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참 궁금하다.

구속 영장이 발부되자 기자가 특별검사 팀에게 이에 대한 논평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 가장 열정적으로 조사한 특검은 뜻밖에도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을 아꼈다. 하루 종일 사방에서 구속 영장 발부에 대해 수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정작 이번 구속의 중요 당사자요 가장 할 말이 많을 특검 팀이 언급을 자제한 것이다. 이것이 내게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을 애도하는 북한 주민들

북한 관련 뉴스를 볼 때 늘 의아한 것은 북한 지도자에 대한 그들의 격정적인 반응이다. 거의 광적인 흥분 상태에서 열렬히 환영하거나 슬픔을 표현한다. 누가 강제로 시켜서 했다고 하기에는 감정이 너무 거세고, 진심으로 기쁨과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저렇게 상황 판단이 우리와 다를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후 북조선은 제대로 된 민주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아마도 북한 주민들은 조선시대에 전주이씨가 500년 동안 권력을 세습하며 독점한 것이 아무 문제가 안 되었듯이, 지금도 조선 시대의 연장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단지 왕조만 김씨로 바뀐 것이다.

현재 북한 대부분의 주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교육을 아주 강하게 받아왔다. 해방 후 민주화와 쿠데타를 반복하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남한 주민들과는 의식구조가 같을 수 없다. 그렇게 보면 이해가 된다. 유교적 전제 군주 체제에서 왕이 죽으면 마치 내 부모가 죽은 것처럼 통곡했고 왕이 행차하면 모두 길가에 엎드려 절하는 것이 당연한 의식구조라면, 북한 지도자에 대한 주민들의 감정 표현은 우리가 볼 때는 과잉이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리라.

남한 주민들 대부분은 민주적 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일부, 특히 연세 많은 분들 중에서는 아직도 유교적 관념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분들이 있다. 그들 눈에는 대통령이 좀 잘못은 했지만 그래도 군주는 군주다, 군주를 백성이 탄핵하는 것은 역모라는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분들의 의식구조에서는 민주화를 외치는 이들은 분수를 모르고 아주 버릇없는 무뢰한일 뿐이다.

이제 작년부터 시작된 탄핵 정국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국민의 다수는 겨우내 길거리에서 보낸 보람을 만끽하고 있고, 소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현실 앞에 망연자실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독재 권력을 탄핵하고 법정에 세운 민주진영은 특별검사 팀처럼 대응을 절제할 필요가 있다. 아직도 독재자를 옹호하는 이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라 하여 국민이 아니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묵묵히 법에 의해 모든 것이 진행될 수 있도록 지켜보고 격려함으로써 불필요한 국민감정 분열을 예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의 공의로운 손길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정의는 반드시 세워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 좋겠다.

1. 고통스러운 인생

1) 오늘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힘든 지를 하소연하고 있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9절)

하루하루 너무 걱정거리가 많아서 눈과 영혼과 몸이 쇠약해졌다. 힘든 현실에서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은 눈이 약해진다.

렘브란트, 탕자 돌아오다(부분), 1669년

탕자의 비유를 그린 렘브란트는 집 나간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눈을 반쯤은 감기도록 쇠약하게 그렸다. 근심이 많으면 영혼도 쇠약해진다. 영민하던 사람도 정신이 혼미해지고 때론 멍하기도 해서 바른 판단을 못하기도 한다. 이러면 몸 관리도 잘 안 된다. 온 몸이 매 맞은 것처럼 아프기도 하고, 요즘은 면역력이 떨어져서 대상포진에 걸리는 사람도 많다. 삶 자체가 너무 힘들어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다.

2) 우리는 모두 기쁨과 희망으로 채워진 삶을 염원하지만 기대와는 반대로 슬픔과 탄식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삶에 아무런 의욕도 없고, 그냥 습관처럼 한숨만 나오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내 인생에 더 이상 햇살은 비치지 않고 늘 잿빛으로 흐리기만 하다. 우울한 날들이다.

고흐, 슬퍼하는 노인. 1890년

현대인들은 50살을 넘으면 누구나 갱년기를 맞이한다. 그런 거 못 느끼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은 정말 감사해야 한다. 청소년기에 사춘기를 피할 수 없듯이 청년기와 장년기를 거쳐 노년을 앞두고 갱년기를 피할 수 없다. 이때는 인체의 호르몬에 변화가 생기면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상을 경험한다. 다행히 약하게 지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마침 그 때 생활의 극단적 변화나 정신적 충격을 당하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악화되기도 한다.

정작 본인도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주변인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다. 오늘 시인의 고백처럼 이런 때는 기력이 떨어지고 뼈가 막 녹아내리는 것 같다. 인생의 아주 심각한 위기의 때이며, 우리는 모두 나이를 먹으면서 이러한 위험에 직면한다.

2. 외부로부터 오는 고통

1) 오늘 시편의 시인은 자신의 내적 고통만도 힘든데 더 나아가 여기에 외부에서 발생하는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11절)

자기 혼자 몸과 마음으로 힘든 것은 어떡하든지 스스로 추스르고 일어날 수도 있는데 여기에다가 주변 사람들의 비난이 더해지면 정말 고통스럽다. 대적은 꼭 적이라기보다는 경쟁자일 수도 있고 바로 옆의 이웃일 수도 있다. 내가 어려움 당할 때 위로해주고 공감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마땅한데, 반대로 공격하고 모욕하면 상태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는 꼭 직접 찾아와 따지고 공격하는 것보다 저 만큼 떨어져서 힐끔거리며 슬슬 피하는 이웃들 때문에 더 스트레스 받는다. 그 눈초리, 그 속삭이듯 하는 비웃음,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이 당시는 누군가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그렇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니 고통당하는 것도 어려운데 거기다가 죄인이라는 판정을 받고 나아가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고 소외시키는 사회적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주변인 입장에서는 괜히 죄인하고 어울리다가 같이 벼락이라도 맞으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다.

이처럼 고통을 가중시키는 현실을 욥기에서도 강하게 하소연하고 있다.

“ 그가 내 가족을 내게서 멀리 떠나가게 하시니, 나를 아는 이들마다, 낯선 사람이 되어 버렸다. 친척들도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구들도 나를 잊었다. 내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와 내 여종들까지도 나를 낯선 사람으로 대하니, 그들의 눈에, 나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 되고 말았다.

종을 불러도 대답조차 안 하니, 내가 그에게 애걸하는 신세가 되었고, 아내조차 내가 살아 숨쉬는 것을 싫어하고, 친형제들도 나를 역겨워한다. 어린 것들까지도 나를 무시하며, 내가 일어나기만 하면 나를 구박한다. 친한 친구도 모두 나를 꺼리며, 내가 사랑하던 이들도 내게서 등을 돌린다. ” (욥기 19:13~19)

누군가 고난당하는 상황에서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식구, 친구, 이웃이 매우 중요한데, 오늘 시인은 본인도 힘든데 주변으로부터도 크나큰 상처를 받고 있다.

2) 나아가 시인은 폭력을 당하지 않을까 늘 위험을 감지하고 있으며 불안에 떨고 있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13절)

집에서도 일할 때도 길을 갈 때도 누군가 나에게 테러를 가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삶은 평안할 수 없고 행복할 수도 없다. 한국에서 일하는 미국인들은 한국이 살기 좋다고 한다. 미국 가보면 미국에서 살고 싶어진다. 물론 미국도 빈민지역이 있어서 한국보다 못한 곳도 많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미국 환경이 한국보다는 훨씬 낫다. 그럼에도 한국이 살기 좋단다. 뭐가 좋으냐고 물으면 대부분 이렇게 대답한다, 총이 없어서 안전하다고! 미국에서는 공공장소나 학교에서도 심심치 않게 총기 사고가 나서 끔찍하게 죽거나 다치는 것을 보면 정말 그러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를 가든 늘 총알이 어디서 날아오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삶은 결코 평화로울 수 없고 행복할 수 없다.

폭력의 위협 속에 사는 삶은 실제로 폭력을 당하지 않는다 해도 불안하고 고통스럽다. 그런데 실제로 시인에게는 구체적인 폭력의 위협이 가해지고 있고 살해 음모까지 진행되었다. 끔찍한 일이다.

이스라엘에 닥칠 강대국의 침략을 예견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미켈란젤로, 예레미야. 1517년

수많은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겁에 질려 있다. 너희는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합니다. 저와 친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립니다. '혹시 그가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그를 덮치고 그에게 보복을 하자' 합니다. (렘 20:10)

이런 삶을 얼마나 더 이어갈 수 있을까!

3. 하나님께 매달리는 신앙

1) 단 며칠만 이렇게 살라 해도 끔찍한 현실이 이어지고 있는데 오늘 시인은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14절).

이게 오늘의 결론이다. 내가 아무리 눈이 짓무르고 영혼이 무너지고 몸이 쇠하여져도, 더욱이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고 위협하고 폭력과 살해 위협을 당한다 해도,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다. 아니 그럴수록 하나님만 의지하렵니다.

이러한 시인의 독백이야말로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끝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눈물의 신앙으로 고통을 극복해낸 이스라엘의 역사, 그리고 수많은 기독교 신앙의 선배들 속에서 끊이지 않고 울려 나오는 신앙고백이다.

2) 하나님만이 내 주님이라는 믿음은 야곱의 삶에서 구체화되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야곱은 형 에서의 진노를 피해 멀리 하란으로 도망가서 20년을 살았지만 마냥 그렇게 살 수는 없었고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고향에는 야곱을 보호해 줄 어떤 것도 없었으며 에서는 20년 동안 복수의 칼날만 갈고 있었다. 홀로 떠났던 길은 이제 4명의 아내와 12명의 아들을 비롯하여 대가족이 되었다. 정보에 의하면 에서는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야곱에게로 다가오고 있다. 뒤로 돌아설 수도 없고 이대로 죽을 수도 없다.

그럼에도 결국 야곱의 인생이 파멸이 아니라 행복으로 결말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었다. 수완이 좋기로 하면 야곱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수단이 좋아도 우리 인생의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야곱의 위대함은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하나님을 붙잡았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겠습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구원해주실 수 있습니다.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구스타프 도레
천사와 시름하는 야곱, 렘브란트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는 장면을 많은 화가들이 그렸고 렘브란트와 구스타프 도레의 그림이 가장 유명하며 나도 이 그림들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이 장면 그림들은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는데 힘 겹기는 하지만 대등하게 겨루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최근 전혀 다른 그림을 발견했다.

누구 그림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다른 그림들과 달리 전적으로 하나님의 천사에게 매달리는 모습의 야곱이 이채롭다. 야곱이 천사와 겨루는 것이 아니라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이다.

보라 저 야곱의 간절한 표정과 놓지 않는 손을! 나는 이것이 더 리얼하다고 생각한다.

죽을 만큼 힘들고 두려울수록 하나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져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체면은 교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하나님만이 저를 살려주실 수 있다고 매달리는 곳에 기적이 일어난다. 오늘 시인은 결국 이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내 인생의 현실에 대해 견딜 수 있으면 그냥 견뎌라. 참을 만하면 그냥 참아라. 그러나 정말 이 시인처럼 힘든 상황이면 결단해야 한다. 내 알량한 지식이나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겠다고 결단해야 한다. 그리고는 야곱처럼 눈물, 콧물 흘리며 머리 헝클어지고 다리뼈가 부러질 정도로 하나님께 매달려야 한다.

그곳에서만 새 인생이 아침햇살처럼 펼쳐질 것이다.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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