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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의 탄압에 저항하는 민중혼(民衆魂) (25)<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7.04.04 11:15

「사상계」 (思想界), 죽음을 넘어....가다

유경환이 인용한 「조선일보사보 제 1198호, 1995.4.1.」자에 실린 방우영의 생각 나는 대로“의 글은 다음과 같이 끝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사상계의)인수계획은 어이없이 무산되고 인쇄 직전에 있던 「조선일보사상계」제 1호는 햇볕을 보지 못한 채 한권의 기념물로 지금도 조사부에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잡지 발행은 박 정권 하에서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이렇게 방우영의 「사상계」최후의 장(場)을 인용한 유경환이 이제는 그 자신의 말로 「사상계」를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사상계」는,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주의라는 네이션 빌딩을 위한 주춧돌 놓기 과정에서 서구식민주주의와 그리고 실용주의적 문화 및 유럽의 새 예술사로 특히 동구의 반체제 작가들의 정신을 필요한 크기의 주춧돌로 익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와 민족주의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가도 1960년대 새로운 시민사회의 시민들에게 아울러 체험 시켰다. 이것은 고귀한 업적이다. 이 업적을 이룩한 지식인들은 「사상계」15년에 걸쳐 편집에 참여하고 헌신한 지식인 그룹이다. 이 가운데서 가장 용기 있게 기수 노릇을 한 한사람으로서, 민주주의를 위한 순교자로서 장준하를 우리는 남달리 기옥하고자 한다.”

조선일보가 「사상계」의 인수에 실패한 것은 이제 와서 생각하면 하늘의 뜻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조선일보 사상계」라니 말이 되는가! 언론 자유를 열망하는 동아, 조선의 투위 축출 이전이라 해도 그리 되서는 안될 일이라 할 터인데, 지금 만일 「조선일보 사상계」라 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언론 자유를 열망하는 동아, 조선의 투위 축출 이전이라해도 그리 되서는 안될 일이라 할 터인데, 지금 만일 「조선일보사상계」가 출판계에 거래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아, 어쩌다가 그 잘났던 「사상계」가 이 꼴이 되었을까? 할 것 아닌가! 생각만 해도 억울하고 분할 일 아닌가?

그래서 “조선일보가 사상계의 인수에 실패한 것은 이제 와서 생각하면 하늘의 뜻 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방우영은 말하기를, “...그리고 잡지발행은 박정권 하에서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면서 못내 아쉬워했지만, 「사상계」는 그렇게 가야만 했다. 「사상계」의 살아온 길이 그리도 당당했던 것 같이 가는 길도 그렇게 당당해야 했다. 유경환은 「사상계」와 장준하를 묶어 ‘민주주의의 순교자“라 했다. 함석헌은 ”민주주의야 말로 종교“라 했다. 유경환과 함석헌의 장준하에 대한 논(論)을 묶으면 장준하는 참 종교의 순교자가 된다. 

모든 종교가 다 해체되어도 민주주의는 영존할 것이라면 장준하의 「사상계」, 「사상계」의 장준하 역시 영존할 것이다. 방우영은 「사상계」가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했지만 「사상계」는 그 죽음을 넘어 제 길에 든 것이다. 미완성의 영원 길 말이다. 

신통찮았던 장준하의 의회 생활

자신의 하는 일이 당당하려면 그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장준하의 의정생활은 그러지를 못했다. 그것은 장준하에겐 형언할 수 없는 고행이었다. 분명히 말해 장준하에겐 정치판에 들어온 것 자체가 상황에 밀려 억지로 된 것이었으니 별수를 부린다 해도 그 판이 춤판 일 수는 없었다. 그가 일본경찰의 감시 하에 있는 아버지, 일군(日軍)의 위안부로 끌려가게 될 직전의 연인 김희숙, 그리고 가문의 안전을 위해 대학의 졸업학년도를 앞두고 일군에 지원 입대를 하여 평양 제42부대 복무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그의 소속이 평양 제42 부대의 군마(軍馬)중대(中隊)였다. 군마중대의 과제는 글자 그대로 제42부대에 속한 모든 군마를 관리하는 일이었는데 장준하는 자기에게 부여된 군마의 관리에 심혈을 다했다. 

한인출신병사들은 그 군마의 관리에 진액을 쏟는 장준하를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정신이 약간 이상한 거 아냐?”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일본군에 끌려 왔다 해도, 그렇더라도 조선청년이 혼마저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 마치 얼빠진 놈 대하듯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준하의 생각은 이랬다. 
“일본이야 그렇다지만 말이야 무슨 죄가 있는가? 그것도 명이 있어 사는건데....기왕 내 손에 주어진 거라면 정성을 다해 돌보는 것이 옳다.”
그래서 장준하는 그 일본의 군마를 마치 더할 수 없는 자신의 애마처럼 만져주고 긁어주고 씻겨주고 있다. 장준하의 손에 가는 말들은 예외 없이 그 털들에 빛이 흘렀다. 그 자신의 매일 매일의 삶에 뜨거운 의미를 부여해 오는 그였다...

그런데 그 장준하가 다시 찾은 제 나라의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갈수록 그 국회가 남의 땅처럼 느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잘못왔어. 내가 올 곳이 아니었는데...”
장준하가 의회를 마치 남의 세상으로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 자신의 확신(신념)에 대한 절대 신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 한번 “옳다”는 영원한 “옳다”였고, 한번 “아니다”는 영원한 “아니다”였다. 그는 의(義)의 사람이었고, 신(信)의 사람이었다. 그는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외에 다른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당시 의회 의원 중 특히 조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장준하와는 전혀 다른 이들이었다. 낮에는 야당의 투사요, 밤에는 간데없는 집권층의 사람들로 변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다 장준하에게 조직원으로서는 약간의 핸디캡(?)같은 게 있었다. 행이었다 할까, 불행이었다 할까 장준하는 누구를 “따라서” 무엇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앞장에서 이끌어온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해온 이제까지의 일들이 결코 평탄한 길은 아니었지만 그가 바라고 구상하는 대로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정치판에서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외형은 어떻든지 내용은 무서운 이권, 이욕 집단이었다. 

그런데도 장준하의 가슴 속에 “제대로 한번 해보자”하는 꿈은 시들 줄 몰랐다. 윤보선과 손을 잡고 국민의 당을, 양일동과 함께 통일당을 만들어 새 정치의 길을 열어보자 정열을 쏟았다. 그러나 새 정치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제8대총선(1971.5)에서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제9대 총선에서는 통일당후보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정치판에서의 장준하, 재야에서의 장준하가 아니었다. 재야정치세력의 연대, 나아가서 연합을 위해서라며 통일당을 탈당했지만, 이후 장준하의 제도권정치와의 인연은 더욱 멀어 갔다. 

재야 대통령 장준하

이후 장준하의 역할을 보면, 장준하의 장준하 됨은 역시 “재야(在野)의 사람”이라는 있다해야 할 것이 었다. 야(野)에 있는 사람, 야(野)에 있어야 할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랬다. 장준하는 “재야의 사람”이어야 했다. 누구의 입을 통해서인지 장준하에게 정말 영광스런 별명이 주어졌다. 「재야(在野) 대통령」이라는 별명이었다. 재야(在野)대통령 장준하! 천상천하에 이보다 더 값진 이름은 없을 것이다. 그 「야(野)」라는 말 때문에 하는 말이다. 

아, 야(野)라니!...
야(野)가 뭔가?
야(野)라! 그곳은 하늘이 맞닿아 있는 곳이다. 하늘의 소리 그침 없이 들리는 곳이다. 하늘의 소리 듣는 자리, 그 곳을 야(野)라 한다. 참으로 한다면 거기 무슨 대통령 따위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만 보다 더 큰이가 없다는 뜻으로 거기 야(野)에 있는 (在)가장 큰 자라는 의미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재야의 대통령’ 이라고. 

함석헌은 그 재야인사(在野人士), 곧 야인(野人)을 ‘들사람’이라했다. 그렇듯 의회당(議會堂)의 사람으로 실패한 이후의 장준하를 따르다 보면 정치인으로 실패한 장준하를 더 할 수 없이 감사하게 된다. 재야에서의 그의 역할, 민중과 더불어 이루어가는 그의 행진이 아름다움을 넘어 거룩하다 해도 과언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의로웠고 휘황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재야의 대통령」, 아마도 장준하를 맨 처음 그렇게 부른 이는 하늘이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그 “장준하를 죽음에 그대로 버려둘 수 없다”는 한 “사람”이 나타났다. 또 한 하늘의 사람 문익환(文益煥)이었다. 그는 공중석상에서 까지, “나는 장준하의 뒤를 이으려 한다”고 거침없이 토로하는 사람이었다. 

그랬다. 문익환은 장준하의 뒤를 이었을 뿐만 아니라 죽지 않는다는 것,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명명히 밝혔다. 둘이었으나 하나로 살다간 장준하와 문익환, 문익환과 장준하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후 장(場)을 달리해 더 말해질 것이다.

어쨌든 장준하는 그 제도권(制度圈)을 벗어나 다시 그의 자리인 야권(野圈·민중의 장場)으로 돌아왔다. 분명히 말해 그의 4년간의 국회의원 생활은 떠돌이 살이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었다. 천생의 야인이 야(野)를 떠나 성안으로 들어갔으니 그의 기개, 그의 자유의 혼, 그의 소요유(逍遙遊)에 닥치는 질고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본향인 야(野)를 찾아 돌아오면서 곧바로 다시 신명(神明)을 받는다. 박정희가 감히 정권의 존폐를 걸고 선포한 소위 「10월 유신」(1972.10.17.)에의 저항이라는 것이다.

1972년, 10월 17일 오후 박정희는 전국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한다. 박정희는 그것을 「10월 유신」이라 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그 유신을 그대로 끌어다 쓴 것이다. 박정희는 특별 선언에서 「10월 유신」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평화적통일의 지향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위해 구질서를 청산하고, 통일을 향한 개혁을 단행-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국무회의를 설치한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슬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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