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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Day] 2017년 4월 9일 사순절 여섯째주일(종려주일) 마태 21:1-11<말씀의 잔치>
홍상태 목사 | 승인 2017.04.06 12:2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이야기가 종려주일 본문으로 택해졌지만, 여기에 종려나무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본문은 십가가까지 이어지는 수난 이야기의 시작 역할을 한다. 본문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이 여러 가지 해석을 해 왔지만 특별히 뚜렷하게 교리적 논쟁의 대상이 되는 부분은 없다.

본문에는 복합적으로 뒤엉켜진 채 등장하는 몇 가지 주제가 있는데, 이에 관한 신학적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본문에서는 정치적 주제가 기독론, 속죄론, 종말론과의 연관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제2 성전 유대교 시대(the age of Second Temple Judaism)의 메시아 대망(expectations)의 배경에서, 예수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동물을 타고 입성하는 장면은 사복음서에 공통으로 나온다. 이러한 대망은 여러 다양한 전통과 기대와 연관이 있었으며, 매우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중에는 로마인 정복자와 부역자에 대한 무장 투쟁 운동도 있었다. 예수의 생애에 관한 비판적 연구와 성서 자체, 기독교 전통에 의하면, 그런 여러 형태의 대망들이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태복음은 예수를 메시아로 규정하는 초기 기독교의 전통을 반영한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예수와 교회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예수와 관련된 사건을 율법과 선지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율법과 선지자를 예수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과 <구약을 예수의 생애 단계와 그 이후의 관점에서 조망하는 것>은 두드러진다. 필요와 의도에 의한 선택의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메시아가 어떤 분인가에 관한 신학적 입장이 전제된다. 수많은 다양하고 또는 서로 모순되는 메시아론 중에서 어떤 입장이 맞는가, 메시아가 왔다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인가 등에 관해 어떤 견해를 취하는가?

마태복음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에는 메시아적 주제와 승리의 주제가 두드러진다. 여기에서는 구약의 메시아 대망과 중요한 순례 축제들(pilgrimage festivals)에 관한 언급과 암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직전의 장면에서 도시는 죽음을 가져온다. 즉 메시아는 죽임을 당할 시간이 되었다. 예수는 20장에서 예고된 것을 이루기 위해 나귀와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할 준비를 하셨다. 이 일련의 사건 자체가 매우 명확하고 담대한 메시아적 주장이다. 이 이야기는 분명하게 다음의 사실들을 밝히 드러낸다: 예수가 메시아적 입성을 계획하고 수행한다; 군중은 그의 입성을 기뻐하고 환호를 보낸다; 하나님의 메시아의 통치에 위협을 느낀 로마 권력은 서서히 대책을 마련한다.

이 이야기 속에는 일반적인 메시아의 이미지 – 화려하고, 축제적이고, 장엄하고, 충격적일 정도의 파괴력을 보이는 – 와는 명백하게 대조되는 측면이 강조된다. 스가랴 9:9은 메시아가 겸손하고 온순하게 나귀를 타고 온다고 말한다. 만일 이것이 예수가 메시아가 되는 방식이라면 이는 대중적인 메시아관과는 배치된다. 이런 문제는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예고에 의해 더 심각해진다.

구약에 나오는 위대한 승전 영웅의 이미지와 로마 병정의 위협적인 행진을 기억하고 있는 대중들에게 이런 대조는 신학적 패러디로 다가오게 된다. 오늘 본문은 패러디적 사고를 촉발한다. 예수가 나귀를 준비시킨 과정과, “그가 갈릴리 나사렛에 나신 예언자”라는 평가와, 이에 앞서는 어색하게 강조되고 기괴하기까지 한 상징적 행동들은 그런 점을 강조한다. 오늘의 신학자들은 여기서 <하나님의 방식은 이 세상의 방식과 다르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쉽게 판단할 것이다. 여기 나오는 통치는 섬김이 그 핵심적 요소로 작용한다. 온순함, 겸손함, 평안함, 자비, 자기희생적 관용, 연민 등은 하나님의 통치의 핵심 요소이다.
 
위의 주제와 함께, 본문에는 조금 낯설 수 있는 두 번째 주제가 등장한다. 이것은 본문에 묘사된 예수의 이상한 메시아적 입성의 형태가 기독교인들이 각자의 다양한 현장에서 다양한 메시아적 기대를 갖고 활동하는 데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하는 주제이다. 사람이 일하는 방식과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구별하는 그 다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하다.

오늘 이야기에 나온 방식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는 이 세상의 권력과 권세자들에게 언제나 큰 도전이다. 영적인 도전일 뿐 아니라 정치적인 도전이기도 하다. 예수의 방식은 열심당 등의 어떤 무장 혁명가들과도 달랐고, 정당을 통해, 혹은 입법이나 행정명령을 통해 목적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의 방식과도 달랐다. 왕인 예수는 권력자에게나 변덕스러운 군중들에게나 위협이었다. 예수는 이 세상의 질서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입성하거나,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메시아적 통치의 영역을 개인의 영혼으로 제한하고, 관심을 이 세상이 아니고 다음 세상에 집중하기도 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대안적 사고를 하도록 권한다. 콘스탄틴 황제 이전의 순교의 이야기나 오늘날의 변화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정치적, 후기 식민주의적, 해방적 관점의 신학들 안에서 국민들의 자발적 저항은 나사렛의 예언자 예수가 온화한 임금으로 통치하신다는 주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역자 주: 촛불 집회의 평화적 분위기와 맞불집회의 폭력적 언어·행동)

예수의 메시아적 방식은 로마 제국이나 그 괴뢰 정권이나, 궁정 예언자들이나, 대중 선동가들의 방식과 다르다. 따라서 예수의 방식은 권력층이 자신의 방식으로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상황에서는 위협이 된다. 기독교인들이 권력을 잡았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임마누엘이라 불리시는 분의 성품과 방식을 본받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새로운 사회 질서를 꿈꾸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James O. Duke, Professor of History of Christianity and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Brite Divinity School, FortWorth, Texas
 

주석적 관점

예루살렘으로의 승리의 입성에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예수가 메시야라고 고백한 것처럼 무리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한다. 그들은 예수를 “예언자”라고 외쳤는데(마21:11비교16:13-14), 그들의 외침은 예수를 통해 유대인들의 메시야대망을 성취한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확증은 예수와 예루살렘 공의회간의 고조된 갈등을 가져왔다.

“무리들”은 마태복음에서 집단으로서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기능한다. 그들은 예수 공생애 초기에 여러 지역에서 몰려왔었다(4:25).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7:28-29 비교13:2). 그들은 여러 번 예수가 병자를 치유하는 능력을 보며(12:15;14:14;15:30;19:2), 그의 권위에 놀랐고(7:28-29;9:8;22:33), 그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울 보고 “이런 것은 이스라엘에서 처음 보는 일이다”(9:33)라고 하며 놀랐다. 그들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일 것이라고(12:23) 생각하기 시작했다. 승리의 입성 전에 무리들은 몇 조각의 빵과 몇 마리의 물고기로(14:13-21;15:32-39) 두 번이나 그들의 배를 채웠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가 말을 타고 성에 들어올 때에 그렇게 열광하는 것이 놀랍지는 않다. 행진이 감람산에서(21:1)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 행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인데, 감람산은 전통적으로 메시야가 오시는 장소로 여겨져 왔다(슥14:1-11).

“이 사람이 누구냐?”라는 질문과 무리의 반응은 마가의 설명에 대한 마태의 중요한 수정이다. 부가적인 수정은 1)예수의 왕되심을 강조하고 유대전통의 연속성에 위치시키는 예언의 성취를 추가한 것 2)무리들이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 한 것은 마태복음 처음부분 족보의 반향이고 메시야라는 주장에 대한 강조이다 3)예수의 도착에 성이 소란해진 것은 그의 십자가형 때의 지진이나 우주적 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태의 이야기는 유대성경에서 공식적 인용도 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이것은 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예를 들어 1:22;2:15;8:17)는 말씀이다. 이러한 인용은 유대인들의 메시야대망에 있어 예수의 연속성과 예언의 성취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의 공식적 인용은(5절)은 이사야와 스가랴에서 온 것인데 왕의 오심을 기다리며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다. 본래 예언서의 맥락에서는 첫 번째 부분인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에 이어 “너의 구원자가 오신다”(사62:11b)고 말한다. 본래의 예언은 미리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옹호와 구원의 약속 그리고 마태의 인용에 의해 전달된 기대들을 보고 있다.

뒤쪽의 인용은 스가랴 9:9에서 왔다. 원문의 배경은 주님이 적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에 관한 신탁인데 승리와 평화의 왕으로서 입성하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 마태는 나귀의 등을 타고 오는 이상한 모습의 예수를 묘사하며 신탁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어쨌든 시골사람에게 탈것을 빌리는 일상적 행위를 구원과 회복의 구약의 에언들과 연관시킴으로 중요하게 만들었다. 예수는 승리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 하나님의 깃발 아래에서 그렇게 한다. 이것에는 물론 대가가 있는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임박한 죽음에 대한 것을 말해 준다(20:17-29).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무서운 현실을 무리들이 색종이를 뿌리는 행진의 1세기 버전인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깔고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편 것을 통해 뒷전으로 밀어낸다.

마태는 예수를 “메시야,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1:1)이라고 정의하며 시작한다. 마태의 이야기 속의 인물 묘사 또한 비슷한데, 특히 그의 치유행위와 연관하여(9:27;15:22;20:30)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언급하고 있다. 한 번은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 하나를 고쳐 주었을 때, 무리가 모두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 아닌가?”(12:22-23). 그들의 질문은 단지 예수가 유대의 좋은 가문출신이라는 것을 제시하거나 다윗과 같이 중요한 왕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간접적 방식이 아니다.

마태의 이야기에서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메시야적 강조이다. 바리새파사람들 까지도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22:41-42)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무리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을 때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21:9 비교,시118:25-26) 그들의 메시야 구원자의 오심을 축하하는 것이다. 그들의 반응은 성전 뜰에서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하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화가 난(21:15-16)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주시를 피할 수 없었다. 

그 때 예수와 그의 일행은 예루살렘 도성에 들어오는데 온 도시가 들떴다(seio, tremble의 의미). 이 동사와 명사형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지진과(27:51), 빈 무덤에서의 천사의 나타남(28:2)을 말할 때 사용된다. 땅의 흔들림은 “주님의 날”(욜2:10-11)이나, 하나님의 임재(시67:8;욥9:6;사13:!3;겔38:20 등)와 연관된다. 비록 예루살렘 백성들이 예수의 오심을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적절한 것이었다. 메시야가 오는 것은 지구가 흔들리는 사건이다. 비록 무리들이 재판에서 빌라도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요구하며 톤이 달라졌지만, 도성에의 입성할 때만 해도 그들은 예수를 그들이 기다리던 분 중의 하나로 인식했던 것처럼 보인다.

Audrey West, Adjunct Professor of New Testament,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Illinois.
 
목회적 관점

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에, 계절의 흐름은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사건이 서로 상승효과를 나타내는 것을 경험할 때 우리를 십자가에 더 가깝게 이끈다. 종려주일의 전례와 고난주일의 전례는 같은 무대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드라마들은 너무 가까이에 펼쳐져 있어서 정서적으로 이동할 여지가 거의 없다. 축하와 찬양은 상실과 애통으로 수렴한다. 강력함과 취약함은 하나의 전례의 순간을 공유하면서, "호산나!"라고 외치며 동시에 십자가의 날카로움을 버티게 하고, 또 애도하게 한다. 종려주일의 예식은 우리가 교회로서 그리고 신앙 공동체로서 공유하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고려하도록 강조함으로, 공동의 신앙, 용기 있는 선포, 두드러진 행동을 하도록 요청한다.

공동체가 강조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것은 현재를 아주 강력하게, 메시지를 아주 설득력 있게, 사랑을 아주 완전하게 경험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비범한 용기를 드러내며, 그래서 그들은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종교와 시민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밖의 마을과 도시에 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여리고처럼 먼 곳에서부터 여행했기 때문에 살기 위해 예수가 거저 주시는 양식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들이 눈에 보이는 부흥으로 예수를 따르고, 들에서 열린 연회에서 저녁을 먹고, 예수가 만졌을 때 기적을 목격하고 예수가 선포하는 복음을 들었을 때, 예수의 사역이 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으며, 그들의 영혼을 자라게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다르다. 예수의 목소리는 예수가 그들이 기다려 온 분이라고 분명하게 대답하는 친구들과 낯선 사람들의 평범한 공동체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그들이 이 여행을 시작할 때 느끼는 기대와 흥분이 밝혀져야만 한다. 그들은 예수의 주위 사방에 잠재적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적대자로 생각하고 그들이 살아남기 위한 가장 큰 적대자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행렬이 도시의 성문에 접근 할 때 목격자의 증언은 격렬해진다. 그들이 외치는 호산나는 산간 지방까지 메아리친다. 예수는 세상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부인할 수없는 표현이 되었다. 그들의 외침이 너무 강렬해서, 마태는 그들을 스가랴가 예언한 대로, 말을 탄 메시아 같은 군사 지도자가 아니라, 모든 나라를 위한 평화와 화해를 그의 입에 담고서 나귀의 등에 타고 성문으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전사에 비유한다.

그들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면서, 이 복음 선포자를 위하여 외투와 망토와 나뭇가지로 왕을 위한 융단을 만들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그들의 외침은, 분열의 얼룩이 여전히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방해하며 공동체의 복지를 위협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거의 본능적으로, "호산나!"라는 외침이 우리의 입술 밖으로 터져 나오고, 삶의 질에 대하여 성찰하면서 자기 검열을 하는 사순절에 대한 우리의 약속을 보완하는 이 승리의 행진에 동참하게 된다. 비범한 용기를 지닌 평범한 대중이 배타적인 관행과 정책에 반대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9절)과 함께 할 때 평화와 화해가 가능해진다.

역사는 우리가 홀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함께 할 때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사순절 여행을 계속하면서 바로잡고 연습할 수 있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자유를 찾는 노예들을 위해 Underground Railroad(남부에서 북부나 캐나다로 탈출하는 노예를 도와주던 비밀 조직)에서 안전한 통행을 제공한 여성들과 남성들이 있었다. 1930 년대 히틀러와 나찌가 아니라 주 예수에게 충성한다는 확실한 입장을 취한 Dietrich Bonhoeffer와 고백교회의 사람들을 기억하라. 남아프리카의 젊은이들은 더 이상 인종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꿈꾼 넬슨 만델라의 지도 아래 인종분리정책에 반대하여 1944년에 아프리카 민족회의 청소년 연맹을 결성했다.

많은 사람들이, 1963년 8월 28일에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미국의 수도에 모인 다양한 인종, 민족, 사회, 종교적 배경을 가진 25만 명의 여성, 남성, 어린이를 흔하지 않은 용기의 표본에 포함시킨다.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먼지로 뒤덮인 길을 걸었던 사람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 순례길에 개인적으로 큰 위협을 받았지만, 국가를 분열시키는,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억압하는 법을 비난하기 위해 행진했다.

마틴 루터 킹 2세 목사는 그의 유명한 "I Have a Dream"이라는 연설의 결론에서,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고 정의가 인간관계의 규범적 표현이 되는 세상에 대한 꿈을 분명히 밝혔다. 그와 함께, 거기 모인 군중들과, 거실에서 지켜 본 사람들과 전국 곳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절망의 계곡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승산이라고는 없는 상황 앞에서 꿈을 꾸고, 새로운 창조를 예언하는 예언자로 서있었다.​1)

우리는 이 이야기와 다른 사람들을 기억하기에, 우리가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예수와 함께 행진하고 평화와 화해의 말씀을 선포할 용기를 가질 수 있다. 결국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공식적인 권한이 없었지만, 이웃과 친구, 낯선 사람과 먼 곳에서 온 여행자, 어린이와 어른들은 예수와 함께 성문으로 들어가서 오래도록 그들이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해 온 배타적인 관행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11절)라고 대답했다.

46절에서 밝혀지듯이 종교 지도자들은 이 행진을 방해했지만, 마태는 그들이 왜 그랬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아마도 이 순간의 열정은 민중들이 정의의 편에 서는 것이 세상에서 되풀이 되는 때를 예언하는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종교지도자들은 민중들이 정의롭고 생명을 긍정하는 존재가 되려는 깊은 열망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우려했을 것이다. 아마도 예언자이신 예수의 모습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9절)과 함께 담대하게 서서 평화와 화해를 계속해서 실천하게 하는 전례의 순간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Veronice Miles, Ruby Pardue and Shelmer D. Blackburn Assistant Professor of Homiletics and Christian Education, Wake Forest University School of Divinity, Winston-Salem, North Carolina

설교적 관점

“두 개의 행진이 30년 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다”라고 성서신학자 마커스 보그 (Marcus Borg)와 존 도미닉 크로산 (John Dominic Crossan)은 자신들의 공저 “마지막 일주일: 예수, 예루살렘 입성에서 죽음과 부활까지” [다산초당 2012, 원제: The Last Week: What the Gospels Really Teach about Jesus’ Final Days in Jerusalem]에서 쓰고 있다. 그들은 이 두 행진을 비교하는데 하나는 동쪽에서 진행된 것으로 주로 농민들로 구성된 무리가 나귀를(donkey) 탄 갈릴리 출신 예수라는 사람을 따라 온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도시 반대편 서쪽에서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Pontius Pilate)가 제국의 기병과 군인들 행렬 맨 앞에서 군마를(war horse) 타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는 가이사랴 마리티마 (Caesarea Maritima)로부터 유대명절인 유월절에 혼란스러운 일이 일어날 경우 법과 질서를 지킬 목적으로 이 곳에 왔다.

로마의 행진은 보그와 크로산이 성경 외적인 자료들에 기초하여 상상력을 동원한 역사적 재구성이다. 하지만 그것은 저자들이 의도한 대로, 4만명 주민들이 살고있는 거룩한 도시[예루살렘]에 20만명의 순례자들이 몰려들어 긴장감이 고조된 그 곳에서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이“미리 준비된 행진”을 함으로써 생성된 [갈등의] 정치적 차원을 강조하려는 목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2)

두 저자는 고난주간을 지키는 교회의 예전이 미국 독립기념일 (Fourth of July)퍼레이드에 성조기 대신 종려나무를 들고 참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고난주간은 국가권력에 저항한 것이라는 의미-역자주] “모든 영광, 주님”등은 예수에게 붙여진 것이지 황제에게 드려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미국을 축복하소서” (God Bless America)와는 다른 “우리 승리하리라” (We Shall Overcome)등의 저항의 노래와 유사한 것이다.

마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온 도시가 “들떠 있었다고” (10절, was in turmoil, 새번역)하면서 “흔들렸다”(shaken) 혹은 “떨렸다”(trembled)라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ἐσείσθη;이 헬라어 단어는 대부분 캘리포니아 거주민이 잘 알고있는 지진을 뜻하는 seismic의 어근이다-캘리포니아는 지진이 많으므로). 게다가 “이 사람이 누구냐?”라는 어수선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마태는 군중들의 대답이 “그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 (11절)라고 말하고 있다. 이 대답은 마태가 인용한 스가랴 9:9-10에 의해 지지되는데 거기서는 승리한 왕은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들어오고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앨” 평화의 왕으로 묘사되어 있다.

나귀와 군마를 예언적으로 대비시킨 이 구절은 예수의 비폭력적 예루살렘 입성이 지닌 의미를 잘 보여준다. 환호하는 군중들은 겉옷과 나뭇가지를 던져 그의 길을 인도하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라고 외치며 다가온다. 호산나는 드물게 쓰는 아람어로 복음서에서 (마태, 마가, 요한 그러나 누가에는 없다) 그것도 예수의 예루살렘 행진과 연관해서만 나온다, 호산나는 문자적으로는 “기도하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혹은 도와주소서)  ”라는 의미를 지닌 찬미감탄사로 유대인에게는 할렐 예식서 (Hallel liturgy, 시편 118:25을 보라)의 일부분으로 사용되었고 후에 교회의 예전에 도입되었다. 

베네딕트 수도사 듀프너 (Delores Dufner, OSB)는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Reign of Christ Sunday)에 널리 불리워진 한 찬송을 썼다.

오 그리스도시여 우리가 당신을 우리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요?
교회가 찬양하는 것은 당신께서 보여주신  왕의 어떤 얼굴입니까?
영광과 권세와 부와 명예의 자리에 앉지 않으시고 당신은 다른 낮은 길을 걸으셨습니다.​3)

이 찬송의 도입부 질문은 오늘 종려주일의 핵심으로 접근하게한다: 이 예수 곧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이 예언자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온전히 답하기 위해 한 주간의 행사들이[고난주간] 진행될 것이지만 대답을 얻기 위한 무난한 출발점은 군중들이 외친 “호산나”에 함축되어 있다. 우리 교회도 시편 118편을 오늘에 맞추어 우리 자신의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응답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찬양과 몸으로 드리는 경배는 하가다 (haggadah)라는 유대교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거룩한 분께서 노예로부터 벗어나게 한 것은 우리 조상들만이 아니다; 우리 역시 노예로부터 벗어났다...그러므로 우리 조상들과 우리들에게 이 모든 기적을 행하신 분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예물을 드리고 영광을 돌리고 높이고 찬양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4)

우리의 고난주간 예전은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우리를 해방시키고 있음을 신앙공동체 안에서 예전적으로 다시 상기하는 것인데 그 해방은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올해 교회의 고난주간 행사는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진정으로 “다른 류의 왕”(different kind of king)을 환영하는지를 보여주며 시작해야 할 것이다.   
 
John Rollefson, Pastor, Lutheran Church of the Master, Los Angeles, California

1)  Martin Luther King Jr., “I Have a Dream,” in The Norton Anthology of African American Literature, ed. Henry Louis Gates Jr. and Nellie Y. McKay (New York: W. W. Norton & Co., 1997), 80.
2) Marcus J. Borg and John Dominic Crossan, The Last Week: What the Gospels Really Teach about Jesus’ Final Days in Jerusalem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2006), 2–4. Robert H. Smith anticipates Borg’s and Crossan’s imagining of a double procession from the east and the west in Proclamation 5, Series A: Holy Week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2), 7.
3)  Delores Dufner, “O Christ, What Can It Mean for Us,” in Evangelical Lutheran Worship (Minneapolis: Augsburg Fortress, 2006), #431. “O Christ, What Can It Mean for Us” by Delores Dufner, OSB (First Verse) Copyright ⓒ 2001, 2003 by GIA Publications, Inc., 7404 S. Mason Ave., Chicago, IL 6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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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See The Family Haggadah (New York: Artscroll/Mesorah, 2008), 45, 47.

 

홍상태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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