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이훈삼 설교
죽임 당하신 왕(요한 19:17~22)2017년 4월 9일 종려주일설교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 | 승인 2017.04.10 10:50

■ 주간 단상 : NBC 한반도 특집 방송

지난 3일, 미국 거대 언론사인 NBC가 주요 뉴스에서 한반도 문제를 특집으로 다뤘다.
 
그런데 이 뉴스를 전하기 위해 NBC는 한국 특파원이나 위성 방송 연결이 아니라, 앵커가 직접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와서 오산 미 공군 기지 현장에서 뉴스를 생방송으로 진행했다. 그 먼 거리를, 그 바쁜 사람이! 이건 그냥 심심하거나 관광 삼아 한국을 방문하여 진행한 것이 아니다. NBC가 굳이 앵커를 직접 한반도에 파견해서 생방송으로 뉴스를 진행하게 한 것은 한반도 상황이 그만큼 심상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011년 미국 인기 만화 심슨가족은 북한 김정일위원장과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만화를 방영했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는 방식은 대개 영화나 만화를 통해 대상자를 악마로 규정하고 미국 국민에게 이것을 자연스럽게 주입한다. 빈 라덴이나 후세인을 죽이기 전에 그렇게 했다. 그래야 나중에 전쟁을 일으켜도 미국 국민이 반대하지 않는다. 미국인들 머릿속에는 이미 그가 악마이기에 전쟁으로 제거하는 것이 정의라고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미국에서 북한 지도자는 이미 악마로 규정되어 있고, 그가 통치하는 북한 체제는 비상식적이기에 조건만 허락된다면 얼마든지 전쟁을 일으켜도 되는 대상이다. 그리고 실제로 전쟁에 돌입하기 전에 이런 작업은 더욱 치밀하게 가속도로 진행된다.
 
이번에 NBC 앵커가 뉴스를 진행한 오산 미 공군기지 지하 통제실은 1급 비밀장소이기에 우리나라 장군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한 방송사 앵커가 들어갔다는 것은 아마도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허락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NBC 방송사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트럼프 정부와 긴밀한 협력 가운데, 유사시 북한 공격을 염두에 두고 미리 미국 국민들에게 알려주고 사전 작업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한반도에서 곧바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트럼프는 시진핑과 정상회담을 하는 중간에 시리아에 59발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했다. 전문가들은 중국과 북한을 향한 강력한 경고 메시지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태평하다. 우리교회는 태평동에 있으니까 그렇다쳐도 전국의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태평하다. 대통령선거, 세월호, 핵발전소, 건강, 기업, 직장, 교육 등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그 모든 것들을 한 번에 무효화시켜버릴 수 있는 일이 멀리 있지 않은데, 우리는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낙관주의가 걱정스럽다. 그동안 군부독재정권들에 의해서 하도 여러 번 속아서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일에 별로 눈길을 주지 않는다. 걱정도 하지 않는다. 나는 이점이 두렵다. 좋은 현상인가? 내가 괜한 걱정을 이고 사는 것인가? 그랬으면 좋겠다, 제발!

1. 십자가 : 영원한 걸림돌
 
1) 기독교는 십자가 종교다. 교회나 기독교인을 상징하는 것은 십자가다. 십자가 없이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수 없고, 십자가 없이는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삶에 십자가가 빠질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십자가를 우회할 수는 없다. 문제는 주님이 주신 십자가가 너무 힘들다는 거다. 좀 쉬운 십자가는 없을까? 또 그냥 십자가를 안 지고도 주님을 따르는 방법이 없을까? 이 문제는 예수님 당대부터 초대교회도 마찬가지고 오늘 현대 교회에도 영원한 걸림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예수님 당시에도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었으니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2) 십자가가 달콤하면 좋겠다, 그러나!
 
바티칸 소장 금 십자가
달콤한 십자가, 금으로 만든 십자가, 매력적이다. 그러면 너도 나도 십자가를 지겠다고 아우성 칠 것이다. 이것이 주님 때부터 기독교인에 다가오는 치명적인 유혹이다. 현대 한국 교회는 이 유혹에 넘어갔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서 십자가를 빼고 변형하여 멋지고 평안한 복음으로 리모델링한 것이다. 그래서 어느새 기독교 복음은 주님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고 풍요로와지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국에 초대형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부자 되는 기독교인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럴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하여 저 구석에 처박혔다. 오늘 우리는 전반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맞이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 
 
1) 에밀 놀데, 그리스도의 생애 연작 중 ‘십자가 처형’, 1912년, 220*193cm
 
1913년에 한국도 방문하였다는 독일 화가 에밀 놀데가 그리스도의 생애 연작 중에서 십자가 처형을 그렸다. 사진기가 발명된 이후로 미술은 대상을 얼마나 똑같이 화폭에 옮기느냐는 중요한 과제가 아니게 되었다. 대신 화가는 자신의 내면적 감정이나 느낌을 형태와 색채를 통해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미술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에밀 놀데는 거칠고 원색적인 그림으로 매끄럽지 않고 세련되어 보이지 않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2) 고통
 
오늘 요한복음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18절) 이게 전부다. 십자가에 몸을 눕히고 손과 발에 큰 못을 갖다 대고 커다란 쇠망치로 사정없이 내리치고 뼈가 으스러지고 피가 튀고, 못 박히는 이들은 끔찍한 신음소리를 내고… 이런 자세한 사항들을 기록하지 않았다.
 
벨라스케스, 십자가 처형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 그림에서 많은 경우 예수님은 고통을 처절하게 느끼지는 않는 모습이다. 마치 고통을 초월해 있는 천상의 존재처럼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2천 년 전 이스라엘에서 실행된 십자가 처형은 어땠을까! 너무 잔인하고 처참해서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 마리아는 사랑하는 아들의 끔찍한 처형 앞에서 오열하거나 다리에 맥이 풀려서 기절하고 만다. 어느 어미가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있을까! 살이 찢어지고 뼈는 부서지고 뒤틀린다, 쉽게 죽지도 못하는 예수님은 메시아라 하더라도 이 고통을 피해갈 수는 없다. 아니 바로 이 극심한 고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택하신 것 아닌가!
 
에밀 놀데, 그리스도의 생애 연작 중 ‘십자가 처형’, 1912년, 220*193cm
주님의 머리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손과 발에서도 피가 철철 흐른다. 이미 주님의 얼굴과 몸에는 푸른색 죽음이 찾아들고 있다. 입은 벌어지고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다. 고통 앞에서 초연한 메시아의 의연함은 찾아볼 수 없다. 잠시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주님은 아픔과 절망을 향해 싸우고 있다. 6년 같은 6시간의 고통을 당한 뒤에야 주님은 죽음의 은총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빨리 죽여주는 것이 고마운 현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고통을 직접 당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누리는 삶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처절한 사랑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3) 십자가는 모욕이다.

고통과 함께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님이 당하신 모욕이다. 현대인은 명예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명예 때문에 자기 목숨을 거는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이다. 명예가 소중하긴 하나 목숨과 바꿀 정도라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천박한 자본의 세상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면서도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면 되지. 대체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명예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시대다.
 
대체적으로 옛날 사람들은 우리나라나 서양이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명예라고 믿었다. 명예롭지 못한 삶은 가장 부끄럽고 비참한 삶이었다. 지금 죽더라도 명예롭게 이름을 남긴다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명예를 소중히 여겼다. 이것이 고대 사회의 품격을 지켜주었다. 과거에 비하여 오늘 우리는 얼마나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가? 우리 모두는 옛날 사람들과 비교할 때 굴욕적인 삶을 살고 있다. 돈과 권력 앞에 스스로 자신의 명예를 쉽게 내던져버리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의 한 비극이다.
 
최근 한 퇴역 군인의 명예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이다. 그는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 해군 참모총장으로서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다. 20일 이상 직접 현장에 내려가 구조자들을 독려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검찰이 통영함을 방산 비리의 온상이었으며 해군 참모총장이 여기에 관련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그 결과 참모총장은 임기 7개월을 남겨두고 불명예 전역에 비리 당사자로 몰려 구속까지 된다. 그런데, 그 뒤로 1심과 2심 그리고 대법원까지 가서 내려진 판결은 무죄였다. 평생 정직하게 살아왔고 법원이 무죄로 최종 판결한 해군 참모총장의 명예를 권력의 하수인인 검찰이 하루아침에 박살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세월호 사고로 국민들의 분노는 청와대로 향하고 있었는데 이 분노를 정부는 해군 최고 책임자인 참모총장에게로 돌렸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군복에는 규정된 약장·훈장을 제외하고 다른 부착물을 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20일 넘게 팽목항 현장에서 구조 활동을 돕던 황 참모총장이 팽목항에 내려온 대통령에게 브리핑할 때도 당당하게 노란 리본을 달고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괘씸죄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듯이 군대에서 별 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것도 최고 자리인 4개를 달고 참모총장이 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구속된 황 참모총장은 장관급이기에 감옥에서도 독방에 가두어 예우해주는 것이 관례인데 황 참모총장은 6인실에 잡범들하고 같이 수감했다고 한다. 검찰 조사 때부터 감옥까지 그를 잡범 취급함으로써 그의 명예를 모욕한 것이다. 너무 무례하고 치졸한 정권이었다.
 
인간에게 명예를 박탈하는 것은 두 번 죽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하는 현장은 모욕으로 가득 차 있다. 역사상 가장 거룩한 십자가 형 집행은 주님 단독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른 죄인들 2명과 함께 나란히 처형된 것이다. 죽음의 자리에서조차 주님은 홀로 조명 받지 못했다.
 
나아가 주님은 메시아임에도 너무 고통스러워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는데 십자가 아래 로마 군인들은 주님의 옷을 걸고 제비뽑기를 하면서 낄낄거리고 있다.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고 매단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있다. 주님 죽음의 현장 어디에도 명예는 찾아볼 수가 없다. 고통과 오욕만이 있을 뿐이다.

3. 복음 : 왕의 죽음 
 
1)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잡범 취급당하며 가장 끔찍한 십자가에 처형되었지만 그는 진정한 왕이었다고 복음서는 증언하고 있다.
 
사형 선고는 내렸지만 빌라도가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팻말을 붙이자 유대인들이 항의했다.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수정해야 한다고. 그런데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내가 쓸 것을 썼다!;고 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 보도를 통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왕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사실 왕은 사형 선고 받고 죽임당하는 자가 아니라, 남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으면서 선고를 내리는 권력자다. 예수님은 사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권한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요한복음은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런 권력자가 저런 모욕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아무런 저항 없이 무력하게 당하기만 했는가? 하는 물음이 자동적으로 생긴다. 여기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왕은 죽임 당하는 이가 아니라 죽음을 선고하는 존재인데,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정말 고통스럽게, 정말 치욕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도대체 뭐야, 왜 그래? 이것이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2) 나를 위한 주님의 희생 : 하나님의 사랑
 
고통당할 수 없는 분이 고통당하고 모욕 받을 수 없는 분이 가장 치욕을 당한 사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체험한다. 이것이 은총이다. 기독교 신앙은 여기에 기초한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남들보다 더 성공하지 못했어도, 더 건강하고 더 유복하게 살지 못해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십자가의 사랑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놀라운 은총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들 머릿속에 이 은총이 가득하면 좋겠다. 우리들 가슴이 이 사랑으로 채워지면 좋겠다.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주님 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곰곰이 되새기고 그 은혜에 감격하는 절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