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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Day] 2017년 4월 16일 부활주일 (요 20:1-18)<말씀의 잔치>
홍상태 목사 | 승인 2017.04.10 16:37

부활절 아침에 일어난 일에 관한 요한의 서술에서는 승천의 주제가 시간적으로나 의미상으로 우선적인 것으로 강조된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시신을 누군가 무덤에서 가져갔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경주하듯이 달려갔는데, 이 두 제자의 각각의 반응을 요한복음은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베드로는 삼베가 놓여 있는 것과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이 한 곳에 따로 개켜있는 것을 보았다.(6-7절) 다른 제자도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베드로가 본 것을 보았을 것이다. 요한은 추가로 그가 “보고 믿었다”(8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보고에는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베드로가 삼베와 수건이 따로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삼베가 놓여 있다는 점을 언급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에게는 삼베옷이 더는 필요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 같다. 이는 나사로(11:44)의 경우와 대조된다. 그는 천으로 감긴 채 무덤에서 걸어 나와서 예수가 <그를 풀어 주라고> 명하셨다. 나사로의 경우는 지금 수의를 벗겨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의 경우 수의가 앞으로도 필요 없으므로 수의를 옆에 놓아둔 것이다.

머리를 싸맸던 수건을 굳이 언급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얼굴을 수건으로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날 때 얼굴을 천으로 가릴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출34:33-35), 예수도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러 갈 때 얼굴을 가릴 수건을 갖고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제자의 행동과 반응은 우리의 머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그는 베드로와 똑같은 장면을 보았을 텐데 그만이 “믿었다”라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묘사된다. 언뜻 그가 예수가 부활한 것을 믿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9절에서 <그들은 아직도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고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 생각이 잘못된 것 같다. 이 제자가 부활의 의미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면, 그는 도대체 무엇을 믿었다는 것인가? 그에게 증거로 제시된 것은 삼베와 머릿수건밖에 없었다. Frances Taylor Gench는 Sandra Schneider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 제자가 믿은 것은 다음의 내용이라고 말한다: 십자가가 예수의 생명이 소멸한 사건이 아니고, 예수가 영광을 받는 사건이며, 이 예수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얼굴을 수건으로 가릴 필요가 없었다.1)

요한의 부활절 선포의 우선적이고 강조하는 내용은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보다는 예수가 생명의 하나님에게로 승천했다는 것(혹은 승천할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무덤가에서 우는 장면(11-18절)을 보면 그것이 더욱 명확해진다. 왜 울고 있냐는 천사와 예수의 질문에 마리아는 예수를 어디다 옮겨 놓았는지 알려달라고 요청한다.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르는 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예수가 “마리아야”라고 이름을 부르자,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은 양과 같이 마리아는 “라부니!”하고 대답했다. 비로소 그때 예수는 당신에게 임한 놀라운 사건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한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17절)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말에 예수가 승천했다는 부활절 메시지의 핵심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 첫 장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1:14)라는 구절의 완성이고, <그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다>는 구절(1:12)의 성취이다. 하나님의 생명 안에 들어가심으로 승천하신 예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관계를 예수와 연합한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확장하신다.

승천과 부활은 신학적으로 연결되는 개념이다. 둘 다 <예수가 추진한 위대하고 고상한 계획이 사망에 의해 폐기되지 않았다는 것>을 선포한다. 승천은 부활의 약속으로 연결된다. 부활에서 드러난 새 생명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또 다시 죽는 죽음이 아니다. 그 대신 이 새 생명은 하나님 안에 사는 생명이고 따라서 영원히 사는 생명이다.

요한의 부활 이야기의 특징은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는 순서를 뒤바꾼다는 것이다. 그는 먼저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의 새 생명을 강조한다. 요한은 <예수가 지금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을 살고 계시다는 것>을 제자들이 깨닫기를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바라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가 그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제자들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요한에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1:1)는 것이 부활 메시지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제 요한은 말한다.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말씀의 제자들(the Word’s disciples)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고 있다.
 
D. Cameron Murchison, Dean of Faculty,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Decatur, Georgia
 
주석적 관점

단순히 말하면 이야기는 어느 이야기든지 인물과 구성에 관한 것 즉 인물들이 무엇을 했고 그들이 한 일의 순서가 어떠냐(비록 제시된 순서와 다를 수도 있지만)는 것이다. 본문에서 등장인물은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 예수가 사랑한 다른 제자, 두 천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야기 끝에 나오는 예수님이다. 그들이 한 것은 와서 뛰어가서 보았다는 것이다. 허리를 굽히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들은 예상을 했지만 혼란스러워졌고 그래서 울었고 그리고 다시 보았다.

이 이야기의 인물이나 줄거리는 고전적 희극의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주인공은 아주 평범한 인물이다. 대단하지 않은 여인, 어부, 무명의 한 사람 등이다. 천사들은 별도로 다루어야 한다. 그들은 줄거리를 만드는 역할을 하며 화자가 직접 말하는 대신 독자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줄거리는 연극에서 중요하다. 잃어버린 시체, 무대로 뛰어오고 나가고, 누군가를 혼동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데, 하지만 그 개입도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도리어 이야기는 다음에 일어날 일로 연결된다. 

모든 희극은 대체로 관객들이 파악할 수 있는 영웅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는 막달라 마리아인데 모든 이야기를 연결시킨다. 구성은 그녀가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에 무덤에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제자들에게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고 얘기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흐름이다. 그녀의 대사가  마지막이다. 하지만 좋은 희극이 되기 위해서 그 사이에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마리아가 무덤에 왔을 때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갔다. 베드로와 이름 모를 다른 제자에게 가서 그녀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면서도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 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녀는 무덤을 그때까지 드려다 보지도 않았다.

제자들은 바로 뛰어갔다. 둘이 같이 뛰었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몸을 굽혀서 시체를 싼 삼베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베드로가 먼저 무덤으로 들어가 삼베가 놓여있는 것을 보게 했고, 다른 제자도 따라 들어가 보았다. 무덤은 비어 있었는데 하지만 이 시점에서 누가 이유를 알 수 있겠는가? 등장인물 중에 아무도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알 수 없었다.

마리아도 제자들과 함께 또는 바로 뒤에 따라서 뛰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집에 돌아갔을 때 무덤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아서 울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희극이 관객을 놀라게 하듯 무덤은 더 이상 비어있지 않았다.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에 천사 둘이 앉아있었다.

천사들은 마리아가 왜 우는지 물었다.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사람이 뒤에 서있었다. 그녀는 동산지기인줄 알았는데 그 사람도 마리아가 왜 우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자세히 빈 무덤을 들여다 보았는데도 아무도 보지 못했다.

전형적인 희극적 또는 인간적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은 서로 말한다. 동산지기로 착각한 예수는 마리아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물었다. 마리아가 말하기를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희극은 놀람과 변장이 가득하다. 관중들은 예수의 변장을 통해서 본래 있는 것을 본다. 다시 희극의 전형적 방식으로 마리아는 서 있는 그를 보지만 예수는 마리아가 자신을 알게 할 때까지 감춘다. 마침내 마리아가 알아보고 그에게 말한다. “선생님!”(16).

예수는 마리아에게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고 말한다. 희극의 플롯은 천사가 오고 없어진 시체가 발견되고 살아있음을 아는 것으로 해결된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전히 끝이 아니다. 이것은 고전적 희극이고 결혼으로 끝나는데, 막이 내리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계21:2을 보라).

예수가 말한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은 예수가 마지막 제자들과의 대화를 상기시킨다(요14:10,20). 그 대화에서 예수는 비록 그가 떠나지만 성령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14:16-17,26;15:26).

그래서 연극은 끝나지만 이야기는 계속된다. 예수는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숨을 불어 넣으신다(20:19-23). 성령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데(3:8), 예수의 제자들에게 분다. 그래서 부활절 신앙은 계속된다.

이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당신은 빈 무덤을 보지 못했겠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나는 주님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한다. 우리 또한 보고 믿을 수 있을까? 그것이 다음 본문 20:19-31의 중심적 주제이다.

Richard S. Dietrich, Minister, First Presbyterian Church, Staunton, Virginia
 
목회적 관점

요한의 부활절 이야기는 여러 번의 달리기에서 시작된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이 빈 것을 발견하고서, 시몬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에게 달려간다. 그녀의 말은 달리기 출발 신호의 총소리처럼 두 제자를 무덤으로 보내어 직접 확인하게 한다.

부활절 아침에 회중을 바라보면, 숨가빠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교회에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오기 때문에, 자리를 잡으려고 경주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아무도 뛰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왜 왔을까? 그들은 뭔가 새로운 것을 들으려고 왔을까? 아니면 아주 오래 된 옛날이야기를 다시 들으러 왔을까? 습관의 힘 이상의 어떤 것이 작용했을까?

스위스의 신학자 인 칼 바르트(Karl Barth)는 부활절 뿐 아니라 어떤 날이든 사람을 예배로 보내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 배어 있는 암묵적인 질문이라고 한다. 그 질문은 단지 이것이다. “그게 사실인가?”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연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일상의 법칙을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날 일상의 법칙을 깨뜨리고 어쨌든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는가? 그날 아침에 아주 특별한 일이 일어나서 그것을 토대로 해서만 우리의 삶을 재건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게 사실인가?

이것들은 매우 강력한 질문이며, 오늘 같은 날에는 피할 수없는 것들이다. 때로는 부활절이 초신자를 위한 날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기를 원한다. 그보다는, 부활절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다루는 입문 과정을 마친 기독교인을 위한 고급 과정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산상 수훈으로 시작하라. 예수의 지혜에 경탄하라. 그에게서 배우라. 그의 인생에 매료되고, 그의 인격을 응시하라. 거기서 시작한다면, 아마도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이 신비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을 것이다.

가장 믿기 힘든 바로 그 일을 선포하는 날인 부활절에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 꽤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를 알았던 사람들,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성경의 저자들부터, 부활절은 멀리서부터 따라온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의 극적인 결론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부활절은 시작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 교회의 맨 처음 설교를 읽어 보라. 그들이 무엇으로 시작했는가?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의 세상에서의 삶은 거의 주목받지 못한다. 그의 생애는 부활절의 관점에서 볼 때만 흥미로운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예수님의 가르침조차도 그 자체로서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안에 오리지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스승이 누구인지, 즉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하나님의 택한 자가 누구인지 충분히 고려할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복음서를 확장된 서론을 가진 부활절 이야기라고 부르는 이유다. 예수의 맨 처음 제자들에게는 기독교가 선포되는 시작이 부활절 사건이었다. 거듭해서 제자들은 부활절에 관한 선포로 시작했다. 마치 그곳이 시작하는 유일한 장소인 것처럼.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빈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으로 믿음의 여행을 시작했다. 스스로 세련되게 생각한다고 여기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대 사람들에게도 믿기 힘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고대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았고,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 이야기 안에 의심할 만한 것이 있었다. 또 이야기를 설명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이야기 안에, 그들의 마음과 생각의 가장 깊은 영역, 의심과 믿음이 동시에 있는 곳에 닿는 무언가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부활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을 만한 사랑과 용서의 기적을 주셨고, 따라서 그것은 의심에 대하여 열려있음을 나타낸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의구심은 우리가 선포한 것의 규모와 힘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을 시작하는 곳이 꼭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곳일 필요는 없다. 현실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과하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말한다. 우리가 부활절에서 선포하는 것은 확실성 안에 가두기에는 너무나 강력하며, 우리의 상상력의 테두리 안에만 두기에는 너무나 경이롭다.

부활절은 결국 초신자를 위한 장소일 수 있다. 믿음의 삶을 시작하는 곳이 반드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곳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초대 교회가 시작된 곳에서, 의심에 대하여 열려 있는, 하지만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을 드러내기에 충분히 크고 충분히 깊은, 더 큰 현실과 더 깊은 신비를 가지고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오늘까지 유지되어 온 약속, 역사상 가장 큰 의심과 동시에 가장 깊은 신앙의 원천이었던 부활절의 약속이다. 어쩌면 우리는 초대 교회가 바로 여기, 지분이 가장 크고, 더 큰 신앙을 주장하기 위해 의심을 감수해야 하는 곳에서 시작한 것이 옳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교회가 부활절 하루 가득 차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계시하기에 충분히 큰, 위험과 약속 둘 다 훨씬 큰 현실의 깊이에서 헤엄치기를 원하기 때문일까?

목회자는 교인들이 오늘 예배를 떠날 때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게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물음표는 시작하기에 알맞은 좋은 곳이다.

Martin B. Copenhaver, Pastor, Wellesley Congregational Church, United Church of Christ, Wellesley, Massachusetts
 

설교적 관점

성경 안에서 부활절 이야기만큼 풍부한 설교자료는 없다. 이 이야기는 그 첫날부터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알렸던 날, 요 20:18) 그리고 그 이후 그것을 믿는 교회를 통해서 지금까지 선포되어 왔다. 요한복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설교자들에게 이 점을 약속하고 있다[풍성한 설교자료]. 사실 그것은 무한한 설교자료이다. 여기 설교에 적용가능한 많은 관점들이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갔고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20:1)

“와서 보라” (come and see)는 요한복음에 늘 있는 주제이다(1:39; 1:46; 4:29, 11:34). “와서 보라”는 또한 강력한 부활절 주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부활절과 성탄절을(목자들이 가서 보았고) 연결시킨다. 막달라 마리아는 와서 예상했던 바와 달라져있음을 보았다. 부활은 온갖 예상했던 것을 휘저어 놓았고 그것을 파악하는 유일한 길은 달라진 것을 와서 보는 것이다. 예수께서 함께 할 때 언제나 예상했던 것과는 일들이 다르게 전개된다.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는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들이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는지를 와서 보십시오”

“그들이 주님을 가져갔다” (2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만날 때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이해될 수 있게 설명하려고 한다. [이 장면에서도 다음과 같은 여러 설명들이 있을 수 있다]그들이 그를[예수를] 가져갔음에 틀림없다. 그는 살아있을 수 없다. 그는 단지 상처를 입었음에 틀림없고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었지 인간이 아니었는데 인간은 그런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영지주의의 가현설-사람처럼 보였으나 하나님이었다.docetism, docew:~처럼 보이다라는 헬라어 동사-역자 주]. 여기에는 그의 추종자들이 천년동안 세상을 속이기 위한 종교집단을 만들기 위해 그를 숨기는 음모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실제로 거기에 없었다. 그는 단지 율법교사이거나 아바타였지 메시아는 아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설명 가운데 어느 것이 맞는것인가? 어떤 설명보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11:25). 진실은 곧 밝혀지게 되었다.  누군가 그를 가져간게 아니었고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다. 그런다음 마리아에게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 모든 가능한 여러 가지 설명 앞에서[위에 말한] 부활절은 우리에게 진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마리아가 말한 것처럼 단순하다: “내가 주님을 보았다” (20:18).

“그러나 그는 들어가지 않았다” (5절)

거기에 증거들이 있었으나 예수께서 사랑한 제자는 들어가지 않았다. 진실에 다가가서 이해한 것은 우직하고 실수가 많은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기쁜 소식 (good news)을 선포하는데 그것은 그가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수께 다가가는 유일한 길은 역시 우직한 것이다. 설교자들은 소심해서는 안된다. 설교자들은 증인이고 말씀은 (the Word)은 그들이 부활을 선포할 때 새롭게 증인들을 만들어낸다. 
 
 “그는 보았고 믿었다 그러나 아직 이해하지 못하였다” (8-9절)

신앙은 이해보다 선행한다. 그것은 선물이다. 이 신비한 교리문답은 (새로운 개종자에게 신앙의 신비에 관해 가르쳤던 것) 세례를 주기 전에 행해진 것이다. 신앙이 먼저 선물로 온다.  그것에 대한 이해는 나중에 따라온다. 그것은 어린아이에 대한 사랑같은 것인데 그 사랑은 그 아이가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알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온다.

“그리고 그녀는 휜 옷 입은 두 천사를 보았다” (12절)

이러한 전달자 (messenger)는 보기 어렵다 (헬라어 angelos는 메신저를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쉽게 진행할 다른 방식이 없을 때 그들을 사용하는 것 같다:수태고지 때(마리아의 임신소식 알릴 때), 요셉을 안심시킬 때, 목자들에게 알릴 때. 우리들은 천사들의 알림을 보다 많이 바랄지 모르나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메시지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놀라운 소식은 그가 여기 없다는 것이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살아있다. 오래된 우스운 이야기를 기억하나요? 어느 목사가 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한 여성이 “당신 천사인가요?”하고 외친다. 그러자 그 목사가 “아니요 하지만 나는 [천사와]같은 부서에서 왔습니다” 라고. 우리 모두는 메시지 부서 소속이다. 우리는 같은 뉴스를 선포한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그는 진실로 부활하셨다.

“그녀는 그가 예수인지를 알지 못했다” (14절)

어떻게 그녀가 알 수 있었겠는가? 그는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다. 우리는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때 종종 알아보지 못할 때가 있다. 마리아는 한 살아있는 사람을 보고있고 그녀의 선생님은 죽었음에 틀림없다. 어떻게 이 남자가 예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겠는가? 우리도 종종 [우리 앞에 있는]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생각해보라: 도움이 필요한 낯선 이의 얼굴에서, 설교의 말씀에서, 빵과 포도주 앞에서. 어떻게 우리가 바로 그임을 알지 못할 수 있을까?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 우리는 믿는다.

“형제들에게 가서 말하라” (17절)

잘 들으세요. 여러분은 부활절 예배에 와서 돌이 굴려진 것을 보고 천사들의 나팔소리와 말을 듣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그대로 말하세요. 이것은 말씀이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모여준다. 그것은 그 말씀전파가 마리아에게 달려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 달려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갔고 선포했다...”내가 주님을 보았다“ (18절)

이것이 첫 번째 설교이다. 그것은 한 여성이 하였다. 그녀는 보았고 믿었고 선포했다. 그녀는 안수나 공인된 설교자양성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오직 예수로부터 들은 말씀만 필요로 하였다. 그런다음 가서 말했다. 여기에 우리들을 향한 메시지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가서 말하라.

이 모든 주제들이 설교준비에 유용하다. 설교자는 그녀/그의 설교적 상황에 기초하여 필요한 것을 선택하면 된다. 결국 오늘 하는 설교는 핵심적인 이 진리를 어떻게 말하는가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그는 진실로 부활하셨다.

Clayton J. Schmit, Arthur DeKruyter/Christ Church Oak Brook Professor of Preaching and Academic Director of the Brehm Center for Worship, Theology, and the Arts, Fuller Theological Seminary, Pasadena, California

1)  Frances Taylor Gench, Encounters with Jesus: Studies in the Gospel of John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7), 130.a

홍상태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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