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미수습자는 더 이상 외롭지 않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슬픔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지난 3년의 시간을 접고 가족들은 비로소 애도의 기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힐 진실과 만나야 한다. 우리 사회는 지난겨울 촛불혁명을 경험했다. 최초의 불꽃은 세월호의 진실을 향한 사람들의 염원이었을 것이다. 그 작은 촛불이 횃불이 되고 들불이 되어, 결국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이 봄에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로 향하는가? 앞으로의 세계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정체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사회질서든, 정치적 목표이든, 종교적 이상이든, 새로운 정체성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세월호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분기점이다. 그 진실을 만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교회는 부활절의 기간을 보내고 있다. 이 부활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오백 주년을 맞아 새로운 정체성을 얻도록 거듭나야 한다. 야곱의 경험을 가져야 한다.

 

야곱은 약육강식의 세계를 사는 사람의 초상(肖像)과도 같은 존재였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용맹스러우면서도 깊이를 잴 수 없을 만큼 웅대한 파토스를 품은 족장의 면모를 가진 사람이라면, 야곱은 목적 달성하기 위해서 비겁한 수단을 동원하고 탐욕을 채우기 위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교활한 사람이었다. 그런 정체성을 이름하야 야곱, 즉 남의 발뒤꿈치를 치는 사기꾼이라 하였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이스라엘 12지파의 선조가 되었을까?

 

야곱의 이야기는 갈등과 반목을 키워가다가 마침내 화해하는 구도를 갖고 있다. 그 전환점이 되는 이야기가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얍복강의 씨름 사건이다. 그 이야기를 보면, 야곱이 ‘어떤 존재’와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한다. 그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얍복강을 지키는 물귀신이었는지, 몸을 입은 하나님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신이라고 하기에는 불완전한 신이다. 야곱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는 있지만, 완전히 이기지 못해서 결국 자신을 놓아달라고 애걸하는 존재이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야곱이 미스테리한 존재와 밤이 새도록 ‘씨름’을 했다는 점이다. 무엇을 위한 씨름이었는가?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축복을 얻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한 야곱이 마침내 성공한 이야기’로 읽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야곱이 추구한 축복이 무엇이었는가, 씨름을 통해서 야곱이 얻은 축복은 과연 무엇이었느냐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세 차례의 대화로 이뤄져있다.

 

첫 번째 대화는 지극히 야곱스러운 대화이다. 상대방의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삼아 온 사람답게 야곱은 날이 새기 전에 떠나야만 하는 상대방을 붙잡고 ‘자신을 축복하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한다. 야곱이 원하는 ‘축복’은 무엇이었을까?

 

야곱이 요청한 축복은 양면을 갖고 있다. 그것은 그가 아직 갖지 못한 ‘새것’에 대한 요청이지만, 또한 그것은 자신의 ‘옛 기준에 의해서 요구’되는 것이다. 야곱의 요청에는 옛것과 새것이 교차한다. 야곱은 자신의 옛 기준으로 축복을 원했다. 그러나 그가 얻은 축복은 옛 기준에 의해서 기대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것이 다음 대화에서 밝혀진다.

 

두 번째 대화는 이름과 연관된 것이다. 대화는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질문을 풀어서 말하면, ‘네가 너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즉, ‘네가 받고자 하는 축복은 무엇이고, 그것을 받고서 너는 무슨 존재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신원확인을 위한 물음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존재가 되라는 요청이 담긴 질문이다.

 

이 질문을 받은 야곱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다. “사기꾼입니다 (야곱입니다).” 그 때 야곱에게 축복이 임한다. “이제 네 이름은 사기꾼(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본/경험한 사람, 하나님의 축복을 얻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야곱은 필사적인 씨름 끝에 새로운 축복을 얻었다. 그 축복은 새로운 이름이다. 야곱은 새로운 이름을 얻음으로써 인과응보의 밤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동트는 아침을 맞이할 약속의 사람으로 거듭난다.

 

이 두 번째 대화가 하룻밤 사이 순식간에 이뤄진 것인지, 아니면 긴 세월 동안 이뤄진 다음에 설화적인 이야기 속에 자리 잡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야곱이 얻은 축복은 ‘새로운 이름’이었다. 그 이름은 ‘사기꾼’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다.

 

새로운 정체성을 얻은 야곱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담하게 마지막 대화를 펼쳐간다.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자 묻는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심오한 신학이 담겨있는 듯하다. 하나님은 역사에 길들여질 수 없는 존재라는 고백일 것이다.

 

마침내 새날이 밝아 아침이 오자 야곱만 홀로 남게 된다. 그에게는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이 아침 햇살처럼 환하게 비쳤다. 야곱은 지난밤의 씨름으로 인해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씨름한 흔적이요, 새로운 정체성을 얻기 위한 투쟁에서 생긴 ‘믿음의 스티그마’라고 할 수 있다. (갈 6:17) 바로 이 새로운 정체성과 함께 성경의 역사가 다시 펼쳐진다.

 

새로운 정체성을 갖도록 야곱에게 던져졌던 물음은 부활절 이후를 사는 우리에게도 심각하게 던져진다. 너는 과연 새로운 존재인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받은 네 상처는 무엇이냐? 네 이름이 무엇이냐?

 

권력과 돈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이름은 정체성보다는 가면이 된다. 모두가 가면을 쓰는 일에 익숙해질 때에는 가면이 쇠처럼 굳어진 철면피들이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야곱의 욕망’인가, 씨름하여 얻을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인가?

 

세월호 사건은 우리 민족이 씨름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이다. 참사 이후 3년 동안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끊임없이 물음을 던졌다. 대한민국아,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네가 너일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네가 받고자 하는 축복이 도대체 무엇이고, 그것을 받고서 너는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느냐?

 

그 동안 우리 사회와 한국의 교회는 정의와 평화의 약속을 간직하기보다는 어떤 성과에 탐닉하는 성급함으로 인해 시달려왔다. 모두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어서 빨리 도달하기를 갈구했다. 하지만 약속의 땅이란 단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약속’ 자체가 살아있는 곳이다. 약속이 있는 한 그곳이 어디든 약속의 땅일 수 있으나, 약속이 사라졌을 때는 그 어디도 약속의 땅이 될 수 없다. 우리 사회에는 정의의 약속이 있는가? 우리들의 교회에는 평화의 약속이 있는가? 그것을 얻기 위한 이 민족의 빛나는 이름이 있는가?

 

다행스럽게도 지난 3년 동안 세월호와 함께 아픔을 같이하며 어두운 시대를 견뎌온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애통의 숲에서 몸부림치면서 우리 민족의 영혼에 숨길을 내는 일을 감당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되고 끈질긴 노력을 했으며, 하나의 비전에 끝까지 진실하려는 소망을 놓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과 소망으로 말미암아 시련을 당했고, 자신들의 사랑 때문에 괴로움을 겪었다. 해묵은 안보논리와 탐욕에 찬 경제논리로 무장한 이 시대의 이성들이 손가락질을 할 때에도, 이 믿음의 사람들은 차라리 고통을 받겠다고 마음먹었다. 고난 받는 어린 양처럼 그들은 우리 시대의 십자가를 메고 걸어왔다. 

 

이제 부활의 언덕을 오르는 길목에서, 골고다의 십자가만큼 처참한 모습으로 뭍에 오른 세월호가 이 사회에 묻고 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희생자와 유가족을 모욕한 탐욕의 사회, 진실을 외면한 채 욕망으로 흔들려온 이 세계가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이 물음은 계속될 것이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이 소리를 들은 곳은 어두운 얍복강에서 미스테리한 존재와 씨름을 할 때였다. 우리의 세계 역시 이런 씨름을 전개하고 있다. 돈과 권력으로 어두워진 밤의 나루터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얻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역시 동일한 하늘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본 사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기까지 믿음의 씨름을 멈추지 않는 세계는 약속을 간직한 세계이다. 하늘의 약속을 안고, 비록 상처를 입어 절룩거릴지라도 진리와 평화의 길을 묵묵히 걷는 모든 사람들에게 브니엘이 아침 햇살처럼 비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