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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전순란의 지리산 휴천재일기>
전순란 | 승인 2017.04.22 15:01

산속에서는 숨 쉬며 사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충만하다. 뒷담에 기대 자라는 대나무 잎을 어루만지는 바람까지도 조심스럽게 한 잎씩만 살짝살짝 건든다.

아침 기도를 하며 ‘배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져라는 말씀을 듣고 153마리의 대어를 건졌다’는 얘기가 2000년 지나서도 고기가 팔딱거리는 그물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준다, 우리가 가 본 갈릴래아호수를 배경으로. 누구를 사랑하면 그 사람과 연결된 모든 것이 어제처럼 생생한 법.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파트모스섬에 귀양 가 죽을 날을 기다리던 100세 노인 요한이, 스승을 처음 뵙던 날의 추억이다.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바꿔놓은 ‘만남의 시각’을 사람들은 잊지 않는다. 사랑했던 순간은 가슴속에 예리한 칼로 섬세하게 조각되어 행여 잊히려 하다가도 삶에서 나를 붙들어 준다.

얼마 전 ‘상설 시청률 조사’를 한다며 매달 8,000원을 준다 해서 조사기기를 달았는데 오늘 떼 갔다. 휴천재에서 TV 보는 거라곤 나 혼자 ‘손석희 뉴스룸’이 전부고, 그나마 사방으로 돌아다녀 지난달은 다섯 시간도 안 되니 조사기관으로서는 애가 탔는지 “왜 그렇게 TV를 안보세요?”라는 확인전화가 왔다. 간혹 걸려오는 그런 전화를 받다 못한 보스코가 ‘전화 하지 말고 그 기계 떼 가라’ 했더니 당장 떼 갔다, 오늘 아침에!

그 젊은이더러 ‘왜 하필 우리 집에 시청률 조사기를 달아줬냐?’니까 ‘사회지도층의 여론을 TV를 보는 성향으로 알 수 있어서’였단다. 거꾸로 말하자면, 배운 것 없고, 늙고, 하릴없어 하루 24시간 TV를 켜놓는 사람들이야말로 TV를 통해 얼마든지 여론 조종할 수 있으리라는 착상같다. 우리 둘이야 책에 빠지면 며칠이고 TV를 켜는 것조차 잊고 사니까, 조중동 종편의 여론조작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셈인데, 시골 노인정 TV 채널을 아예 ‘TV조선’이나 “채널 A’로 고정해 놓는다는 늙은이들에게는, 요즘 대선 여론조사에서 그 약빨이 여전함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잘못된 여론에 오염이 안 되려면 바보상자 TV를 안 켜는 길이 최선이다.

휴천재 앞마당 꽃들
휴천재 앞마당 꽃들

점심에 소담정 도메니카랑 함께 식사를 했다. 서로 속말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 사이니까 자연스럽게 대선 얘기까지 나왔다. (상대방에 대해 확실히 모르면 정치 얘기는 금물.) 요사이 문재인 후보의 대선 유세를 보면 부활한 노무현을 보는 듯 하단다. 우리가 그의 죽음 앞에 얼마나 좌절했던지 이렇게라도 보상 받아야만 한다. 아이돌 스타들과 전국을 누비는 문 후보가 진주에 오면 같이 가자고도 한다. 한번도 유세 현장엘 가본 일이 없었지만, 비록 ‘문빠’가 아니지만 나도 60대 후반이니까 70대에 들기 전 유세장에 한번 가서 목도 풀고 몸도 풀까 보다.

부면장네 임실댁이 6개월의 예비자 교리를 하고 지난 16일 부활절에 영세를 했다고 자랑하러 우리집에 왔다. 함양성당에서 대녀들을 한 사단쯤 거느린 마리아 아줌마가 대모를 서 주셨단다. 작은아들네가 서울에서 성당 가까이 이사하자 임실댁이 ‘성당도 가까우니 성당 나가라’ 했더니만 온 가족이 다니고 손주들은 복사까지 서더라며 자랑한 적도 있다. 부면장님이, 보스코의 권유와 주선으로, ‘바오로’로 영세를 받고 돌아가셨고, 사후에도 남편과 영원히 함께 할 생각에 아내로서 열심히 교리를 했다니 참 대견하다. 보스코가 ‘교황님 묵주’를 안젤라에게 선물하였고, 나는 “그 정성이 고마워서라도 천국에서 부면장님이 기다리시다가 커다란 꽃관이라도 씌워 주실 거에요.”라고 다독여드렸다.

저녁에는 빵고가 같은 과 친구들과 교수님을 모시고 바르셀로나에 ‘엠마우스 소풍’을 갔는데 무척 좋더라며 부모님도 구경을 시켜 드리고 싶더라는 전화를 해 왔다. 장가를 갔더라면 제 식구 챙기기에 바쁠 텐데... 신부 수녀가 된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오늘은 11시 이전에 잠자리에 들겠다고 맘먹었는데 작은 아들의 효도 전화 1시간을 노닥이며 흐뭇해하다 보니까 오늘도 자정 이전에 잠자기는 틀렸다.

 

전순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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