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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의 탄압에 저항하는 민중혼(民衆魂),함석헌과 장준하 (28)<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7.05.08 13:17

한날 같이 죽은 「사상계」와 「씨알의 소리」

「사상계」와「씨알의 소리」가 한날 같이 죽은 이 사건은 필자에게 있어 묘한 여운으로 남는다. 구체적인 사실로 말한다면 폐간(씨알의 소리)과 발행 불허(사상계)라는 문공부장관의 직인이 찍힌 문서 한 장씩이 전달된 것이지만 「사상계」와「씨알의 소리」가 한날함께 죽임을 당했다는 이 사건은 함석헌과 장준하의 동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 특히 역사란 한 거룩한 의지를 가지고 자라 진화하는 생명임을 믿는 사람들에겐 이상한 감회에 젖어들게 한다. 

이미 증언한바 있는 내용들이지만 「사상계」와「씨알의 소리」가 한날 같이 죽게된 경위는 대체로 이런 것이다. 함석헌이 1970년 5월 「씨알의 소리」 제2호에 1호에 이어 역시 ‘씨알’을 주제로 하는 글을 쓴다. “왜 나는 ‘알’을 ‘알’로 쓰는가?”, “씨알의 소리”(여기서 1호에 이어 「씨알의 소리」를 내는 이유가 하나 더 해지는데, “천하 씨알이 다 제소리를 내도록하기 위해서 입니다”이다. 필자주) “씨알의 설자리”등이 그것이다. 

이때, 「사상계」는 시인 김지하의 「오적(五賊)」을 싣는다. 역시 1970년 5월호이다. 「사상계」 5월호는 5월초에, 「씨알의 소리」 5월호는 5월 하순에 시중에 배포된다. 「사상계」 5월호를 검열한 중앙정보부의 조정관들에 의해 5월호에 실린 「오적」을 청와대에 보고, 관계 법규를 아예 무시 소위 ‘출판 불가’의 명을 받는다.

폐간도 정간도 아닌 그저 출판 불가라는 것이었다. 폐간이나 정간을 명했을 경우, 이미 상당한 명성과 지식층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터여서 그 후폭풍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출판 불가로 결정을 해놓은 채로 은인자중(?)하며 며칠을 기다려 오는 터에, 지난 달 「씨알의 소리」의 그 천둥이 있었고, 다시 발행된 5월호 역시 5.16사람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요 반역이었다. 

「씨알의 소리」를 내는 목적이 “천하의 씨알로 다 소리를 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라는 따위의 논리가 그랬다. 결국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는 박정희 정권을 저항하도록 부추기는 반역세력의 진지였다. 

「씨알의 소리」와 「사상계」를 없애버리기로 결심은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방법을 만들어야 했다.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또 찾았다. 씨알의 소리 지난달 4월호를 보고나서 곧 바로 없애버리기로 결정하고 시행한 첫 작업이 인쇄소의 압박이었다. 당시 「씨알의 소리」와 계약한 곳이 서대문소재 「선일인쇄소」였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습니까?” 인쇄소에 있어진 어떤 일도 밖으로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인쇄소 주인도 오히려 어처구니없어 했다. 선일인쇄소사장은 몇 번 「씨알의 소리」에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결론은 더 이상 「씨알의 소리」는 인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편집장 전덕용(全德龍)은 다른 인쇄소를 찾아야 했다. 박정희 정권의 문공부는 창간호를 받아보곤 「씨알의 소리」 살려둘 수 없다고 단안을 내린 후 였지만 그 같은 사실은 「씨알의 소리」의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당시 중구(中區) 소재 「이우인쇄소」를 어렵게, 어럽게 접선, 그 제2호를 발간해 냈는데, 이 창간 제2호가 제1차 「씨알의 소리」폐간호가 된다. 

“본지 제2호를 인쇄인 변경 허락 없이 타인쇄소에서 인쇄했다는 것”이 그 폐간이유였다. 함석헌은 분노했다. 
“역사야 말로 생명이어서 자라가는 것이다. 역사가 자라는데 절대로 요구 되는 것이 사상이요, 글이요, 말이다. 언론자유라는 것이다. 언론 자유 없이 역사의 진화 없다. 박정희씨는 ‘지금 역사의 진화를 가로막고 있다. 자기네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저항하는 세력들을 억압, 탄압하는 것인데, 언론자유를 부정하고 역사의 진화를 방해하는 국가권력이 살아남은 적이 없다. 지금은 자기가 천하의 대권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두고보면 알게 될 것이다. 민중을 탄압하는 정치권력의 종말이 얼마나 비참하게 될 것인가를 말이다.”

함석헌은 그의 잡지가 폐간되면서 박정희를 향해 거의 예언에 가까운 성토를 한다. 
“내가 아무래도 저 사람(박정희, 필자주) 끝장을 보지...”
75년에도, 77년에도 함석헌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가 아무래도 저 사람의 끝을 보지...”
아니다. 더 한 말이 있다. 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하늘이 보낸 사람 김재규의 저격으로 그 명을 끝내게 되는 12일, 전 함석헌은 미국 워싱톤 한인교회에서 (10월 14일, 필자주) 행하는 연설에서 아주 분명하게 박정희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다.

함석헌이 연설을 하게 된 그 교회 강당 앞자리에는 세 사람 목사가 앉아 있었다. 함석헌이 하려는 말은 ‘참 사람은 절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목사들이 절 받는 자리를 즐겨서 되겠느냐? 면서, “다른 사람들이 다 ‘목사님만 따라가면 되지요’하면, ‘아니다. 나는 아니니까 나는 보지 마시오’ 그래야 옳은 거지. 그런데 그러질 않는단 말야. 안 목사 큰일 났네요.(폭소) 목사님 세분앞자리에 앉았는데 큰일 났어요. 정치의 수반, 정치의 권력을 쥔 사람이 제일 그 죄를 많이 져. 사람이 절을 하지, 짐승은 절 없어요. 이것이 어디서 왔냐하면 생각하는데서 나온거야. 절을 할 때는 코가 땅에가 닿아야해. 서양사람들은 그냥 끄덕하는데, 좋은 점도 있어요. 하지만 그래선 안돼요. 워십(worship)이라고, 듀티(duty)라고도 그러는건 아주 엎디어서, 사지와 몸뚱이 납작 엎드려 정말 하나님한테,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고 예배하는 거에요.”

함석헌의 말은 고조되어간다. 
“사람은 그걸 받아 먹을 놈이 없어요. 세상에선 정치꾼들이, 임금 때 대통령 때 이것들이, ‘내가 기다!’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쓴 밤나무에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제사하려면, 지금은 사진이 있으니까 사진 놓으면 되지만, 사진 없는 옛적엔 나무 중에 비교적 썩지 않고 오래가는 밤 나무를 골라다가 아무게 신위(神位)라 써서 그걸 보고 절을 했어요. 상점에 가서 그거 고를 때 요놈으로 할까 요놈으로 할까?”

여기서부터 위로부터 신내림이 있었던지, 아니면 처음부터 신의 인도 속에 말을 시작했던지 알 수 없지만 함석헌은 아주 분명하게 <예언의 말씀>을 쏟아 냈다. 
“그러니까 심볼과 실체를 구별할 줄 알아야지.”
그리고 박정희라고 실명을 불러내지는 않았지만 누가 들어도 박정희를 향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박정희를 ‘그래서 벼락 맞았지’라고 정리했다. 
“그러니까 심볼과 실체를 구별할 줄 알아야지. 제가 (박정희를 일컬음, 필자주) 실체인 것처럼 칼을 뽑아들고, ‘내가 제일이다. 내가 나간다’그러면 벼락 맞을 소리.” 
그리곤 함석헌은 박정희를 아주 정확하게 정리한다. 그것은 바야흐로 역사의 정리였다. 
‘그래서 벼락 맞았지!“

참 놀라운 것은 함석헌의 아주 분명한 그의 예언이었다. 함석헌의 그 밤이 그의 선언대로 라면 박정희가 벼락 맞기 12일전 밤이었는데 어떻게 박정희의 죽음을 완료형으로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일까? 만일 함석헌이 그 밤에 미리 투시하여 박정희가 10월 26일 ‘벼락을 맞을 것’이라 했다면 그 말은 미스테리로 회자(膾炙)되는 것 이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에게는 믿음에서 오는 믿음이 있었다. 

절 받으려하는 놈 즉 신이 되려하는 놈은 준엄한 역사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함석헌은 박정희의 현재를 투시했다. 함석헌 시각 속의 박정희는 ‘신이 되려는 자’였다. 
역사 속에서 신(神)은 민중, 씨알인지라 그 민중에게 ‘업디어 절’을 강요하는 그를 함석헌은 정리해야 했다. 
“벼락 맞을(짓) 소리, 그래서 벼락 맞았지...”
박정희의 악한 권세가 「씨알의 소리」를 죽였다. 그것은 겉을 보고 하는 말이다. 어떻게 박정희의 악한 권세가 「씨알의 소리」를 죽일 수 있겠는가? 무슨 재주로 박정희가 민중의 소리를 죽일 수 있겠는가? 

하늘도 부러워한 함석헌과 장준하의 인간지교(人間之交)

함석헌이 그랬듯이 장준하 또한 그랬다. ‘재야의 사람’이었다는 데서 하는 말이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장준하의 가슴 속엔 ‘새정치의 꿈’이 휘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같은 장준하에게 정치인 특히 한국의 정치인으로써의 결점(?)이 있었다. 너무 옳곧았다는 것이다. 그는 도무지 협상(協商)이라는 것을 몰랐다.

‘옳곧다’는 것이야 말로 천하의 중성(重性)에 고귀한 품성임은 더 말할 나위 없는 것이었지만 판(板)의 흐름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가 그 굽힐줄 모르던 「사상계」의 사장이었으니...
의정생활 2,3년을 지나면서 장준하는 헤어나기 힘든 이중고를 겪게 된다. 이 정치판을 혁명이라하리만큼 바닥부터의 개혁을 시도할 것인가? 아니면 아예 정치를 접을 것인가? 격한 몸부림 속에서 나날을 버티어 가야했다. 그러나 그 결단은 쉽지 않았고. 그렇게 나날을 버티는 사이 함석헌이 월간 민중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다. 

장준하는 함석헌의 그 「씨알의 소리」에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그 「씨알의 소리」가 단 두호(1970.4-5)를 내고 폐간이 된다. 동시에 「사상계」역시 발행이 중단된다. 사실상 폐간이었다. 장준하는 왠지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를 찾았다. 「씨알의 소리」를 죽은 채로 둘 수가 없어서였다. 함석헌은 ‘ 되는대로 사는 사람’이었다. 정치권력의 불의를 향한 격정 반면엔 ‘그런들 그러리’하는 간데없는 순촌로(純村老)의 모습이 여전했다.

“선생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안된다는데...”
“아니 그럼 그만 두시겠다는 겁니까?”
“아니 어떻게 그만둘 수 있나, 해보긴 해봐야지...”
“선생님, 그렇다면 제가 이병린 변호사와 한번 의논해 보겠습니다.”
장준하는 바로 다음날 이병린을 찾았고, ‘한국언론의 시험대’로 삼자면서 둘은 일신처럼 서울 고등법원에 「행정처분취소청구의 소」를 제기했다.
이병린 변호사는 선임료 없는 무료 변론을 흔쾌히 자원했다. 함석헌은 주변에 있는 민주언론동우들이 한 없이 고마웠다.
장준하는 또 다른 생각에 젖었다. 의회생활이 끝나면 돌아가리라 했던 「사상계」도 없어졌다. 헌데 장준하는 아예 「사상계」를 지키며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씨알의 소리」는 분명히 승소할 것이고....그렇다면 내가 「씨알의 소리」를 맡아 선생님의 활동에 동우가 될 수 있겠다”는.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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