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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원하시는 부모와 자녀 (에베소서 6:1~4)2017년 5월 7일 어린이·어버이주일설교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 | 승인 2017.05.08 17:00

■ 주간 단상 : 선거 혁명

1) 우리 사회는 1980년대에 현재의 방향이 결정되었다.

1980년대 서울 거리

유신체제의 종식과 곧 민주화가 다 되었다는 기대, 그리고 이 열망과 기대를 총으로 짓밟고 세워진 군부정권 아래서 민주주의, 인권, 언론의 자유, 평등 이런 가치들은 불온한 것으로 낙인 찍혔고 비인간적인 강압이 일상적인 세상이 되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을 불태웠다.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차단된 사회, 언론은 권력의 나팔수가 되어 권력의 이익을 홍보하고, 진실은 도리어 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유언비어라고 단속 대상이 되던 시대에 새로운 세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으로서 혁명은 분명 매혹적이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뒤집고 새 아침을 맞이하려는 갈증과 조급함은 80년대를 ‘혁명이 아름다운 시대’로 만들었다.

2) 사회적 혁명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목숨은 기꺼이 내놓아야 하고 내놓을 수 있다는 분위기가 80년대의 정서다.

1980년대 학생운동

이러한 시대에 인간이나 사회나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질 수는 없고 조금씩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사회 전체에 불필요한 희생과 충격을 줄일 수 있다는 점진적 개혁은 진보 운동권 내에서는 개량주의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그만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다. 그러나, 아름답고 화려한 버섯일수록 독을 품고 있듯이, 한 시대를 매료시켰던 혁명이란  얼마나 끔찍한 희생을 수반하는가!

단두대는 1792년부터 1977년까지 사형도구로 쓰였다.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로베스피에르 등도 단두대에서 사라졌다.

진정한 근대를 열었던 프랑스혁명은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지만 자유·평등·형제애라는 고상한 가치 이면에는 엄청난 희생이 동반되어 있다. 지금은 보기만 해도 소름 돋는 기요틴(단두대)은 사실 프랑스혁명 당시 매일 사형당하는 이들이 너무 고통스럽게 죽어가자 사형수들의 고통을 줄여주고자 기요틴이라는 의사가 고안해 낸 인도주의적 사형도구였다. 어차피 죽이는 것, 한 번에 목을 잘라서 고통을 줄여주자는 의도에서 고안해낸 것이었다. 혁명기 파리의 광장에는 매일 죽임 당하는 이들로 피로 물들었다. 일반적으로 혁명은 너무 많은 피를 요구한다. 물론 역사의 발전이 어찌 고상하게 앉아서만 되겠는가마는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꾸려는 시도는 개인이나 사회나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눈과 생각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사상, 화려한 여성이나 남성, 뛰어난 화술 등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3) 민주주의 사회에서 혁명은 결국 선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민주주의의 발상지 그리스에서는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한 표씩 부여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은 자칫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작당하여 그릇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있어서 평등한 민주주의를 반대하기도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정치의 우민정책이나 포퓰리즘을 경계한 것이다. 일면 그런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유능한 이들에게는 더 많은 선거권을 주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차등을 두는 것은 더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기에 현재의 선거제도가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최선의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그러기에 선거권자는 진지하게 자신이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 분별하고 우리 사회의 과제를 극복하고 미래로 발전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준비해야 한다. 우리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임기 전에 심판을 받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조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너무 많이 헝클어진 우리의 현실 과제들을 하나씩 해결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면 거의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를 통해 진정한 혁명을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자.

1. 갈수록 무거워지는 과제

1)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가 당면한 갈등의 중심에는 지역감정이나 이념 갈등이 있었다. 영남과 호남의 감정 대립은 사회의 주요 결정 사항마다 충돌했고, 진보 성향의 사람들을 친북 용공으로 몰면서 이념 대립으로 몰고 가는 전략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근래 들어 지역 감정은 아주 뚜렷하게 사라지고 있고, 이념 갈등이나 북풍도 예전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많이 성숙하고 발전한 것이다.

2) 반면 가장 두드러진 갈등 주제는 세대 갈등이다.

출처 : 문화예술협력네트워크

노인 세대와 청장년 세대,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갈등이 과거에 비해 첨예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이어진 유교적 관념이 아직도 가장 지배적인 사회 통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대표적인 유교적 관념인 어른 공경과 장유유서의 질서가 민주주의의 평등성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는 진통을 앓고 있다. 지금 5~60대 세대는 어려서부터 어른을 공경하고 버스에서 자리는 당연히 양보해야 하며 어른에게 말대꾸하는 것은 버릇없는 것이라 배웠고 또 그렇게 충실히 따르면서 섬겨왔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우리도 이런 대접을 당연히 받아야 하는 때가 되었는데 후배 세대의 생각은 이전과 같지 않다. 세대가 위라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대접을 해야 하고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한 시대는 이미 종말을 고한 것이다.

3) 가정에서 무슨 행동을 해도 부모니까 용인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늙음이 존중받던 시대에서 서러운 시대로 급격하게 변한 것이다. 이제는 늙으신 부모님이 자식들의 눈치를 보고 혹시 짐이 되지 않을까 혹시 자신 때문에 자식 부부가 싸움이라도 하지 않을까 가슴 졸이는 시대가 되었다. 똑똑하고 발표력까지 갖춘 며느리는 더 이상 시어머니를 두려워하거나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지 않는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라나는 귀한 자식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있다. 그런데도 각 가정마다 그렇게 조용하지는 않다. 갈등과 다툼이 끊이지 않고 바람 잘 날이 없다. 우리 가정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하나님이 주신 가정을 사랑과 존중으로 행복하게 만들어가고 싶은데 어찌하면 좋을까!

2. 예수님의 가족

1) 예수님의 가정생활은 어떠했는지 성경에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별로 없다. 아머지 요셉과 관계는 다정다감했는지 좀 어색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특별한 언급이 없는 이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리라 본다. 어려서부터 독특한 삶과 파란만장한 일들을 겪어야 했던 요셉은 미술사에서 힘들고 지친 삶이지만 아들 예수를 잘 지키는 인물로,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는 자식의 처참한 죽음을 목도해야 하는 비련의 주인공이지만 강인한 어머니로 묘사되었다.

2) 카라바조, 이집트로 피난길에서 휴식하는 성가족

카라바조, 이집트로 피난길에서 휴식하는 성가족, 135.5*166.5cm, 1597년, 로마 (출처 : 위키미디어)

메시아는 이름과 달리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이집트로 향하는 고단한 피난길에 올라야했다. 권력욕 가득한데다가 잔인한 헤롯이 이미 베들레헴 근방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은 모조리 학살했기 때문이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게 끔찍한 재앙이다. 이를 피해 달아나야하는 성 가족은 얼마나 내달렸을까.

지친 성가족을 위로하고 새 힘을 북돋우기 위해 하늘에서 미소년 천사가 내려와 바이올린을 켜 준다. 이 신기한 장면을 나귀는 눈 크게 뜨고 쳐다보고 있고, 허연 머리카락과 수염의 요셉도 피곤하지만 천사가 음악을 잘 연주하도록 악보를 들어주고 있다. 옆에서는 출산한 지 얼마 안 되어 몸이 성치 않은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아주 곤히 잠 들었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피곤에 지친 마리아의 오른 손은 땅 쪽으로 늘어져 있다. 고개를 옆으로 숙인 채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진 것이다. 어찌 그러지 않으랴! 그럼에도 아기를 안은 왼손은 정신 줄을 놓지 않고 있다. 행여 아기를 떨어뜨릴까봐 무아지경의 곤비함 중에서도 아기를 받치고 있는 마리아의 왼손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이다.

전쟁 같은 피난길 중에서 아기 예수는 쌔근쌔근 잠을 자고 있다. 불그스레한 아기 예수의 볼과 가지런히 모은 두 발이 평안의 극치를 드러내고 있다. 아기는 세상이 뒤집어져도 동요하지 않고 잠 잘 수 있다. 어머니의 품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같은 우리들, 부모님 품 같은 주님이다. 주님의 몸이라는 교회가 이 품이었으면 좋겠다.

3. 좋은 부모 좋은 자녀가 되기 위하여

1) 초대교회 때라고 해서 부모 자식 간에 문제가 없었겠는가? 오늘 에베소서에 보내는 편지 중에 굳이 부모와 자식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그 때도 부모가 어른답지 못하고 자식이 부모 속 썩이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을 것이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1~4)

에베소서의 답은 고전적이다. 자녀들은 부모님의 사랑을 믿고 그 뜻을 잘 헤아려서 순종하는 것이 복 받는 비결이고, 부모는 자식이라고 해서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뜻으로 잘 양육하라는 것이다. 아직 미처 이런 교훈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제라도 부모님께 순종하고 자식들을 존중하며 키워야하겠다고 깨닫고 실천하기 바란다.

문제는 이미 이런 내용 다 알고 실천하려하지만 이것이 그리 쉽게 되느냐고!

2) 요즘 어느 가정이나 부모 자식 갈등이 없는 집은 흔하지 않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으로 양육하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가정은 정말 축복받은 가정이며 날마다 감사해야 한다. 마음은 모두가 다 이런 가정과 부모 자식 관계를 원하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부모는 자식 때문에 가슴 졸이고 때론 열 받고 부모 직을 포기하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자식은 자식대로 부모를 별로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옛날에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 가끔은 아버지, 어머니가 있었는데 요즘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앞으로 세대 간의 갈등, 부모와 자식 사이의 대립은 갈수록 더욱 깊어질 것 같다. 이거야말로 사회의 민주주의 성취와 별도로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다.

3) 기독교 신앙이란 ‘간접성’이다. 과학적 사고방식은 원인과 결과가 직접적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구공이 움직인 것은 사람이 큐대로 공을 쳤기 때문이다. 사람-큐대-당구공 여기에는 관계가 명확하고 직접적이고 이것 밖에 없다. 이것이 일반 사회의 인식이다.

기독교는 이 점에서 다르다. 세상 만물, 모든 인과 관계에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요소뿐 아니라 실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존재하며 그것이 본질적이라는 믿음이 기독교 신앙이다. 부모와 자식 관계도 비 신앙인들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 개선만 본다면 기독교인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시켜 주실 것을 간구하며 살아야 한다.

자식이 너무 속 썩일 때, 내 자식 같지 않고 아주 낯설게 느껴질 때, 자식을 직접 대하기 전에 나와 자식 사이에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께 이 현실을 아뢰는 것이 먼저임을 명심해야 한다. 내 지식과 자녀 교육 방법이 본질이 아니며 먼저 하나님의 도움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분께 맡기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다.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방관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되 그 사랑하는 자식의 삶을 인도하시고 책임지실 분도 나와 자식 사이에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먼저 하나님과 상의하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바른 자세다. 그러면 하나님이 도저히 참지 못할 일도 참게하시고 불안도 평안으로 바꿔주시고 자식의 안전도 보호해주신다. 그렇지 않고 나와 자식 사이에는 오직 우리만 있으니 죽으나 사나 내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여기는 이는 별로 성공하지 못한다.

자식이 볼 때 이해하기 어렵고 성숙하지 못한 부모도 있다. 그렇다고 대들고 싸우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나와 부모 사이에 계셔서 이 현실을 지켜보시는 하나님께 도움의 손길을 내밀라. ‘도와 주십시오 주님!’ 이 말하는데 자존심 세우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존경할 수 있고 순종할 수 있는 우리 부모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자녀와 부모 사이에는 부모와 자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이 계신 것을 잊지 않기 바란다. 그리고 우리들 관계의 결정권도 바로 그 주님이 갖고 계심을 확인하기 바란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 내려주시고 행복한 가정 이루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기 바란다. 그러니 그 분께 자녀에 대한 부모의 고민을, 부모에 대한 자녀의 고민을 털어놓고 맡기라. 주님이 원하시는 부모와 자녀의 모습은 바로 이 믿음에 예비되어 있다.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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