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첨부된 도판은 필자가 직접 책에서 찍은 것으로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질 좋은 도판을 준비하지 못한 점 많은 양해를 바랍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대미술을 매우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다. 전시장에서 일하다 보면 다양한 관람객들을 만나게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이해’를 잘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간혹 ‘이해’는 잘 못하지만 ‘신기하다’, ‘재미있다’ 등의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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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1]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 모자이크, 하기아 소피아 사원 | ||
내가 앞에서 ‘이해’에 따옴표를 한 것은 이들 관람자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핵심이 이 ‘이해’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보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다 동원해서 이성적으로 ‘이해’를 하고자 하는 습관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누가 클래식 음악회에 가서 그 곡을 ‘이해’하려 하는가?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그것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아마도 이러할 때는 ‘이성’이 아닌 자신의 ‘직관’과 ‘느낌’을 사용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감상할 때 눈을 감기도 하면서 마음을 열어 아름다운 선율을 ‘느끼려’ 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이 이성보다 더 먼저 작용함을 알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사람들은 전시장을 찾으면 ‘느낌’이나 ‘감성’보다 ‘이성’을 더 사용하며 작품을 감상하려 하는 것일까?
이미 현대미술은 고전주의적 대상의 재현을 포기한지 오래고,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의 영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말이다.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다. 현대미술은 더 이상 대상이나 원형에 얽매이지 않는 이미지 자체 일 경우가 많다. 현대미술에서 묘사하는 ‘사과’는 더 이상 단순한 ‘사과’가 아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의 사과일 수도 있고, 사과의 붉은 색은 강렬한 성적유혹을 상징할 수도 있다.
현대미술에서 작가가 묘사한 대상은 이미 대상의 본래적 의미를 떠나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이 ‘시뮬라크르’의 세계이다. ‘모방’이 ‘모방’을 낳고 ‘모방’이 또 다른 의미를 갖고……자연적 대상은 더 이상 재현이라는 예술 표현의 자리를 잃어버렸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중은 현대미술작품 앞에서 당황하는 것 같다. 사실 미술에 몸담고 있는 나로서도 현대미술을 대할 때 새로운 충격을 받는 경우가 많은 걸 보면 그들의 고충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이러한 현대미술의 경향을 고전주의적 시각으로만 보지 않는다면 보다 자유롭고 다양한 예술 감상의 가능성이 많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현대미술이 추구하는 예술적 ‘코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숭고미’이다. ‘시뮬라크르’는 작품의 이미지와 관련하지만 ‘숭고미’는 작품 이면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어떤 ‘느낌’과 관련한다. ‘시뮬라크르와 숭고미’는 현대미술의 핵심적인 코드이다. 특히 ‘숭고미’는 이성이나 로고스에 의존한 비례와 균형 등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대상 이면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으로부터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다.
로고스 중심의 서구 사유세계에서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 받던 숭고미가 현대미술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이성 중심적인 사유세계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숭고미는 간단히 말하면 이 세상에서 인간의 이성에 의해 느껴지고 분별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물질적인 형상 이면의 보이지 않는 세계의 아름다움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이성의 작용을 잠시 억제(?)하고 현대미술을 지각과 감성에 의존해서 감상해본다면 분명 새로운 예술의 아름다움을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한번 시작해보면 결코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나는 이 글에서 현대미술의 중요한 요소인 ‘숭고미’를 기독교 신비주의와 관련해서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이는 숭고미의 근원이 ‘초월적’인 것과 관련 있고 또 ‘체험’에 의존하는 바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과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체험’과 관련한 것은 보드리야르가 비판한대로 ‘존재론적 도박’이 될지도 모른다.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미술의 이미지들을 단순한 ‘시뮬라크르’ 로만 얘기하기에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숭고’의 영역을 언급하지 않으면 우리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한 축을 놓치게 될 것이다. 나는 현대미술을 어렵게 느끼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이해의 틀을 제공하고 또 현대미술에서 기독교 미학의 가능성을 내 나름대로 살펴보고 싶다. 이러한 글을 쓸 때마다 느끼는 나의 무지함에 부끄러운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 이를 정리고자 한다.
신비주의와 숭고미 : 체험을 중심으로
‘신비적’이라는 용어는 위 디오니시우스가 사용한 그리스어로 ‘mystikos’에서 유래된 것으로 “은밀한(신비에 연관된)”, “감추어진 전례(비밀의식)”을 의미하고 또한 “어두운”, “비밀에 찬” 등을 뜻하는 형용사이다.” 이는 “앎이나 믿음” 즉 로고스적인 것과 상관없는 차원의 것을 말한다. 이 ‘신비’라는 말은 늘 ‘체험’을 수반하고 철학에서는 이 합일의 체험이 “주관과 객관의 합일”을, 또 종교적으로는 “신인합일”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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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2] 테오토코스 성모와 임마누엘 | ||
조던 오먼이 마태복음 5장 48절의 ‘완전함’(완덕에 이르는 것)을 신비주의의 목적으로 삼은 것 에 반해 매튜 폭스는 신비주의를 ‘자비와 창조력, 그리고 사회정의’와 연결시킨다. 폭스는 말하기를 “나는 안의 경험을 신비주의로, 밖의 경험을 예언으로 명명했다. 신비주의로 명명된 안의 경험은 우리가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과 즐거움을 얻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언으로 명명된 밖의 경험은 우리가 받아들인 아름다움을 더 잘 비추기 위해 밖으로 나가서 사회와 역사를 개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신비주의가 개인적 완덕을 강조하면 ‘개인의 성화’를, 사회정의를 강조하면 ‘사회의 성화’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이러한 것이 체험을 통해 경험되는 것이고, 이와 함께 자연스럽게 중요해지는 것이 결국 우리의 ‘몸’이다.
이곳은 체험의 장소이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 만나는 ‘경계’로서, 단순히 주체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나누이지 않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몸’은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며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로서, 가시적 영역과 비가시적 영역의 경계로서 존재한다. 체험의 관점에서 이러한 몸의 개념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보통 미의 본질을 말하면 “조화롭고 균형 잡힌 형식”이라고 말하곤 한다. “예술에 있어서의 심미적 체험이란 그러한 형식을 순수하게 관조하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심미적 체험은 어디까지나 “수학적 비례관계로” 또는 사물에 대한 “공간적 지각방식과 로고스적 사고방식”으로 이해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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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 3] K.S.Malevich. 'Black Quadrilateral'. c. 1913-15. Oil on canvas. 61x43.3 cm | ||
이를 통해 인간은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고 “실존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희열”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로고스적이고 코스모스적인 심미관과 다른 숭고미의 특징이다. 이런 차원에서 숭고의 미학은 “현실을 넘어선 존재론, 혹은 현실의 심연에 드리운 근본적 존재론” 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비주의와 숭고미의 체험은 모두 우리 몸의 지각과 감각에 의존하며 인간의 이성이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입되는 ‘수동적’ 체험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특히 신비주의에서는 ‘일캄라는 것을 전재하며 ‘신과의 합일’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다.
동방정교회의 성화상에서 추구하는 것도 이콘을 통해 나타나는 숭고미이고 그것은 성화상과 그 대상 간의 연관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단순히 이콘은 관조의 대상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콘 자체가 원형은 분명 아닐 것이다. 이러한 이콘의 묘한 미학은 구체적인 체험을 전재로 하는 것임으로 이것 또한 신비주의의 범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콘(성화상, Icon)과 숭고미
“아무도 아버지의 말씀을 묘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 테오토코스여, 그가 당신으로부터 육체를 취하셨을 때……” 그 묘사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라고 동방정교회 신학자 오우스펜스키는 정교주일의 시기송을 인용하여 말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므로 ‘표현’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는 성육신 사건을 이콘 표현의 근거로 여긴 것이다. (그림1, 2 참조)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성부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는 우리에게 계시된 것, 즉 성자의 성육하신 인격인 예수 그리스도만 묘사할 수 있다” 는 것이다. 즉, ‘계시’된 것 만 묘사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의 경우는 성서에 묘사된 형상으로만 묘사됨으로 ‘비둘기의 모습’이나 ‘불의 혀’ 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콘 미학의 신비주의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연합” 이다. 이것이 이콘을 통해 나타나는 숭고미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어느 피조물의 비례와 균형에 의해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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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 4] K.S.Malevich. 'Suprematist Compositon : White on White'. 1918. Oil on canvas. 79.4 x 79.4 cm | ||
이콘이 가지는 신비스러움은 다음에서 더 두드러진다. 이콘은 “신적 아름다움과 영광을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인 방법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원형의 특성인 은혜가 성상 안에 임재한다” 고 동방정교회 미학은 말한다.
이는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를 사제가 축성하면 그리스도의 피와 포도주로 변한다는 ‘화체설’과는 다른 ‘임재설’에 가까운 내용이다. 은혜가 임하므로 그 떡과 포도주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단순한 그림이 하나님의 은혜의 임재에 의해 거룩한 ‘이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늘 우상숭배의 위험이 있게 마련인데 이를 피하기 위해 동방정교회 신학은 이를 신비주의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숭배하는 것은 형상의 본질이 아니라, 그 형상에 각인되어 있는 원형의 형태이다. 왜냐하면 형상의 본질은 숭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숭배되는 것은 물질이 아니다. 오직 원형이 그 형태와 함께 숭배된다.” 그들은 이콘을 통해 그 원형에게 경배하는 것이지 물질인 그림 자체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콘은 결국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로서 자리한다. 그림 저 너머의 세계와 지금 현재의 세계를 연결하는 매체가 바로 이콘이기 때문이다.
이콘에는 그 원형과 이콘 자체와 그리고 관자(觀者) 간에 묘한 긴장감이 늘 존재하며 관자에게 주입되는 은혜에 의해 ‘신비 체험’의 경험이 나타난다. 여기에 이콘의 숭고미가 관자에게 체험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콘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현상들은 신비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현대미술과 숭고미
현대미술에서도 신비주의적 요소를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대상의 재현이 아닌 시뮬라크르, 비례와 질서 그리고 합리주의적 미적 관점을 넘어서는 숭고미, 현대미술은 이와 같이 재현과 일상적인 미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길을 걸어 왔다. 현대인들이 현대 미술작품 앞에서 낯선 아름다움(?)에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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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 5] Mark Rothko. 'Orange and Yellow' . 1956. Oil on canvas. 231x180.3cm | ||
여기에서는 주체와 객체, 주관과 객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등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세계로의 지향성이 현대미술을 더욱 ‘신비’롭게 하는 요인이다. 이것이 현대미술에 나타나는 ‘숭고미’이다. 여기에서는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1935),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 그리고 송번수의 작품을 중심으로 간단히 이러한 경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화가 말레비치는 러시아 전통 속에 담겨있는 비잔틴적 숭고미를 현대적 형태로 재현했다( 그림 3, 4 참조). 그의 작품에서는 원근법도, 볼륨도, 그리고 어떠한 묘사도 찾아 볼 수 없다. 보이는 것은 단순한 색과 사각형이 전부이다. 그의 그림은 철저히 그림 그 자체가 되었다.
잰슨은 그의 작품이 ‘현대적 이콘’이며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숭고미를 대신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의 평면성은 공간을 대신하며 사각형의 세 개의 꼭지점은 3차원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시간을 상징하며 4차원의 세계를 표현한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개념은 시간과 공간의 밀접한 관계를 규명한 아인슈타인의 이론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과 철학 그리고 종교적 숭고미 등 절대로 함께 섞일 것 같지 않는 이질적 요소들이 그의 작품 안에서 하나로 어우러진다.
그는 분명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전후로 하여 활동한 작가로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예감하고 이전의 전통적 형식과 단절된 새로운 형식을 새로운 러시아에 제시하려 했는지 모른다. 미술사에서는 그의 절대평면의 회화 양식을 ‘절대주의(Suprematism)’라 명명했다. 대상의 묘사보다는 순수한 기하학적인 색채 평면을 표현하고 그 결과 형태가 없는 속에서 색채와 평면만 남는 추상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평면의 그림은 우리의 순수감성을 자극한다. 우리의 인식이 그 의미를 깨닫기 이전의 원초적인 지각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느낌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관자(觀者)가 그의 그림에서 고전적인 어떤 형태나 의미를 찾으려 하면 할수록 그의 그림을 더욱 난해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그는 이성이나 고정관념 그리고 자연적인 형태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의 지각이나 감성의 틈을 비집고 나오는 파토스(pathos)적 감성에 호소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의 절대 평면성과 기하학적인 규칙성은 이콘에서 느껴지는 짜임새와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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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 6] Mark Rothko. 'White and Greens in Blue'. 1957. Oil on canvas | ||
그가 러시아 이콘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절대평면’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절대’라는 말은 초월적인 존재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초월성은 우리로 하여금 ‘숭고’의 영역으로 눈길을 돌리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절대주의’를 ‘초월주의’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무방할 듯 하다.
말레비치의 사각형이 정제(整齊)된 느낌을 주었다면 로스코의 사각형은 더욱 격정적 느낌을 더한다. 색의 번짐과 침투로 인해 캔버스와 물감은 완전한 일체를 이루며 말레비치 보다 더한 평면성을 획득한다.(그림 5, 6 참조) 로스코의 사각형은 이미 꼭지점을 상실한 상태임으로 사각형의 모양은 하고 있지만 더 이상 기하학적 사각형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말레비치의 작품은 로스코의 것에 비해 더 기하학적이고 합리적으로까지 여겨진다.
자연에 대한 재현은 말레비치의 경우와 같이 더 이상 로스코의 작품과 관계가 없다. 그는 매체를 넘어 자신 만의 가상의 세계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지각에 의존한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 너머에서 합리주의의 틈을 뚫고 나오는 감성의 강한 에너지. 그것이 그의 그림과 관자를 일치의 경험으로 인도하는 역동적 힘이다.
그의 작품은 대상의 재현이라는 고전적 미술의 기능을 포기하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연결하는 매체로서 자신의 그림을 위치시켰다. 이러한 일치의 개념은 관자와 작품 간의 교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종의 신비적 체험이다. 그의 작품은 관자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명상으로 이끈다. 그 명상을 통한 일치는 우리의 지각이 인식과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이전의 ‘원초적 지각’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적 체험은 시지각의 언어에 의존한다. 동방정교회의 이콘이 ‘말없는 말’ 이었다면 로스코의 작업 또한 그러하다. 그의 작품 속에서 보여지는 색과 색의 대비, 중첩, 혼합, 흡수는 우리의 지각적 감성을 이끌어 상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2m가 넘는 그의 작품의 스케일은 평면의 그림 안에 또 다른 평면의 세계를 담기에 충분하다.
넓은 색면은 관자의 시선을 마치 ‘블랙 홀’처럼 작품 속으로 빨아드린다. 그의 작품 앞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전율은 분명 작품의 스케일이 주는 또 다른 아름다움임에 틀림없다. 그가 주고자 한 아름다움은 작품을 통해 관자에게 ‘주입’되는 피안의 세계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이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숭고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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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 7] 송번수. '그날 이후'. 1997. Wool, Plain Weave. 205x305 cm | ||
“비탄과 전율은 현실의 힘 앞에서 실존의 한계가 극단적으로 드러날 때 터져 나오는 인간의 가장 부정적인 체험의 표현이다”고 안성찬은 그의 저서 ’숭고의 미학’에서 말한다. 이러한 ‘카타르시스’에 대해 안성찬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성의 사슬에 묶여있던 인간 내면의 광기, 즉 파토스(pathos)가 통제에서 풀려나 무서운 힘으로 모든 현실적인 벽과 경계를 무너뜨리고 관객을 일상적 실존의 좁은 감옥에서 풀려나게 한다. 이러한 해방과 고양의 체험이 카타르시스의 본래적 내용과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송번수의 작품을 통해 체험하게 되는 카타르시스적 숭고미이다. 그의 태피스트리(tapestry, 다채로운 색실로 짜서 만드는 그림 작품) 작품에서 보여지는 ‘가시의 이미지’는 그 대상의 재현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가시’가 가지는 보여지는 언어, 즉 상징적인 의미에 중점을 둔 것이다.
처음엔 미시(微視)적으로 그림 속 ‘가시’에 주목하게 되지만 동시에 그 ‘가시’ 이면의 거시(巨視)적 세계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림 속의 ‘가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로 그곳에 표현된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숭고와 신비를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앞에 언급한 로스코나 말레비치의 경우와 같이 그의 그림도 관자를 자연스럽게 명상으로 이끈다. 그의 그림은 단순히 관조의 대상을 넘어 이콘(Icon)이 가지는 초월적 형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실존의 고통을 정화하고 승화시키는 그의 작품의 카타르시스는 기독교의 고난의 영성에 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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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 8] 송번수. '절망과 가능성'. 2001. Wool, Plain Weave. 205 x 197 cm | ||
‘절망과 가능성’(그림8 참조)이라는 작품은 날카로운 가시가 천을 뚫고 나오는 것 같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이 보이는 세계의 장막을 뚫고 나오는 파토스적 힘이 분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 파토스는 현실의 혼란과 고통의 상태, 즉 카오스를 통해 모든 이성적이고, 합리주의적인 구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 새로운 코스모스를 찾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절망과 가능성’은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또 다른 표현이 된다.
숭고미: 기독교 신비주의 미학으로서의 가능성
비잔틴 시대의 이콘은 그 시대가 추구했던 ‘보편성’을 종교적 형식으로 잘 간직하고 있다. 비잔틴 시대가 지정학적으로, 시대적으로 이질적인 문화가 하나로 결집되어 있으면서도 이데올로기적으로 ‘보편성과 통일성’을 획득한 것은 ‘정교합일’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교권이 교황에게 속한 로마교회와 달리 황제에게 보편적인 그리스도 국가의 수장으로서 통치권과 교회의 대표자로서의 교권을 부여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그리스도의 국갗라는 보편성과 종교 문화적으로 ‘이콘’이라는 보편적 미술양식을 창출함으로 비잔틴 제국은 나름대로의 보편성을 정치와 미술 분야에서 유지할 수 있었다.
다양함 속에서의 보편성, 아마도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문화와 사상, 그리고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으면서도 ‘숭고와 시뮬라크르’라는 문화적 코드는 어떤 유행과도 같이 현대문화 전반에 흐르는 보편성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전개되는 양상은 국가와 문화마다 다르고 예술적 장르 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지만, 비잔틴 제국이 현실의 형상과 자연 세계의 미와 비례, 균형 등을 중시했던 그리스, 로마의 내재적 미의 개념을 배척하고 물질과 로고스, 코스모스의 세계를 넘어 비가시적인 세계와 숭고에 집중한 것 같이 오늘날의 현대미술도 현실의 세계에 대한 재현과 미의 규범을 넘어 새로운 미의 보편성을 추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위의 세 작가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형식적, 표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그림을 한 시대의 그림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미, 즉 숭고미를 모두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고전주의적 미의 관점을 여전히 유지한 채 이들의 작품들을 보면서 ‘보편성’이 결여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혹자는 작가 마음대로 개인적인 세계를 표현한 것이 무슨 보편성이 있느냐고 반문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보편성이 이콘을 통해 숭고미로 드러난 것처럼, 숭고미가 일반적 미의 개념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닌 한, 숭고미는 현대미술에서 독특한 보편성을 갖는다. 이러한 숭고미는 체험적인 관점에서 신비주의적 성격이 짙다. 이는 개체들의 감정, 느낌, 경험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던의 한 경향이기도 하다.
그러한 경향조차도 거시적 안목으로 보면 자본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테두리 속에 있지만 신비주의는 그러한 질서와 제한을 언제나 넘어선다. 이성과 합리주의의 세계가 한계에 다다를 때, 물질 지향적이고 자본 중심적인 세계가 그 모순을 드러낼 때 늘 파토스는 그 한계와 모순의 틈을 비집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 그것이 신비주의가 갖고 있는 ‘일캄와 ‘저항’이라는 두 얼굴이다.
현대미술 속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간과해 왔던 것은 이러한 흐름이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이나 비잔틴 전통과 맥을 같이 한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미술사 수업에서는 늘 중세 미술, 즉 비잔틴 미술에 대해서는 가볍게 다루거나 그냥 건너뛰기 일수였다.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창의적인 것이 전혀 없는 미술의 ‘암흑기’로 여겼던 것이다.
이덕형 교수는 그의 저서 ‘비잔티움, 빛의 모자이크’에서 이러한 것이 라틴 문화에 우월성을 강조한 서구문명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동서로마의 오래된 대립으로 생긴 깊은 골이 서구문명으로 하여금 이러한 편견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 또한 예외는 아니다. 교권과 교리중심의 교회전통에서 신비주의 전통은 늘 주류로 편입됨이 없이 주변 현상으로 남아 있었다. 신비적 체험이 때론 교권과 교리를 위협할 위험이 감지 될 때는 가차 없는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성의 흐름에서 이러한 신비주의 전통을 무시하고는 기독교 영성은 절름발이로 남을 수밖에 없다. 신비 체험에 대한 흐름은 역사를 통해 민중들의 삶 속에서 늘 그 맥을 이어왔다. 물론 주술과 접신 등과 같은 많은 폐단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나 대다수가 문맹이었던 과거의 민중들을 위로해 왔던 것은 이러한 신비주의 경향이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대미술이 자본화, 소비화 되어있는 병패도 있지만, 그러한 먹구름 만 걷고 본다면 작가 개인의 체험과 작품을 감상하는 자의 ‘어떤 체험’을 중시한다는 차원에서 현대미술이 신비주의적 경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작가와 작품 사이에서 발생하는 체험도 중요하지만 이를 감상하는 자의 참여 또한 매우 중요하다.
현대미술에서 의미의 전달이 작가 편에서 일방적으로 관객에게 주입되는 성향은 줄어든 반면 작가와 관객이 함께 쌍방 간에 소통하는 구조가 늘어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작가의 창작을 통한 미적 체험만큼 관객이 작품을 통해 경험하는 체험 또한 중요시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자리하는 것이 ‘숭고미’이다. 형상의 이면이나 그 너머에 존재하는 미, 그것은 질서나 균형이 가져 다 주는 미와는 분명 다른 초월적인 면이 있다.
비잔틴 미술의 이콘이 끊임없이 ‘우상숭배’의 논란에 휩싸인 것도 결국은 ‘내재와 초월’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작품에 그려진 대상의 본질이 작품 안에 내재 한다고 주장한다면 반드시 그려진 작품 자체가 원형과 동일한 지위를 갖게 됨으로 이는 ‘우상’의 범주에 든다. 그러나 작품은 그 원형의 그림자요 그 원형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머무는 자리이며, 현실과 초월을 매개하는 그 무엇이라 할 때는 ‘우상’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고전주의 미술에서는 그려진 사과나 대상으로서의 사과에 동일한 의미를 부여했지만 현대미술에서는 그러한 재현을 포기한지 오래이다. 그림에서 대상을 재현한다는 의미는 퇴색되고 대상과 그려진 대상 간에는 이제 의미의 연결고리 또한 사라졌다. 이것이 현대미술 양식에서 보여주는 시뮬라크르이다. 이 글에서는 이 부분에 관한 것은 생략하고 ‘숭고미’의 특징에 집중했지만 현대미술의 표현 양식에서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대미술이 가지는 ‘숭고미와 시뮬라크르’는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과 분명히 맥을 같이한다. 이러한 전통은 이미 비잔틴 미술에서 그 가능성을 보였다. 비잔틴 미술이 너무 형식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으로 치우친 문제는 있지만 그들이 추구하고 이루려 했던 미는 초월적이며 신비적인 미였다. ‘신비’라는 말은 가시적이며 물질적인 이 세계에 대한 반대 국면이며 ‘초월’이란 말로도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잔틴 문명이 초월적인 것을 중시한 나머지 작품 자체를 경히 여겼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원시종교와 같이 작품을 신적인 대상의 범주에 갖다 놓은 것 또한 아니다. 그들은 초월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의 경계에다 이콘의 위치를 부여했다. 그 이콘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그 원형을 향하게 한다.
현대미술에서 작품보다 작가의 창작이나 사상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사실이나 작품 자체가 그 의미를 상실한 적은 전혀 없었다. 뒤샹의 변기 작품이 하나의 해프닝으로 등장한 것이지만 그것을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한 것도 현대미술 자체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작품 또한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며 그 작품은 늘 메를로 퐁티의 표현대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의 경계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미술의 신비적인 요소는 이러한 두 세계의 경계에서 작품이 만들어 내는 그림 이면으로의 ‘초월’과 이 세상으로의 ‘주입’의 반복과 긴장 속에서 생겨난다. 그러한 긴장은 늘 관객 안으로 주입되고 체험되는 신비적 현상이다. 물론 그러한 감흥이 늘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신비적’이란 말이 무색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에서 기독교적 미학의 위치는 바로 이러한 곳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신비주의는 이러한 체험에 미학적 답을 제시하기에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뿌리는 이미 비잔틴 미술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미 움베르토 에코가 가설로 말한바 있지만, 나는 비잔틴 세계와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는 분명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더불어 ‘내재’와 ‘초월’의 경계에서 현대미술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가능성은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서 발견될 수 있다. ‘숭고미’는 어쩌면 그 숙제를 푸는 첫 번째 열쇠일지도 모르겠다.
생태계 위기 속에서 기독교 미학의 자리는
현대미술은 끊임없이 기존질서의 한계를 무너뜨리며 진화해 왔다. 새로운 경향은 또 다른 새로운 경향에 의해 자리를 내주어야 만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늘 현대물질문명의 한계와 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지구촌 생존의 위기가 늘 존재해 왔었다.
이러한 속에서 예술이 서야 할 위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당연히 물어져야 한다. 아울러 계시가 죽고 교리와 교회 전통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또 자본의 논리가 그대로 교회에 적용되면서 세속화의 길을 가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에서 기독교의 영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도 동시에 던져져야 한다.
헬라 세계의 이질적 문명과 문화가 어우러지면서도 문화와 예술, 종교와 정치가 하나의 보편성을 추구했던 비잔틴 세계에 다시금 기웃거리게 되는 것은 이러한 질문에 나름대로의 답을 찾고자 함이다. 비잔틴 문명의 어두운 면 보다 그 문화가 가지고 있는 응집력과 융화력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콘의 미학적 신비를 탐구하며 느끼는 것은 그것이 기독교 신비주의 영성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현상들은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것이 푯대 없이 중구난방 헤매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각 종교가 지향하는 바를 성취하는 차원에서 분명한 자리 매김이 필요할 것이다.
현대미술이 방향성 없이 헤매는 것이 아님은 그 미학이 가지는 특수성이 많은 미학자들에 의해 밝혀지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시뮬라크르와 숭고미’를 현대미술의 특징으로 발견한 것도 현대미학의 발전의 일환이다.
현대미술에서 기독교미술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자리에서 ‘숭고미’와 ‘기독교 신비주의’를 살펴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르겠다. 현대미술 속에서 기독교 미학의 전통의 흔적을 찾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방향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면 그 결과 또한 긍정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채창완 cwhj67@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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