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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의 탄압에 저항하는 민중혼(民衆魂) (29)<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7.06.01 16:29

「씨알의 소리」, 박정희를 이기다

「씨알의 소리」 폐간은 전혀 출판법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중앙정보부와 청와대에 의해서였다. 단언하면 그것은 박정희의 통치(?) 정무(?)에 의해서였다. 박정희는 자신이 직접 “함씨 발언 막지 말라” 했지만 그것은 정말 립서비스였다. 그의 통치의 도구가 되어있는 문화라인에서는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김종필의 표현대로 “정신이상의 늙은이”였다.

함석헌의 글은 그 글을 읽은 박정희의 모든 패거리들로 억장이 무너지게 했다. 함석헌의 글은 하늘같은 각하를 완전히 우스개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목숨 걸고 일으킨 그 혁명(?) 자체를 부정하는 늙은이, 말끝마다 노장소리나 하는 늙은이, 민(民)이 주(主)라며 ‘박정희가 아니다. 민을 주(主)로 모시라’는 늙은이.

그래서 그의 입질을 하는 「씨알의 소리」를 없애버리려 한 것인데, 그래서 폐간령을 내렸던 것인데, 그런데 그놈의 「씨알의 소리」가 다시 살아나온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박정희 위에 또 다른 힘이 작동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박정희의 군사통치력이냐?
함석헌, 장준하가 주(主)로 섬겨내는 민중이냐? 
어쨌던 박정희가 칼로 베어버린 「씨알의 소리」는 죽음에서 다시 부활했다.

헛소리라고는 할 줄 모르는 장준하의 간절한 요청이 아니었다 해도 이미 ‘재야의 정신’이 되어 있는 함석헌에 대한 이병린 변호사의 존경심 또한 지극한 터, 「씨알의 소리」의 어려움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이병린은 자진 무료변론의 소송대리인으로 서울 고등법원에 「행정처분취소청구의 소」를 제기했다. 1970년 6월 8일이었다. 함석헌의 모습은 그때나 이때나 유유자적, 일만사에 무심한 듯 했다. 그렇게 기를 쓰고 시작했던 「씨알의 소리」가 고작 2호를 내고 폐간을 당한 터에도 그런들 그러리, “어떻든 해봐야지”하면서도 모습은 그랬다.

그 해가 지나고 1971년 5월 4일, 이병린 변호사가 제기한 「씨알의 소리」폐간 처분 취소청구의 판결이 내렸다. 고등법원 재판장 안명수, 판사 윤일영, 김석수에 의해, “문공부의 「씨알의 소리」 폐간처분은 ‘재량권의 범위를 넘은 처사’이며, ‘등록을 취소한 처분은 위법부당하다’고 판시, 본지의 승소판결을 내린 것이다. 박정희의 말이 좋아 민정(民政)이지 사실은 여전한 군사 정치 하에서의 언론투쟁의 승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병린, 장준하를 비롯해 이 송사에 참여한 민우(民友)들의 헌신적인 수고가 있어서 가능 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권의 탄압은 달라지지 않았다. 
‘백천간두에 놓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은인자중하던 중 목숨을 걸고 일으킨 구국혁명’을 ‘강간’이라 ‘강도질’이라 ‘칼질’이라하며 내쳐버린 늙은이...그 정신이상의 늙은이를 더 이상 풀어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문공부는 서울 고등법원의 「씨알의 소리」 폐간 취소판결을 거부, 곧 바로 대법원에 상고한다. 그러나 그 정권, 그 정권의 입인 문공부로서도 상고의 이유는 고법의 그것과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씨알의 소리」등록 취소 처분의 이유를 지금 계약되어있는 인쇄인의 변경등록이 없이 타인쇄소에서 인쇄했다는 것이라 했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의 고육지책이었다. 자신들의 맘대로 할 수 있다면 국가 보안법 위배나 국기 문란 등 감히 찍 소리할 수 없는 죄명으로 묶어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은 그럴 수 없는 경우였다. 이미 박정희 정권의 철권이라 해야 할 언론압박 정책으로 상당한 언론, 방송, 문화기관들이 스스로 알아서 내부 검열을 해가는 상황이었지만 함석헌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내 몸의 살점을 뜯기면 뜯기어도, 내 사상은 살점, 내 말의 살점을 뜯길 수는 없다”는 함석헌이었으니...“
문공부로서는 참으로 난감했다.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를 죽여야 한다는 것은 문공부의 의사가 아니라 중앙정보부와 청와대의 엄명(嚴命)에 의한 것이 었으니 결과의 판명이 어떻게 나오든지 문공부로서는 어거지로라도 이 싸움을 대법원으로 끌고 갈 수 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문공부는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함석헌에게는 이미 이겨놓고 하는 싸움이었는데!

7.6일 드디어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내린다. 
재판장 김치걸, 판사 사광욱, 홍남표, 김영재, 양광호에 의해서 였다. 
“「씨알의 소리」 등록을 취소한 처분은 위법부당하다"고한 원판결의 결과에는 영향이 없는 것이라”고 판시, 문공부의 상고를 기각한 것이다. 죽었던 「씨알의 소리」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대법원의 법정에서 「씨알의 소리」의 승소판결을 목도하고 달려와 “선생님, 우리가 이겼습니다”, 숨을 몰아쉬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한 제자에게 “이제 바빠지게 생겼군...”그리곤, 더 다른 말이 없었다. 

의정생활 4년을 마치고 장준하가 찾아든 둥지는 「사상계」가 아닌 「씨알의 소리」였다. 장준하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의회생활에 투신하게 되면서 그의 분신인 「사상계」를 떠날 때, 「사상계」의 판권을 인수하게 되는 부완혁과 의회생활을 마치는 데로 다시 「사상계」로 돌아오는 것으로 계약을 했었는데, 그가 의회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곳은 「사상계」가 아닌 「씨알의 소리」였다. 「사상계」와 「씨알의 소리」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함께 폐간이 되었는데 웬일인지 장준하는 「사상계」를 다시 살려내려는 노력을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오히려 「씨알의 소리」복간에 열을 내며 이병린 변호사를 끌어들여 고법, 대법의 법정싸움을 계속해 갔던 것이다. 

왜 였을까? 꼭 같이 깨져버린 「사상계」요, 「씨알의 소리」라면 다시 살려내자는 싸움에 「사상계」의 판권을 회복하는데 문제가 전혀 없었는데...., 판권을 부완혁에게 양도할 때 전혀 무상으로 였고, 의원직이 종료될 때 역시 무상으로 그 판권은 장준하에게 조건 없이 환원하는 것으로 했기 때문에 장준하가 그 의원직이 종료될 때의 그 환원은 재론조차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는데...... 장준하의 의원생활이 끝난 것이 71년 6월 30일이었다. 이제 장준하는 그 판권을 돌려 받아 「사상계」의 속간(續刊)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그런데 아니었다. 지금 이병린 변호사가 소송 대리인으로 그 폐간 처분의 취소를 위해 법정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씨알의 소리」승소여부에 온 신경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일구월심 기대하던 「씨알의 소리」폐간 조치를 취소하라는 고등법원의 판결에 불복, 상고한 문공부의 그 상고를 대법원에서 기각한 것이다. 
“원 판결 서울 고등법원 1971. 5. 4 선거 70구 184판결
주문 : 상고를 기각한다. 상고 소송비용은 피고 (박정희 정권, 분공부, 필자주)의 부담으로 한다“

원래 문공부가 「씨알의 소리」 함석헌 앞으로 보내온 ‘갑제일호증(甲第一號證) 정기 간행물등록취소통보서’에는 그 취소 이유를 4개항으로 나누어 명시하고 있는데, 그 제4항에서 문공부는, “...따라서 정기 간행물 등록증을 반납하여 주시고 앞으로 언론활동 (기자취재, 본사, 지사, 지국설치, 기자증 발급)을 일체 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했다. 요컨대 ‘언론활동’ (정확히 말해 박정권을 비판하는, 필자주) 불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같은 국가권력의 언론탄압에 맞서 최종심에서 승소했으니, 이제 함석헌의 글쓰기, 말하기는 계속될 것이다. 

이 대법원에서의 승소는 박정희 정권에겐 그야말로 치명상이었다기 보단 수모요, 치욕이었다. 이 함석헌을 “정신이상(精神異常)의 늙은이”라 한 것이 김종필이었고, ‘외국으로 나가시라.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가 뒤를 보살펴 드리겠다‘ 한 것이 이후락이었다. 

6월 30일로 장준하의 의원임기가 끝나면서, 그 일주일 후 7월 6일 「씨알의 소리」 승소가 확정되는데, 이미 그 일주일 전인 7월 1일부터 「씨알의 소리」는 복간작업에 들어간다. 이때가 장준하가 함석헌을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때다. 함석헌이 「사상계」에 쓴 글에 그 직함을 「宗敎人」 (종교인) 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 필명의 직함은 함석헌 자신이 아닌 장준하가 붙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장준하는 10여년 전 부터 함석헌을 종교인으로 보았다는 것인데, 그러나 이것은 그가 의정생활 이전까지는 그저 그렇게 (종교인으로) 보았을 뿐이고, 실제로 함석헌을 종교 (현상을 넘어선) 인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소위 정치현장 4년을 살면서 혹은 살고 나서 였다. 그리고 장준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래, 이제는 선생님과 함께 살아야지”하게 되었다.

그랬다. 장준하는 그랬다. 물론 이제까지는 장준하에게 함석헌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후 자신의 공사간의 살림을 함석헌과 함께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장준하의 이 결심과 함께 함석헌에게도 큰 은혜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장준하를 「씨알의 소리」의 큰 일꾼으로 맞게 되는 날 말이다. 장준하, (大) 「사상계」의 창립자 아니던가! 한국의 젊은이들, 지식인들이 매월 새롭게 발행되는 그 「사상계」를 사들고 더 할 수 없는 자산처럼 으젓, 당당해 하던 대(大) 잡지 아니던가! 그 잡지를 이 땅 언론사(言論史)에 세워 낸 장준하! 

그런데, 그런 장준하가 아예 「씨알의 소리」를 찾아 그 둥지를 틀겠다니...
함석헌도 ‘고맙다!’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이라곤 해본 것이 없고, 했다하면 반드시 실패하는 함석헌에게 ‘일을 만들어 내는 사람 장준하가 온다! 그래, 그 사람 장준하가 온다!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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