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이훈삼 설교
역동적 신앙의 비밀(행전 2:1~13)2017년6월4일 성령강림주일 설교
이훈삼 목사(성남 주민교회) | 승인 2017.06.05 14:13

1. 초대교회의 비밀

1) 비밀 

내용을 미리 예상할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는 별로 인기가 없다.

작가나 감독은 이러한 시청자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기에, 요즘은 중간 중간에 함정을 파 놓아서 시청자의 예상을 빗나가게 한다든지, 어느 정도 진행될 때까지 등장인물이 지니고 있는 비밀을 잘 풀어놓지 않는다. 시청자는 이 비밀을 알고 싶어서 기를 쓰고 본다. 감독은 관객의 호기심을 이용하여 비밀이라는 장치를 통해 시청자의 관심을 붙잡는다. 

비밀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비밀을 파악하는 사람은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마련한다. 오늘 우리교회의 비밀 하나를 나는 알고 있다. 오늘 식사 당번이 디모데회인데 어제 오후부터 회원들이 교회에 나와 열심히 준비를 했다. 그리고 나는 안 봐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오늘 메뉴! 디모데회가 비밀에 붙인 점심 메뉴를 보고 나는 심각한 유혹에 빠졌다. 오늘 설교를 짧게 하고 빨리 점심시간을 맞이하고 싶다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비밀을 알고는 있지만 유혹에 빠지지 않고 꿋꿋하게 해볼 작정이다. 

2) 초대교회의 전환

기독교역사에서 가장 신비하고도 놀라운 현상 중의 하나는 초대교회의 변화다. 그렇게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너무 쉽게 체포되어 십자가 매달려 죽임당한 후, 제자들은 거의 의욕을 상실하였다. 그들은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전진하다가 갑자기 목표를 상실한 새처럼 갈팡질팡했고, 자신들에게도 똑같은 십자가 처형이 내려지지는 않을까 하는 혹독한 두려움에 떨었다. 회의와 불안이 증대할수록 점점 그들은 자신을 더욱 유폐시켰다.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했고 사람들 만나는 것을 기피하게 되었다. 완전히 사회로부터 패배한 루저(loser)들의 모임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들이 놀랍게 변했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나와서 마구 소리치기 시작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잡아 가려면 잡아가라고, 고문 하려면 고문하라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면 못 박으라고! 두려움과 불안으로 숨어 지내던 이들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제자들은 놀랍게 변했다. 이 변화의 지점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일까?

3) 오늘 성경은 바로 그 비밀을 풀어주고 있다. 

100년 전에 지은 미국 세인트루이스 성당은 화려한 모자이크로 성당 내부 전체가 장식되어 있는데 그 천장에 성령강림을 묘사한 장면이 있다. 아무리 봐도 모자이크는 아닌 것 같은데 인터넷에는 모자이크라고 나와 있어서 좀 의아하다. 언제 한번 가서 확인해봐야겠다(?).

성령강림, 미국 세인트루이스 성당 천장화, 1914년

예수 그리스도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좌절과 불안에 시달리던 제자들에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그들은 더 이상 위축된 삶에 갇혀있지 않았다. 스스로 밖으로 나가서 큰 소리로 그리스도를 증언했다. 이 놀라운 변화의 중심에는 성령강림 사건이 놓여 있다. 성령의 임재를 통해 그들의 삶이 바뀌었고, 역사가 새로워졌다. 제자들은 각 자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다. 신앙은 개인적이다. 성령은 각자의 사고와 경험과 상황에 따라 개별적으로 역사하신다.

기독교 신앙은 어느 하나로 획일화하지 않고 다양성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성령의 개별성은 무질서하지 않으며 전체적인 성령의 큰 영역 안에서 움직인다.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 세계 교회가 추구하는 가장 일차적인 신앙고백(에큐메니칼)이다. 우리가 새로운 변화를 갈망한다면 성령의 임재를 기도하자. 성령의 역사는 개인이든 공동체든 현실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한다. 아니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의 고백이다. 

2. 성령의 표징 

1) 방언 전성시대

오늘 본문에서 전하는 성령강림 사건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모인 이들의 공간에 성령이 불의 혀같이 갈라져서 각 사람들 머리 위에 내려오셨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나타난 변화는 이들이 방언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0~80년대 한국교회에는 성령운동이 힘차게 일어났고 교회마다 성령의 임재를 간구했고 체험했다. 성령 받은 가장 분명하고 직접적인 증거는 대개 방언이었다. 방언 받은 사람은 성령이 임한 사람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지닌 것으로 인정받았다.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방언을 못 받은 사람은 굉장히 멋쩍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인들은 필사적으로 방언 받기를 원했다. 어느 기도원에 가면 방언 은사를 잘 받는다든지 어느 부흥사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하면 방언이 잘 터진다든지 하는 소문이 많이 돌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기도원에 가거나 부흥사들이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해서 방언 은사를 받는 교인들이 많았다. 

방언의 은사를 통해 성령이 내게 임재하셨다는 확신을 갖는 교인이 많은 교회는 활기가 넘쳤다. 모이기도 열심이고 거의 교회서 살다시피 했다. 식사, 청소, 전도 등 이전에는 하기 싫어하던 일들을 서로 맡아서 하려는 경쟁까지 벌어졌다. 어쨌든 방언 은사를 받은 이들이 늘어날수록 교회는 역동적인 공동체가 되었다. 그 때는 모든 것이 신나고 즐겁고 어떤 것도 힘들지 않았다. 이때는 전도도 열심히 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확신이 들고 그 성령이 초대교회처럼 나아가 복음 전하기를 원하시는데 주저할 수가 없었다. 모두 기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기에 열심을 냈다. 어린이든 노인이든 한 영혼을 귀히 여기며 전도했다. 

이런 힘차고 활기찬 교회가 된 비밀은 방언을 통해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고 그것은 곧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2) 방언의 위험성 

모든 것은 시간 앞에서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방언을 통한 은사 체험도 너무 많은 곳에서 너무 자주 발생하니까 역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방언은 전적으로 성령이 주시는 은총이요 선물인데 사람의 기술로 만들어 내려는 움직임들이 생겼다. 유명 부흥사들은 자기 마음대로 방언을 받도록 해준다고도 했다. 랄랄라~ 하다가 방언 받았다는 등, 할렐루야를 빠르게 되풀이하면 받는다는 등,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가 아니라 사람이 조작해서 만들어내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위험성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또 하나 영이란 기본적으로 바람처럼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형식과 규칙을 파괴하곤 한다. 대예배 시간 대표 기도하는데 방언으로 기도한다든지 옆에 사람을 배려해서 절제해야하는데 그냥 자기도취에 빠져서 방언으로 고래고래 기도한다든지 하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방언의 부작용이 확산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성령강림 사건 이후 바울이 목회하는 초대교회에서도 문제가 되었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이 성령의 중요한 은사이긴 하지만 그것의 위험성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3:1) 

유명한 사랑 장 첫 부분에서 바울은 방언이 지니고 있는 부작용을 경고하고 있다. 아무리 방언을 잘한다 해도 그것이 신앙의 궁극적인 표징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방언 받은 이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란 당시의 일반적인 인식을 부정한 것이다. 방언을 아무리 잘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처럼 소음일 뿐이라는 굉장히 냉정한 선언이다. 

한국교회에서도 한 때 휘몰아쳤던 방언에 대해서 점잖지 못한 것으로, 악은 아니지만 기품 있는 교양인들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폄하하는 분위기가 더욱 널리 퍼졌다. 이제 우리는 1970~80년대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부흥회, 기도원 집회, 철야기도회, 방언과 통역 등 은사, 병자 치유, 귀신 축출 등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만큼 우리는 교양 있고 성숙한 신앙인이 된 것일까? 

3. 언어를 초월한 언어

1) 방언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서처럼 처음에 방언은 성령이 우리에게 외국어 능력을 한 번에 내려주시는 것이었다. 방언의 목적은 전혀 낯선 외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행전 2:6~8)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이 놀라운 소식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데 말이 안 통하니 어찌하나? 예나 지금이나 외국어 습득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그렇게 차분하게 외국어 공부하여 능통한 후에 전도하려면 이미 세상의 종말이 올지도 모르는 급박한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방언은 외국어 습득 기능을 한 번에 해결하는 열쇠라고 여겨졌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명 자들에게 성령이 방언을 통해 외국어 능력을 주셨다는 것이다. 

나도 고등학교 때 열심히 기도하던 교회에서 신앙생활했는데, 나보다 어린 중학생들도 다 방언으로 기도하는데 나는 못해서 상심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기도하다가 방언이 터졌는데 세상 날아갈 것 같았다. 기도하는 것이 즐겁고 밤이나 낮이나 교회 가는 것이 신나고, 교회 가서 청소하고 재래식 화장실에서 똥오줌을 퍼 날라도 하나도 싫지 않았다. 방언은 우리를 무척이나 신나게 한다.

그런데 내 친구는 비슷한 시기에 영어 방언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무슨 방언 달라고 까지는 생각 못했는데 이 친구는 영어 방언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할 때 옆에서 들어보니 진짜 영어로 하는 것 같았다. 아~, 나도 영어 방언을 달라고 기도했어야 하는 것인데,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러나 영어 방언 받았다는 그 친구가 정말로 영어 회화가 갑자기 가능해진 것은 아니었다. 영어 방언은 맞는 것 같은데 그 영어 방언을 가지고 영어 소통을 하지는 못했다. 

성령운동과 방언 은사를 중요하게 여기던 미국교회와 한국교회는 방언 은사가 곧바로 외국인과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면서 방언의 기능을 새롭게 해석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바울의 이 말씀을 방언이 낯선 외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필요한 외국어를 단 한순간에 습득하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갈망을 하나님께 대신 간구하는 것이 방언의 기능이라고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대개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방언이 신기하기는 하지만 곧바로 낯선 외국어를 습득하는 능력은 아니라는 것이다. 

2) 방언이란 이성에 갇힌 언어의 해방

한국교회의 부흥과 역동적인 신앙생활, 신나는 교회를 이끌었던 중요한 요소 중에 방언을 빼놓을 수는 없다. 방언이 신앙의 모든 것이고 성령의 최고 은사인 것처럼 여겨지던 시대는 분명 문제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방언을 폐기해야 할 것도 아니고, 점잖지 못한 그래서 교양인은 무시해도 좋은 것도 아니다. 방언은 여전히 언어학이나 과학으로 설명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한 은총이다. 중요한 것은 방언 자체보다도 방언의 폐기로 신비 자체가 사라진 교회는 인간의 차가운 이성과 합리주의가 지배하여 교회의 생명력을 상실한다. 2000년대 한국교회는 합리주의적 신앙이 걸었던 서구 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여러 가지 위험이 있다 해도 방언은 분명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이며, 성령이 내 안에, 내 목구멍 안에 임재하셨다는 가장 강력한 표징이다. 그러니 방언이 최고라고 할 필요도 없고 시도 때도 없이 방언하는 것은 절제해야 하지만, 반대로 방언을 하찮게 여기거나 무시해서도 안 된다. 

방언은 우리의 언어로는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신비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험적, 합리적 언어를 초월하는 원초적 언어이기 때문이다.(하비 콕스) 적어도 방언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 전부가 아니며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보다 뚜렷이 체험할 수 있는 중요한 은총이다. 오늘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제 세상에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이 과거보다 현저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조차 사람이 모든 것을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으로 해명하려 하고 그럴수록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계기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비가 사라진 신앙, 초월적 현상이 용납되지 않는 신앙에 남는 것은 인간 자신뿐이며 그 위에 세워지는 신앙은 참된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인간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갈망하라, 방언의 은사를 주시면 기뻐하며 받고 감사함으로 신의 임재를 체험하라. 이것이 인생과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는 비밀이다. 

이훈삼 목사(성남 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충정로 2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 생명의집 204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