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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를 보았다 (Du siehst mich)독일 “교회의 날”(Kirchentag) 참관기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원장) | 승인 2017.06.07 13:34
출처 : https://www.kirchentag.de

1, 교회의 날 행사에 이르기까지

지난 5월 20일(토)부터 30일(화))까지 독일 베를린과 비텐베르크에서 열린 “교회의 날(24-28일)“행사에 다녀왔다. 오가는 일정까지 감안하여 대략 10일 가량 독일에 체류했고 글을 쓰는 지금은 귀국 후 몇 날이 지났으나 시차로 여전히 혼미한 상태이다. 세계 곳곳을 다녀보았으나 유럽과 한국 간의 시차 적응이 가장 어려운 듯하다. 사실 유럽에서 공부했으나 ”교회의 날“ 행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30년 교수생활 이후 은퇴한 상태에서 처음 경험했다. 긴 세월 신학대학에 몸담고 살면서 ”교회의 날“에 대한 경험을 나누지 못했으니 게을렀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배움이 있었기에 더욱 그렇다.

“교회의 날” 행사에 대한 관심은 지난해 10월 재독 한인교회 연합회 임원 수련회에 강사로 초빙되면서 불거졌다. 후학이자 제자들로서 한때 우성감리교회에 함께 몸담았던 두 목사님들, 보쿰의 추용남, 뒤셀도르프의 김재완-의 요청으로 오랜만에 독일 땅을 밟게 되었다. 집회 마지막 날에 세월호 기억저장소를 위해 후원금을 모아주었고 이 일의 연장선상에서 “교회의 날” 행사에 세월호 유족들의 참여를 독려 받았다. 베를린 한인교회 조성호 목사님(기장)의 도움이 컸음을 밝힌다. 이런 연유로 필자의 경우 유족 분들과 함께 “교회의 날” 행사에 참여하는 일이 당연지사가 되었다. 기억 저장소 어머니들도 좋아했기에 독일 한인교회와 연락을 취하면서 이 일을 성사시켰다. 애시 당초 베를린 “교회의 날” 행사에 참여키로 했으나 유럽교회들과 시민사회의 협조로 뮌헨, 런던 그리고 보쿰 지역까지 다녀오게 되었다. 아마도 6월 10일쯤이 어머니들의 귀국 날자가 될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올 초 이은선 교수는 독일교회 내 지인 목사님으로부터 “교회의 날” 행사를 위해 논문 발표 요청을 받게 되었다. 종교개혁 500년을 기념하는 “교회의 날” 행사이기에 관련 주제를 부탁받은 것이다. 우리 부부가 “교회의 날” 행사에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겨 기쁘게 응했고 감사했다. 그때부터 복잡한 메일이 오갔고 논문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국제적 행사라 영어가 공식 언어로 된 탓에 비교적 익숙한 독일어를 접고 영어로 준비하는 일이 버겁긴 했으나 덕분에 그 곳 유럽 사람들은 물론 한인들에게 생각거리를 던지고 왔다. 이에 관해서는 후술할 것이다.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서부터 이은선 교수는 “교회의 날” 발표를 통해 우리들 아시아적 시각을 서구에 전하자는 뜻을 굳게 가졌다. 나 역시 그 뜻에 동조했기에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것을 맘껏 기대하며 떠 날 수 있었다. 함께 하는 여행으로선 참 오랜 만의 일이었다. 물론 단순한 사적 여행이 아니었지만.

조성호 목사님 소개로 “교회의 날” 행사가 열리기 전까지 2-3일간 민박집에 머물며 인근 명소를 둘러 볼 수 있었다. 첫날(21일) 조 목사님 교회에서 설교한 후 독일 국회 의사당, 메르켈 총리 관저, 전쟁 포격 의 상혼을 그대로 간직, 보관한 교회를 찾았다. 이어서 통독이후 베를린에 정착한 감리교 선교사 이병희 목사님 부부 안내로 베를린 북쪽에 위치한 나찌 수용소도 방문하였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축소판이라 불릴 정도로 닮았다한다. 끝까지 히틀러 정권에 저항했던 마틴 니믈러 목사가 머물렀던 방도 눈에 띄었다. 노동력을 상실한 유대인들을 죽이던 가스실, 그 옆에 세운 기념비 인근에 이스라엘 국기와 함께 방금 놓고 간 듯 보이는 싱싱한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지금은 기념관으로 변한 본회퍼 목사의 부모가 살았던 집도 들러보았다. 어린 시절 본회퍼가 뛰놀던 공간이었으리라. 이은선 교수가 근처에 놓인 작은 돌 맹이 하나를 어느새 주어 보여주었다. 니믈러와 본회퍼 목사가 없었다면 독일 기독교는 세상에 얼굴들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 날(22일)은 시내 지도 보며 지하철 타고 시내 중심부를 다녔다. 옛적 공부하던 바젤서의 경험에 근거, 낯선 독일 시내를 어렵지 않게 돌아다녔다. 무작정 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 훔볼트 대학이었다. 분단 시 동독에 속한 이 대학을 찾은 것이 무척 반가웠다. 신학부 건물에 들어섰을 때 슐라이에르마하와 본회퍼 흉상과 합께 벽면에 새겨진 그들 말을 읽을 수 있었다. 내식대로 해석한 것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본다. “역사의 매듭은 풀려짐 없이 함께 가는 것인 바, 기독교와 이웃종교들이, 신학(학문)과 불신앙(미신)이 그렇다(슐라이에르마하). ”기독교는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에게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들이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본회퍼) 앞의 것이 신학의 근대적 과제를 말한 것이라면 후자는 20세기 산업사회의 병폐를 염두에 둔 글일 듯싶다. 시대가 달라지니 신학의 핵심과 골자도 이렇듯 달라졌다. 신학부 앞에 위치한 서점에서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책이 잔뜩 전시되어 있었다. 판매하는 이에게 물으니 훔볼트 대학에서 지젝, 바디유, 아감벤 그리고 아렌트 책들이 많이 읽힌다고 한다. 신학적 동향이 또 다시 달라졌다는 반증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바디유와 한나 아렌트가 서문을 쓴 W. 벤야민의 책을 한권씩 사들고 나왔다.

이튼 날(23일) 우리는 다시 그곳을 찾았다. 베를린의 중심이었기에 박물관과 미술관 등이 많았던 탓이다. 동독의 생활양식을 전시한 박물관을 보았고 종교 개혁 500년을 기념하며 그 전후의 독일 역사를 정리한 독일 역사박물관도 긴 시간동안 살폈다. 너무 볼 것이 많아 빠르게 지났으나 지난 2천 년간 독일이 어떤 경로를 거쳐 오늘에 이렀는가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수없이 국경을 달리하면서 흥망성쇠를 거듭하다 세계적 문제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오늘의 독일이 많이 부러웠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런 독일을 만든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금번 교회의 날 행사가 루터의 종교개혁 500년을 내세울 수 있었다. 물론 그것 자체는 미완의 개혁이었음에도 말이다. 주변에 예술품을 전시한 공간도 있었으나 시간 없어 입장하지 못했고 거대한 돔(Dom)들 몇 개를 살펴보며 넒은 잔디밭 위에서 햇볕을 즐기는 뭇사람들을 실컷 구경했다. 사람을 살펴보는 일(Mindfulness)이 이처럼 신나는 일인지를 새롭게 알았다. 그날 저녁 우리는 “교회의 날” 행사 주최 측이 소개해준 베를린 근교의 가정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특별히 아시아 사람을 손님으로 원했다는 이 가정집에서 우리는 일흔을 넘긴 두 부부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았다. 이은선 교수의 당당한 태도가 이들에게 호감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들 부부에 대해서는 말미에 별도로 언급하고 싶다.

2. “교회의 날” 행사에 첫발을 들여놓다

다음 날 수요일(24일)은 교회의 날 행사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등록한 후 우리는 “교회의 날“프로그램을 담은 두툼한 안내서를 받았고 행사기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교통카드를 받았다. 본 행사가 한 곳에서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베를린 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되기에 수없이 지하철로 이동해야 했던 탓이다. 우리 부부가 발표하게 될 행사장도 사전 답사해 두었고 오가는 거리, 소요되는 시간도 체크 했다. 우리 외에도 몇 사람의 한국인들이 발표하는 것도 안내서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경동교회 채수일 목사, 장로교의 이홍정 목사 그리고 뜻밖에도 인명진 목사가 한국교회의 개혁을 주제로 발표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 한국당내 비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그가 교회개혁을 주제로 발표한다는 것이 생뚱맞기까지 했다. 그러나 신학논문을 발표하는 한국인은 우리들뿐이었다. 채수일 목사는 한국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 했고 이홍정 목사는 아침 성경공부 시간에 ‘야곱과 에서’ 본문을 갖고서 신자유주의 문제를 풀고자 시도했다. 우리는 이분들의 발표시간에 함께 참여했다. 상당 수 재독 한인 목사님들도 함께했다. 사랑하는 제자들, 추용남, 김재완 목사를 비롯하여 교환교수로 와있는 배재대 교목실장 이성덕 박사 그리고 이은표 목사 부부를 만난 것도 뜻 깊었다.

개회식은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성문(광장) 앞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수십만의 사람이 왔다 하여 서로들 놀란 듯 했으나 한국의 촛불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결코 경이롭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이들을 함께 모여 ‘교회의 날’행사를 맘껏 즐기며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독일교회가 결코 죽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매 주일, 그 엄청난 교회 공간을 텅 비웠던 이들이 본 행사에 참여하여 교회의 책임을 논하고 느끼고 있음을 보았던 탓이다. 더구나 종교개혁 500년을 기념하는 베를린 ”교회의 날”행사의 대회장이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공부한 여성목사인 것을 알고 놀랐다. 더구나 그녀는 스위스 인이었다. 민족, 성별을 떠나 이렇듯 중대한 행사에 여성이 대회장 되어 개막 강연을 멋지게 하는 것을 지켜 본 것이다. 그녀의 강연은 본 행사의 주제인 “Du siehtst mich”, 즉 당신이 나를 본(살핀)다“는 창세기 말씀(16장 11절)에 근거했다. 하느님이 신음하는 하갈을 살폈듯이 가난하고 힘든 이웃, 특히 난민, 소수자들을 마음 다해 살펴, 도움이 되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좋게 창조했으니 그의 피조물인 인간들도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야한다(하느님 형상)는 것이다. 결국 세계적 차원의 재난, 빈곤에 대해 독일 교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호소였다. 이슬람 지역에서 온 탄자니아 출신 흑인 목사의 설교도 인상 깊었다. 난민문제로 야기된 갈등을 해결하고 싶었을 것이다. 본 주제에 관해서는 별도로 논의하겠다.

다음 날(25일) 아침은 첫날과 동일한 장소에서 세계적인 강연회 및 토론회가 있었다. 전날 강연한 대회장 여성목사의 사회로 전(前) 미 대통령인 오바마와 메르켈 총리의 대화가 광장을 메운 사람들 앞에서 행해졌다. 비교적 이른 시간 떠나 앞자리를 얻은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얼굴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어 좋았다. “교회의 날” 행사에 자국 수상과 미국 대통령이 와서 축하하고 행사 주제에 관해 토론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신나는 일이었다. 수십만의 독일 젊은이들이 이들 대화에 환호했었던 바, 그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이들 토론의 핵심 내용은 세계적 차원의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 정치와 종교가 상호 협력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트럼프에 의해서 방향이 틀어졌으나 이들 두 정치인은 세계적 차원의 재난에 책임을 함께 지자는 입장을 취해왔었다. 그러나 때론 종교와 정치가 상황에 따라 갈등할 때, 종교인으로서의 개인과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이 모순을 겪을 때 어떤 해결이 있을까를 논쟁했고 솔직히 고민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가난과 전쟁이라는 정치적 모순에 대해 언제든 말해야하는 종교란 인식에 공감한 것 같다.

유럽과 미국이 콜럼부스와 루터 두 사람으로 인해 관계 맺게 되었다는 오바마의 말이 흥미로웠다. 전자에 의해서 착취와 억압의 역사가 일어났으나 후자로 인해 그것이 종식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루터 종교개혁 500년 역사를 의미화한 것이다. 메르켈 총리가 동독 출신이란 것도- 비록 그녀가 CDU라는 보수정당에 속했으나- 오늘의 난제를 풀어 가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란 판단도 있다. 여하튼 “교회의 날”을 맞아 기독교인인 두 정상들은 교회에게 세계적 차원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남겼다.

3. “교회의 날” 주제, “당신이 나를 본다”(Du sichst mich)에 대하여

앞서 말 한 대로 “교회의 날” 행사는 창세기 16장 13절에 나온 이 말씀을 표제어로 삼았고 행사장은 물론 유서 깊은 교회 예배당에 내걸었다. 길을 가다가도 심심찮게 이 구절을 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말씀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의 몸종 하갈이다. 본래 아이를 낳지 못한 본처의 허가를 받아 몸종의 신분으로 임신했으나 본처 역시 임신케 되자 그녀의 질시와 학대를 견디지 못해 죽음의 땅인 광야로 내몰리는 여인이었다. 갈증으로 목말라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깨 우물을 만나게 했기에 하갈은 하늘을 향해 ‘당신은 나를 살피시는 분’이라 고백했다. 곤경에서 자신을 살펴보시는 분, 그가 하갈에겐 하느님이었다.

금번 행사의 주제인 “You see me’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교회의 날“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하느님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당신’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이들의 고통과 절규가 있는 한 그들을 세심하게 듣고 보아야 할 책임이 기독교에게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종교개혁 500년을 맞아 미완의 상태로 있는 기독교의 자기개혁 과제라 여겼다. 앞서 언급한 훔볼트 대학 신학부 벽면에 새겨진 본회퍼의 말도 이점에서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는 결국 유럽의 걱정거리인 난민에 대한 독일교회의 현실적 시각을 반영한다. 자국의 정치적 후진성 탓이기도 하겠으나 그런 상황으로 몰아간 유럽의 책임을 숙지하면서 그들 난민들을 수용할 것을 교회가 국가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 다하기(Mindfulness)’의 영성이다. 살피다. 본다는 것은 마음을 다하란 말이기도 하다. 마음이 없을 때 세상의 고통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법이다. 세상을 향해 마음을 다하는 일이 신앙이다. 성서가 말하는 하갈은 총체적으로 이슬람을 상징한다. 하느님이 보살펴 난 하갈의 아들이 이슬람 조상인 까닭이다. 압복강변에서 하느님과 싸워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란 새(新) 이름이 주어진 것과 비교해 보자. 현재 기독교와 이슬람간의 싸움은 ”하느님을 이긴 자‘와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은 자‘간의 싸움이라 할 것이다. 기독교 서구는 이슬람을 가난한 자의 차원에서 관심할 뿐 이슬람 자체를 긍정하지는 않는다. 자신들을 하느님조차 이길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로 여기는 탓이다. 살피시는 하느님의 역할을 자신들 역할로 인정하는 것은 옳은 일이나 그에 앞서 하갈을 쫒아냈던 자신들에 대한 반성이 앞서야 할 것이다. 최근 계몽시기의 작품 “현자 나단(레싱 著)”이 다시 주목받는 현실을 유념하면 좋겠다.

여하튼 “Du sichst mich”와 짝을 이루는 다른 하나의 말이 눈에 자주 띄었다. 그것은 “Ich war dabei” 로서 앞의 말에 대한 반응이었다. 즉 곤경 속에서 ‘당신이 나를 살핀다’고 말하는 하갈에게 하느님은 ‘너와 함께 있다‘, ’그 때 그곳에 있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느 상황에서든 하느님은 고통 하는 자를 홀로 두지 않는다는 성서의 증언이다. 이런 확신을 갖고서 종교개혁 500년을 맞는 교회가 세상의 책무를 떠않아 슬픔을 경감시키자고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행사장에서 A. 슈바이쩌의 말이 새긴 우편엽서를 나눠주는 집단이 존재했다. 번역해 옮기자면 이런 뜻이다. “우리가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Es gibt keinen Mensch auf der Welt, von dem man nicht erwas lernen Koennte)”. 난민을 구제의 대상으로만이 아니라 배움을 주는 주체로 받아들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교회의 날” 행사에 이런 뜻이 부족했다고 여겨 슈바이쩌 추종자들이 이런 글을 갖고 나왔던 것이리라. 티벳 난민이 발생했을 때 바젤의 신학자 오트는 그들을 수용하는 것은 그들의 오랜 (불교)문화를 수용하는 것이기에 스위스에 큰 덕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난민일 지라도 상호 호혜적 관계성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욱 신학적이고 종교적이며 생태적일 듯싶다.

4. “교회의 날” 행사의 시원과 구체적 내용 및 규모에 관하여

주지하듯 독일 “교회의 날” 행사는 2년마다 한 번씩 도시를 바꿔 열렸었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가 번갈아 가며 행사를 주관했던 탓에 그리 된 것이다. 올해는 루터 종교개혁 500년을 기념하는 축제로서 루터와 관련된 인근도시들이 협소한 관계로 지근거리에 있는 베를린이 주도했다. 개막식은 베를린에서 하되 폐막식은 종교개혁 장소로서 95개조가 발표된 비텐베르크에서 열기로 합의한 것이다. 1949년 독일이 분단되던 해에 평신도 운동으로 시작된 “교회의 날”행사는 분단 역사 속에서도 지속되었고 통독 과제를 비롯하여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에 역점을 두어왔다.

“교회의 날”을 주창한 사람은 라이놀트 폰 타넨-틀리글라프라는 사람으로서 에큐메니칼 의식과 경건주의 의식의 소유했던 그의 영향으로 이후 교회의 날 행사 성격이 나름 규정되었다. 무엇보다 독일교회가 히틀러에 국가사회주의에 동조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교회의 날” 행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루터 이후 국가교회의 성격을 지닌 독일 교회가 “교회의 날” 행사에 있어 후견인 역할을 했던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금번 행사는 우리에겐 낯서나 그들에겐 익숙한 ‘그리스도 승천일’(Himmelfahrt Christi)의 연휴기간 중 열렸기에 많은 관심과 호응을 받았다. 60-70유로를 내고 등록한 사람 수만 17만이라 하니 실제 부스에 참여한 사람, 단순 방문자를 포함하면 몇 곱절은 많을 것이다.

한마디로 베를린 시 전체가 “교회의 날”을 위한 축제의 장이었다. 몇 층으로 된 서 너 개 의 행사장을 비롯하여 도시 내 수많은 교회들, 관공서 내지 대학 건물에서 수많은 강연회, 토론회, 음악회, 에큐메니칼 예배 성서연구 등이 열렸다. 국내외에 참가자 수 십 만 명의 숙박을 위해 크고 작은 호텔, 민박은 물론 가정집, 근교의 학교 건물 등이 필요했다. 동서와 남북이 지상, 지하 철도로 설비된 독일 지하철은 ‘당신이 나를 본다’는 글귀가 쓰여 진 주황색 바탕의 천을 두른 참가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기독교 관련된 수많은 부스들이 운영된 것도 필자를 놀라게 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만 보더라도 부스관람에 하루는 종일 걸려야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세월호 기억 저장소와 위안부 할머니들 부스가 베를린 독일 교회의 부스와 함께 자리 잡아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세상을 위한 빵’(Brot fuer die Welt)이라는 독일 자선단체의 참여부스도 눈 여겨 보았다. 보고 싶은 부스와 듣고 싶은 강연, 그리고 즐기고 싶은 음악회, 또한 배우고 싶은 새로운 형식의 예배 등이 너무도 많아 선택하는 일이 힘들었다. 이들 행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탓에 모두를 경험하기란 불가능했던 것이다.

대략 필자가 눈여겨보았던 강연 주제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Du sichst mich’를 주제로 한 국제적인 만남의 장, 인권을 주제로 한 주제 강연, 전쟁과 테러에 반대하는 비폭력주의, 경계 없는 교회, 다원주의 시대의 기독론(기독교) 재구성, 유대교와 기독교(루터), 이슬람과의 공존의 길, 여성 안수의 문제, 지구를 위한 소금이 되자, 세계적 가난의 문제를 줄이기, 종교들 속의 페미니즘, 하나의 세계가 가능한가? 루터의 ‘오직 은총’- 정의와 관련하여. 공존을 위한 관용, 평화를 위해 더 큰 책임 감당하기, 하느님 은총으로 해방되기, 종교적 자유, 교회와 정치 등이었다.

전체 프로그램은 여기 열거된 것 들 보다 수십 배는 많은 양이다. 시간에 쫓겨 가며 이 저곳을 넘나드느라 내용을 충분히 숙지 못했고 언어부족으로 이해가 충분치 않았음에도 분위기와 방향은 옳게 가늠할 수 있었다. 교리가 아니라 실천이 중요했으며 진리보다 평화가 요청되는 현실을 충족히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대에 교회가 무엇을 위해 필요하며 왜 존재하는 가를 물었고 그 답도 얻었다. 그것은 ‘세상을 위한 교회’로서 자폐증에 걸린 한국 교회를 위한 처방이 될 것이다. 어떤 에큐메니칼 예배에서는 간디의 텍스트와 달라이라마 그을 갖고서 설교하고 묵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시간 상 참여하지 못했으나 프로그램으로 보았기에 증언할 수 있다. 이처럼 광대하고 다양했으나 필자의 시각에선 ”교회의 날“이 여전히 유럽 중심적이었다. 유대교와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고작이었고 아시아 문화와 종교에 대한 관심이 전무 했다. 과거 유대민족에 대한 죄책, 현재 이슬람 난민 수용 문제가 대세였다고 할 것이다. 아프리카적 시각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생태, 환경 문제도 활발하게 논의된 것 같지 않았다. 물론 자본주의 비판, 인권, 평화의 항목에서 보 논의가 없지 않았겠으나 핵심주제는 되지 못한 것 같다. 이점에서 우리 부부가 맡은 과제가 중요했다. 기독교와 한국 유교의 상관성 속에서 종교개혁 이후 신학을 모색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어머니들과 함께 한국의 촛불을 말하고 세월호 이후의 삶을 논한 것도 의미 깊었다.

5. “교회의 날”에서 발표한 이은선, 이정배의 글과 세월호 기억저장소

주최 측으로부터 논문을 처음 요구받았을 때부터 이은선 교수는 다부진 결심을 피력했다. “교회의 날”행사에 단지 ‘배우러 가지 않고 알려 주고자 간다’고 말이다. 당찬 생각에 격려하면서도 나 자신은 솔직히 자신 없었다. 영어가 공식 언어였기에 독일어가 편한 나에게는 조금 버거운 과제였다. 하지만 대학에서 ‘Asian study’ 를 가르친 경험이 있었던 탓에 이은선은 조금 달랐다. 그럼에도 우리 두 사람에게는 학문적 공통점이 있었다. 기독교를 재해석했듯이 유교도 재해석(구성)하여 다른 기독교와 다른 유교를 상호 만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간의 작업을 근거하여 종교개혁의 3대원리와 만인 제사장론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자고 생각을 모았다. 이은선은 종교개혁이 말한 3개의 ‘오직(sola)’를 3개의 성, 즉 聖, 性, 誠으로 재해석 했고 필자는 유교의 제사원리를 최소주의에 입각하여 만인사제설로 발전시켰다. 평신도도 설교는 물론 의례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신독(愼獨) 개념에 터해 재해석 한 것이다. 지금껏 3개의 ‘sola’가 오용되고 과장되어 자본주의 논리로 변질되었다면 만인 제사직은 재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사장 되고 말았던 탓이다.

생명평화 마당에서 활동하면서 우리는 脫성직, 脫성장 그리고 脫성별을 한국적 ‘작은’교회론의 가치로 여겼고 세 개의 脫을 통해 종교개혁 500년을 맞고자 했기에 우리의 이런 작업은 한국에서도 수차례 토론되었었다. 독일교회 목사들, 그곳의 신학생들 그리고 한인 유학생들 다수가 참여하여 논쟁했으나 일정부분 설득되는 분위기였다. 외국어로 난해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려니 한계도 많았으나 의사는 소통된 듯싶어 안심했다. 언젠가 한국어와 독일어(영어)에 능통한 사람들이 번역을 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도 생겼다. 앞으로도 지속될 과제이기에 질문을 경청했고 더 생각할 거리를 갖고 돌아왔다.

세월호 기억저장소 어머니 두분을 모시고 간 것도 큰 기쁨이자 수확이었다. 추진할 때와 달리 정부가 바뀐 탓에 분위기가 달라졌으나 어머니들은 세월호 기억 저장소를 알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세월호 유품들은 수없이 생겨나는 데 그를 보관할 공간은 없고 추모관 건립에 안산 시민들이 앞서 반대하는 상황에서 어머니들은 기억저장소 활동이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역설했다. 독일에서 아우슈비츠 참사를 기억하는 방식도 열심히 배웠다. 세월호를 통해서 촛불민심이 생겨났고 그것이 한류 중 한류가 되어 세상의 희망이 된 것도 강조했다. 우리 역사 상 ‘기억’의 중요성을 이처럼 중시하게 된 것도 분영 세월호 참사로 인함일 것이다. 그래서 벤야민은 기억을 메시아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돌쩌귀(돌의 틈새)와 같다고 말한 것이다.

세월호로 인해 우리는 촛불로 대변되는 직접민주주의 열망과 기억의 중요성을 배웠다. 이것이 지닌 종교적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벙어리와 같았던 유족 어머니들의 입이 열려 세상을 흔든 예언자의 소리가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또 다른 부활이라 명명했다. 조그만 부스에서 어머니들은 이런 메시를 전하였다. 누가 ㄱ들을 고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소시민, 무지렁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강한 자들, 배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메시야 소리를 담고 있었다.

사실 세월호 기억 저장소의 부스활동은 베를린 한인교회 50년 행사를 위한 부스에 한 발을 내 딛으므로 시작되었다. 본 교회는 독일교회와 밀접한 관계 속에 있는 교회로서 50년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어렵 살이 부스를 확보했다. 그러나 필자의 부탁으로 부스 일부를 세월호 유족들에게 내주었고 나중에는 정신대 대책위와도 함께 했다. 협소한 공간에서 세 단체가 부스활동을 했으니 교회로서는 많이 불편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쁘게 공간을 나눠준 교회에게 깊이 감사한다. 이 교회는 초기 파견된 광부들의 생존(노동)권을 인권 차원에서 회복시킨 역사를 갖고 있었다. 이후라도 세월호 기억저장소를 위해 자신들 몫을 다 감당하겠다는 조성호 담임목사의 전화를 귀국하여 받았기에 공유한다. 유족들과의 대화 기사가 지난 6월 2일자 한겨레신문에 베를린 특파원 발(發)로 실렸다. 두 분 어머니들은 ‘베를린 행동’이란 시민단체와 연결되어 보쿰, 런던 그리고 뮌헨을 거쳐 이달 9일 경 귀국할 예정이다.

6. ‘교회의 날’ 행사의 피날레- 비텐베르크에서의 폐회예배를 중심하여

베를린에서 개회한 ‘교회의 날“ 행사는 루터가 95개조 항목을 써 붙였다는 비텐베르크 시에서 페막했다. 도시가 협소한 관계로 수십만이 모이는 폐회예배는 도시 인근 넒은 초원에서 드렸다. 안타깝게도 도심에 이르지 못해 먼발치에서 비텐베르크 교회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내리쬐는 땡볕을 견디며 수십만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목사의 설교가 있었고 독일 대통령의 마지막 인사가 있었으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꿈꾸며 성만찬 예식을 거행했다. 관현악단과 합창단의 멋진 음악이 백미였다. 선포된 메시지 내용을 떠올리며 ’We shall over come’ 노래 4절까지를 모두 합창했다. 우리 이웃을 더 잘 살펴보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수백 대의 차량(버스)이 줄지어 오가는 모습도 장관이었다. 주차후 3-4킬로미터를 걸으면서 서로에게 인사하는 모습도 각인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교회의 날’ 행사를 이끈 대회장인 스위스 여자 목사를 만나 대화하고 사진 찍으면서 바젤동문임을 함께 기뻐했다. 2년 후 ”교회의 날“이 보쿰에서 열린다는 소식과 함께 4박5일의 여정이 마무리 되었다.

행사에 참여하느라 몰랐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교회의 날“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독일 TV채널에선 과연 이런 행사를 지속해야 옳은가에 대해 장시간 토론을 했다는 것이다. 국가교회로서 독일교회가 막대한 예산을 치르면서 이런 행사를 지속하는 것에 대한 이의제기가 없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5-60년 이상 지속된 것은 본 행사에 정당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은 탓이라 했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모여 독일 교회의 사명과 미래적 과제를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이 독일의 앞날에 유익하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고통을 독일교회가 감당할 수 있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이 있는 한 한국교회는 유럽교회의 텅 빔을 비웃을 자격이 없다. 이들 문화 속에 남아있는 기독교 정신은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여타의 모든 것들은 다른 분야가 감당할 수 있다. 의료, 복지, 교육 등이 그렇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책무를 가르치는 종교(기독교)의 역할은 이와 별도로 여전히 존재하는 법이다.

행사 첫날(24일) 베를린 일간지에 한 무신론자의 시각이 실렸다. 종교개혁 500년을 축하하는 “교회의 날“행사에 대한 일종의 관전평이었다.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루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종교개혁이다. 가톨릭이냐 개신교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동구권의 좌파와 탈(脫)교회성이 예수와 훨씬 친근하다는 점이다. 이런 예수를 말하는 한 무신론자인 자신도 교회의 날 행사를 지지한다. 한마디로 종교개혁은 지속되어야만 한다. 현재의 기독교는 세상을 품을만한 규범(Norm)을 갖고 있지 못하다. 루터의 종교 개혁지 비텐베르크의 개신교 인구가 18% 미만인 것을 숙지하라.“

7. “교회의 날” 행사를 위한 감사!

벌써 교외의 날 행사를 마치고 온지 한 주일이 지났다. 많은 것을 배운 자리였다. 올해로 5년 차 준비하는 ‘작은교회’ 박람회(한마당)를 위해서도 생각거리를 많이 주었다. 배운 생각들을 많이 반영하면서 더욱 좋은 모임으로 키워나갈 것이다. “교회의 날” 발표 자료를 준비하면서 박효식 목사에게 신세를 졌다. 모든 자료를 몇 번씩이나 고쳐 복사해 주었다. 진심으로 기쁘게 이 일을 감당해 주어 고마웠다.

독일서 만난 제자들 후학들에게도 고마운 마음 전한다. 힘겹게 목회하면서도 세월호 유족들을 만나겠다고, 선생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1천 킬로 이상을 달려와 준 목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들 교회에서 세월호 기억저장소를 위해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우리들 강연을 듣고 기쁘게 응답해준 임재훈 목사께 인사를 드린다. 세월호 부스를 나눠 함께 쓴 베를린 한인교회 성도들이 특히 고맙다. 창립 50년 행사가 이로 인해 더욱 빛나길 기도한다. 무엇보다 우리 부부의 가스트 게버(Gast Geber)가 되어 준 독일 부부에게 깊이 감사하고 싶다. 이들은 교회의 날 행사로 아침 6시에 떠나는 우리를 위해 손수 아침상을 차려주었고 떠나는 날 공황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곳서 나눈 아침 식사를 잊을 수 없다. 아시아적 시각을 존중하고 좋아하면서 넉넉한 대화로 우리를 격려한 그분들을 기억할 것이며 우리도 이전보다 환대하는 삶을 살 것이다. 끝으로 금번 여행 속에서 일상을 꼼꼼히 챙겨 주었고 학문적 자극과 옳은 길을 거듭 추동한 이은선 교수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독일 “교회의 날“에 대한 기억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생각하며 집필하는 내게 큰 영감을 주었으니 참 좋다.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원장)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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