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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김명수 칼럼>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 예함의집) | 승인 2017.06.12 13:51

1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12:1-2; 새번역)

1 Dear friends, God is good. So I beg you to offer your bodies to him as a living sacrifice, pure and pleasing. That's the most sensible way to serve God. 2 Don't be like the people of this world, but let God change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know how to do everything that is good and pleasing to him.(Romans 12:1-2; CEV) 


기독교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다 보면 두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와 바울이 그들인데요. 지역과 문화는 달랐지만, 그들은 거의 동시대에 살았습니다. 바울보다 예수가 약간 연상(年上)이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활동무대는 팔레스타인이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의 시리아 접경지대인 갈릴리였어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는 30세쯤 출가(出家)합니다. 갈릴리 전역을 주유(周遊)하다가 요단강변에서 예언자 요한을 만나 세례를 받게 되지요. 그 순간 예수는 득도(得道)를 하게 되는데요. 그가 들은 천어(天語)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소리였어요. 한갓 필부(匹夫)에 불과한 자기가 다름 아닌 가장 존귀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깨달음이지요. 새로운 자기 이해입니다. 

득도(得道) 후 예수는 어디로 가나요? 갈릴리 저자거리이지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더불어 하느님나라 복음 운동을 전개합니다. “때가 차서 하늘나라가 임박했으니 회개하라”는 것이 주 내용이었는데요. 예수의 복음운동은 갈릴리 밑바닥 씨알민중 계층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큰 호응을 얻게 되지요. 

로마의 식민지 권력은 예수의 씨알민중 운동에 불안을 느끼게 되고,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예수를 몰아 사형선고를 내리지요. 예수의 공생활(public life) 기간은 1년 정도입니다. 요한복음의 자료에 따르면 3년 정도 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는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진 분이에요. 삶을 양(量)이 아니라 질(質)로 살았던 분이지요. 1년 간 예수의 공생활(公生活)을 기점으로 인류 역사는 BC와 AD로 갈리지요.   

예수가 본토(本土) 유대인이었다면, 바울은 해외동포 유대인이었어요. 디아스포라(diaspora)였어요. 기원전 6세기 유대가 바빌론에게 망하자, 유대인들은 세계 각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요. 예수시대에는 팔레스타인 거주 유대인 대략 180만 명 정도였어요. 해외에 흩어져 거주하는 디아스포라가 5백만명 정도였습니다. 

바람처럼 살다 간 예수가 다름 아닌 메시아였고, 이를 하나님의 구원사건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디아스포라 유대인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길리기아의 수도 타르소(Tarsus) 태생인데요.  바리사이파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요. 어려서부터 율법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율법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젊은 나이에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떠났어요.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사건이 발생한 때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유학하는 기간이었어요. 헌데, 바울은 이 사건을 알지 못했어요. 예수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디아스포라 출신 예루살렘 교회 집사 스데반이 유대교 극우세력에 의해 돌로 맞아 죽는 자리에 바울이 처음 등장하지요.(행7:58) 

바리새파 열성주의자였던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유대교 율법과 성전 전통을 개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분노하여 예루살렘교회 신도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서게 되는데요. 박해를 피해 다마스쿠스로 피신해 있는 경건한 기독교인들을 탐색하기 위해 떠나지요. 그 길목에서 바울은 신비체험을 하게 되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역사의 실존인물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였어요. 그 과정에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할 사도로 선택되지요. 복음의 박해자 바울이 복음의 전파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행9장) 

바울의 다마스쿠스 득도(得道) 사건은 AD 33년 경에 있었어요. AD 65년 경, 로마의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할 때까지 바울은 30년 남짓 ‘오직 한 길’을 갔습니다. 예수 메시아 복음을 전파하는 길이었어요. 바울은 사상가요 조직가였습니다. 율법에 대응하여 예수메시아 복음의 체계를 세웠고, 교회(ecclesia)라는 조직을 복음전파의 거점으로 활용했어요. 기독교가 오늘 날과 같이 세계적인 종교로 발돋움하게 된 데는 바울의 역할이 크지요. 기독교는 바울에 의해서 비로소 기성(旣成)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지요.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예수에 뿌리를 둔 바울교(敎)라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신약성서는 27편의 서로 다른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AD40년 경(데살로니카전서) 부터 AD150년 경까지 대략 2세기(베드로후서)에 걸쳐 쓰여 졌지요.  그 중에 바울의 이름으로 쓰인 책이 13편인데요. 바울의 선교행적을 주로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까지 합하면 14편이 바울과 관계된 책이지요. 이는 초기 기독교세계에서 바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지요. 

그 중 바울의 친필(親筆) 서신이 7편인데요. 여기에 로마서가 포함되지요. 바울 신학사상의 특성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서신 가운데 하나가 로마서입니다. 로마교회는 자생적(自生的)인 교회입니다. 사도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성령강림 사건을 직접 목격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로마로 돌아가 자발적으로 세운 일종의 평신도 교회이지요.(참조, 행2장) 

바울은 신앙생활을 하나의 ‘길’로 보았습니다. 세운 목표를 이루고 성취하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고 보았어요. 인생에는 완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미완성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길 위의 존재(Auf dem Weg Sein)’라는 것입니다.(빌3:12-14) 신앙은 미래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것을 터득했어요. 바울의 말년의 신앙고백이지요. 

바울은 말년에 스페인 선교를 꿈꾸고 있었어요. 유럽의 서방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싶었어요. 그는 로마교회의 도움을 받고 싶었고요. 그런 동기에서 로마서를 쓰게 되지요. 로마서는 신학적으로 주도면밀하게 짜여 져 있습니다. 

로마서의 중심 주제는 비교적 간단하지요. 구원입니다. 구원받는 방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요.  사람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 문제이지요. 

바울은 구원의 패러다임을 체인지 했어요. 유대 민족주의 산물인 율법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어요. 율법이나 양심의 법이 구원의 방편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일일이 지키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새 술은 새 부대를 필요로 하듯이, 이방세계 선교에 맞는 구원방식을 창안(創案)해 낸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보편적이고 쉬운 길(易行)을 제시한 것이지요. 믿음(pistis)이 그것입니다. 구원에서 필요한 것은 ‘닦음’이 아니라 ‘깨달음’이라고 생각했지요. 점수(漸修)가 아닌 돈오(頓悟)의 문제로 본 것이지요. 구원의 패러다임을 행위에서 믿음(인식전환)으로 체인지한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것인데요.(justification by faith). 구원은 인식의 문제이지 결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믿음의 대상은 누구인가요? 예수그리스도이지요. 예수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느냐에 의해서 구원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늘 자각하고 사는 것이 칭의(稱義)입니다. 헌데, 바울은 그리스도를 밖에서 찾지 않고 내 안에서 찾지요. 

크리스천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와 함께 나(에고)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없이’ 무아(無我)로 사는 사람이 크리스천이지요. 그것이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이지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지요.(갈2:20) 그리스도를 나로 삼고 사는 삶이지요. 

내 안에 사는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요? 에고가 아니지요. 본래의 나, 참 나이지요. 생각, 감정, 육신에 매어 탐애(貪愛)하거나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에고인데요. ‘참 나’는 에고와 달리 공익(公益)을 우선으로 하고, 공(公)의 가치를 추구하지요. 그리스도는 ‘사적(私的)인 나’가 아니라 ‘공적(公的)인 나’입니다. 에고(ego)가 아니라 셀프(Self)이지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en pistei zo)’는 것은 다른 것 아니지요.(갈2:20) ‘참 나’에 접속되어 공공(公共)을 이롭게 하는 삶(public life)을 산다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영적 예배(logiken latreian)’를 드리라는 것인데요. 로기켄(logiken)은 합목적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뜻합니다. ‘영적’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가장 합리적인 예배 형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몸(soma)’으로 드리는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마는 영(pneuma)만도 아니고, 육(sarx)만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이나 육을 제외한 다른 무엇도 아닙니다. 인간은 몸으로 생각하고, 몸으로 말합니다. 몸으로 행동하고, 몸으로 살지요.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몸이지요. 몸은 삶입니다. 인간 전체입니다. 부분이 아니지요. 인간이 전체이듯이,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체입니다. 몸의 구원이지요. ‘몸으로 드리는 제사’,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있을 뿐이지요. 

삶 전체가 예배에 되어야 하고, 예배가 곧 삶 전체이어야 합니다.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을 따로 떼어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성속(聖俗) 이분법을 해체하고 있어요. 성(聖) 한 가운데 속(俗)이 있고요, 속(俗) 한 가운데 성(聖)이 있습니다. 성속을 떠나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오직 책임적인 존재일 뿐이지요. 

몸으로 드리는 예배는 무엇인가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인데요. ‘이 세대(aion tuotou)’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역(易)이지요. 무상(無常)입니다. 생주이멸(生住離滅)의 과정을 밟고 있지요. 나(ego)는 일정한 조건 하에서 ‘나 아닌 것들’로 조립되어 있어요. 나 아닌 것들의 집합이 ‘나’를 이루고 있지요. 따라서 나에서 나 아닌 것들을 빼기하면 어찌 되나요? 나는 없어지지요. 무아(無我)입니다. 본래 ‘나’라는 것(substance)이 없지만, 일정한 조건이 형성되면 ‘나라는 현상’이 임시방편적으로 생겨났다가 조건이 다하면 나도 사라지지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무슨 뜻인가요? 이 세상에는 머물 곳이 없다는 말인데요(無住).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변화 과정 속에서 결국 사라지고 말 것들(이 세대의 풍조)에 매이거나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현상 속에서 본질을 꿰뚫어보는 삶을 살라는 말과 통합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세상에 살면서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을 일컬어 ‘몸으로 드리는 제사’요, 가장 바람직한 예배라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늘 ‘마음을 새롭게 하라(anakainos tou noos)’고 합니다. ‘카이노스’는 존재의 질적(質的)인 새로움을 말합니다. 마음은 그릇과 같습니다. 항상 무엇으로 채워져 있어요. 따라서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비워내야 합니다. 텅 빈 마음이어야 새 것으로 채울 수 있지요.  

사람의 마음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나요? 아집(我執)입니다. 탐애(貪愛), 분노(忿怒), 어리석음이지요. 이를 말끔히 청소한 다음에야 변화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선하심(agathos), 기쁨(euarestos), 완전하심(teleios)은 무엇인가요? 모두를 이롭게 하는 공적(公的) 가치들입니다. 텅 빈 마음자리에 하느님의 공적(公的) 마인드로 채우고, 공적 가치인 양심과 정의를 실천하는 길이 몸으로 드리는 가장 바람직한 예배입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 예함의집)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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