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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Day] 2017년 6월 18일 성령강림절 후 두번째 주일 (마 9:35-10:8)
홍상태 | 승인 2017.06.13 14:22

신학적 관점

오늘의 본문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다섯 설교 중 네 번째 것으로 “선교 담화”로 알려진 부분을 포함한다. 예수는 무리를 보면서 그들을 위해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시고 열두 제자들을 추수하기 위한 일꾼으로 파송하신다(9:38). 이 본문은 제자들만을 위한 명령이 아니고 모든 신자들을 위한 것이다.

마10:5-6에는 예수가 “사도들”에게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에게로 가지 말고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선포하라고 당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태복음에서는 사도라는 단어가 여기에만 등장한다. 정확히 열두 사도가 보내졌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새 이스라엘과 그 열두 지파의 중요성을 표현한다. 사도들이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예수는 예수 자신이 행사하던 권위를 그들에게 준다. 더러운 귀신을 쫓고, 병든 자를 고치는 권위가 그것이다. 주목할만한 것은 가르치는 권위는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권위는 예수만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설교자가 아니었는가? 가르치는 사역은 예수만이 할 수 있는 것인가? 예수의 가르치는 권위가 마태복음에서 매우 강조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사도들에게 부여된 권위 중 가르치는 권위는 빠졌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더 나가, 예수는 열두 사도들에게 지켜야 할 지침을 내리는데 예를 들어 자발적 가난, 여분의 옷 소지 금지 등이다. (이는 방랑적 견유학파나 에세네학파와 구별하기 위함인 듯하다.) 그들은 신자나 개종자의 집에서 머물러야 한다. 그들을 환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값을 힘들게 치를 것이다. 예수는 그들이 고난과 핍박을 당할 것이라 말씀하고, 그들이 늑대 속의 양과 같다고 하며, 어떻게 선교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지에 관한 가르침을 주신다.

초보 선교사를 위한 구체적 지침서와 같은 톤의 글이 갑자기 바뀐다. 사도들이 배신을 당하고 권력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라고 예고한 뒤 예수는 10:19-2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이 너희를 관가에 넘겨줄 때에, 어떻게 말할까, 또는 무엇을 말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때에 지시를 받을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이런 강력한 권고가 없었다면 본문은 평범한 지침서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도들은 고난이나 핍박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통해 말씀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다.

이것은 예언이나 설교의 은사도 아니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안위의 말도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사도들과 함께하고 시련의 때에 그들을 통해 역사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임재를 가장 강력하게 체험하게 되는 것은 핍박당하고 용기를 잃을 때라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예수는 세상을 홀로 복음화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예수는 신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권위를 힘입어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한다. 오늘날 우리가 목사, 사제, 평신도 지도자의 권위를 주장할 때, 우리는 기독교 운동 초기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예수가 우리에게 허용한 권위의 성격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예수가 우리에게 준 권위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주어진 것으로 절대적이거나 무오적인 것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비판과 박해가 있을 때, 그런 것들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제자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할 값은 매우 크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강조하신다.

둘째로, 이 사명은 새로운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지 모든 민족을 복음화하라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선포는 우선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야 그 대상은 모든 민족으로 확장된다. 다음의 구절을 보면 예수는 선민들을 동일한 믿음 하에 하나로 모으기를 원하는 것 같다: “이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다”(10:23) “인자”라는 표현은 심판과 관련이 있는데, 이 구절이 70년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를 통해 일어난 유대인의 박해를 언급하는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셋째로, 사도들과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내리는 벌은 매우 중대하다. 예수는 소돔과 고모라에 내렸던 것과 비슷한 하나님의 심판이 내릴 것이라 말한다.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자들을 벌하신다고 하지 않고, 단순히 사도들을 환영하지 않거나 그들의 말에 주목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런 심한 벌을 내린다는 점이다. 이 단계에서 제자들의 주된 사명은 이스라엘의 치유였는데, 그것이 너무 중요한 사명이어서 그 소식을 무시하는 것만으로도 큰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을 회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신학적 주장을 읽을 수 있다. 이 세상의 어떤 권세나 주권자도 하나님과 그 백성이 세운 언약을 방해할 수 없다. 그 언약을 회복하는 것이 예수가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보다 우선된다.

Stephen Butler Murray, Senior Pastor, The First Baptist Church of Boston, Massachusetts, and College Chaplain and Associate Professor of Religion, Endicott College, Beverly, Massachusetts
 
[역자 평: 이 글은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이 사도들의 사역의 일차적 목표라고 해석하는데 그것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관하여는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보인다.]
 
주석적 관점
 
예수의 치유기적들 이야기 끝에(8:1-9:34),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의 사역에 대한 요약을 제공한다. 4:23말씀을 상기시키는 이 네 절은 예수의 가르침(5-7장)과 예수의 행동(8-9장)에 관한 부분을 결론 맺는다. 이 절들은 이행구로서 윤리적이고 동정심 많은 유대 메시야로서 예수의 소개로부터 그들의 스승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12제자들에 대한 사명으로 전환된다. 이 본문은 예수의 가르침, 설교, 그리고 치유사역들에서 ‘불쌍히 여기심’(compassion)이 동기였음을 보여준다(9:35-36; 14:14;15:32;18:27;20:34). 예수는 백성들이 그들을 방어하고 돌보아 줄 목자가 필요한 괴롭힘 받고 무력한 양(문자적으로 억압받아 땅에 넘어진 양)으로 보았다. 마태 기자는 예수를 그의 양을 돌보는 동정심 많은 목자로 묘사한다(18:10-14;26:31)

추수의 비유로 넘어가 예수의 백성들에 대한 동정심은 그로 하여금 추수할 것이 많은 데 추수할 일꾼은 적다고 한탄하게 한다. 동정심은 억압의 문제를 구원의 기회로 전환시킨다. 예수가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그의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청하라는”(9:38) 제자들에 게 한 요청은 열 두 제자들을 사도들로서 파송하는 소환과 사명의 전조가 된다. 사실 예수의 제자들은 열두보다 많지만, 예수는 사도들로서 파송하는 작은 그룹을 선택한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12부족을 대표하고 이스라엘의 이전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에 대한(19:28) 상징이다. 사명을 준 열 두 제자들은 예수 사역 초기에 부르심을 받고 예수와 상당한 시간을 같이 보냈다(4:18-22;9:9-13).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신 후 예수는 그들에게 그가 가진 권세와 권위를 주어 그가 하신 일들을 할 수 있도록 했다(7:29;9:6-8;21: 23-27 ;28:18).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신 내용은(10:5-42) 그의 다섯 강화 중에  두 번째를 구성한다. 첫 번째 강화(산상설교)와 같이 예수의 가르침은 임박한 종말론적 기대가 나타나고 있다(10:16-23; 7:21-23비고). 사도로서 열두 제자들은 예수의 사역을 계속하기 위한(10:16-25, 40-42;28:16-20) 대표자로서 파송되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10:16)고 말하셨다. 이것은 산상설교에서 제자들에게 “거짓 예언자들을 살펴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7:15)하신 말씀을 상기시킨다.

이 두 경고들의 문장에서의 맥락을 보면 “이리들”이란 유대 종교지도자를 가리킨다(5:20‘10:16-18,23). 다시 목자 모티브로 돌아가서 예수는 자신을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10:5-6;15:24)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잃어버린 양”이란 개념은 앞에서 백성들을 “목자없는 양”(9:36)이라고 묘사한 것에서 만들어졌다. 에스겔 선지자는 많은 유대 백성들을 약탈하고 억압하고 흩어지게 하여 목자 없는 양을 만든 “유대 목자”들을  규탄했다(겔34:2-10). 백성들이 목자가 없으므로 예수가 목자로 와서 잃어버리고 흩어진 이스라엘 양들을 구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한다.

마태에서만 사도들에게 이방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을 피하고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라고 지시한 것으로 니타난다. 이러한 제한은 복음서 끝에서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라는 명령에 의해(28:19a) 거두어진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를 유대인들에게만 사역을 완수하는 것으로 제시하지만, 이방인들은 여러 곳에서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 칭찬받고 제자로 장차 하나님의 왕국의 상속자로 그려진다(2:1‘8:10-12;15:28;21:43;22:1-14). 마태에서 예수의 족보에는 심지어 세 명(아마도 네명)의 이방인여자(다말, 라합, 룻, 그리고 아마도 밧세바)가 예수의 조상으로 나온다(1:1-6). 

유대인 특권과 이방인 포함 사이의 긴장은 필시 예수운동의 역사적 발전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운동은 배타적인 유대교 운동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마태가 씌여진 때에 마태공동체는 유대인 배타주의를 포기하고 필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명백히 배타적으로 유대인 선교사명에 관심을 갖지만. 부활하신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함으로써 마태공동체의 길을 예비한다. 

사도들의 메시지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는(10:7;3:2;4:17)세례요한과 예수의 메시지와 같다. 바울서신이나 오늘날 대부분의 서구 기독교는 예수의 설교를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로 강조하고 있지만, 열두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는 데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설교하도록 가르쳤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병자가 치유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신이 좇겨나는 등의 억압받는 자의 구원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재정적 보수에 관한 이슈를 말함으로 결론짓는다(10:8b-15). 재정적 이득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대한 사랑이 언제나 사역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께 구원을 거저 받았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거저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비교 고후11:7). 예수는 사도들에게 필요한 물자가 공급되어야 할 필요성을 인정했지만(10:10b-11;비교 고전9:3-19), 또한 사도들은 물질적 준비에 대해 걱정하지 말아야 하고(비고 6:25-34), 개인적 재정적 이득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역에서의 환대를 통해 사도들은 그들이 보내진 사람들과 물질을 나누었다(비고 빌4:14-20). 예수는 한편으로 사도들에게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것을 확신시켰지만, 또한 다가올 박해와 그들이 예수가 받았던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10:16-25) 경고했다.

Guy D. Nave,  Associate Professor of Religion, Luther College, Desorah, Iowa
 
목회적 관점
 
예수는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모든 도시로 가서, 모든 회당에서 설교하고, 질병 하나하나를 모두 고쳐준다. 거리가 너무 멀지 않고, 청중도 회의적이지 않으며, 질병도 심하지 않다. 예수께서는 사역을 완수하셨다. 예수가 그의 사역을 수행하도록 제자들에게 위임할 때, 상황은 훨씬 어려워진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 특히 학교나 교인들 가운데 졸업하면서 특별한 봉사를 위임받은 사람들에게 이 구절들은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진지한 평가를 제공한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신성한 사명은 세상의 정치적 현실, 사회 분열 및 조직적인 무질서에 대하여 적용되어야 한다. 도전들에도 불구하고, 성공할 가능성이 의심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훨씬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성취하려면 불가피한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를 보내신다. 이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이상과 실제의 차이를 인정하게 하면서 제자로서 우리의 신앙이 크게 도약하게 만든다.

설교자는 10:9-23의 괄호 안에 있는 부분이 포함되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 구절이 8절에서 멈추면 제자들의 위임은 상대적으로 실현 가능해 보인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께서 이미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 구절이 계속되면 가난한 사람들의 요구, 복합적인 대립에 대한 예측, 몸이 다치게 될 가능성, 그리고 선교가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듣게 된다. 우리가 계속 나아갈수록 약속하는 소리는 더욱 불쾌해진다.

하지만 청중들은 예수와 떨어져 있는 사람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하지 않으면 본문을 더 듣지 않아도 된다. 병을 고쳤어? 한센병자를 깨끗하게 했다고? 아마도. 악마를 쫓아내? 죽은 사람을 살려? 예수가 한 일에 익숙해 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예수가 성취한 일을 제자들이 이제 곧 수행해야 할 임무와 나란히 놓을 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가 한 것만큼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로 가셨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일을 하는 지역에 남아 있어야 한다. 예수는 모든 회당에서 설교하셨지만, 제자들은 환영하는 집과 박대하는 집을 발견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군중들을 만났고 그들의 모든 질병을 완치하셨다. 제자들은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많은 고난을 견뎌야 할 것이다.

이들 초창기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무엇을 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직접적인 증인으로, 확신과 결단과 강철 같은 용기로 잘 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목자 없는 양처럼 느껴질 수 있다. 오늘 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웃 마을에 사는 낯선 사람들은 제쳐두고라도, 교회에서 옆에 앉아있는 사람들과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 부족하다. 제자들은 기꺼이 먼지를 발목에서 털어버리고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다문화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는 것이 너무 뻔뻔스럽게 보일까봐 두려워하여 주저한다. 아마도 예수의 맨 처음 추종자들은 질병을 치료하고 기적을 행하는 데 성공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고대 이스라엘의 그 성읍들로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 세상을 가지고 세상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일을 완성하라는 도전을 받는다. 세상은 많은 신앙을 요구하며,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성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예수께서 이방인과 이스라엘 집에 있는 사람들을 구별할 때,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나라에서도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정치적 분열과 문화적 갈등이 계속되고 있음을 기억한다. 수년 전부터 좋은 소식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파되었는지 들은 것처럼, 우리는 정보, 산만함, 그리고 진실한 경쟁에 의해 압도되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제자들이 파송될 때,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대가도 받지 말아야 한다면, 오늘날 교회가 부와 맺는 관계는 빈곤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의 요구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위해 기꺼이 겪어야 하는 고난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열두 제자가 예수를 낮은 차원에서 대신한다고 보면, 오늘날 이 위임을 듣는 사람들에게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격은 엄청나게 넓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통해 놀라운 일들,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이루어졌으며 교회의 평범한 교인들을 통해 계속해서 행해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의 말씀은 이 구절에 열거된 열두 제자에게보다 그들에게 훨씬 더 용기를 주고 동기를 부여했다.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노력의 결과로, 불치병이라고 생각되는 질병이 박멸되고, 부당한 법이 뒤집어졌으며, 어떤 문들은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그것들이 넓게 열리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그 가운데 가장 사소한 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박해받는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기독교가 살아남을 뿐 아니라 번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성취가 일어날 때, 그들은 충실한 믿음으로 성공을 더 높은 권세에게 돌리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를 그의 사명에 포함시켜 주시고 어떻게 바로 우리가 그분을 통해 성공할 수 있는지를 신비로 남겨 두지만, 그러나 신실한 사람들은 기적적인 일들을 성취한다. 아마도 예수가 목자 없는 양들에 대해 연민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기도가 응답되었고 충분한 추수꾼이 풍성한 수확으로 보내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성령의 말씀이 적시에 적절한 사람들을 통해 말해졌을 것이다.

아마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현실와 이상 사이의 간격이 실제로 가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고서 믿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더라도 예수는 우리가 그 일을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설교적 관점

예수로 인해 계속 놀라워했던(9:33) 군중들은 대부분 어려움에 처해있던 사람들이다. 이런 군중들은 어디에나 있었으나(7:28; 12:23; 14:13; 21:46) 그들은 어느 곳에서도 그 필요한 것들을 갖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9:36). 예수는 그들이 피곤한 사람들이고 상처를 입은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고 계신다.  구약성서에서 목자없는 양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들을 돌봐주거나 바른 길로 인도해 줄  예언자나 왕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었다(민수기 27:16–7; 이사야 40:11; 에스겔 34:1–). 그들의 고통은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 있고 독자들은 이제 목자가 이런 곤경에 응답하게 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교회의 응답은 무엇인가? 우리는 돌보고 있는가 아니면 최소한의 것도 돌보지 않고 있는가?

예수는 그들의 어려움을 보고 침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9:36). 그의 연민은 그의 “창자” (bowels)나 “내장”(guts)으로부터 나올 정도로 예수 안에 깊이 체화되었는데 여기서 연민 (compassion)이란 말이 유래하였다. 같은 용어가 14:14과 15:32에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목자는 한결같이 자비와 연민으로 그의 사역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는 보는 것으로 인하여 마음이 움직이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 대해 구체적인 행동으로 응답한다. 예수께서 보여준 이 연민에서 나오는 응답은 그로 하여금 실천으로 나아가게 한다. 교회도 이러한 곤경을 목도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연민어린 응답이나 사랑을 품은 선교로 바로 나아간다고 보장할 수 없다. 어쩌면 교회는 그들의 눈 앞에 있는 이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 곤경을 인식조차 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회중들에게 어디에 어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일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예수의 연민(compassion)은 그를 선교로 나아가게 한다. 누군가의 곤경을 보고 그들에 대해 긍휼한 마음으로 응답하는 것은 신앙적 실천을 요청한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을 주인에게 보내줄 것을 기도하라고 할 때(9:38) 제자들 자신이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이 되었다. 그들이 기도의 응답이었고 이것은 우리들도 우리 기도의 응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추수할 일꾼이 된다. 하지만 그들이 “사도들” (apostles) 곧 “보냄을 받은 사람들” (sent out)로 불리우기 전에 그들은 예수에 의해 부름을 받고 권능을 부여받는다 (10:1).

이들 사도들은 배신자, 열심당원등을 포함하고 있는 온전하지 않은(imperfect) 사람들이지만 불쌍히 여기시는 분(the Compassionate One, 예수)이 이 세상을 섬기라고 부르셔서 그 일을 위임한 사람들이다. 추수하는 주님은 그들에게 힘을 주고 할 일을 위해 준비시킨다. 제자들이 지닌 권능은 예수의 권능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만나는 분이다.  우리가 어려움을 만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교에서 교회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고 세상 속에서 사역을 위해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갖추게 한다. 선교가 무엇인가는 공동체 주변 “군중들”(crowds)의 필요가 무엇인가에 따라 각자에게 다르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교회는 “보냄을 받은 사람들” (those sent out) 즉 본질적으로 사도적이라는(apostolic) 점은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내지 않는다; 추수하는 주님이 우리를 선교현장으로 보내신다. 이 선교란 무엇인가?

선교란 하늘나라가 가까이 있다라고 말과 행동으로 선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복음은 (good news) 특별한 메시지 안에 싸여있고 (예를들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10:7) 병든 자를 돌보고, 죽은 자를 일으키고, 나병환자가 깨끗이 되고 마귀를 쫓아냄을 통하여 드러난다. 병든 자, 죽은 자, 나병환자, 그리고 악령에 사로잡힌 자등을 향한 이런 류의 선교는 오늘날 교회의 선교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런 위험한 선교로 부르시는데 그것은 이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연민 때문이다. 말로만 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이 선교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소식은 하나님의 돌보심이라는 구체적인 사실을 통하여 믿을 수 있게된다”​1) 에 대한 가시적인 증거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더욱이 이 돌봄의 선교는 댓가가 지불되는 것도 아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10:8). 근본적으로 복음은 값없이 받는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은 값을 치르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만나기만 하면(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영역에서) 되는 것이다. 목회에 있어 기부를 요구하는 설교자들은 예수의 이 말씀으로 인하여 고발되어야만 한다. 곤경에 처한 사람은 예수께서 그/그녀의 어려움을 만나는데 있어서 씨를 뿌릴 필요가 없다. 

이것이 복음인데 그 이유는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섬기도록 다른 사람들을 선교의 현장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만나는 길을 내어주시고 이 자비로운 사역은 “잃어버린 양들” (lost sheep)에게는 값없이 주어진다.  예수께서 바라는 것은 잃어버린 양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 본문으로 하는 설교는 본문에 나온 어려움으로 시작할 수 있는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를 말함으로써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다음 본문에 나타난 은혜를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의 연민과 그가 제자들을 곤경에 처한 이들을 만나도록 보내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본문의 흐름이 설교의 흐름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이 본문으로 하는 설교의 역할은 교인들을 긍휼한 마음을 지니고 세상 속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 설교는 본문 자체가 그렇듯이 선교를 향한 강력한 요청을 담을 수 있다. 단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곤경에 대해 무언가를 하기위해 보냄을 받아야 한다.
 
Luke A. Powery, Perry and Georgia Engle Assistant Professor of Homiletics,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Princeton, New Jersey
 

1)  Douglas R. A. Hare, Matthew, Interpretation series (Louisville. KY: John Knox Press, 1993), 111.

홍상태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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