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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신 이유 (행전 9:13~19)2017년 6월 18일 성령강림셋째주일설교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 | 승인 2017.06.19 10:37

1. 바울의 전환과 선택의 이유 

1) 바울의 전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신약 성경 최대의 사건은 바울의 전환(轉換)이다.
 
한 손에 성경과 또 한손엔 검을 가지고 있는 바티칸 광장의 사도 바울. 그 뒤로 그리스도 상이 보인다. 바울은 기독교를 세계적 종교로 확대한 결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핍박하던 혈기왕성한 사울이 예수를 목숨 걸고 증거하는 바울로의 변화는 내면적 심리에 초점을 모으는 회심이나 회개라는 용어보다는 삶 전체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뜻의 전환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다고 한다. 예루살렘을 떠나 시리아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체험은 정말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나아가 인류 역사를 새롭게 구성하는 사건이었다.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생각, 가치관, 몸의 방향이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달라지는 사건 안에는 보통 내 의지와 결단을 넘어서는 신적인 계기가 내재되어 있다. 인간의 의지적 결단보다도 하나님에 의한 변화가 진정한, 근원적인 변화인 것은 성경의 여러 인물들이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적어도 이 사실을 긍정하고 나 자신뿐 아니라 우리 역사의 변화도 하나님께서 추진해주시기를 간구하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불확실하거나 결여될 때, 기독교 신앙은 존재와 역사의 근원적 변화가 아니라, 도덕 강론의 수준으로 추락하고 만다.
 
2) 전환의 계기, 예수 그리스도
 
카라바조, 바울의 회심, 230*175cm, 1601년, 로마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출처 : Art History & the Art of History
끝까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스데반을 돌로 처형한 극렬 유대교도들은 이제 시리아까지 박해의 지경을 넓혔다. 예수 믿는 이들이라면 땅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박멸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중심에 사울이 있었다. 사울은 매우 위협적이었고 딱 보기에도 살기가 등등했다. 이런 사람 만나면 섬뜩해진다. 그는 스스로 대제사장을 찾아가서 예수 박멸의 사명을 실행하겠다고 선언하고 공문을 받아서 예수 무리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온다는 불타는 열정을 지니고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었다. 그 길 위에서 사울은 일생일대의 경험을 한다. 바로 그렇게 증오하고 박멸의 대상이라고 믿었던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이 만남이 그에게 닥친 변화 요인의 전부였다.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문을 활짝 열었던 카라바조가 이 장면을 그렸다. 다마스쿠스에 거의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환한 빛이 사울을 둘러 비췄고 이에 사울은 땅에 엎드려졌다. 화가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단순화하여 꼭 필요하지 않는 인물들은 과감히 생략하고 초점에만 집중했다.
 
위에서 내리꽂는 빛은 탄력으로 넘쳐나는 말의 몸통을 지나 쓰러진 사울에게로 쏟아진다. 말이 앞발 하나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울은 이제 막 말에서 떨어진 것이다.
 
순간 놀라기는 마부도 마찬가지였다. 오른손으로는 말의 고삐를 단단히 쥐고 왼손으로는 말의 콧잔등을 눌러 놀란 말을 제어하고자 얼굴이 붉어지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다.
 
벗겨진 머리와 이마, 그리고 미간에 이르기까지 깊이 팬 마부의 주름살은 이 일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말에서 떨어진 사울은 강렬한 빛에 눈을 뜰 수가 없다.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소명임을 확신하면서 거침없이 달려오던 그 길이 갑자기 화면 위쪽의 어둠처럼 암흑으로 변한 것이다. 의기양양하던 사울의 몸은 비참하게 땅에 내팽개쳐지고, 쏟아지는 빛의 방향을 향해 두 손을 들어 항복하고 있으며, 투구는 벗겨지고, 반대로 눈은 감겨졌다. 그는 사흘 동안 볼 수도, 아무런 음식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 칠흑 같은 시간에 사울은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다. 개인이든 역사든 근본적 전환의 지점은 주님과의 만남이다.
 
3) 부르신 이유
 
바울의 눈을 뜨게 하는 아나니아
다마스쿠스에는 아나니아라는 신자가 있었다. 주님은 그로 하여금 사울을 방문하여 눈을 뜨게 하라고 하신다. 아나니아는 주님께 이의를 제기한다. 듣자하니 사울은 핍박자로 악명이 높은데 예루살렘에서도 그랬듯이 이곳에 온 목적도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는 것이라는데 어떻게 저런 자를 다시 눈뜨게 할 수 있습니까? 눈을 뜨면 많은 동료 신앙인들이 잡혀가고 죽임 당할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일리 있는 항변이다. 주님의 뜻에 대한 저항이 일리 있다하여 불순종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인간의 분석과 판단이 주님을 넘어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나니아의 항변에 주님은 전혀 뜻밖의 말씀으로 응답하신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행 9:15)
 
이제까지 모든 사건은 모두 주님이 만드신 것이다. 그렇게 한 이유는 딱 하나, 사울을 선택하기 위해서다. 주님의 정 반대편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사울을 선택하여 넘어지게 하고 눈을 못 뜨게 하고 빛을 비추고 소리를 들려준 모든 것은 모두 주님이 그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서 고난이 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더 가까이 부르시고자 하는 과정인 경우가 많다. 이 때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울을 선택하여 바울로 대전환을 이루게 하신 목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하는 것, 이것이 사울을 넘어트리고 눈을 멀게 하고 식음을 전폐하게하면서 까지 부르신 이유다.

2. 전도의 기쁨
 
1) 전도 안 하는 자부심?
 
한국교회의 급성장 배경에는 열심히 전도하는 전통이 있다. 믿음 좋은 사람은, 은혜 받은 사람은 반드시 전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한국 교인들은 자신이 교인임을 드러내기를 좋아했었다. 그래서 교회 승합차에도 커다랗게 교회 이름을 쓰고 다녔고, 교회 차는 대개 여러 사람이 운전하고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많다 보니 신호도 많이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국교회의 인식이 나빠진 이유 중 하나는 차, 옷, 언행에서 교회 다니는 것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실제 생활은 별로 본이 되지 않는 경우를 반복적으로 경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도도 열심히 하여 전철이나 공공장소에서 양해도 없이 일방적으로, 그것도 달변의 모습으로(마치 뱀 장사를 연상시키듯) 마구 쏟아내는 모습을 보면, 신실한 신앙인까지도 전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게 만든다.
 
이 한 장의 사진이 기독교 전도는 무례하다는 이미지를 확산시켰다. 더군다나 불교 등 이웃종교에 대한 무례한 장면들, 진심어린 친절이나 봉사가 아니라 자기 교회에 끌고 가기 위한 목적성 접근 등에 대해서 비난의 여론이 비등하다.
 
서울대, 카이스트 등에서 펼치는 전도 반대 카드운동
오죽하면 최근 대학교에서는 전도를 거부하는 카드를 만들어서 자신을 전도하려는 학생에게 주고 괴롭히지 말라는 당부까지 하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교양 있는 기독교인들은 전도 같은 점잖지 못한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자세인 것 같은 분위기도 형성되어 있다. 전도하지 않는 신앙에 대한 자부심?
 
2) 초대교회 전도와 선교사
 
그러나 기독교 역사는 한 마디로 전도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전도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성령이 임재하신 목적도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전도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였고, 전도하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며 살았다. 하나님은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의 길을 따라 기독교 복음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셨다. 그 결과가 오늘 동방의 작은 나라인 한반도에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래되어 꽃피울 수 있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 부유한 나라만 아니라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의 가난하고 힘든 나라들에도 수많은 한국 선교사들이 전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초대교회의 전도에 대한 열정과 사명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낯선 외국에서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건강을 해치고 자녀들 교육 문제로 고민하며,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생활 속에서 오직 전도의 사명감만 붙들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제3회 마드라스크리스찬칼리지 한국의 날(2017년, 인도 첸나이)
설교 후 별도로 설명하겠지만 우리교회가 파송하고 후원하는 이화랑 목사의 인도 선교사역은 이런 점에서 초대교회의 사역을 이어가는 매우 중요한 사명이다.
 
3) 예나 지금이나 전도자의 삶은 매우 피곤하고 위험하면서도 끝내 전도를 버리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 곤란함이 있지만 전도 그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기쁨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전도는 때로 비웃음도 당하고 스스로 멋쩍기도 하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진정한 신앙인에게 그 어떤 것도 전도의 삶을 막지 못했다. 전도는 어렵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했다는 결실과 감사에서 오는 기쁨이 더욱 크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좋은 소식, ’기쁨의 소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은 소식이 있으면 빨리 전하고 기쁨을 나누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다. 전도는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좋은 소식, 최고의 선물을 나누는 것이기에 빨리 전하고 싶은 것이다.

3. 어떻게 전도할까?
 
1) 노방 전도
 
우리교회 전도부가 그동안 전도를 하지 않았는데, 오늘 식사 후에 교회 앞길에서 노방전도를  하기로 했다. 사실 전도의 경험도 많지 않고, 기왕에 하는 거 잘 준비해서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해서 다음 주에 할까 했는데 말이 나온 김에 그냥 해보기로 했다. 좀 서툴러도 괜찮다. 주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나머지는 사실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청년이 고급 호두과자 4개 묶음 100세트를 전도 용품으로 기증했다. 2000년 대 들어서서 한 동안 노방전도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교인들이 교회 밖으로 나오지 않고 모두 교회 안에 유폐되었다. 길거리에는 이단들의 전도 가판대가 점령하고 또 ‘도를 아십니까?’하는 이들이나 ‘얼굴이 아주 복 많이 받게 생겼다’고 말하면서 쫓아오는 이들이 훨씬 많아졌다. 그러다가 최근에 다시 우리교회 주변에도 노방 전도하는 이들이 많이 늘어났다. 교회가 다시 전도에 대한 열정과 사명을 되찾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2) 전도하는 방법 중에 ‘진돗개 전도’라는 것이 많이 알려졌다.
 
잘은 모르겠으나 한번 대상자를 정하고 전도를 시도하면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것 같다. 품위 있는 진돗개는 한번 물면 놓지 않는 것처럼 전도 대상자를 한번 물면 결코 포기하거나 중간에 놓지 말라는 것인가 보다. 전도는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도 전도 잘 하는 교인들이 필요한 시기다.
 
오늘 우리교회 전도도 어린이들이 함께 하기로 했는데, 고등학교 때 시골 교회에서 어린이부 교사를 했다. 주일 아침이면 8시도 안되어 나가서 우리 동네 아이들 집을 다니면서 아이들 데리고 한참 걸어서 교회까지 다니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이렇게 전도하기도 쉽지 않은 사회 구조가 되어 버렸다.
 
3) 가장 중요하고 쉬운 전도 방법은 고백으로서의 전도다.
 
전도를 어렵다고 생각하면 실행하기 힘들다.
 
가장 중요하고도 쉬운 방법은 내가 예수를 믿고 좋은 점을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좋은 점만 있는 것도 아닐테고 사람이 모이는 교회에 문제가 없을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내가 예수를 믿고 얻은 구원과 평안, 받은 은총과 사랑, 기도의 응답 등을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면서 나는 예수님이 좋다고, 교회가 좋다고 말하는 것이 곧 전도다. 순교할 각오하고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라고 내 몰지 않는다.
 
그저 있는 자리에서 주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을 하나씩 되돌아보면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전도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전도하지 않으면서 점잖고 교양 있는 척 하는 사람보다는 부족하지만 전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전도하려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영생의 면류관을 예비하신다. 주님이 오늘 주민교회 교인으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행복해진다. 이 믿음으로 주님의 구원 역사도 이루고 우리 자신도 참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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