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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Day] 2017년 6월 18일 성령강림절 후 두번째 주일 (마 9:35-10:8)홍상태 목사
홍상태 | 승인 2017.07.06 14:54

신학적 관점

내가 어릴 때 좋아하던 찬송가 중의 하나가 Judson W. Van DeVenter가 1896년에 작사한 “I Surrender All(“내게 있는 모든 것을,” 찬송가 50장)”이다. 나는 특히 후렴을 좋아했던 것 같다. 이 후렴은 오늘의 본문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I surrender all, I surrender all,

  All to Thee, my blessed Savior, I surrender all.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

내가 상상하기로는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마11:28-30에서 우리를 제자도로 초대하신 후 듣기 원하시는 반응이다. 

그 초대가 있기 전에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이 그 결과에 의해 입증될 것이라고 명확히 말씀하셨다.(19)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고, 그 관계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고 하셨다. 예수가 오늘 본문 결론부에서 제안하는 제자도로의 초대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제자도로의 초대의 특징은 우리의 목회적(평신도와 성직자 모두의 목회) 상황과 우리가 믿음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관한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믿음, 사랑, 소망, 정의를 위한 투쟁의 상황에서 제자도를 실천하면서 우리는 신앙과 매일의 삶을 연결하는 하나님의 통합적인 관심을 깨닫는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이 변혁적 제자도를 실천하는 것은 어렵지만, 필수적이고, 때로는 매우 고독한 길이다. 

제자의 길을 가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융단을 짜듯이 우리의 존재를 직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누리고, 또 우리가 받은 은총과 자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삶을 살면서 제자도를 이루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한계에 주목하지 않고 가능성에 주목하는 삶이며, 하나님의 요구에 “네”라고 대답하는 삶이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점점 더 서로를 잘 이해하고, 연민을 베풀고, 용납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제자로 사는 것은 우리가 정직하고 하나님께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찾음으로 우리의 자아관이 바로 서게 되면 우리는 삶의 대소사와 관련하여 깊은 신학적 통찰력을 발휘하게 된다. 예수의 제자가 되면 안식만 얻는 것이 아니고 핍박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야 할 새로운 존재 양식과 우리가 전해야 할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확신에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제자도는 또한 우리가 더 정의로운 세계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한다. 이런 고민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성격에 관한 구절들(16-19, 29)과 연결된다. 16-19절과 관련하여 우리는 “일상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추방당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주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내용이 예수의 멍에를 지고 그에게서 배우라는 29절의 말씀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성찰하다 보면 깊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도에 관해 배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제자의 공동체 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제자도를 실천하는 모범은 연못의 잔물결처럼, 혹은 지진 후의 큰 파도처럼 주위로 확산된다. 마지막으로, 제자도 신학이 한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공유될 수 있는가를 명확히 하려면 본 훼퍼의 책 The Cost of Discipleship에서 더 찾아보는 것이 좋다.  

Emilie M. Townes, Associate Dean of Academic Affairs, Andrew W. Mellon Professor of African American Religion and Theology, Yale Divinity School, New Haven, Connecticut

 

주석적 관점

마태복음의 주요 문학적 구성 요소는 다섯 개의 긴 강화인데, 각 강화마다 이야기들이 따른다. 오늘 본문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는 것에 관한(9:35-11:1) 두 번째 강화에 따르는 이야기 중의 일부분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선교를 위해 제자들을 파송하는 예수의 모티브나, 이스라엘의 고을(10:23)들의 반응 또는 무반응이 여전히 전체 문학적 구조에서는 본문의 배경이다.

자료에 관해서는, 마태11:16-30 전체가 Q자료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데, 하지만 세 문단 각각은 누가복음에 있는 Q자료와 병행구인데, 그것은 마11:16-19와 눅7:31-35, 마11:20-24와 눅10:12-15, 그리고 마11:25-27와 눅10:21-22이다. 마11:28-30은 공관복음에서 병행구가 없다. 그것은 마태의 특별한 전승이나 마태 자신의 창작으로 볼 수 있다. 

가능성은 적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추측은 마태는 Q로부터 “내게로 오라”는 초청을 택했지만 누가는 삭제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찰은 원자료의 범위와 공관복음 전단계 Q의 본문에 담겨져 있는 말씀들의 순서에 대한 자료비평적 질문들을 금방 제기하게 한다. 그러한 질문들은 보통 해결하기 어려운데, 하지만 특정한 경우에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반적으로 누가복음보다는 마태복음이 더 많은 수정들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첫 번째 문단 16-19절 앞에는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가 “오실 그 분”(11:2-3)인지를 묻는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는 그들에게 대답하고, 그들이 돌아간 뒤 군중들에게 세례요한에 대해 짧은 연설을 하는데 16-19절은 그것의 일부분이다. 16절은 앞에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는 말의 연결되는 의미보다는 반대되는 의미로 시작한다.

이러한 언어적 연결은 이 본문의 우화적 말씀들의 궁극적 의미를 밝혀준다. 그것은 진실로 이 세대(16)에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세대”의 본래의 참고는 예수 시대이지만, 삼투성의 편집적 모티브에 따라 마태의 세대나 또는 우리의 세대에도 적용할 수 있다.

비유 자체는(16b-17) 여기에 나온 인물이 실제 누구인지에 관해 많은 논쟁의 주제가 되어왔다. 이 비유가 일반적으로 사람들, 특별히 세례요한과 예수의 적들은 전혀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현재의 인용구에서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해석하는 부분(18-19)에서는 풍자적으로 세례요한과 예수를 그들의 생활스타일과 받은 비난으로 비교하는데, 한데 요점은 비교가 아니라 그들 각자를 향해 모략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이다. 

이 부분은 격언으로 끝난다.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19절의 “일”이란 신학적 의미가 있는 단어인데, 이는 2절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상기시킨다. 이는 또한 예수가 한 여러 가지 일(11:5)들을 가리키기도 한데 이는 예수가 선언한 복음의 핵심을 보여준다. 

두 본문 사이에 오는 본문(20-24)에서 청중은 같지만 주제는 바뀐다. 여기에서 예수는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도시에 대한 예언자적 심판을 선언하는데, 이들은 16절에서 예수가 말한 것이나 행한 것에 대해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16절에 언급한 “이 세대”의 다수를 대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주제는 2-24절의 전 부분에 걸친 주제이다. 

두 번째 단락인 25-30절은 부정적 강화에서 긍정적 강화로 바뀌는 것을 보여준다. 문학양식으로는 기도(25-26), 선언(27), 그리고 충고(28-30)이다. 앞에 부분과 비교하여, 예수의 기도는 앞에서 언급하지 않은 그룹으로 예수의 말을 듣고 이해하고 따른 소수의 사람을 보여준다. 적절하게 반응하지 않은 사람들을 “지혜있고 똑똑한 사람”으로 성격지움으로 예수의 이 말은 주되게는 교육받은 이스라엘지도자인 그의 적들의 범위를 좁힌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사람을 아이로 규정한다. 이 비유는 일반적으로 겸손한 자를 지칭하지만, 그러나 또한 제자이든 군중이든지 특별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25절 예수의 기도에서 기원은 주기도문과 비슷한데, 하지만 예수의 유일성을 표적으로 취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버지에게 기원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유대인들이 기도를 시작하는 방법이다. 예수가 독특한 것은 기도의 내용에서 볼 수 있는데, 아버지와 아들간의 상호이해의 독점적 성격과 또한 아들을 계시의 유일한 중개자로(27) 지정하고 있다. 이 기도는 눅10:22과 말 그대로 병행구이다. 

배타적 계시의 그러한 주장은 종종 종파주의의 표시인데, 보통 변방의 초기공동체로서 그가 속한 큰 사회의 주류에 대항하여 정통성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Q공동체나 마태공동체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데, 하지만 이것은 누가공동체에 적용하는 것은 토론중이다. 그러므로 28-30절의 결론적 권고는 70년 이후 유대교의 소수자운동으로서 마태공동체의 곤궁함이란 배경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Eugene Eung-Chun Park, Dornsife Professor of New Testament, San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 San Anselmo, California.   

 

목회적 관점

성서정과의 이 기묘한 복음서 말씀은 7월 4일 미국의 독립기념일 주간에 나온다. 미국에서 설교하는 목회자는 이런 맥락에서 이 말씀을 읽을 수밖에 없다. 비록 그렇게 하는 것이 민족, 국가, 모든 세대가 다 다양해서 목회적으로 일관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이 본문은 신앙을 지닌 어느 한 민족을[미국] 위한 축하의 말씀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묘사하는 방식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려고 할 때도 있지만,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서 전적으로 무시하기가 어렵다.  

이 구절은 자기들의 노래를 사람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들이 기쁜 노래를 부를 때, 아무도 춤을 추지 않았다; 장송곡을 불렀을 때,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들은 세례 요한보다 더 잘 이해받지 못했으며, 예수보다 더 잘 이해받지 못했다.

예수는 개인이 응답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부르고 있는 노래에 대해 사회 전체, 실제로는 전체 세대가 반응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우리는 애국적인 축제 일주일 동안 춤추는 이유와 우는 이유를 우리 세대가 이해하는 방식이나 혹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숙고하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 문화의 또 다른 노래와 목소리에 너무나 자주 그리고 쉽게 무감각해진다. 우리는 중요한 순간을 놓칠 뿐만 아니라, 짐이 무거운 세상과 안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애도해야 할 때 빼먹지 않고 춤을 춘다.

 

홍상태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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