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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과 저항의 복음(창 11:1-9; 행 2:1-13)2017년 6월 4일 조헌정 목사 설교
조헌정 목사 | 승인 2017.07.11 15:36

1. 첫만남

6,7년 전 부산 예수살기 모임에서 여러분 중의 몇 분을 뵙긴 하였지만, 공식적으로는 오늘 예배 안에서 저와 여러분이 처음 만나는 셈입니다. 그간 여러분은 저를 향린교회에서 펼친 저의 하늘뜻펴기를 통해 곧 말씀 안에서 저를 만나 왔고, 저 역시 간간히 들리는 소문으로 여러분을 만나왔습니다. 핸드폰과 SNS 시대에 우리가 직접 대화를 하려고 했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가능했겠지만, 저나 여러분은 마치 십대의 소녀소년들이 사랑의 고백은 직접 하지 못한 채, 서로 마음만 나누었던 그런 애태움이 있어왔던 것인데 오늘 드디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있습니다.

전 김영수목사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나이는 저보다 햇수로는 두 해 학년으로는 한 해 위입니다만, 제 기억에는 한국신학대학에는 2년 혹은 3년 후배가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당시 저와 김영수목사님이 같이 한신대를 다니던 시기는 박정희유신독재가 가장 악랄하게 학원가를 침탈하던 시기였고, 동시에 한신대의 저항 역시 가장 치열했던 시기로 정상적인 수업이 불가능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동기생마저도 개인적인 만남이 쉽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전체 학생수가 200명도 되지 않는 매우 소규모 신앙공동체였지만, 이상하게 김영수목사님과 저와의 개인적인 만남은 없었습니다. 다만 제가 기억나는 것은 몇 년 전 김목사님의 평전을 읽으면서 한신대를 다닐 때에 검은색으로 물을 드린 군복과 워카를 신고 다녔다는 얘기를 읽는 순간 제 기억 속에 아 그렇구나! 그런 학생이 한 명 캠퍼스를 힘차게 걸어 다니는 모습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터넷상에 떠 있는 목사님에 대한 글을 읽어보니 제가 지금 걸어오고 있는 길을 이미 저보다 앞장서서 걸으셨고,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한 시대에서 제가 살아온 삶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예수의 길을 따라가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력상으로 본다면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김영수목사님은 아무도 걷지 않았던 황무지에 길을 처음 내신 분이셨다면, 저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굳이 언급하자면, 안병무선생님과 홍근수목사님 그리고 향린교인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그 길을 그저 따라서 걸어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굳이 김영수목사님과 저 자신을 비교한다면, 그건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난 그분의 신을 들고 그 뒤를 따라 걷기에도 부족한 사람’이라는 고백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러했기에 목사님을 기억하고 있는 여러분은 어느 다른 교회와 달리 목사님이 이미 15년 전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지금까지 흩어지지 않고 소수의 신앙 공동체를 계속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복음서를 읽어보면 어떻게 해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 당시에는 모두 도망을 갔던 제자들이 다시금 돌아와 스승 예수를 기억하는 기도 모임을 시작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건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였기 때문이고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하느님 나라 건설에 대한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직접 대화를 해본 적이 없어 여러분의 신앙 경험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그러하였듯이, 여러분 또한 김영수목사님은 돌아가셨지만, 그러나 그분의 부활의 영과 함께 그분의 못 다한 일을 계속 이어 오고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은 공교롭게도 교회의 생일인 성령강림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40일을 머물다 가십니다. 이 40일을 문자적으로 읽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믿음교회 교우들은 다 익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나서 부활 예수께서 승천하십니다. 사도행전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모두 쳐다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사람이 어떻게 공중으로 올라갈 수가 있나?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라고 우리같은 나이든 세대들은 부정하지만, 사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이거 별로 어려운 일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얼마 전 드론을 타고 한 사람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아마 몇 십년 후면 많은 사람들이 지금 자동차를 타고 길 위를 다니듯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일이 가능해 질 것입니다. 뉴스에 차량 충돌로 인해 몇 사람이 죽고 다쳤다는 얘기가 나오듯이 하늘을 날아다니던 사람들이 기기 고장으로 부딪히기도 하고 추락하였다는 뉴스도 나올 것입니다.

하여간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천사가 말합니다. ‘뭘 그리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느냐? 예수께서는 곧 다시 하늘의 새로운 명령을 받아 다시 이 땅에 내려올 것이다.’ 그래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마각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숫자가 대략 120명이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저는 이 숫자 또한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다락방은 그저 두서너 명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었지. 120명이 한꺼번에 들어갈만한 다락방은 상상하기 어려운 얘기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열둘이라는 숫자에 완전성이 내포된 10이 곱해진 숫자인 것입니다. 120명은 유대민족을 대표하는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 열흘동안을 기도하자 그때 성령이 각 사람 속에 강림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 날은 당시 오순절 혹은 칠칠절이라고 불리는 유대 명절이 시작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히브리노예들이 해방을 받은 날인 유월절 혹은 과월절 기념일로부터 50일째가 되는 날로 본래는 보리의 첫 수확을 야훼 하느님께 드렸던 감사의 절기였습니다. 이 오순절 절기가 우리 예수를 따르는 신앙인들에게는 예수의 부활의 영이 임하는 성령강림절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흔히 성령강림 혹은 성령충만하면 우리는 방언을 떠올리고 방언 그러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한 언어로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말씀전하는 전도자로 어떤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병을 낫게 하는 치유자로 어떤 사람은 봉사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하늘의 방언 곧 신비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이를 통역하는 사람으로...” 한마디로 성령 충만한 역사는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언 또한 지금은 들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로 얘기되고 있지만, 처음 마가의 다락방에 내린 방언은 사람들이 못 알아 듣는 언어가 아닌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였고, 그리고 그 언어는 예루살렘에 참여한 순례자들이 자기 나라에서 사용하던 곧 외국어였던 것입니다. 곧 첫 성령강림절의 방언의 역사는 서로 다른 언어로 인해 소통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게 되는 역사였던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바로 이 서로 소통하지 못해 다투고 미워하고 있었던 사람들과 민족 사이에서 소통하게 하고 화해하게 하고 하나되게 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2. 성령강림과 참 복음

바로 여기에 교회의 존립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이냐? 오늘 사도행전 본문 말씀에 따르면 그건 첫째, 소통하지 못하던 사람과 집단을 서로 소통하게 함으로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화해의 역할입니다. 두 번째는 그냥 서로의 하고 싶은 말만 단순 통역자가 아니라, 예수의 말씀과 행적인 복음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복음 그건 문자적으로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지만, 이 당시 복음이라는 단어는 본래 교회의 단어가 아닌 로마정권의 정치적 언어였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바로 기쁜 소식 유앙겔리온이라는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로마의 시민들에게 있어 전쟁의 승리 소식은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적에서 빼앗은 전리품 곧 보화와 재물을 나눌 수 있었고, 포로로 잡힌 적들을 노예로 삼아 자기 대신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로마 시민들 입장 곧 승리자의 입장에서는 복음이 되었겠지만, 다수의 패배자들에게는 이는 죽음보다 더한 굴욕과 슬픔의 소식이었습니다.

여기에 예수의 제자들은 이러한 로마 황제가 전하는 전쟁 승리의 복음에 대항하여 당시 로마의 군사패권으로부터 가장 억압과 착취를 당해야 했던 갈릴리 민중들과 함께 살다 로마의 십자가 처형을 받아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이야기를 유앙겔리온 복음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로마황제가 말하는 복음은 지배자 소수에게만 해당이 되는 기쁨의 소식이었지만, 복음서 저자들이 말하는 복음은 당시의 피지배자 다수의 사람들 모두에게 기쁨의 소식이 되는 진정한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복음을 언급할 때, 이 복음은 본래 반지배, 반패권, 반군사를 내포하는 정치적 언어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보수교회 사람들은 복음주의운동, 혹은 순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반정치 혹은 탈정치적인 의미에서 복음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방언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변질시켰듯이 본래 복음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었던 정치저항성을 빼버린 변질이자 타락이요, 달리 말하면 복음주의운동이 아닌 반복음주의 운동이요, 순복음이 아닌 거짓복음인 것입니다.

이천년 전 성령강림을 받았던 성령에 충만했던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난 공통적인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집안에 앉자 찬송을 부르며 철야하며 기도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길거리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순례자들도 있었지만, 저들가운데는 예수를 처형하라고 외쳤던 군중들도 있었고, 신성모독과 군중소요죄로 예수를 고발했던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아니 예수를 못박았던 로마 군병들도 있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바로 스승 예수를 죽였던 그들 앞에 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죽였던 예수는 부활하셨고 그분이야 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우리는 갈릴리의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너무나 쉽게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 고백은 결코 쉽지 않은 고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황제야 말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당시의 사람들은 고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의 예수, 나사렛의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복음이라고 불렀듯이 곧 로마의 황제의 신성을 거부하는 일종의 정치적 저항이요 로마의 통치를 거부하는 일종의 반역 행위였던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니체와 칼막스가 비판했듯이 힘을 가진 자들의 부조리한 현실을 계속 지탱하게 하는 노예의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본래 초대교회가 갖고 있었던 정치적 저항성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회복하고자 마틴루터 신부가 5백년전 당시의 최고의 정치권력이었던 로마교황청에 저항하는 정치개혁운동을 일으켰지만, 지금의 개신교는 또 다시 이 저항성을 상실하고 숫자와 건물로서의 교회 성장 그리고 개인의 물질 축복과 천국이라는 타계적 구원신앙에 머물고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던 본래의 이름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영어로 개신교인들을 말할 때는 프로테스탄트가 아닌 슬레브라는 이름으로 번역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예수는 성전을 허물어라 그리고 내가 사흘 만에 세우는 새로운 성전에 머물라고 외치셧지만, 눌린자들과 함께 거하는 부활 예수의 몸으로서의 현장교회는 없어지고, 거대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금 세우고 있습니다. 36년을 걸려 세운 거대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예수께서는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이 예언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실현되었습니다.

3. 역사 현장 회복하기

지금 우리 민족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습니다. 전쟁광이 미국의 패권주의는 지난 70년동안 북을 적으로 몰아왔고, 오늘 이 시간에는 3개의 핵항공모함이 한반도 주위에 떠 있습니다. 물론 북의 핵군사력으로 인해 전쟁은 억제되고 있지만, 오늘의 교회는 이런 전쟁의 현실에 대해 그저 손들고 기도하고 찬양하면 하느님께서 구해주실 것이라는 안일한 신앙을 참 신앙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거짓이요 기만입니다. 아모스와 예레미야와 이사야의 시대에 종교지도자들이 전쟁의 위협 속에서 평안을 외침으로 백성을 기만하였을 때, 예언자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곧, 이 땅에 정의를 먼저 실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저들은 입술로는 회개를 말했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가난한 자들과 힘없는 소수자들을 계속 억압하고 착취함으로 말미암아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고 거기서 역사를 배우는 것은 오늘 이 시대 내가 서 있는 현장에 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역사의 현장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교회 건물 밖에서 일어나는 예수의 갈릴리 역사의 현장성을 상실했습니다.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의 하느님의 만남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이천년전 예수께서 성전 숙청을 하신 이유는 바로 성전 안에만 머물고 있는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하고 있는 잘못된 신앙을 숙청하신 것입니다. 마틴루터의 독일에서의 개혁운동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민중의 아픔에 외면하는 교회는 결코 참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김영수목사님은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민중 현장성을 회복하기 위해 믿음교회를 여러분과 함께 세웠던 것이고, 여러분은 그런 뜻을 이어가기 위해 미약하나마 주 안에서 오늘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함께 펼쳐나갈 미래의 청사진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여러분에게 믿음의 빚을 진 사람으로서 향린교회를 떠났기에 이제 그 빚을 다소나마 갚아야 한다는 책임은 깨닫고 있습니다.

오늘 성령강림절을 맞아 우리가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은 하느님 나라 건설에 대한 비전 꿈입니다. 그건 2천년 전 베드로가 요엘 선지자를 통해 보여준 비전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다른 열한 사도들과 함께 일어서서 군중을 보고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유다 동포와 예루살렘 시민 여러분,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시각이 아침 아홉 시인데 어떻게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들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언자 요엘이 예언한 대로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주리니 너희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는 나의 남종에게도 여종에게도 나의 성령을 부어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 나는 하늘 높은 곳에서 표징을 보이며 땅에서 기적을 행하리니 피와 불과 짙은 연기가 일고 해는 빛을 잃어 어두워지고 달은 피와 같이 붉어져 마침내 크고 영광스러운 주의 날이 오리라. 그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느님의 크신 은총이 이어지는 성찬의 예식 가운데 함께 하기를 바라며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자유 - 김남주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다

피와 땀과 눈물을 함께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조헌정 목사  webam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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