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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권해효는 ‘아버지’의 이름을 찾았으나, 홍상수는 ‘김민희’로 이름을 찾았나?최병학 목사의 <문화로 본 성서>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7.07.24 14:41

* 영화에도 나오듯, ‘공과 사를 구분’해서 글을 쓴다. 물론 홍상수의 영화는, 특히 이번 영화 <그후>는 권해효의 말대로, ‘감독이 이전의 자기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할 수 있지만, 영화 <그후>는 홍상수의 그 후가 아니라, 영화 <그후>로만 읽어본다.

 
1. 영화 <그후>
 
홍상수 감독의 21번째 장편영화 <그후>는 아침 식사를 하는 봉완(권해효 분)에게 아내 해주(조윤희 분)가 말을 걸면서 시작된다.
 
아내: “자기, 요즘 이상해.”
남편: “내가 이상해, 뭐가?”
아내: “전보다 표정이 달라졌어.”
남편: “내가 표정이 달라졌어?”
 …
아내: “자기 요새 여자 생겼지?”
남편: “뭐라는 거야, 지금.”
아내: “자기 여자 생긴 거 아냐? 이상해. 좋아하는 여자 생겼어?”
 
출판사 사장이며 문학평론가인 봉완은 오늘 신입 직원이 오는 날이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부터 집을 나선다. 새벽에 식사를 하는 남편에게 아내(조윤희 분)는 표정이 달라졌다고(물론 남편은 늘 그대로라고 하지만) 말하며 외도를 의심한다. 영화는 바람을 피운 봉완과 이를 눈치 챈 아내와 내연녀 창숙(김새벽 분) 사이에서 겪는 진퇴양난을 그리고 있다.
 
<해주와 봉완>

그런데 정작 봉완의 아내로부터 오해를 사서 따귀를 맞고, 봉완에게 회유당하고, 창숙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는 건 그날 첫 출근한 아름(김민희 분)이다. 비록 봉변을 당하지만 아름은 영화 속 다른 인물들과 달리 자신에게 당당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비롯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봉완의 가식을 꾸짖을 줄 아는 여성이자 관찰자가 된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 후』1)에서 제목을 빌려온 이 영화는 아름과 만나면서 봉완의 민낯이 드러나는 하루 동안의 코믹한 해프닝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사이로, 봉완을 사로잡고 있는 창숙과의 만남이라는 과거, 그리고 이 하루 동안 아름을 유혹하려는 봉완의 갈등, 그리고 이 하루 동안의 소동과 봉완-창숙의 관계가 끝난 후의 어느 하루의 시제가 뒤섞이는 영화이다.
 
<아름과 창숙, 그리고 봉완>

감독의 말대로 “일어난 시점은 과거지만 그게 지금에 영향을 끼치고, ‘소화되지 않았고’, 계속 기억되는 것이라면 현재 시점의 인물의 의식과 감정에 그 과거와 지금의 행위들이 같은 실체적 힘으로 존재합니다. 그걸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홍상수 영화에 나타난 다층적 분열과 시간의 가역성이기도 하다. 늘 그래왔듯 홍상수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시간’이라는 개념이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무언가를 잊거나 잃고, 동시에 생산한다. 사랑과 쾌락, 아픔과 슬픔 모두 시간이 지나면 다른 것들로 뒤바뀔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따라서 주인공 각자의 시간을 차이 나게 살아가며, 시간은 같은 공간, 같은 장소이지만 차이의 반복으로 시간의 비가역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흑백의 카메라는 그 어느 때보다 인물들 가까이 클로즈업되며, 그렇게 붙어선 카메라 사이로 공간을 꽉 채우는 것은 말들의 잔치인데, 그것은 바로 ‘실체에 대한 해석’과 ‘믿음의 유무’이다.
 
2. 보편논쟁​2)

보편논쟁이란 종(種)과 류(類)라는 ‘보편(universalia)’이 ‘객관적 실체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사고 속에만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놓고 일어난 중세 스콜라철학자 사이의 최대 논쟁이다. ‘보편의 객관적 실재성을 인정’하는 실재론(實在論, Realismus)과 “보편은 명목(名目, nomina)에 불과하다”는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us)의 대립이 있고, 이 양자를 조정하려고 나선 개념론(槪念論)​3) 이 있다.
 
실재론에 따르면 보편은 시간적, 위계적이며, “보편은 개별사물에 앞선다(Universalia ante res)”고 하여, 보편의 객관적 실재성을 인정하는 입장한다. 따라서 사고하는 세계와 외부적 세계는 엄밀한 의미로 평행관계를 이룬다. 즉 ‘1대 1의 대응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진리, 정의, 덕, 인간성, 사랑’과 같은 보편 관념은 인간정신의 소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경험세계에 존재하는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인간의 추리능력에 의해 자연에 존재하는 통일성과 법칙을 발견할 수 있으며, 자연법도 긍정할 수 있다.​​4)
 
영화 속 아름이는 이름 그대로 ‘아름다움’의 의미, 더 나아가 신과 실체에 대한 믿음으로 실재론의 입장에 선다. 반면 봉완은 모든 실재에 대한 것은 개념과 말이며, 실체는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사랑한다.”라고 발화하면서도 사랑하는지 헷갈리고, 자신의 실체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주체성 혼돈으로 살아간다. 실체에 대한 확신이 없다.
 
<실재론자 아름과 유명론자 봉완>
유명론에 따르면 보편이란 다만 명칭에 불과하거나 사유의 추상적 소산이며, “보편은 개물 뒤에 존재(Universalia post res)”하는 것으로 이들은 보편의 실재를 부정한다. 따라서 자연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감각을 통한 관찰, 지각으로 포착되는 개별적 사물뿐이며, ‘일반화, 분류’는 외부적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편적, 추상적 표상도 개별화만이 지배적 원리가 되는 실체계를 반영하지 못하며 직접적 지각과 구체적 관찰을 통하여 증명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자연의 본체에 대한 파악능력에 회의를 나타내며, 윤리적 상대주의, 법실증주의의 경향을 보인다.​5) 봉완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영화는 붕완과 아름이 실재를, 혹은 실체에 관한 논쟁을 벌이는 말의 잔치로 관객을 초청한다. 봉완에 따르면 “실체가 말로 잡히냐? 실체를 알 수 없으면 사실은 없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름은 “없는걸 안다고 전제 하는게 거짓말이다.” 말로 정리가 안돼지만, 실체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6)
 
2. 아버지의 이름을 찾은 권해효(봉완)
 
실체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주체를 혼돈한 봉완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실체와 주체를 ‘아버지의 이름’ 혹은 부성에서 찾는다. 물론 영화는 새벽에 집을 나설 때, 봉완의 뒤에서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를 삽입한다. 고개를 돌아보는 봉완. 홍상수 감독이 영화에서나마 가정을 지켰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봉완은 창숙과의 갈등 가운데서도 항상 딸아이의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리고 창숙과의 한 달간의 외도에서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 것은 딸아이에게 아내가 ‘영국식 파란 코트’를 입히고 새벽에 창숙의 집에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봉완은 아름에게 그때의 일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마음이 바로 결정이 되었다. 아이를 위해 살자. 내 인생을 포기하자. 마음을 결정하는데 1초도 안되었다.” 봉완에게 ‘사랑’은 ‘부성’에 그 자리를 양보한다. ‘부성’의 이름은 ‘수컷(혹은 남자)’의 이름을 넘어서는 것일까? ‘아버지의 이름’이 이전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달리 귀환하는 것이다.
 
융이 설립한 국제분석심리학회 회장을 지낸 분석심리학자 루이지 조야는 ‘서구 사회, 나아가 오늘날의 인류 전체가 아버지 상을 잃어버림으로써 거대한 공황 상태에 처했다’​7)고 생각한다. 조야는 역사적, 심리학적, 문화적 관점에서 아버지의 발생사적 연원을 추적하지만, 핵심은 ‘심리학적 관점’이다. ‘원형’, ‘집단무의식’ 같은 융의 심리학 개념을 근거로 서구 사회 집단무의식 안에서 발견되는 아버지 상의 원형을 찾아 서구 문화의 시원으로 들어간 뒤 거기서부터 역사를 밟아 내려온다.
 
1단계, ‘선사시대’에 아버지가 탄생했다. 여기서 조야는 아버지 곧, ‘부성’과 ‘남자’를 구분한다. 남자가 생물학적 속성이라면, 부성은 사회적·문화적 구성물이다. 따라서 남자라고 해서 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자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충동과 욕구에 직접적으로 지배받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충동과 욕구를 제어하고 인내, 의지, 지성으로써 삶을 계획하고 끌어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책임감이야말로 부성의 핵심 특징이 된다. 조야는 이렇게 말한다. “원시 인류가 진화의 어느 단계에 이르러 이런 특성을 지닌 아버지를 탄생시켰고, 그 탄생은 문명의 출발과 다르지 않았다.”
 
2단계, ‘고대’에서는 ‘문화적 형성물인 아버지’는 그 내부에서 ‘원시적 남성성’과 다툼을 벌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다툼을 신화적 장대함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이다. 그리스의 트로이 정복을 그린 『일리아드』의 경우, 부성과 남성의 대결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싸움으로 나타난다. 헥토르는 가족을 걱정하고 자식을 염려하는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다. 반대로 아킬레우스는 남성적 힘의 분출 욕구만을 따르는 거친 전사라고 볼 수 있다.  『일리아드』에서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패배하는데, 남성이 부성을 이겼다는 사실은, 부성 내부의 남성이 지닌 힘의 파괴성을 잘 보여준다.
 
트로이 함락 후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그린 『오디세이』 역시 부성과 남성 사이의 대결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고향에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와 ‘한없이 충동에 이끌리는 오디세우스’의 대비로 부성과 남성의 대결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싸움은 거인-괴물 퀴클롭스와 오디세우스의 싸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산 채로 잡아먹는 퀴클롭스가 원시적 남성성을 상징한다면, 지략을 발휘해 퀴클롭스를 제압하고 탈출하는 오디세우스는 부성적 존재를 가리킨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기나긴 유혹과 충동의 항해를 끝내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아버지의 귀환이며 남성에 대한 부성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조야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 문화의 이런 아버지 승리는 동시에 어머니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다.” 부성은 남성을 제압함으로써 여성도 함께 종속시켜 가부장제를 확립했다.
 
3단계, ‘중세’에는 이렇게 확립된 아버지의 권위는 기독교라는 저항에 부딪혔다. 기독교는 천상의 신만을 아버지로 섬기고 지상의 아버지를 부정함으로써 부성적 권위를 뿌리부터 흔들었다. 이러한 지상의 아버지를 부정하고 남은 것은 ‘형제 관념’과 ‘평등 관념’이었다.
 
4단계, ‘근대’에는 18세기 계몽사상과 프랑스혁명을 통해 아버지는 숙청당했으며, 산업혁명은 아버지들을 공장으로 밀어 넣어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우울증 걸린 아버지들은 술에 찌든 불량한 아버지가 되어 남은 권위마저 잃어버렸다.
 
5단계, 아버지의 상실은 그 자리를 대신할 다른 것을 찾게 되는데, 이때 등장한 파시즘이 무력한 아버지들을 규합하고 국가주의를 외치며 텅 빈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했다. 조야는 이렇게 말한다. “파시즘이 겉보기에는 가부장적 권위의 발현 같지만, 실은 부성 상실의 반작용이었다.” 게다가 포스트모던의 부친살해는 현대의 질환을 더욱 그 극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파시즘이 부성 상실을 폭력적으로 해결하려 했다면, 포스트모던은 해결이 아니라 무덤까지 이장하여 삭제시켜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문명의 위기는 ‘모성의 부활’인가, 아니면 ‘부성의 새로운 자리 비워주기인가?’가 되었다. 사실 조야도 “부성 상실 문제는 오늘날 더욱 깊은 문화적 질병으로 산재해 있으며, 그 질병을 극복하려면 잃어버린 아버지를 되찾아야 한다. … 집단무의식 속의 아버지 향수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현대 문명의 질환을 치유하려면 아버지를 되찾아야 할 것인가? 어머니를 되찾아야 할 것인가? 홍상수의 <그날>은 부성의 부활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신의 삶과는 다른 자리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3. 김민희의 신앙 “모든게 하나님 뜻대로”
 
봉완과의 대화에서 아름은 자신이 믿는 것을 세 가지로 이야기 한다. “첫째, 자신이 주인, 주인공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 둘째, 언제든 죽어도 된다. 괜찮다. 셋째, 모든 것이 다 괜찮다는 것을 믿는다. 다 아름답다. 영원히. 이 세상을 믿어요.” 신이라는 실체를 인정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아름이 이상한 하루(아름의 말대로 액땜을 하게 된 날)를 보내고 집에 돌아가는 택시에서 하늘에서는 눈이 퍼붓는다. 이때 아름은 기도한다. “기도합니다. 모든게 하나님 품안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소서. 하나님 마음대로 하소서.” ‘모든 게 다 괜찮다는 걸 믿어요’, ‘모든 게 다 아름답다는 걸 믿어요.’ 이 아름다움에 대한 대사는 감독과 배우의 스캔들에 대한 변명과도 같지만, 타자(관객들)에게도 자신들의 사연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괜찮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임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시종일관 흑백으로 연출된 장면들 속에서 대다수의 공간이 흰 빛으로 채워지는 이 장면은 아름(엄밀히 표현하자면 김민희)의 아름다운 얼굴과 함께 더 아름답게 다가온 것이다. 게다가 “모든게 하나님의 뜻대로”라고 하지 않는가!
 
<이상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가는 택시안에서 아름의 모습>
그리고 홍상수는 ‘다 괜찮다’라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 합리화하며 현실과 영화 속을 교차하며 열린 결말을 보여주는 것이다. 
 
로버트 브랜덤(Robert Brandom)은 미국의 사상가로 리처드 로티 밑에서 배웠고 로티가 사망하자 실용주의의 부흥에 매진했다. 그러나 브랜덤의 실용주의는 ‘이유를 주고받는 게임’이라는 화용론을 통해 합리주의를 주장한다. 가령 코앞에 있는 붉은색 천을 보고 인간과 앵무새가 “이건 붉은색이다.”라고 말하는 경우, 둘 차이는 무엇인가? 브랜덤에 따르면 인간은 앵무새와 달리 ‘이유를 주고받는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상대에게 이유를 주거나 상대에게 이유를 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왜 붉은색이지?”하고 물으면 “그야 그건 빨가니까”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런데 앵무새는 “이건 붉은색이다.”라고 되풀이해서 말할 수는 있어도 ‘이유를 주고받는 게임’을 할 수는 없다. 아름이 처럼 믿음이라는 이유로 살아가지는 않을지라도, 봉완처럼 부성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끝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기대(겸 우려)하는 것은 어쩌면 영화 제목이 ‘그 후’이기 때문이다(사실 생애 많은 부분들을 내려놓은 듯한 홍상수를 영화를 통해서 보게 된다). 그래서 홍상수의 다음 영화가 기대되는 이유이다.
 
*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으면...
 
20세기 지식인들의 지식인이었던 장 폴 싸르트르는 “지식인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계몽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을 첨가하면 참다운 지식인은 세 종류가 된다.
 
첫째, ‘참견하는 지식인’은 자신의 전문영역에서 쌓아올린 명성, 곧 상징자본을 세상을 바꾸는 데 사용하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1898년 드레퓌스 사건의 한복판에서 에밀 졸라가 소설 쓰기를 제쳐두고 “자퀴즈!”(J’accuse!) 곧 “나는 고발한다.”라고 외치고 나섰을 때, 반드레퓌스 우익세력들은 한목소리로 ‘작가가 왜 쓸데없이 남의 일에 끼어드느냐’고 비난의 화살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날아가는 순간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이 탄생했던 것이다.
 
둘째, ‘계몽적 지식인’은 소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에서 스스로 철학자라고 불렀던 지식인들, 곧 (프랑스로 한정하여) 볼테르, 루소, 디드로, 달랑베르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8세기를 계몽주의 시대로 만들었다. 중세적 교회권력에 맞서 미몽의 세상에 빛을 끌어들였던 참 계몽적 지식인들이었다.
 
셋째, ‘유기적 지식인’은 일찍이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했던 바, ‘사회 계급의 신경 노릇을 하는 지식인’이다.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이야말로 그람시적 지식인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세 부류의 지식인은 당대 피억압자를 대신해 그들의 대표자, 대변자 구실을 했다. 곧 대중 위에서 대중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지식인인 것이다. 여기에 홍상수식 지식인을 하나 더 추가한다면, ‘일상성의 지식인’을 추가 할 수 있겠다. 사실 ‘지식인의 고향’, ‘지식인의 태반’이었던 대학이 대기업과 대자본의 하청업체가 된지 오래다. 대학은 ‘죽은 지식인들의 묘지’가 되어 버렸다. 앞으로도 더 극심해질 이러한 세상에 싸르트르적 지식인의 ‘불온한 기운’이 부활해야 하고, 계몽적 지식인이 권력에 맞서 미몽의 세상에 빛을 밝혀야 하지만, 그리하여 이 땅의 수많은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불의에 대한 저항’의 꿈을 꾸어야 하지만, 그래도 홍상수식 ‘일상성의 지식인’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뭔가 석연찮은 느낌, 현실 같은 현실 아닌 현실의 이미지, 그것만으로도 홍상수는 지식인의 반열에 들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 <그 후>는 어느 정도 ‘계몽적 지식인’의 흉내를 내고 있지 않은가!
*각주
 
1)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화두는 ‘결혼’과 ‘안정’이다. 그러나 영화는 외도 이후 결혼의 안정, ‘그 후’인지(따라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일상성으로의 복귀는 새로운 이탈로도 볼 수 있으나, 동시에 안정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아니면 감독의 외도, ‘그 후’인지를 묻게 만든다.
 
2)이동희, 『법철학요해』 (피데스, 2006), 56-57 참조.
 
3)개념론은 “보편은 개념 속에 존재한다(Universalia in rebus)”는 아벨라르(Abelard)의 주장인데, 엄격하게는 유명론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4)중세 스콜라철학의 제1기는 실재론이 채택되었다. “알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고 하였던 안셀무스(Anselmus)가 그 대표자이며,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입장에 서있다. 실재론은 ‘가톨릭 자연법’의 주류를 형성하였으며 주지(主知)주의적 경향을 띤다.
 
5)스콜라철학 전기(11~12세기)에 베랑가르(Berangar de Tour)와 로스켈리누스(Roselin Rosecelinus)가, 후기(14세기 이후)에는 스코투스(Scotus), 오캄(Occam) 등이 주장하였으며 종교개혁의 바탕이 되었다. 이들은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주장하였으며 주의(主意)주의적 경향을 띤다.
 
6)그러나 역설적으로 봉완은 자신을 ‘사장님’이라 불러달라며 자신의 실체를 규정한다. 물론 아름이에게는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그 실체를 규정한다.
 
7)루이지 조야, 이은정 역, 『아버지란 무엇인가』 (르네상스, 2009). 이하 이 책의 내용을 요약 정리함.
 
8)가부장제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자비로운 여신들』이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트로이 원정을 떠난 틈을 타, 아이기스토스와 정을 나누고 아버지를 배신한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Clytemnestra)를 죽인 아들 오레스테스(Orestes)가 존속살해 혐의로 재판을 받는데(물론 이때 공범은 누나이자, ‘엘렉트라 콤플렉스로 유명한 엘렉트라이다), 판관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오레스테스의 손을 들어준다. 이때 판관은 “어머니는 자식의 생산자가 아니라, 아버지 씨의 양육자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 판결은 이후 서구 문명사에서 어머니의 패배를 상징하는 사건이 된다. 이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신화적 판결을 과학과 철학의 이름으로 합리화하였다. 그리스를 이어받은 로마는 법률로 가부장제를 확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부성이 모성을 처단한 역사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webam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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