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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에서의 동성애 담론: 관용을 넘어
민대기(감리교신학대학) | 승인 2017.07.24 18:07
출처: 위키백과

2017년 대선에선 대선후보들의 동성애에 관련된 입장 표명이 큰 이슈가 되었다. 동성애에 대해 찬성하는 후보도 있었고 반대하는 후보도 있었는데 이들의 목소리는 사회 곳곳에서 리플레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되곤 하였다.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던 동성애 이슈는 이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와있는 상태이다. 사회 곳곳에서 동성애에 대한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고, 동성애자들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임이나 퀴어축제와 같은 다양한 활동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와 더불어 동성애에 대한 찬반 논쟁도 거세지고 있다.

사회곳곳에서 동성애자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반면에 한국 내에서는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특히 교회 내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반대하는 입장이다. 성 정체성에 대해서는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고 성경 벽돌로 만들어진 성벽 안에 들어가 성문을 굳게 잠그는 교회들도 있곤 하다. 교회 내에서 동성애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곤 한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이들을 관용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오늘날의 관용은 관용의 주체가 관용을 행하려는 사람에게 있다. 그렇기에 서로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정체성을 논의하는 과정이 배재된다는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이 이슈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해보자.

동성애를 바라보는 눈빛

인간의 성은 네 가지의 복합적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첫째, ‘출생 시의 성’, 즉 태어날 때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정해 주는 신체적 생물학적 특징, 둘째로 ‘성 정체성’, 즉 한 사람이 자신을 성적 존재로서 어떻게 보는가 하는 성적 자아 개념, 셋째로 ‘성 역할’, 즉 특정한 문화에서 규정하는 사회적 차원의 성적 정체성, 마지막으로 ‘성적 지향’, 즉 한 개인이 누구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가 하는 방향성을 지칭하는 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1) 이런 점에서 볼 때, 동성애는 하나의 ‘성적 지향’이고, 성적 지향은 크게 ‘동성애’, ‘양성애’, ‘이성애’의 형태로 나타난다.​2) 그렇지만 성 이라는 것은 다양한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동성애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도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동성애라는 것을 한 가지 관점으로만 보면 본래 갖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축소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동성애자란 한마디로 동성을 사랑하는, 즉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을 말한다. 동성애자인 최 안드레아는 그의 책에서 어떤 사람이 동성애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본인밖에 없다고 했다.​3) 동성애적 성향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특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적 성향은 내부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기 전에는 결코 알 수가 없다. 이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만이 옳은 것이라고 여기는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자신의 성향을 감춘 채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동성애는 자율적인 선택에 의해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선천적인 성향인 것일까? 동성애의 원인은 현재로서는 만족할 만한 수준에서 밝혀지지는 않았다.​4) 동성애의 원인을 밝혀보려는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의 원인이 과학적으로 완전히 규명된 것은 아니다.​5) 그렇기에 동성애에 대한 판단을 섣불리 내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어쩔 수 없이 동성애를 받아들이게 된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유의지로 동성애를 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자각하였다면 우리는 그것을 도덕적으로 문제 삼을 수 없다.​6) 성 정체성이라는 것이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것도 있겠지만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 내에서 학습에 의해 주어지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성애자가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하면서 동성애적 성향을 드러낼 경우 우리는 그러한 성향을 치료되어야 할 질환이나 극복되어야 할 성적 도착으로 볼 수는 없다.​7) 동성애자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동성애적 성향을 선택하였다면 그러한 선택은 각자의 자율적인 선택이요 결론이기 때문이다.​8)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은 성적 소수자로서 설 자리를 잃은 채 법의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었다.​9) 그러나 요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사회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유명 연예인들이나 명사들이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밝히고, 그것들을 옹호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인권운동의 차원에서도 1990년대 후반부터 성적소수자 인권운동은 착실하게 그 성과를 쌓아왔다.​10) 이렇게 하여 침묵하여야 했던 성소수자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동성애에 대한 찬반의 목소리가 계속하여 나타나고 있다.

먼저 동성애를 찬성하는 자들의 주장들이 있다. 동성애가 도덕적으로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자들의 핵심에는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 동성애를 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에 해당하고, 둘째,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성적 지향이 이성에게로 향해 있는 사람이 차별을 당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고, 셋째, 동성애를 함으로써 타인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는다는 주장이다.​11)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동성애를 보다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영역으로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12)

미국의 경우 동성애운동은 일상적 사고나 행위의 수준을 넘어서 제도적, 법적 개혁까지 요구함으로써 사회문화적 변혁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13) 우리나라에서도 제도적 개혁을 하기 위한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다. 성소수자들을 위한 법률들이 국회에서 언급되기 시작하였고, 군대에서조차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법안들이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어느 학자는 동성애 옹호론을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누기도 한다. 하나는 동성애는 타고나는 것이기에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선천주의적 동성애론’이고 다른 하나는 동성애도 인간의 다양한 성 행위 방식 중의 하나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동성애론’이다.​14)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들도 있다. 그들은 여러 의견을 내고 있는데 동성애를 함으로써 동성애성이 유전된다는 주장, 동성애로 인해 에이즈를 포함한 성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주장, 다수의 보통의 이성애자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억압을 받을 수밖에 없어 불행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란 주장이 그러한 것들이다.​15) 다음으로 요즘 동성애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개신교 내에서의 입장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한다.

동성애를 바라보는 교회의 눈빛

개신교에서 동성애에 대한 찬반 입장은 나누어져 있다. 반대하는 입장이 대부분이긴 하다. 퀴어축제와 같은 동성애 축제를 반대하는 집회를 여는 교회들이 있기도 하고, 동성애를 인정하는 교회들이 있기도 하다. 동성애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동성애는 죄라고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성경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기에 개신교내의 동성애 담론에 대해서는 개신교는 동성애 문제에 대해 정확히 이렇다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그렇지만 개신교내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몇 가지로 범주화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개신교의 반응으로 첫 번째는 동성애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이 한국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한 기사 글을 소개해본다.

서울신학대학교 한국기독교통일연구소는 ‘목회 윤리(성윤리)’와 관련해 기성 소속 목회자(목사, 전도사)와 평신도(장로, 권사, 집사, 성도) 1,02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 최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응답자 중 약 94%(964명)가 동성애 허용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반대 이유로는 대부분 동성애를 죄로 보기 때문이었고, “동성애는 왜곡된 사랑이다” “동성애는 문란한 성생활에 빠진다” 등의 의견도 있었다. 찬성한다고 답한 이들은 약 5%(54명)였다. 이들 대부분은 “성소수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 이 같이 답했다. “동성애는 유전이라고 생각한다”는 답도 일부(6명) 있었다.​16)

위와 같은 인식은 다른 교단도 비슷할 것이다. 동성애를 반대할 때 교인들은 성경을 근거로 동성애는 죄라고 말하며 동성애에 대해 비판한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다.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 20:13)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롬 1:26~27)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 6:9~10)

성경에 위와 같이 동성애를 반대하고 있으니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극단적으로 근본주의 교회나 성경 문자주의에 갇혀있는 많은 사람들은 동성애를 배척하기도 한다. 퀴어축제와 같은 행사가 일어나면 이들을 사탄의 무리로 몰아가며 집회를 열기도 한다. 다른 국가들에서 동성애자를 목사로 세우기도 하고 동성애를 합법화하는 일이 일어나면 이를 큰 위협으로 느끼고 대한민국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라고 여긴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을 넘어 동성애를 혐오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인권위의 설문 결과에 따르면 그것이 거짓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인권위는 혐오 표현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예방·근절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를 위탁받은 숙명여자대학교 산학협력단은 지난해 8월 13일부터 9월 29일까지 만 15~59세 내외국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한국 사회에서 혐오 표현의 주된 대상인 여성·성소수자·장애인·이주민 4개 집단에 있는 총 1,014명의 답변을 받아 분석했다. 인정하기 싫어도 한국교회는 어느새 한국 사회에 난무한 혐오 표현의 주체가 되고 있다. 이번 설문조사 응답자 1,014명 중 '개신교 성직자'에게 혐오 표현을 경험했다고 답한 사람이 전체 응답자의 57.6%다. 성소수자 집단만 놓고 보면 개신교 성직자 즉 목사에게 혐오 표현을 들은 사람이 10명 중 7명꼴이다.​17)

그러나 이런 행위는 동성애자들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의 폭력은 누군가 어떤 사람에게 욕을 하거나 때리는 등의 누가 보더라도 폭력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행위라고 여겨지던 범위를 넘어선다. 오늘날에는 어떤 행위에 대해 그 사람이 폭력이라고 느꼈는가 느끼지 않았는가에 따라 폭력의 여부가 결정된다. 이런 관점에서 동성애자들이 동성애에 대한 배척을 폭력으로 느낀다면 그것은 명백한 폭력인 것이다. 동성애에 대해 반대하긴 하지만 이들을 사랑으로 품어줘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듯이 동성애가 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을 배척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이 입장을 지닌 사람도 상당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중에 실제로 동성애자를 만나면 사랑으로 품어줄 사람이 실제로 얼마나 될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그리고 행동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동성애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다. 이들도 성경을 근거로 들어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성경에도 분명히 동성애로 보일 수 있는 면들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또 성경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동성애를 죄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국내에서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개신교내의 많은 사람들은 이 입장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이 그동안 배워왔고, 설교를 들어왔던 것과는 다른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의견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세 번째는 동성애에 대해 찬반을 유보하는 입장이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있고, 성경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으므로 더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과거에 죄라고 인식되어 졌지만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그 사람이 동성애를 의지적으로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몸 안의 변화에 따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몸의 반응에 따른 어쩔 수밖에 없는 선택이라면 성경이 쓰이던 시대에는 죄라고 여겨졌을 지라도 오늘날에는 죄가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관용?, 그것으로 충분할까?

개신교에서 동성애를 바라볼 때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는 않더라도 관용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계속하여 관용이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논의되어 왔지만 관용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보지 않는 것 같다. 관용을 해야 한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관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관용은 흔히 생각하듯이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개념ㆍ원리ㆍ원칙ㆍ미덕이라기보다는, 목적과 내용, 행위주체와 대상에 따라 다양한 역사적ㆍ지리적 변형태를 가지는 정치적 담론이자 통치성의 실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18)

많은 사람들이 관용에 대해 전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오늘날 담론화되고 있는 관용은 후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관용을 그저 좋은 것 정도로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니라 통치성의 한 측면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정의와 평등의 문제가 관용의 문제로 대체될 때, 타자에 대한 정의의 문제가 타자에 대한 감수성과 존중의 문제로 대체될 때, 역사적 배경을 가진 고통들이 단순히 차이와 공격성의 문제로 환원되고 그 고통이 개인의 감정의 문제로 여겨질 때, 정치적 투쟁과 변혁의 문제는 특정한 행동과 태도, 감정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19) 정치적으로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이야기하며 풀어나가야 할 문제들도 관용이라는 명목 하에 우리와 그들 사이의 선긋기를 해버린다. 우리와 다른 그들을 우리보다 하등의 존재로 보고 관용해야 할 대상으로 보며 정치라는 것을 완전히 배재해 버린다. 그

들과 우리는 서로 눈을 맞대고 이야기할 동등한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들을 판단하는 기준이나 근거는 오직 우리에게 있는 것이고 그들은 우리의 판단을 받아들일 뿐이다.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전제가 여기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많은 기독교인들의 행태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관용이라는 것은 그들 사이에서 등장할 수가 없다. 그들은 무조건 동성애를 반대해 버린다. 교회 내에서 논의할 주제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성경 문자주의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대신 교회가 판단자가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리는 이 상황에 대해 하나님은 가슴 아파 하시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사랑해야 할 사랑의 대상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비판받아야 할 죄인들을 양성해 내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서양과는 달리 우리나라에 관용이라는 것이 언급진지 오래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다. 서양에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 관용이 이야기되어 왔고, 그것이 사회 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다음에 그것의 문제점이 나타났다. 그러다가 그것을 넘어서는 지금의 담론이 형성된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관용이 문화로 형성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계속하여 관용해야 한다고 외치기보다는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어야 한다.

관용을 넘어 사랑으로

앞의 글에서 관용이라는 것이 통치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관용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어떠한 진실이 있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생각을 벗어나는 영역이면 인간은 그 진실을 거부한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진실을 마주하게 되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사고 속에 갇혀 살아가는 인간. 그러한 것이 인간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생각을 깨려하면 깨려하는 인물을 없애버린다. 예수님도 죽음도 그러한 죽음이 아니었던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가치를 지니고 계신 분이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가치와 다른 가치를 가진 사람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다른 차원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개개인이 0차원의 차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기만족 속에 다른 사람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자기 내면의 말만이 중요한 것이기에, 자기 자신이 진리이기에 결코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은 채 말이다. 자신의 밖으로 나와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어야만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데 그처럼 어려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기독교에서 해결책을 찾는다면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존재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사고가 깨어지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 후에 우리가 믿어왔던 것만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와 다른 것을 믿고 있는 다른 이들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영화 [오두막]에서 주인공은 지혜와 대면하게 된다. 대면 중에 모든 것을 심판하던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심판했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인간의 판단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온전한 판단을 할 수 없으므로 다른 이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

동성애자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귀한 피조물이다. 그들이 왜 동성애자가 되었는지 묻거나, 동성애가 죄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보다 그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겠다. 서로가 종속 관계가 아니라 자유로운 관계 속에서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품어주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다른 관점을 갖고 접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모습이 있을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 개신교는 사랑의 종교라는 것을 인식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소수자들에게 찾아가셨을 때 그들이 예수님을 반긴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반겨줄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점점 더 커져가고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더 확대되어 갈 것이다.

 각주

 1) 신응철, “바라보기ㆍ해석하기를 너머 수용하기로서의 다문화 현상: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찬ㆍ반 논쟁을 중심으로”, 「철학탐구」, 23호, 2008.5, p.297
 2)위의 논문, pp.297-298.
 3)최안드레아,「터부에서 상식으로의 전환」, 서울: 아미, 1997. p.64.
 4)문성학, “진보, 인권 그리고 동성애”, 「철학논총」, 25집, 2001.7, p.295.
 5)위의 논문, p.295.
 6)이종원, "동성애자들의 자율성과 도덕적 책임“, 「철학논총」, 65집, 2011.7, p.316.
 7)위의 논문, p.316-317.
 8)위의 논문, p.317.
 9)위의 논문, p.314.
 10)한채윤, "왜 한국 개신교는 ‘동성애’를 증오하는가“, 「인물과 사상」, 2016.1. p.125.
 김성한, "해학의 원리를 이용한 동성애에 대한 도덕적 평가“,「철학논총」, 60집, 2010.4, p.316. p.136.
 11)이종원, 앞의 논문, p.314.
 12)김문조, 김철규, 최은정, “미국 동성애운동의 역사, 현황 및 사회적 의의”, 「한국사회」 2집, 1999, p.267
 13)문성학, 앞의 논문, p.296.
 14)김성환, 앞의 논문, p.140.
 15)“기성 목회자와 신자 대부분 “동성애 허용 반대””,<크리스천투데이>, 2017.06.08,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1080> (2017.06.14 확인)  
 17)“한국교회 ‘증오 선동’은 도를 넘었다 - 국가인권위, 혐오 실태 조사 발표…성소수자 10명 중 7명 ”목사에게 혐오 발언 경험“, <뉴스앤조이>, 2017.02.22,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9086> (2017.06.14 확인)  
 18)웬디 브라운, 「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이승철 옮김, 서울: 갈무리, 2010, p.22
19) 위의 책, p. 42
 
참고문헌
 
김문조, 김철규, 최은정, “미국 동성애운동의 역사, 현황 및 사회적 의의”, 「한국사회」 2집, 1999, 267~287
김성한, "해학의 원리를 이용한 동성애에 대한 도덕적 평가“,「철학논총」, 60집, 2010.4, p.316, 135~157
문성학, “진보, 인권 그리고 동성애”, 「철학논총」, 25집, 2001.7, 289~311
신응철, “바라보기ㆍ해석하기를 너머 수용하기로서의 다문화 현상: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찬ㆍ반 논쟁을 중심으로”, 「철학탐구」, 23호, 2008.5, 28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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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윤, "왜 한국 개신교는 ‘동성애’를 증오하는가“, 「인물과 사상」, 2016.1. 11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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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증오 선동’은 도를 넘었다 - 국가인권위, 혐오 실태 조사 발표…성소수자 10명 중 7명 ”목사에게 혐오 발언 경험“, <뉴스앤조이>, 2017.02.22,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9086> (2017.06.14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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