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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회운동, 소수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아닐지[에큐가 만난 사람들] 박재형 한국기독교사회연구원 연구실장
에큐메니안 | 승인 2017.08.23 04:16
▲박재형 한국기독교사회연구원 연구실장 ⓒ에큐메니안

기독교사회운동이 나가야 할 바를 고민하고 있다는 박재형 한국기독교사회연구원 연구실장 에큐메니안
한국기독교사회운동, 70-80년대 이 단어는, 한국 민주화와 인권운동과 등가어였다.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운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기독교사회운동의 일원으로 활동해야만 했었다는 뜻이다. 캐나다나 독일 등으로부터 유입되었던 재정지원과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이라는 염원을 품은 사람들이 결합해 시대를 변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기독교사회운동의 두 축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하, 기사연)이었다. 이 두 축을 중심으로 제도적 민주화도 이루어내었고 인권의 신장도 성취했다. 더불어 1.5세계 혹은 1세계로 평가될 만큼 경제 성장도 동반되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각 분야의 민주화는 시민사회운동으로 분화 혹은 전문화되어 갔고 동시에 기독교사회운동의 정체라는 또 다른 모습도 연출시켰다. 현재 기독교사회운동은 이 문제를 안고 여전히 씨름 중이다. 그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소위 선배들의 은퇴 혹은 죽음으로 기독교사회운동은 더 이상의 활로가 없다는 평가가 팽배하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활동가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비가 오락가락 하던 지난 20일(월) 오후, 기독교사회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기사연을 찾아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활동가를 만났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목회자이면서 민중신학자로 살아가고 있는 박재형 연구실장이었다. 그가 털어놓은 기독교사회운동에 대한 문제와 해법은 단 한 시간으로 나누기에는 거대한 이야기였기도 했다.

무엇보다 박 실장은 생명평화마당이라는, 소위 진보(에큐메니칼)와 보수(복음주의) 개신교 운동단체들을 아울러 활동하던 곳에서 경험했던 기독교사회운동에 대한 안타까움을 많이 표현했다.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연대하게 되었지만, 더 이상의 필요성이 사라진 지금 서로의 갈 길을 가고 있는 모습에서 그런 아쉬움을 토로했다. “연대는 매개일 뿐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우리가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정신처럼 하나가 된다면 좋지만 인류 역사상 그런 적 없었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한 목소리를 내는 것 맞지만...”

그런 가운데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젊은 그룹들이,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선배 그룹들이 연대를 강조하고 있어요.”라는 말속에서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예전만큼의 끈끈함은 아니지만 여전히 연대해야 할 필요성이 존재하고 기운들이 남아 있어서 어떤 의제냐에 따라서는 함께 기독교사회운동의 큰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신학적 견해차이는 그에게도 넘을 수 없는 벽인듯 했다.

정체되어 있는 듯한 기독교사회운동의 한 해법에 대해 박 실장은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 문제 같은 그동안 진보진영에서 다루지 않았던 의제들을 다루는” 것에서 찾기도 했다. 또한 “기본적으로 기존 방식의 교회 운동은 이제 힘을 잃었다고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진보와 보수를 떠나서 나름의 구조와 체계를 갖고 있는 기존 교회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아요. 거기에는 예전의 사고와 담론만 가능하니까요. 소위 정상적인 남성 위주의. 근데 이번에 교단장 회의에서 7월 26일 성명서 낸 것에 대한 젊은 기독교인들이나 활동가들이나 목회자 그룹에서 놀랐던 것은 진보와 보수를 통틀어서 다양한 목소리들, 500여명이 연서명을 했어요. 특히 평신도, 당사자들을 보면서 이건 그동안 하나씩 하나씩 구조에 억눌려왔던 목소리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것이거든요. 앞으로의 교회운동은 교회성장이나 기존 교회를 공고하게 하는 맥락에서 탈피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라고 언급했다.

또한 박 실장은 기독교사회운동의 선배들에게 “자신들이 변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자기 성찰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미 세상은 변했는데 여전히 자신들이 젊을 때 하던 방식이 유효하다는, 물론 그걸 계속 고집하는 분들이 많지는 않지만, 암암리에 그걸 드러내고 운동도 대의도 해방도 다 좋지만, 먼저 작고 사소한 것에 대한 감수성이나 의심들을 먼저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 사소한 부분의 부조리, 사소한 것들로부터 나오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선배들이 키워주시면 후배들과의 소통이 더 원활히 가능하지 않겠나 싶어요, 세대교체 가능할 것 같고요.”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다음은 박 실장과 나눈 일문일답들을 옮겼다. 녹취를 풀어준 김보람 전 에큐메니안 기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간단하게 자기소개 좀 해달라
- 저는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으로 일하고 있는 박재형이라고 합니다. 

▲ 너무 간단하지 않나(웃음)
-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 소속 목사이기도 하구요, 독일 뮌헨 대학교에서 “판넨베르크의 하나님 형상 개념과 안병무의 민중 개념을 신학적·인간학적으로 비교하는 연구”로 논문을 썼구요, 2013년 학위를 마치고 들어와서 생명평화마당 사무국장과 여러 가지 일을 거쳐서 지금 현재 기사연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 70~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기사연이 NCC와 더불어서 한국기독교사회운동 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의 메카였는데, 공식적인 것 말고, 실장님이 생각하는 지금의 위상이 어떤지 이야기해 달라. 
- 제가 작년 3월부터 기사연에서 들어와서 일을 하고 시작했는데요, 그 전만 하더라도 기독교사회운동 진영 전체에서 위상은 없었구요, 모든 관계들이 모두 깨진 상태였고, 대체로 후원 정도로만, 목정평이나 생명평화마당 등에 간간히 후원을 정도로 진행했었고, 자체 프로젝트는 거의 전무했어요. 

기독교사회운동의 동력 상실

▲ 어느 정도 기사연 역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을 텐데, 기독교사회운동 아니면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이렇게 범위가 축소되었다던지 위상이 저평가 되었다던지에 대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 일단 일차적인 원인은 한국진보운동 진영 자체에 다양한 NGO들이 생기면서 예를 들자면 참여연대나 경실련이나, 이런 비기독교권이죠, NGO들이 활발해지면서 사실상 기독교진영이 해왔던 역할들을 그쪽에서 감당을 하게 되었고, 또 워낙 사회가 다원화 되었고 정치나 경제,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과거에는 소위 말해서 그런 쪽에 관심이 있는 진보적인 학자들이나 운동가들이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NCC나 기사연을 중심으로 모여서 활발했던 것이지만, 지금은 굳이 기독교라는 이름을 업지 않더라도 자생적으로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민중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넘어오면서 시민단체들이 활성화되다 보니까 기독교 쪽에서는 목소리를 잃게 되고, 민주화라고 해야 되나요, 독재정권이 끝난 이후에 하나로 목소리를 모아서 뭔가를 이야기해야 할 이슈들이 줄어들고, 또 그러다 보니까 각 분야별로 기독교 단체들도 각개 전투들을 하게 되고, 예전에는 각 단체들을 하나로 모으는 힘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NCC도 교회 정치나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면서 보수화 되고 보수교단들이 참여하면서 약간 힘을 잃었고, 기사연은 마찬가지로 인물들이 사회진영으로 빠져나가다 보니까 아무래도 동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소위 한국이 1세계 혹은 1.5세계로 불릴 만큼 경제성장을 하다 보니까 캐나다나 독일 쪽에서 왔던 지원금들이 일제히 다 끊기게 되었죠. 그러면서 이제 소위 말해서 외부 후원 없이 자생적으로 하다가 보니까 재정적인 문제들에 부딪히게 되고, 아시다시피 요즘 이런 단체들의 후원들이 아주 소수만 가능한 상태이다 보니까, 재정적인 문제들이 있는 것 같아요. 한국 사회 진영의 구조가 바뀌고 동시에 경제적이고 재정적인 문제들이 동시에 바뀌면서 그 역할을 하지 못할 만큼의 동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죠. 그 와중에 여러 가지 이유로, NCC와 같이 가는 것 같은데, 여러 교회 정치 내 문제나 운동을 주도해왔던 분들이 조금씩 조금씩 은퇴하시고 돌아가시고 세대교체를 하면서, 세대교체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까 그런 명맥이 끊기면서 결국 자생, 각자도생의 길을 걷다보니까 그런 것들을 많이 상실하게 된 것 같아요.

▲ 결국 두 가지로 압축이 가능해지는 것 같은데, 하나는 의제 상실에 있고, 또 하나는 자본의 문제인데, 해법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 해법은 사실, 커다란 틀 안에서의 해법은 저도 사실 아직 막막한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해법으로 활로를 찾으려고 하는 것들이 첫 번째로, 그 동안 기독교사회진영에서 해왔던 여러 가지 사업이나 일들 중에 여전히 함께 하면 유효한 만한 것들을 발굴해서 같이 다시 힘을 모아서 해 나가는 것, 그게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사회포럼(이하, 기사포)이라고, 올해 하게 되면 11번째가 되는데, 사실 그것도 9회부터 거의 유명무실해졌었죠, 다시 그것을 절실히 원하는 단체나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작은 규모지만 시작해서 이것으로 다시 한 번 기독교사회운동 진영의 목소리를 모아보자 해서 작년부터 다시 진행을 하고 있구요, 또 하나는 기존에 있었던 단체나 운동 방향이 아닌 새롭게 자생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젠트리픽케이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옥바라지나 신학생 연석회의의 신학생 그룹들이나 젊은 그룹들 그리고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 문제 같은 그동안 진보진영에서 다루지 않았던 의제들을 다루는 미시적인 그룹들을 지원하는 일을 해나가면서 세대교체를 하는 게 가장 급선무라고 생각해서 지원하고 같이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있고 또 하나는 신학생들이죠. 제가 이쪽에서 가장 어린 축에 속하고 여전히 실무자로서 일하고 있는데 우리의 세대가 끝나면 이후에 올라올 세대가 없고 다리 역할을 하는 저희도 소수고 여전히 예전 그대로의 구조와 틀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 10년 후를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거든요. 지금 사회문제에 눈 뜨고 있는 신학생과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나 운동, 프로젝트를 활성화시키는 방향으로 출구를 찾아보고 있는 상황이에요.

소수자의 목소리를 듣는 기독교사회운동

▲ 의제 이야기를 하면서 시민사회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더 이상 기독교라는 외피가 필요 없어지고 각자의 운동을 해나가고 있다고 했고, 또 이야기하면서 소수자 운동 등으로 초점을 맞춰야한다고 이야기했는데, 사실 소수자 운동 같은 경우는 교회 내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거든요. 기독교사회 운동이라는 것이 기독교 외피를 입고 있을 경우는 다양한 무리가 함께 하니까 교회가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고 교회가 베이스가 되지 않으면 이런 의제 운동이 힘든데 소수자 운동이 교회 운동과 같이 갈 수 있을지, 어떻게 생각하나?
- 기본적으로 기존 방식의 교회 운동은 이제 힘을 잃었다고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진보와 보수를 떠나서 나름의 구조와 체계를 갖고 있는 기존 교회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아요. 거기에는 예전의 사고와 담론만 가능하니까요. 소위 정상적인 남성 위주의. 근데 이번에 교단장 회의에서 7월 26일 성명서 낸 것에 대한 젊은 기독교인들이나 활동가들이나 목회자 그룹에서 놀랐던 것은 진보와 보수를 통틀어서 다양한 목소리들, 500여명이 연서명을 했어요. 특히 평신도, 당사자들을 보면서 이건 그동안 하나씩 하나씩 구조에 억눌려왔던 목소리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것이거든요. 앞으로의 교회운동은 교회성장이나 기존 교회를 공고하게 하는 맥락에서 탈피할 수밖에 없다.

▲ 그런데 지금 하신 말씀들이 자칫하면 복음주의 진영에서 말하는 교회개혁운동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사회운동과 교회개혁운동은 전혀 다른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 그것은 교회개혁운동이 아니죠. 오히려 그 운동 가운데 예전 기독교 내 민중운동이 민중교회를 양상했던 것처럼 새로운 방향의 이런 민주화나 경제개혁이나 국가변혁을 위한 거대 담론이 아닌 밑에서 왜곡되거나 침묵 당했던 운동을 활발히 진행하다보면 그것에 맞는 교회가 생겨난다고 생각. 향린, 길찾는 교회 등 그런 교회들이 앞으로 운동의 현장을 담보할 수 있는 매개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 보편교회도 교회의 한 성격이다. 소수자 교회의 교회로서의 가치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예를 들면 성소수자들이 모여 교회를 이룬다면? 교단에 소속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데, 공동체를 이룬 것만으로 가치가 있는가, 아니면 공교회로서 인정받는 것이 가치 있는가?
- 공동체가 발생하는 것 자체가 초대교회 정신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고요. 공교회라는 것은 다양한 교회를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으로 묶으려 했던 것이다. 하나의 교리나 의제로 모든 것을 일반화, 보편화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봐요. 가톨리즘이라는 것은 복음의 보편성을 말하려고 나온 것이라고 봐요. 어떤 상황, 인간, 인종, 국가, 민족이든 간에 그리스도의 정신은 보편적이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머리를 두는 하나의 공교회라는 고백이지, 지금은 교회의 교단화, 체제화되면서 왜곡된 현상이라고 봐요. 이런 공동체가 발생했다는 자체가 이미 보편적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인간 현상은 보편적일 수밖에 없죠. 소수자든 기존 일반 성도든, 흔히 말하는 근대적 관점에서 정상적인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오히려 보편과 거리가 멀다고 봐요.

▲ 성소수자 중에 어떤 분이 신학을 하고 안수 문제가 생기면 기장은 어떤 입장 취해야 하나.
- 교단장(총회장)이 선언서에 연서명을 하고 동성혼을 반대한다, 차별금지법을 또 반대한다, 이렇게 나온 건데, 그는 헌법에 나오는 신앙고백에 입각했을 뿐 개인은 의견은 아니라지만, 개교회주의에서 출발했다고 봐요. 자기교회 교인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지, 총회헌법 신앙고백 안에 있는 거고, 창세기를 토대로 하는 이야기에, 그게 동성애 반대가 아니라 성에 대한 오용을 말하는 것이지, 남성 위주의 이혼의 자유 등에 대한 성서적 고백일 뿐이지. 해석의 문제가 있는 거죠.
- 기장은 30만 명도 안 된다고 해요, 지금 가나안 교인이 180만이라고 해요. 기장이 예전에 2000 교회 운동, 3000 교회 운동을 하는 것은, 그동안 교회를 다니던 이들이 왜 교회를 나가지 않는가를 고민해야 하는데 반대로 기장은 스스로 보수화해서 예전 보수 교단의 프로그램이나 방식을 20년 뒤늦게 따라가고 있죠. 그러니까 교인이 줄어드는 거죠, 서울노회 같은 경우는 몇 만 명씩 줄어든다고 하는데, 그건 결국 뒤따라가서 그런 거라고 봐요, 기장이 취해야할 태도는 초심으로 돌아가서 기존의 교회가 싫어서 떠나는 사람이 왜 싫어하는지를 연구하고 그들을 어떻게 다시 교회로 끌어들일지를 고민해야한다고 본다.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 운동의 만남과 헤어짐

▲ 한국에서 참 많이 오용되는 단어가 에반겔리즘 혹은 에반젤리칼이다. 이게 사실은 개신교를 뜻하는데 한국에서는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용어로 오용되고 있다. 어쨌든 이런 용어의 오용은 나중에 생각하더라도, 소위 에반젤리칼이라고 하는 복음주의 진영의 사회 운동을 하려고 많이 노력하는데, 현장에서 이들을 만났을 때 신학적인 혹은 사회적 시각에 대해서 느낀 점은 어떤가?
- 독일에서 돌아와 생명평화마당에서 실무하기 전까지는 복음주의권에 대한 선입견 많았어요. 나이브하고 대화도 안통하고 신앙만 쫓는다고 생각했어요. 신학적 관점은 차치하고 생명평화마당 성격상 여러 교단 소속이 같이 일하면서 느낀 것은 교단이 중요하지 않더라구요. 평신도이신데 기장 목회자보다도 건전한 생각가진 분들 많은데, 반면 오히려 몇 십 년간 기독사회운동에서 있으면서도 보수교단에 속한 사람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고 답답한 경우도 많았어요. 지금은 인터넷만 찾아봐도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많아요, 중세처럼 성서해석이 막혀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다 해석할 수 있고, 지금은 교단이나 진영보다는 각각 그 안에서 누가 목소리를 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복음주의냐 에큐메니칼이냐가 큰 차이 없다고 본다.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의 연대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박재형 실장 ⓒ에큐메니안

▲ 진영적인 용어들을 벗어버리고 거대한 흐름을 하나 만들어낼 수 있을까?
- 지금이 약간 전초단계이다. 걸림돌은 교리, 성서해석, 관점 등은 여전히 넘지 못할 산인 것 같아요. 아무리 교회개혁을 말하는 사람들이라도 세세한 신학적 논제로 들어갈 때는 막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것은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해요. 신학교육이나 신학 운동적 차원에서 풀어갈 수 있다고 봐요. 옥바라지나 대구와 카레라고 하는 그룹과 연대해서 신학강좌 진행 중인데 다양한 색채를 가진 사람들이 와서 다양한 관점으로 토론하고 이야기하다가 보면, 상처를 받고 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젊은 그룹에서 조금씩 조금씩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서 같이 가야한다고 생각해요. 몇몇 분들은 신학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데, 관점이라는 것은 좋든 싫든 학문이라고 하는 틀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죠, 민중신학자들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죠, 민중신학자들도 반신학에서 시작했지만 그동안 공부했던 관점을 매개로 새로운 해석한 것 뿐이지, 틀은 벗어날 수 없거든요, 중요한 건 관점인데 상당히 중요하다고 봐요. 그 관점의 벽이 허물어지지 않으면 결국 나중에 운동의 흐름이 되고 구성이나 체계를 만들 경우 또 분열되거나 또 싸우게 되거든요.

▲ 복음주의 진영과 같이 운동 했을 때의 경험을 회상해 보면 끝에서 걸리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저는 스스로 이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어때요?
- 적절한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모세를 비롯해서 출애굽 1세대가 가나안에 못 들어가는 것과 같지 않나 싶어요. 세대교체를 통해 가능할 것 같아요. 물론 젊은 그룹에서도 1세대 못지 않은 편협한 시각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벽을 허물기 위해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신학생 그룹이 있더라구요. 그런 게 신학생 연석회의에서도 분출되고 있구요. 그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전형적인 운동권의 전략인데, 대의를 위해서는 다른 문제는 제쳐두자고 하는 것보다는 목표가 늦춰지더라도 천천히 같이 가는 것이 앞으로를 위해서는 맞는 방법이 아닌가 싶어요

▲ 일단 진영을 구분시켜 놓고 기독교사회운동이 자양분이나 활력을 얻기 위해서 진영 구분 없이 같이 운동해야 한다고 보는 것인가?
- 그렇죠. 지금도 사실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구요. 기사포 같은 경우도 4회인가 5회인가까지는 같이 했었어요. 신학적이나 사회를 보는 관점의 차이나 방식의 차이 때문에 갈라져서 그쪽은 성서한국으로 다시 출발했고, 지금은 완전히 갈라섰죠. 그래도 여전히 서로에게서 같이 해야 한다는 문제제기 끊임없이 나와요. 재미있는 것은 우리 쪽에서는 젊은 그룹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쪽은 소위 어르신들이 이야기하는 편이에요. 기본적으로 에큐메니칼이라고 한다면, 우리만이라도 제대로 용어를 써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길인 것 같아요.

▲ 복음주의와 같이 하는 방법 외에 침체 상태에 있는 진보 기독교사회운동이 자생적으로 운동의 외연을 확대시킬 방법은 없는가?
- 자생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좀 그렇고, 저는 하던 것 계속, 기존의 방식, 관점, 지향들을 성찰을 통해서 탈피해서 끊임없이 해나간다면 굳이 연대는 매개일 뿐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우리가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정신처럼 하나가 된다면 좋지만 인류 역사상 그런 적 없었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한 목소리를 내는 것 맞지만 하나를 위해서 뭔가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다만 최대한 서로가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고 봐요. 자기성찰 없이 계속 해왔던 대로, 선입견이나 전제를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고. 그 외에는 우리에게 맡겨진 현장, 이슈가 있다면 해왔던 것을 계속 하되 끊임없이 대화와 연대하려는 노력 필요하다고 봐요.

▲ 그간 복음주의권과 에큐메니칼이 연대의 틀은, 사실 이것도 몇 년 지난 이야기이기도 하고 현재도 그런지 자신은 없지만, 복음주의권은 인력과 자본이 있고, 에큐메니칼이 없는 것을 보충하는 식이었다.
- 근데 그 반대도 있었어요, 복음주의권도 사회인식이나 이슈나 문제에 대해 운동이 짧다보니까 에큐메니칼의 도움이 필요로 했어요. 소위 말해 에큐메니칼 진영의 브레인을. 지금은 그들이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그들도 나름 쌓았거든요, 그래서 갈라진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맨날 우리를 동원하려는 것 같고, 돈 줄로 생각하는 것 같고, 사실 그렇게 해 온 것도 사실이거든요. 한편으로는 하나는 연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또 한 편으로는 서로에 대해 보완한다는 차원에서 연대가 있었는데, 이거 둘 다 잘못된 방식인 것 같아요.

▲ 그러면 예전만큼의 끈끈함은 없는 건가?
- 예전만큼의 끈끈함은 없어요, 이번에 기사포 할 때 복음주의권을 참여시키기 위해 몇 번 접촉을 시도했었지만 이미 그쪽에서는... 

▲ 이제 그럼 각자 갈 길 가는 건가?
- 그런데 책임을 가지고 있는 복음주의권의 어르신들은 끊임없이 연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세요. 무작정 연대라고 하는 대의를 위해서 하면 안 되는 거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연대도 아니라고 보고, 다만 상황이 필요로 한다면,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요.

▲ 사회에서 기독교 진영이 아닌 운동 진영에서 80년대 초부터 들뢰즈부터 시작된 탈주개념, 소수자 운동으로 가고 있다고. 에큐메니칼 진영도 그런 흐름이 나타난다고 보는데, 소수자 운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 들뢰즈 류의 생각도 마찬가지죠. 하나의 목적, 하나의 길, 하나의 중심에 대한 반동이잖아요. 우리는 그걸 계속 따라가다가 내가 가진 문제는 소외당하고, 내 목소리 침묵 당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내 문제부터 해결하고, 주변의 드러나지 않는 것을 먼저 보는 것이 우리가 지향했던 거대 담론을 이뤄나가는 것보다 선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데, 저는 그게 맞다고 생각하고요. 시대의 흐름인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이 보였던 한계이기도 한데, 소수자 운동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거대한 인간 해방의 한 맥락일 뿐이고, 그런 지점에서 있어서는 같이 갈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보구요, 국가 시스템이나 법령이 바뀌지 않는데 우리끼리 소수자 운동한다는 것은 자기 만족이 아닌가 싶어요.

▲ 제도화된 민주주의가 수용할 수 없는 소수자들 문제로 가닥을 잡는 것이 기독교사회운동을 살리는 것인가?
- 기독교사회운동을 살리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을 담보하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길이라고 보구요. 소수자 운동은 그동안 배제되었던 것을 포섭한다는 차원에서 중요한 것이지 모든 운동의 방향이라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성찰의 과정을 통해서 나오는 또 하나의 방향인데, 이게 어느 사건이나 계기를 통해 모아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예수 정신은 여전히 필요하다

▲ 사회변화속도가 너무 빨라서 기독교 교회, 신학이 못 따라가고 있는데 기독교가 참 뒤쳐져 있다.
- 다양하고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사회에서도 결국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의 정신인데, 모든 것이 완벽해지는 세상에서 단 하나 부족한 것. 어떻게 보면 기독교 운동, 교회, 종교라는 것은 그것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바라보게 만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동안 80년대 90년대 기독교 운동이 가장 간과했던 것들이 비기독교운동과의 다른 점이 뭐냐, 데모의 방식만이 기도회나 예배일뿐이었지 똑같았어요.

▲ 그런 걸 영성운동이라고 보는 건가?
- 영성운동이라는 말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굳이 영이라는 카테고리 안에만 국한시킬 필요 없나 싶어요. 사회적 영성이라는 차원이나 흔히 말하는 삶 가운데서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거나 궁극적인 것을 보게 하는 차원에서는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신비라고도 하고 영성이라고도 하지만,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찾게 되는 것, 경제적인 성장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유럽사회에서도 끊임없이 뭔가 갈구하는 것들, 제도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나라에서도 여전히 이건 아닌데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종교고 예수의 정신인 것 같아요.

▲ 후배들과는 자주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후배들보다는 기독교사회운동의 선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주면 좋겠다.
- 저번 민중신학회에서 발표할 때, “진보 기독교 꼰대”라는 말을 했었는데, 욕 많이 먹었어요.(웃음) 후배들의 실수나 실패, 대의를 위한다는 핑계로 모든 것을 합리화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변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자기 성찰을 해주셨으면. 이미 세상은 변했는데 여전히 자신들이 젊을 때 하던 방식이 유효하다는, 물론 그걸 계속 고집하는 분들이 많지는 않지만, 암암리에 그걸 드러내고 운동도 대의도 해방도 다 좋지만, 먼저 작고 사소한 것에 대한 감수성이나 의심들을 먼저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민중신학회 때 발표했던 논문 주제도 민중신학은 왜 여성을 말하지 않았나? 여성을 말할 만큼이나 볼만큼, 사소하다고 여겨지던 것을 진짜 사소하게 여겼던 것이잖아요. 사소한 부분의 부조리, 사소한 것들로부터 나오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선배들이 키워주시면 후배들과의 소통이 더 원활히 가능하지 않겠나 싶어요, 세대교체 가능할 것 같고요. 저도 그런 부분에서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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