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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앞세우는 믿음(출애굽기 40장 34~38절)성령강림 열두째 주일설교
이훈삼 목사 (성남주민교회) | 승인 2017.08.24 16:34

[주간 단상: 택시 운전사 관람]

현재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택시운전사’를 지난 수요일 오전에 제일 연세 많은 여신도회인 한나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함께 보았다.

우리 현대사의 방향을 지시해온 거대한 분출인 광주항쟁을 소시민의 눈으로 보고, 그의 협력을 통해 폐쇄되어 묻히거나 날조될 수 있었던 광주항쟁의 진실이 전 세계에 보도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였다.

영화에서는 설정을 바꾸어 좀 아쉬웠지만, 주일 독일 기자 힌츠 페터를 한국으로 가라고 연결해준 분이 우리 교회와 20년 이상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독일 바인가르텐교회의 전임 목회자였던 폴 슈나이스 목사님이었기 때문에 특히 우리교회에 더욱 의미 깊은 영화였다. 한편 한국의 지식인들이 현재 보수 기득권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대형 교회 중심의 개신교에 대해 실망하고 분노하더라도, 엄연히 80년대까지 한국 민주화 운동의 가장 중요한 축이었던 개신교의 역사를 일부러 삭제하고 무시하는 자세는 과학적이지도 않고 학문적이지도 않으며 정직하지도 않기 때문에 흔쾌하지는 않은 면이 있었다. 슈나이스 목사님이 만약 가톨릭 신부였다면 그 장면이 꽤나 장황하게 연출되지 않았을까? 

어쨌든 영화가 보여주는 한 독일 기자의 기자 정신과 사명감은 오늘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남의 나라 문제도 저렇게 목숨 걸고 자기 책임을 다하려 하는데, 우리는 좀 더 분발해야 한다. 만약 힌츠 페터 기자의 목숨 건 취재가 없었다면 전두환 일당의 군부독재는 훨씬 강고하게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고, 지금 우리는 어쩌면 아직도 군부 독재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희생과 결단이 새로운 역사를 쓴다.

▲ 일본 선교사로서 한국민주화에 공헌한 전 바인가르텐교회 폴 슈나이스 목사

이 영화가 감동적인 것은 페터 기자를 도와 기사화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그 택시 기사가 아주 평범한 의식의 소시민이었다는 점이다. 부인은 병사하고 11살 딸을 혼자 키우며 사글세를 몇 달씩 밀려서 구박받고 사는 택시운전사, 돈이 없어 60만 km를 달렸지만 차를 바꿀 엄두도 못내는 기사, 그래서 하루하루 돈 버는 것이 그에게 가장 중요하고 또 전부인 기사, 사회와 역사참여 등에는 관심도 없고 오히려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택시 영업에 방해가 된다고 욕하는 그런 악하진 않으나 특별한 사회의식은 없는 당시 지극히 일반적 의식 수준의  택시운전사였다는 점이다. 

▲ 힌츠 페터 기자

내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 : 기자를 광주에 데려다 주고 참혹한 광주의 현장을 보고는 충격을 받지만, 집에 두고 온 11살짜리 딸이 기다리기에, 또 혹시나 광주에 더 있다가 해를 당하면 아이 혼자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기자를 남겨 두고 혼자 광주를 빠져나와 순천에서 차를 고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 차 안에서 택시운전사는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 3한강교 밑을~’로 시작하는 혜은이의 ‘제 3한강교’를 부른다. 참혹한 현장에 손님을 두고 혼자만 따난다는 죄책감과 딸이라도 지키려면 자신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주인공의 내면을 가슴 찡하게 보여주고 있다. 베테랑 송강호의 명연기다. 신나는 노래를 불러서 자신의 마음을 달래면서 정당화해 보려하지만, 생존과 양심의 가책을 동시에 표현한 이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영화 관람 후 맛있는 점심 식사

17명이 함께 점심도 맛있게 먹고 시원한 음료수도 마신 영화 관람은 생각보다 극장 화면이 너무 작아서 실망스러웠지만 다음에는 대빵 큰 영화관에서 볼 것이니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1. 가나안 정착의 기적과 비밀

1) 역사 상 가장 큰 기적 중의 하나는 이집트 제국에 노예로 붙잡혀 있던 히브리들이 어느 날 이집트를 탈출했다는 사실이다.

이집트라는 거대한 제국의 노동력과 생산력을 담당하던 노예들이 집단적으로 탈출한 사건은 꼭 홍해를 기적적으로 가르지 않고 그냥 나왔다 해도 그 자체로 기적이다. 곰곰이 따져볼수록 가능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집트가 이들을 순순히 내보내줄 리도 없고, 노예들이 이집트 군사와 맞서서 이겨서 탈출에 성공하는 것도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정말 기적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구약 성경은 이 신적인 기적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바로 야훼 하나님이고 이 해방자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유를 얻은 노예들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약속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이스라엘이고, 그 계약 문서가 십계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씩 역사를 재구성해 보면 진정 출애굽 자체가 놀라운 기적이다.

▲ 비옥한 초승달 지역(출처: 청소년을 위한 세계 경제사)

2) 또 하나의 기적은 이렇게 어렵게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당시 가나안은 빈 공간이 아니었으며, 모두가 정착하여 살고 싶어 하는 옥토였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사이에 걸친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가나안 땅이 속해 있었다. 이곳은 땅이 비옥하고 농사가 잘 되니 잉여 생산물이 있고,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었고 잘 먹고 잘 사니 사람들이 건강하고 힘이 세서,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이들에 비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치 메뚜기처럼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고 했다. 이건 문학적 표현이지만 과장은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이집트를 탈출한 노예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그렇게 나와서 물도 없고 먹을 것도 변변치 않았던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리저리 방황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몰골을 그려보자. 얼마나 힘 들었으면 이들이 다시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시절을 그리워했겠는가! 물도 식량도 별로 없이 살았으니 힘도 없었고 무기도 발달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이 그보다 훨씬 강하고 힘도 세고 체계적인 가나안 사람들을 상대로 이겨서 가나안 땅에 정착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런데 그렇게 되었다. 이것이 기적이고 신비다.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지 않고 들어가서 정착한 것 자체가 놀라운 기적이다.

3) 이런 기적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는가?

성경은 이 비밀을 기록한 책이다. 이 비밀을 잊지 않고 그대로 살면 날마다, 누구나 기적을 만들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신앙이다.

2. 기적의 비밀 : 성막

1) 성막이란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지도에 따라 성막을 지었다. 성막은 쉽게 말하면 이동용 천막이다. 이들은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살아야했기에 집도 흙이나 돌로 지을 수 없었다. 이동하기에 편리한 천막을 쳐서 생활하다가 물이나 풀을 따라 다시 이동해야 했다.

▲ 성막 건축 (1728년 성경 삽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거지인 천막집과 비슷하게 하나님의 집을 짓도록 하셨다. 하나님이 거처하시는 천막을 성막이라고 한다. 광야 시절, 하나님의 거처인 성막은 이후의 솔로몬 성전이나 헤롯이 성전에 비교하면 볼품없는 건축물이었지만, 당시 광야에서 근근이 살아가던 이스라엘에게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출애굽기 총 40장 중에 35~40장까지 총 6장이 성막 짓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만큼 구약 성경에서 성막의 비중이 큰 것이었으며, 모세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성막을 짓는데 모든 힘과 정성을 기울였다. 사람들은 성막을 짓는 재료를 스스로 가져와서 바쳤다. 금, 은, 여러 가지 실, 가죽, 도구 등을 아낌없이 바쳤다. 또 뛰어난 기술자들이 자신의 재능을 성막 짓기에 전적으로 투여하였다. 이렇게 마음과 물질과 모든 정성을 기울여 만든 것이 성막이다. 성전 건축은 이렇게 진행되어야 한다. 이후 이스라엘은 이 성막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삶을 영위하였다.

2) 하나님의 현존으로서의 성막

성막은 하나의 천막이다. 보통 사람들이 사는 천막보다는 훨씬 잘 만들고 화려하고 거룩하게 치장을 하였다. 그러나 그래서 거룩한 천막이 된 것은 아니었다. 바로 이 천막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주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거룩한 천막이 된 것이다. 그 안에는 이스라엘에게는 가장 소중한 자산, 정신적/물질적 중심이 되는 하나님과의 계약인 십계명 판이 들어 있는 법궤를 모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법궤 위에는 천사 둘이 서 있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천사들 위에 계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앞에서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고, 바른 마음과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쨌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성막을 통해 하나님이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들의 삶 현장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면서 생활했다.

3) 기적의 비밀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가나안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상식 밖의 기적이었다. 힘으로도 전략으로도 가능하지 않은 놀라운 일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 비밀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36~37절)

하나님의 집인 성막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표시로 구름기둥이 생겨났는데, 이스라엘의 진퇴는 바로 이 구름기둥의 움직임에 전적으로 맞추었다는 것이다. 구름 기둥이 떠오르면 이스라엘은 앞으로 행진했고, 구름 기둥이 떠오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다.

앞으로 갈 것인지 말 것인지, 머물 것인지 출발할 것인지 하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겼다. 그 결과가 불가능한 일인 가나안 정착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 싶어 하시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개인에게나 역사에나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는 행복과 생명의 원칙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 원칙에 충실했을 때, 객관적 여건상으로는 불가능한 가나안 정착이 가능했으며, 반대로 성전은 휘황찬란하게 지어져 있었지만, 진정한 신앙은 형식화 되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주님과 동행하지 못했을 때, 이스라엘 역사는 바로 그 때가 파멸로 기울기 시작한 지점이었다.

3. 오늘, 성막은 어디에?

1) 인간 이성이 못 미치는 신비의 영역

올해는 작년에 비해 비도 자주 많이 오고 가을도 좀 더 일찍 다가온 것 같다. 지난 주간에도 천둥과 번개가 쳤다. 옛날에는 천둥 번개가 치면 범죄자들이 특히 두려워했다. 천둥은 신의 노여운 소리이고 번개는 신이 내리는 심판의 창날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런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천둥과 번개가 치면 구름의 음이온과 양이온이 만나서 부딪쳤구나! 한다. 천둥과 번개가 왜 생겨나는지 모르던 시대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생각하던 것을 이제 인간이 과학을 통해 그 원인을 밝혀내면서부터는 이제 인간의 사고에서 하나님은 점점 사라져버렸다. 그 자리를 과학적 지식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근대 과학이 출발하던 17세기에는 그 범위가 그리 넓지 않았는데, 21세기 현대는 이제 인간 삶 모든 영역을 인간의 지식이 밝혀내면서 하나님의 자리는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현대)는 한 마디로 하나님이 계시던 신비의 영역을 인간이 모두 차지하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영역으로부터 쫓아낸 역사다.

과거 저 하늘에 계신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을 현대인은 이제 하나님이 은하계 어딘가에 계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원히 풀 수 없을 것 같았던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인간이 밝혀냈다. 이제 인간은 세포까지도 해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에는 없던 물건들을 정말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다. 마치 창세기에 하나님이 이름을 부르면서 자연 만물이 창조하셨듯이, 인간은 과학과 컴퓨터의 발달로 전혀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내고 있다, 심지어 새로운 생명체까지! 이제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었고, 구차하게 성막 같은 것을 모시고 다니면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또는 언제 출발해야 하는지 묻거나 기다리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인간 자신이 신이 되었고, 인간의 거처가 곧 거룩한 성막이 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런 시대를 살고 있으며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이런 현상이 두드러질 것이다.

2) 신을 세상 밖으로 내몬 인간에게 남는 것

이제 교회 밖으로 한발자국만 나가도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 현대 사회에 인간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성막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갈지 말지, 어디로 가야할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은 오직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다른 어떤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공공연히 말하고 있고 제도화 하고 있다. 이것이 근대 이후 거대한 인류 문화의 현실이다. 하나님 없이,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시대. 이제 인간은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 중 아담의 창조에서 하나님을 지웠다.

문제는 인간은 하나님 없이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이런 시대를 향해 하나님의 동행 없는 삶은 곧 실패요 파멸이요 죽음이라고 단언하신다. 교회는 이렇게 가는 인생과 역사의 방향은 결국 낭떠러지일 뿐이라고 외쳐야 한다.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할 첫 번째 사명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 고백 위에 서 있다. 

오늘 이스라엘이 불가능한 목적인 가나안 정착을 이룬 것은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기도 하고 멈추기도 했다는 것!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나중에 멸망한 이유도 딱 한 가지다. 국력이 약해지고 정치가 부패하고 국론이 분열되고 국제 정세가 어려워진 것도 이유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원인은 딱 하나, 하나님 뜻과 무관하게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멈추고 앞으로 가고 뒤로 가고 결정했다는 점이다.

4. 주님을 앞세우는 삶

1) 우린 어떻게 성막을 되찾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며 믿음 가운데에서 동행할 수 있을까?

이미 우리가 숨 쉬면서 살아가는 사회 환경, 문화, 제도, 의식 속에 하나님의 자리는 현저하게 축소되었다. 다시 우리들 머릿속에, 우리들 삶 속에, 우리들 역사 속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막을 짓고,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 그 결과가 구원이고 그 결과가 행복이다. 이 믿음을 갖기 위해 애써야 한다. 애쓰고 노력하지 않으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속의 물결에 그냥 휩쓸려 떠내려갈 수밖에 없다.

2) 해군/해병 군목으로 근무할 때, 군대 안에는 기독장교회(OCU)가 있었다.

그들은 모일 때마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자, 말씀보다 앞서지 말자, 성령보다 앞서지 말자는 이야기를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군인 장교들 신앙 구호니 사회 역사의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늘 기억에 남는다. 급하고 어려울수록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하는 것이 어려워 보이고, 구한다고 바로 응답이 오는 것도 아니기에 한 시가 급한 상황에서 불필요하게 지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중에 곰곰이 되새겨보면 그게 가장 빠른 길이다. 하나님 없이 내 지식과 경험으로 선택한 방법은 빨리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40년을 방황했다. 사흘이면 걸어갈 수 있는 길을 40년이나 걸렸다.

3) 먼저 기도하고 응답받고 움직이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다.

중대한 문제일수록, 위급한 문제일수록 하나님이 계신 성막 앞에 가지고 나와서 기도하라.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면, 절대로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던 가나안 땅이 열리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나가고 들어가고, 전진하고 머무는 결정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맡겼다. 기독교 신앙은 여기에 놓여 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내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은 아닐지라도, 주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해주신다. 설교, 찬양, 기도, 묵상, 또는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해서 응답해주신다. 기도-응답-확신-기도-응답-확신의 순환을 통해 우리는 반석 위의 삶을 살고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다. 기도하고 응답받는 삶을 통해 우리는 과거 성막으로 느꼈던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체험이 결여되면 남는 것은 마른 뼈 같은 인간의 이성과 냉소뿐이다. 기도와 응답으로 하나님이 거처하시는 성막을 다시 세우자. 그 때 우리 앞에 가나안의 기적이 열린다.

이훈삼 목사 (성남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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