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은 연하천에서 장터목대피소까지 13.3km의 여정으로 어제와 비슷한 거리다. 그래서 동이 터오는 이른 시간에 출발했다. 우리들 각자는 개인 준비물 외에 공동준비물을 조금씩 나누어 준비해 왔다.

그런데 아무래도 적은 준비물을 배정받은 내가 준비해 온 부식은 마지막 날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제 배낭과 비교해 무게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도리어 땀에 젖은 첫날 옷가지의 무게가 더해져 배낭이 더 무거운 느낌이었다. 하산해서도 며칠 더 있을 계획을 가졌기에 여분의 옷가지들도 들어있어 배낭 기본무게도 장난이 아니었다. 지리산 등반에서는 조금의 물건이라도 줄어야 하는데 말이다.

불필요한 것들은 줄이고

40년 전 강원도 양구 최전방에서 군생활하면서 100km 행군을 가던 생각이 났다. 처음에는 배낭이 가뿐하다가 갈수록 배낭무게가 무겁게 느껴지고 힘들었던 기억말이다. 그래서 베테랑 등산객은 배낭을 싼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가능하면 불필요한 물건을 줄여야 한다. 그래도 첫날에도 잘 버티었는데 둘째 날은 출발부터 무척 무겁게 느껴지니 오늘 일정이 은근히 걱정되었다. 적어도 후배들에게 민폐 끼치지는 말자고 다짐했는데 솔직히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더 힘들게 느껴졌다. 한데 이러한 나에게 자극을 준 것은 여자후배 K였다. 20대 후반 대학 졸업생과 대학 4학년생, 두 딸의 어머니이기도 한 이 후배는 체구도 작은 편이었는데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 치열함 끝에 바라볼 수 있었던 광경 ⓒ김영철

도리어 걸으며 가장 열심히 사진도 찍고 가끔 통화도 하고(지리산은 모든 곳에서 통화가 가능하다, 통신천국만세), P와 함께 자기 동기들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우리 등산 순서는 H가 선두 내가 둘째 그리고 K과 P가 걷는 순서였는데 등산 내내 대체로 이 대형을 유지했다), 처음보는 꽃을 보면 이름도 알고자 했다(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Daum에 사진을 찍으면 꽃이름 알려주는 애플이 있다). 그래 저런 여유도 배우고 분명히 나만큼 힘들텐데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걷는 후배에게 배우자하고 마음 먹으며 조금 힘을 얻었다. 저렇게 등산을 해야지 무슨 숙제하는 것도 아니고 군대 행군이 아니지라고 마음을 다잡게 해준 것이다.

나를 밀어주는 것들

가장 좋은 시간은 10분간 휴식 시간이다. 이 때 물을 마시면서 살아 온 이야기도 나눈다. 이번에 등반대장 역할을 한 P는 본래 경제학 전공이었지만 40이 넘어 치과대학에 다시 진학하여 지금은 면목동에서 치과병원원장이다.

선두에 서서 등반을 리더하는 H는 사학과 출신인데 전혀 생소한 땅을 파는 기계장비를 판매하는 회사에서 일한다. 둘 다 학생운동을 하다 두 번이나 투옥되어 2년 이상 감옥생활을 한 투사들이였다(자기네들은 그 시대 다 그렇게 살았다고 하지만). 여자후배 K는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에게 영어과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얘기 나누다보니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하였고, 벽소령에서 조금 더 가면 세석평전이 나온다. 비오는 가운데 점심으로 세석대피소에서 라면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식사 중에 내리던 소나기가 마침 출발할 때에는 개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험한 길을 오르내리려면 스틱이 필수인데 비가오면 우비입고 몸이 둔해지고 덥고 스틱사용하기가 불편하고, 너무 미끄러워 위험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 날씨는 전적으로 우리 편이었다. 나중에 천왕봉 일출까지 제대로 보게 되었는데, 여기에선 삼대 째 덕을 쌓아야 제대로 된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얘기도 하는데, 그만큼 덕을 쌓은 기억은 없으니 날씨가 우리를 특히 힘들어 하는 육십고개의 나를 밀어주는 것 같았다.

치열함 끝에 보이는 광경

점심을 먹으니 탈진의 염려가 조금 가신듯 했다. 철쭉꽃이 유명한 이 잔돌평원에는 이제 시들어버린 철쭉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언젠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읽었던가, 세석의 철쭉은 대대본부가 있던 이곳에서 죽어간 수많은 지리산 빨치산의 피로 피어난 꽃이라고. 지리산 산하에는 곳곳에 이같은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고 특별히 해방정국과 6.25 이후 남북통일국가를 만들려던 사람들의 치열한 투쟁의 현장이기도 했다.

아무런 등산화도 장비도 없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온 지리산 골짜기 능선을 다녔던 그 때 그 사람들을 잠시 떠올리며 스틱이 어떠니 배낭이 어떠니 배부른 걱정 했던 것이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생각 속에 마침내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했다. 운해가 구름같이 펼쳐진 광경이 일품인 곳이다.

출발의 불안에 비해 마침내 여정을 마쳤다는 안도감이 들어서 일까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여기서도 한가한 저녁 일정을 보내긴 어려웠다. 왜냐하면 내일 아침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3시반에는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김영철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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