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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와 ‘얼나’[조헌정 목사 설교] 마태복음 16장 21-28절
조헌정 | 승인 2017.09.04 23:26

정경(正經)과 위경(僞經)의 차이

사복음서의 형성 과정을 보면 이렇습니다. 마가복음이 맨 먼저 쓰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본 마태와 누가는 미흡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산상수훈의 말씀과 비유 말씀들이 없는 것은 물론 너무 십자가 사건 위주로 예수의 일생을 그렸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이 읽었던 마가복음에는 부활 예언만 있었지 실제 부활하셨다는 얘기도 빠져 있었습니다.(원마가는 빈무덤 이야기로 끝난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나름대로의 복음서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 마태와 누가는 여러 가지 부분에서 다릅니다. 우선 예수의 족보가 다르고 탄생의 과정이 다르며, 심지어는 예수 말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수훈의 말씀과 주기도도 내용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요한이라는 사람이 이 세 복음서를 다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부족하다고 여겨 자기의 복음서를 기술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네 복음서를 다 동등한 입장에서 바라보고 설사 그 내용이 서로 충돌한다 하더라도 그건 그냥 부수적인 차이로 이해하고 하느님의 말씀과 인류 구원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이를 다 옳다고 수용합니다. 그런데 이 방식에 대해 복음서 저자들이 동의할까요?

왜냐하면 우선 누가는 도입부에서 말하기를 예수에 관한 글을 쓴 사람이 자기 앞에 여러 명이 있었는데, 그들의 말이 다 사실이긴 하지만, 자기가 더 자세히 보고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요한은 말미에서 ‘이 책에 기록하지 않는 다른 표적들도 수없이 많다. 다만 자기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취사선택(取捨選擇)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 당시에는 단지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에는 지금 이름이 알려진 복음서만 하더라도, 도마복음, 베드로복음, 야고보복음, 빌립복음, 마리아복음, 마르다복음 등등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를 배반했다고 하는 가롯 유다를 진정한 제자로 보는 유다 복음서까지도 있었습니다. 배반이 아니라 실은 유다만이 십자가 죽음을 통한 인류 구원이라는 예수의 의도를 알고 있었기에 둘이서 차고 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성서를 27권으로 정하는 정경(正經)화 작업은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결정이 되었기에 그 이전까지는 위경(僞經)이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곧 초대교회에서는 지역별로 각기 다른 복음서가 읽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경화 작업은 일치와 통합을 원하는 교회 차원에서의 요구가 있기도 하였지만, 정작 이를 가장 원한 것은 교회가 아닌 정치권이었습니다. 기독교를 국교화한 로마 황제의 입장에서 볼 때, 지역교회간의 다툼과 분열은 곧 나라의 다툼과 분열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모든 공의회는 황제가 소집을 했고, 참가자들의 교통비, 식비, 숙박비 그리고 회의비 일체를 다 댔던 것입니다. 오고가는데도 몇 주가 걸렸고, 회의 또한 몇 개월씩 진행되었기에 당시 가난한 교회가 이를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느 기업이나 기관이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다고 한다면 강연자 선정이나 회의 진행 방식에 있어 후원기관의 입김을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신조로 귀결되는 삼위일체 교리도 역사적 고찰을 하여 보면 소수파 아타나시우스가 다수파 아리우스를 누르게 된 것은 주장의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신격화하였을 때에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권 곧 로마 황제의 정치적 선택이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남한교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남한교회 분열의 시작은 1953년 5월 대구총회에서의 기독교장로회(기장)와 예수교장로회(예장)의 분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 이름이 상징하듯이 원래 한편이었던 그리스도와 예수가 다투어 갈라선 것이지요. 당시 비판의 주된 주장은 김재준목사님의 고등성서비평에 기초한 자유주의 신학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 내막을 보면 조선신학교를 설립하고 조선인에 의한 조선교회라는 자주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은 미국선교사들의 정치적 간섭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분단으로 평양신학교를 잃게 되자 이게 걸 맞는 선교사 중심의 신학교를 세워야 했는데, 김재준목사가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로 북에서 내려온 목사들과 선교사들이 함께 손을 잡고 김재준목사 이단 소동을 벌인 것입니다.

휴전 직전 교통이 불편했던 시기라 회의 통보도 받지 못한 목사, 장로도 많았지만, 참석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때 미국선교사들은 자기 미군 차량을 이용하여 자기파 사람들을 실어 날랐던 것입니다. 당시 총회에서의 가부 표차가 불과 7표에 불과하였는데, 당시 표를 행사한 미국선교사들의 숫자가 20명을 훨씬 넘어섰던 것입니다. 미국선교사들이 정치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장로교의 분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조선 땅의 분단도 미국에 의해 분단이 되었지만, 교회 또한 미국에 의해 분열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저들의 과오를 깨닫지 못하고 집회 때마다 미국 국기를 흔드는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기장과 예장의 분열을 시작으로 예장 교단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 지금 남한에서 ‘예수교장로회’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교단의 숫자는 200개가 넘는데. 겉으로는 교리와 신학의 차이로 말하지만, 속내를 보면 다 기득권으로 인한 세력 다툼 곧 정치적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에 기초한 신앙공동체라고 하는 교회 또한 분열과 충돌이 자주 일어나고, 정통과 순복음을 앞세우는 교단들에 더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을 볼 때, 정통(正統)과 이단(異端)의 구분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의(自意)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서의 반전(反轉)

복음서 저자들은 나름대로의 예수 이해가 있고, 예수의 삶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다릅니다. 이 말은 문학 작품에서 흔히 보는 플롯이 있고, 이에 따른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전(轉)이라고 하는 것은 반전(反轉)을 말합니다. 기승을 따르던 일정한 흐름이 어느 순간 갑자기 바뀌는 것입니다. 소설이나 영화나 반전(反轉)이 없으면 밋밋한 작품이 되고 맙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복음서의 반전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예수는 가이사랴 빌립보 도성을 바라보며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라는 질문 후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수제자답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위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너는 베드로(그리스어로 ‘반석’)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이제 너에게 하늘나라 열쇠를 맡길 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이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적대자들에게 붙잡히고 고난을 받고 그리고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런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고 붙잡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라는 극렬한 비난을 받습니다. 마치 하늘 꼭대기 태양 근처까지 올라갔던 이카로스가 날개가 녹는 바람에 땅 아래로 추락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이것보다 더 극적인 반전은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다는게 이유입니다만, 그렇다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겠다는데, 말하자면 이는 일종의 자살행위인데, ‘그러면 주님,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방관하여야 옳았을까요? 물론 지금 우리는 예수께서 사흘 후에 부활하실 것이니까 이게 전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인간의 태도가 아니지요. 

물론 우리는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예수는 전연 다른 차원의 죽음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곧 제대로 살기 위해 죽겠다는 말씀입니다.  

‘제나’와 ‘얼나’

유영모 선생은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입니다. 유영모 선생께서 즐겨 쓰는 단어가 ‘제나’와 ‘얼나’입니다. ‘제나’란 인간의 욕망과 죄악의 근원이 되는 육체의 나 자신이며, ‘얼나’라 함은 육체가 아닌 얼 곧 참된 나 자신을 의미합니다.

유영모는 ‘제나’의 온갖 욕망―특히 식(食)과 색(色)―들을 죽여야만 참 얼나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다른 짐승과 달리 머리를 하늘에 두고 있다. 이는 얼의 나를 깨달아 맘속을 밝혀 위(하느님)로 한없이 솟나는 일이야 말로 인간됨의 근본이라는 것을 말한다.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랍어 부사 ANA는 ‘두 번’ 혹은 ‘다시’로 번역되지만, 동시에 ‘위로부터’ 혹은 ‘하늘로부터’로도 번역이 되는 이중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보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하자 그는 이를 두 번으로 해석해서 ‘어떻게 다 큰 사람이 다시 어머님의 뱃속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말은 아래로부터의 삶은 버린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성찰하는 것은 참다운 삶을 추구하기 위함입니다.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말하지만, 부활하려면 일단 죽어야 합니다. 어찌 씨앗이 죽지 않고서야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고 바로 부활의 단계로 넘어가고자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죽지 않고 부활하는 길은 없습니다. 그것도 그냥 죽어서는 안 되고 제대로 죽어야 합니다. 자기 아집을 버리는 비움의 훈련,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수행의 고통 없이는 부활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에게 부활은 미래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 사건입니다. 곧 예수께서 ‘지금 있는 사람들 중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저는 목회하는 가운데 교인들로 하여금 유언서 작성을 하도록 권유하여 왔습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영결식장에서 목사가 자신을 대신하여 전할 말들과 좋아하는 성서구절 찬송 등이 있고, 가능하면 의료 기구에 의한 생명 연장을 거부하는 서명난도 있습니다. 매년 고난주간이 되면 유언서 작성을 권면하여 왔습니다. 누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 기억하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아 내가 인생을 헛 살았구나.’ 하는 후회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죽음학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퀴블러 로스라는 분이 효시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지금까지의 죽음학은 대체로 어떻게 하면 잘 죽을 것인가라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일에 방점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죽음학이 과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지고 있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연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죽음과학의 미래라고 명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죽음과학의 미래

두 사람의 예를 들고자 합니다. 미국의 의학박사 겸 과학자인 로버트 란자 박사는 양자물리학과 다중 우주이론을 근거로 생물중심주의라는 이론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우주공간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우주세계가 존재하며 이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다른 우주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망선고를 받았을 때 두뇌에 남아있는 20와트의 에너지가 다른 우주로 이동한다는 것입니다. 곧 ‘죽음이란 다른 우주에로의 여행이다.’라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베소라는 친구가 죽었을 때, 그를 향해 “나보다 조금 앞서 이상한 세계로 떠났군.”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지요.

란자 박사는 “불멸이라는 것은 시간 속에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 보다는 시간 밖에서 함께 거주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부활이란 곧 다른 우주에서의 삶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분의 이론을 따른다고 할 때, 그러면 이 지구에서의 삶과 다른 우주에서의 삶의 차이가 무엇일까를 질문하게 되는데, 지구의 삶이 에고(ego)가 중심이 되는 삶이라면 다른 우주(부활)의 삶은 슈퍼에고(super ego)가 중심이 되는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두 번째로 말하고자 하는 학자는 유발 하라리라는 유대인 역사학자로서 최근 <사피엔스>라는 책으로 유명해졌습니다. 40억 년 전에 출현한 오늘의 생명체는 크게 두 가지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어 왔다고 말합니다. 자연선택의 법칙 곧 진화론과 유기화합물로 구성되어 있다는 유기체 법칙입니다.

요즘 창조과학론에 심취한 한 교수의 장관직 임명을 앞두고 사회적 논란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또한 문자주의를 맹종하는 한국교회의 근본보수신앙이 만들어낸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어떻게 과학자가 우주 창조와 생명 탄생에 관하여 창조론과 진화론을 동시에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신앙과 과학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지 대척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근본주의 신앙인들이 창조론을 믿고 진화론을 거부한다면 진화론에 기초하여 발전해 온 의학이나 생명과학 분야에서의 의술은 모두 부정해야 할 것입니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와 과학이 주장하는 백뱅 우주론은 그 보는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얘기는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찬양이자 신앙고백이지 이것이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과학적 서술이 아닙니다. 성서는 우주가 어떻게(how) 만들어졌는지를 답하는 책이 아니라, 이 우주 만물들 속에는 신의 뜻(what)이 담겨 있음을 노래하는 찬양 시입니다.

히브리어로 읽으면 운율과 대귀가 계속되는 한편의 시입니다. 시에서 과학의 논지를 찾아내겠다는 건 산에 가서 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창세기 1장의 하루를 천년으로 계산하여 우주의 역사를 6천년으로 계산하는 어리석은 기독교인들이 지금도 많이 있는데, 하루속히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성서에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은 세월의 덧없음을 빗대어 설명하는 은유이지 산술적 천년이 아닌 것이지요. 

유발 하라리가 말하기를 지금의 과학은 자연선택을 지적설계로. 유기체가 아닌 비유기적 생명으로 대체하는 중에 있다고 말합니다. 앞으로는 사회와 경제뿐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도 유전공학, 나노기술, 뇌 기계 인터페이스에 의해 완전히 바뀔 것이다라고 예언합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급격한 변화, 컴퓨터와 로봇이 인간을 대신하여 직장에서 뿐만 아니라 전쟁도 대신 치루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생명과학의 영향으로 인해 가난한 자와 부자간에 단순히 경제적 차이가 아닌 생물학적 우열 격차가 일어나는 시대에 돌입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죽음은 사제와 신학자들의 영역에 속했지만, 앞으로는 공학자들이 죽음을 관리하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2년 전 구글은 ‘캘리코’라는 자회사를 설립했는데, 그 회사의 목표는 ‘죽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지금 온 세계가 방글라데시와 휴스톤시의 홍수나, 북의 핵미사일 발사나 중동의 테러와 사드에 열중하고 있지만, 이 모든 문제들은 '인간강화'(human enhancement)의 문제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유전공학 인공지능 그리고 나노기술을 이용해 천국을 건설할 수도 지옥을 만들 수도 있다고 예언합니다.(8-11쪽)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전도하는 목사로서 조금 우울해지긴 했지만, 불과 이십년 전 지금의 인공지능과 핸드폰이 만들어내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었듯이, 옳고 그름을 떠나 그의 예언은 대부분 실현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죽음의 노래를 준비하라

그는 『사피엔스』 한국어판 서문에서 오늘의 남한사회를 향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남한의 GDP는 극적으로 올라갔지만, 동시에 자살률 또한 세계 최고이다. 경제력에 있어서 남한은 멕시코나 콜럼비아 그리고 태국 보다는 앞서지만 행복도에 있어서는 뒤쳐져 있다. GDP 수치달성이 우리의 목표라면 남한은 성공한 나라이겠지만, 만약 우리들의 목표가 행복 달성에 있다면 우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는 예수 말씀을 오늘의 언어로 바꾼다면 이렇게 되겠지요. ‘사람이 제 아무리 큰 부자가 된다 하더라도 자기 안에서 기쁨을 얻지 못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되겠느냐?’ ‘오늘의 가난 속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다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단지 허공을 치는 메아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테쿰세라는 인디언 추장이 남긴 말입니다.

[그대의 가슴속에 죽음이 들어올 수 없는 삶을 살라. 
다른 사람의 종교에 대해 논쟁하지 말고, 그들의 시각을 존중하라. 그리고 그들 역시 그대의 시각을 존중하게 하라. 

그대의 삶을 사랑하고, 그 삶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고, 그대의 삶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만들라.
오래 살되,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에 목적을 두라. 
이 세상을 떠나는 위대한 이별의 순간을 위해 고귀한 죽음의 노래를 준비하라. 
낯선 사람일지라도 외딴 곳에서 누군가와 마주치면 한두 마디 인사를 나누라.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누구에게도 비굴하게 굴지 말라. 

자리에서 일어나면 햇빛에 감사하라. 
당신이 가진 생명과 힘에 대해, 당신이 먹는 음식, 삶의 즐거움들에 대해 감사하라. 만일 당신이 감사해야 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 잘못이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사람이 되지 말라. 
슬피 울면서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 그 대신 그대의 죽음의 노래를 부르라. 집으로 돌아가는 인디언 전사처럼 죽음을 맞이하라.]

-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231쪽.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조헌정  choshalo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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