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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향한 저항의 고백마태복음 16장 13-20절, 로마서 12장 1-8절
조헌정 | 승인 2017.09.12 00:20

성서 신화 벗겨내기

역사적 예수에 관한 기록은 제2(신약)성서 4복음서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바울 서신에도 요한 서신에도 베드로서신에도 요한계시록에도 예수 얘기는 다 나오지만, 그건 역사적 예수 이야기가 아니라 부활 이후의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그리스도 이야기입니다. 물론 복음서라 하더라도 이 또한 예수 사후 50년이 지나 부활 그리스도를 고백한 제자들에 의해 전해지고 기록된 이야기이니 이 또한 순수한 역사 기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루돌프 불트만이라고 하는 20세기 불세출의 독일 신약학자가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는 이 분을 빼놓고 복음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분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천 년 전 사람들의 우주관은 흔히 삼층 세계관으로 말해지는데, 곧 구름이 떠다니는 저 하늘 어딘가에는 신과 천사들이 사는 천국이 있고, 땅 아래 깊숙한 곳에는 사탄이 사는 지옥이라고 하는 지하 세계가 있으며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물들은 지구라는 땅에 살고 있는데, 이 지구는 편편하기에 바다 끝으로 가면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태양이 하루에 한번 지구 주위를 돌면서 낮과 밤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달을 오고 가는 지금의 눈으로 보면 이는 일종의 신화이지요. 곧 복음서가 처음 기록될 때의 청중들이란 신화에 갇혀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오늘 현대인들이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이러한 신화의 껍질을 벗겨내는 곧 비신화화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러면서 복음서의 말씀들을 비교하며 세세히 분석하기 시작하면서 어떤 구절들은 예수가 직접 말했다기보다는 후세 사람들이 마치 예수가 말한 것처럼 자기들의 생각을 투사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나아가, 예수 부활 사건 또한 역사적 실제라기보다는 제자들의 실존 경험 사건으로 재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사실 독일어에는 우리 말로는 둘 다 역사라고 번역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Histrorie 이고 다른 하나는 Geschite입니다. 히스토리는 일어난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고 Geschite는 해석된 역사를 의미합니다. 복음서의 기록은 예수 사후 최소 4,50년이 지나 기록된 것으로 Historie가 아니고 히스토리에 기초한 Geschite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두터운 어느 일본 목사님이 독일을 여행하는 가운데, 어느 날 이 불트만교수가 강의하는 교실에 불쑥 나타나서 학생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부활을 믿는 거요? 믿지 않는 거요?’ 이 질문을 받은 불트만 교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당신이 지금 말하는 부활은 어떤 부활이요?” 사실 우리가 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신앙 얘기를 하다 보면 신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다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의 이야기는 누가 한 이야기인지 알아 맞혀 보시기 바랍니다.

성서는 때로 우리를 절망에 빠트리고 분노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될 수 있는 어리석음과 편협함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혼란스럽게 하네. 우리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 위안도 주지. 딱딱한 껍질 속에 숨어 있는 쌀쌀한 과유과도 같은 위안 그것이 그리스도라네. 오직 들라크루아와 렘브란트만이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렸네. 그리고 밀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렸지. 회화적 관점이 아니라 종교적 관점에서 그려진 종교화들은 나를 웃길 뿐이네.....

철학자들과 미술가들이 많이 있었지만,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생을 확신했고, 시간의 무한성, 죽음의 무의미함, 평온과 헌신의 필요성과 의미를 깨달았지. 그는 다른 모든 예술가들보다 더 위대한 예술가로서, 대리석, 점토, 물감을 경멸하면서 살아 있는 육신으로 일했고 평온하게 살았네. 신경질적이고 둔한 우리 현대인의 두뇌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 이 두려움 없는 예술가는 조각을 하지도, 그림을 그리지도, 글을 쓰지도 않았네. 단지 자신의 말을 통해 살아 있는 사람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지.

여보게 베르나르, 이런 생각은 우리를 예술 자체를 넘어서 아주 멀리 있는 세계로 데려간다네. 그래서 생명을 창조하는 예술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있는 예술을 볼 수 있게 해주지. 이 생각은 회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네.(25쪽) ...  흔히 한 마리의 황소로 상징되는 누가는 복음서의 저자인 동시에 과학자이자 화가였기에 흔히 화가들의 성자라 불리면서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네.”(27쪽) 

예수를 한 예술인으로 그리고 누가를 화가들의 성자로 인식하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예수와 예술

빈세트 반 고흐는 ‘영혼의 화가’ 혹은 ‘태양의 화가’라 불리는 네델란드 인상파 화가로서 불꽃같은 정열과 격렬한 필치로 눈부신 색채를 통해 서양미술사에서 높은 봉우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1853년 엄격한 칼뱅파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나 16살부터 6년동안은 미술품 상점의 점원으로 일하다가 24살에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당시 교계의 너무 딱딱한 분위기에 실망을 겪은 후, 목사 되기를 포기하고 28살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연과 경제적 어려움, 소외감 등으로 37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채 십년도 되지 않는 이 짧은 기간에 그는 모두 879점의 그림을 남겼는데, 지금 그의 그림은 경매장에서 최고가로 거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전에는 딱 한 점만 팔렸는데, 그것도 그저 물감 값에 불과하였습니다.

고흐는 그의 후원자이자 그림 판매상이었던 네 살 터울의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썼는데, 무려 668통의 편지가 남아 있고, 이외 어머니와 여동생 윌 그리고 동료 화가인 고갱과 베르마르에게 보낸 편지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전 고흐에 관련된 책이 몇 권 번역되긴 하였습니다만, 최근 신성림이라는 작가가 그의 편지들을 선별하고 그림을 더하여 『영혼의 편지』라는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저는 35년간의 목회를 통해 설교(하늘뜻펴기)를 단지 말로만이 아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도해 보았습니다. 곡 10년 전 아프칸에 선교 여행을 떠났다가 납치를 당해 두 명이 살해당한 그 주일에는 교인들에게는 공지하지 않은 채, 20여분 동안을 완전히 침묵으로 끝낸 적도 있고, 요한계시록을 다루면서는 20여 편의 그림을 이용한 설교를 대신한 적도 있고, 클래식 음악은 물론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락과 같은 대중음악을 이용한 설교를 한 적도 두세 번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루어 보고 싶었던 화가가 렘브란트와 고흐인데 그 중에서도 고흐는 꼭 하고 싶었는데, 준비만 하다가 실행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제가 고흐 얘기를 하고 있지만, 후에라도 꼭 고흐의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하고 싶습니다.

▲ 고흐, “별이 빛나는 밤”

여행과 같이 어쩔 수 없이 동석을 하게 되는 경우 간혹 처음 본 사람들이 저에게 묻곤 합니다. 예술을 하시나요? 그럴 때 무척 당황스럽습니다. 수염이 있다 보니 사람들이 그렇게 묻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제가 ‘아닙니다. 목사입니다.’ 또 이렇게 답하기는 싫더군요. 왜냐하면 목사에 대한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는 것도 이유이지만, 만약 질문자가 교인이면 당연히 어느 교회 목사냐고 묻게 되면서 자연히 호칭은 ‘목사님’으로 바뀌게 되고, 호칭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저 사이에는 묘한 거리감이 생기게 됩니다.

또 만약 교인이 아니라면 제가 목사라고 답하는 순간 대화는 거기서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장시간을 함께 하는 경우에는 목사라고 답하기가 꺼려지지요. 그래서 ‘예술을 하시는가 봐요.’ 그러면 ‘네’라고 짧게 답합니다. 사실 ‘예수’나 ‘예술’이나 발음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으니까요.

그럼 어떤 분들은 이어서 ‘그림을 그리시나요?’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때는 그냥 미소로 답을 합니다. 그러면 대체로 더 이상 묻지는 않습니다. 딱 한 사람, 무슨 그림을 그리는지 묻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만, 인상파 미술 어쩌구저쩌구 하니까 거기서 질문이 멈춰지더군요. 하여간 고흐에 따르면 제가 ‘예술을 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예’라고 답하는 것이 하나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흐는 논리에 밝지는 않았지만, 시대 사상에도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너무 지나치다 보니 주위 사람들과도 마찰이 심했고, 한때 함께 살아가던 고갱이 말다툼 끝에 집을 나가자 자신의 왼쪽 귀를 잘라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기이한 행동도 했으며, 붕대로 얼굴을 칭칭 감싼 모습을 자화상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결국 주위 사람들의 강권에 의해 정신병원에 잠시 머물다가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쳤습니다만, 그에게 있어 이 행위는 세상이라는 감옥으로 부터의 탈출을 의미했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이 ‘별이 빛나는 밤’인데, 그가 왜 그렇게 별을 좋아했을까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직접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타인에 의해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란 바로 새장에 갇힌 새와 비슷하다. 그들은 종종 정체를 알 수 없는, 정말이지, 끔찍한 새장에 갇혀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단다. 해방은 뒤늦게야 오는 법이지. 손상당한 명예, 가난, 불우한 환경, 역경 등이 그를 죄수로 만든단다. 이 모든 것들이 단지 환상이고 상상에 불과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묻곤 하지. ‘신이여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까요? 언제까지 이래야 합니까? 영원히?’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 때 묻곤 하지. 왜 지도 위에 표시된 검은 점에게 가듯 창공에서 반짝이는 저 별에게 갈수 없는 것일까? 타라스콩이너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지.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수 없단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 (191쪽)

고흐는 늙어가면서 천천히 별을 향해 걸어가기에는 너무나 큰 정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지요. 제가 오늘 고흐의 얘기를 하는건 그가 어떤 사람도 말하지 않았던 바, 예수를 ‘예술인’으로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방식에 따라 <의사 예수>, <교사 예수>, <목자 예수>, <해방자 예수> 등등 갖가지 이름으로 예수를 이해하여 오고 있습니다만, 고흐는 자기 방식대로 한 명의 <예술인>으로 예수를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술은 단순한 미적 감각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닌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가는 생명 창조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고흐에게 이러한 인식이 있었기에 그는 매우 강렬한 필치로 그림을 그렸던 것이고, 그로 인해 당대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후대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사랑받는 예술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다음의 말은 제가 예수와 예술을 동의어로 받아들이는 저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화가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희생과 자기 부정,그리고 상처 받은 영혼으로 그림을 그린다.”

예수 이해는 곧 자기 이해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다’라는 답을 곧잘 듣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델포아 신전 기둥에 새겨진 글귀, 곧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자주 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누군가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는 역설로 답을 하였습니다. 오늘 예수가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은 우리들 각자의 ‘예수 이해’를 묻는 질문이지만, 동시에 이는 예수를 통해 자기 자신을 아는 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를 따르는 모든 교회에서는 이 본문을 갖고 설교를 하고 있고, 설교의 결론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건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정답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일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이러한 교리와 문자의 고백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두에서 이야기 했듯이 이 고백은 우주의 신화 속에 살아가던 이천년 전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의 고백이자 초대교회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고백을 모두 종교적인 고백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이 고백은 전연 다른 차원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아들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백에 구십 구명은 ‘아우구스토스 황제’입니다라고 답을 했기 때문입니다.  

시저 황제의 양자로서 본래 이름이 옥타이바누스였던 그는 악티움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로마를 평정하는데, 이후 그는 시저 황제에게 붙었던 ‘가이사’라는 칭호 대신에 ‘아우구스토스’라로 새로운 칭호로 불려지는데, 이는 ‘신의 아들’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로마의 황제를 향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숭배할 때, 극소수의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 로마의 십자가 형틀에 죽어갈 갈릴리 출신 청년 예수를 향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당대에 있어 잘못하면 황제 모독죄 내지 국가반역죄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매우 위험스런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예수를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목숨은커녕 코털 하나 건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는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존경을 받죠. 물론 세상 사람들은 이런 고백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도 않을뿐더러, 이 고백을 교회 밖으로 가지고 나오면 오히려 골치를 아파합니다. 제가 목사이긴 하지만, 길거리에서 혹은 지하철 안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하며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제지하고 싶습니다. 여기 오는 가운데서도 부산역 앞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실천과 봉사의 행위로 예수를 전해야 하는데,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반감만 사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예수가 누군지 몰라서 교회 나가지 않는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만,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안 나가는 겁니다. 오히려 다니던 교인들마저 나가지 않고 있는데, 이들을 ‘가나안(=안나가) 성도’라고 부르고 있는데, 어느 신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이백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오늘의 로마서 말씀에서 주장하였듯이 하느님을 믿는 참 예배란 삶을 산 제물로 바치는 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 성전에서는 소나 양을 죽여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그 살을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로 드렸습니다. 예전의 우리나라도 돼지머리를 제사상에 올리기도 했지만, 지금도 인도나 아프리카를 가면 동물 희생제사를 드리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더 이상 동물의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교회 안에서 드리는 예배는 모두 산 제물을 드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바울은 우리들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라. 이것이 참다운 예배요 영적 예배”라고 말하면서 바로 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희생동물 제사방식을 따르지 않으면 모두 산 제물이 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 말씀이 지금 우리가 산 제물인지 죽은 제물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본받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 가치를 쫓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들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선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고흐가 그랬듯이 세상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좁은 길을 갑니다. 때로는 괴롭고 외롭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내는 삶의 파장은 강하고 영원합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면 그는 어떤 그림을 그리면 잘 팔릴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이 요구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본받기를 거부했습니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누구나 자기 그림을 보면 잠자고 있던 영혼들이 꿈틀거리며 깨어 일어나는, 혼이 담긴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참 화가란 캔버스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캔버스가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캔버스가 두려워하는 화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고,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향한 저항의 고백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진 <장소>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과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사뭇 달라지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 예수께서 질문을 던진 장소는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입니다. 헤롯대왕의 아들로 갈릴리 지역 일대를 다스리던 로마의 분봉왕이었던 빌립보는 아우구스토스 황제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주고자 로마의 원형경기장이 있는 도시를 본 따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그게 빌립보 가가이사랴입니다. 세상 부와 권력과 명예를 좇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도시입니다. 

도시 중앙에 있는 신전에서 황제의 상에 절을 하며 ‘황제 아우구스토스 신의 아들이여 찬양을 받으소서!’ 라는 찬양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물었던 것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물었던 것도 아니고, 가버나움 집안에서 물었던 것이 아닙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땅에서 로마제국의 권력을 상징하는 도성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이를 추종하는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고대 왕국이 모두 그러했듯이 로마는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재산을 약탈하고 포로를 노예로 삼아 나라의 경제를 꾸려갔던 패권국가였습니다. 그들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여 영원하라!)고 기도했지만, 이 평화는 전쟁과 살육을 기반으로 한 거짓 평화였습니다. 반면 예수께서 외치신 갈릴리의 평화는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 민중으로부터의 진정한 평화였습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이웃나라끼리 화목하며, 가난한 자와 약자를 우선시 하는 하느님 나라의 평화였던 것입니다. 

오늘 미국(迷國)은 로마 제국 이상 가는 패권국가입니다. 로마는 당시 지중해를 중심한 유럽 지역만을 지배했지만, 미국의 군사력은 세계 2위에서 50위까지의 군사력을 합친 것보다 더 세고, 세계 60여개 나라 수백 개의 군사 기지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핵항공모함과 수만 발의 핵미사일과 신형전투기를 갖고 ‘팍스 아메리카!’(PAX AMERICANA!)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에게 대항하는 나라들은 모두 무차별 폭격으로 굴복을 시킵니다.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과 리비아가 그러했고, 지금 시리아는 6년째 미국과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이슬람동맹을 지지하고 반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2세계대전 이래 모든 전쟁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습니다.

미국은 지금 컴퓨터나 TV나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나라가 아닙니다. 지금 미국의 수출 효자 품목은 전쟁무기입니다. 여기에 우리나라가 세계 제1의 무기 수입국입니다. 미국 정치는 실업률에 따라 희비가 엇갈립니다. 만약 미국이 무기 생산을 중단하기로 결정한다면 실업률이 50%에 달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미국 대통령들은 후보 시절에는 모두 전쟁을 중지시키겠다고 말하지만, 실제 대통령이 되면 대화는커녕 적대정책으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바마가 그러했고, 트럼프가 그러합니다. 

예수를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초대교회의 고백 속에는 팍스 로마나를 거부하는 정치적인 저항이 담겨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신앙 안에는 팍스 아메리카를 거부하는 정치적 저항이 함께 담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에 의하면 ‘세상을 본받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하는 일이야 말로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가치를 거부하고 하늘나라의 가치를 만들어내고 선포하는 곳입니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모인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고, 십자가가 걸려 있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고, 성서를 읽고 기도와 찬송소리가 울려 퍼진다고 해서 교회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의 틀에 불과합니다. 예수께서는 분명코 로마의 황제 권력을 부정하고 평등과 사랑의 새로운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저항하는 베드로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조헌정  choshalo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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