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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언어(요한3서 1:9-12)기독교인들의 역할, 사랑의 언어를 퍼뜨려가는 삶
이성훈 | 승인 2017.09.14 00:07
에큐메니안은 40대 목회자들의 설교를 소개하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도시나 농촌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목회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교회와 성도를 섬기고 있는 젊은 목회자들의 목소리를 들려드립니다.

목회서신 중에 요한1,2,3서가 있습니다. 요한이라고 추정되는 장로가 쓴 세 통의 편지입니다. 요한1서는 5장이나 되는 그나마 좀 긴 편지입니다만, 요한2,3서는 한 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편지들입니다. 이 요한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장로라고 말한다고 해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장로들과 같이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라거나, 지금 교회의 장로님과 같은 성도들의 대표는 아니고 오히려 지금의 목회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를 운영하거나 이끌어가는 일에 대한 편지인 목회서신을 남겼습니다.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

오늘 저희가 읽은 요한3서는 장로 요한이 가이오에게 보낸 편지며 편지의 내용에 대단한 해석을 해야 할 만큼 어려운 내용도 아닙니다. 우선 장로 요한은 가이오에 대한 칭찬을 합니다. 그리고 무슨 교회인지는 모르겠지만, 요한과 관련이 있는 교회에 세워진 두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으뜸이 되길 좋아하는 ‘디오드레베’이고 다른 한 사람은 ‘데메드리오’입니다. 요한이 이들에 대해 자신이 썼다고 말하는 부분을 봐서는 아마도 요한이 선임 목회자였을 가능성도 있고, 혹은 요한이 사도 바울처럼 방랑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였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요한은 교회를 위해 두 사람을 지도자로 세웠는데, 디오드레베는 자신을 세워준 요한을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즉 교회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조금 애매해보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요즘 특정 교회들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말씀드리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교회를 설립한 목사님이 있고, 이 설립자 목사님이 은퇴하신 이후에 새로 온 목회자가 설립자이자 은퇴 목사님을 교회에 못나오시게 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상황 자체는 조금 다릅니다.

▲ 장로 요한 이콘

요한이 방랑 선교자였다면, 그는 교회에 매번 나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교회를 방문하는 일이 있다면 선교 지원을 받거나 가끔 유숙할 곳을 찾아서 방문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디오드레베는 이런 측면에서 요한을 거부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디오드레베가 으뜸이 되기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요한이 자신보다 위에 있다고 여기고 그런 요한이 교회에 오지 못하게 막았다고 보는 편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디오드레베는 참 나쁜 사람입니다. 요한을 못 오게 막는 것도 모자라서 악한 말로 그를 비방하고, 교회에 오게 하려는 사람들을 내쫓는다고도 말합니다.

이런 디오드레베에 비해서 데메드리오는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이런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가이오에게 전하면서 악을 본받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사람과 언어

제가 오늘 요한3서의 본문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요한1,2,3서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성경 속에서, 특히나 신약성경에서 가장 선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저희가 잘 아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요한1,2,3서에 나옵니다. 장로 요한이 역사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선한 언어를 사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의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언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일들이 있습니다. 한 번은 페미니즘과 관련된 여성 후배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 대화를 통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떠한 의미도 전달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분명 서로가 대화를 나눔에 있어서 악의가 없음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서로를 이해하기에는 서로가 사용하는 언어가 너무나 다르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최근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관련된 태극기 집회에서 나오고 있는 발언들이었습니다. 집회에서 나온 발언의 사실관계를 떠나서 발언에 들어가는 단어들이 너무나 과격하고 거칠고, 누군가를 공격하는 내용들밖에는 없습니다. 변호사라는 사람의 입에서 ‘아스팔트에 피가 물들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구호를 내걸고 있고, ‘계엄령을 선포하라’는 끔찍한 이야기를 당연시 하고, 뭔 새끼 하는 욕설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나왔습니다.

이 분들에 대해서 뭐라고 하려는 것보다는 태극기 집회에 나오는 분들이 대부분 60대 이상의 분들이라는 점을 고려하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이 분들이 살아오셨던 사회, 이 분들의 세상에서는 이런 식의 언어들이, 이런 방식의 표현들 밖에는 없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본인들의 세상 속에서는 당연하고 익숙한 표현들을 지금 사용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대와 언어, 그리고 교회와 언어

물론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라고 모두 거친 언어를 사용하시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나라 표준어 제정의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듯합니다. 우리나라 표준어 규정 정의를 보면,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입니다. 초등학교 때 외우는 문장이기도 한데, 1988년에 제정된 말입니다.

왜 표준어 규정에 ‘교양 있는’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했을까요? 서울 사람들이 쓰는 말이 전부 표준어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서울말 중에도 일반적으로 느끼기에 교양이 없는 말들이 많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때 이후로 교양 있는 말을 쓰도록 장려하기 위해서 이런 규정이 나왔다고 합니다.

물론 시대를 어떤 시대, 어떤 시대로 구분해 놓고, 그 시대에 따른 언어가 과격한 언어와 유한 언어, 교양 있는 언어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왜 이런 언어의 차이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까’를 생각하다보니 다양한 생각을 떠올려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사회의 언어가 아니라 교회의 언어는 어떨까도 생각해봤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기에 항상 사랑의 언어를 사용할까? 그런데 저 역시도 제가 쓴 설교문을 다시 읽어보거나, 설교 녹음을 들어보면, 사랑의 언어, 사랑의 표현들 보다는 누군가를 향한 비판, 잘못된 것들을 향한 비판의 언어가 더 많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예언서는 거의 전부가 비판의 언어를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빼면 전부 비판입니다. 역사서들도 좋은 이야기보다는 잘못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잘못된 현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비판하셨습니다. 사두개인, 바리새인, 제사장들에 대해 비판하시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많이 하셨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사랑하셨다는 말은 요한복음을 제외하면 공관복음서에서 딱 한 번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에 쓰인 말들은 비판의 말들이 많기에 교회는 사랑의 언어보다는 비판의 말을 더 많이 쓰는 것 같고, 그러한 비판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는 끊임없이 비판의 대상, 적대자를 만들어 왔습니다.

언어가 만들어내는 삶과 세상

오늘 본문에서 ‘디오드레베’는 악한 말로 장로 요한을 비방했다고 말하는데, 디오드레베의 이런 모습도 어쩌면 기독교의 언어가 누군가를 비판하는 언어였기에, 그 자신도 당연하다는 듯이 장로 요한을 비판하진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목회자, 성도의 모습은 지금 교회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 요한은 어땠는가를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의 1절과 2절을 보면, 1절에 ‘사랑하는 가이오’라고 부르면서 먼저 사랑한다는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는 아직 부족했는지,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바로 이어서 또 말합니다. 2절의 시작도 ‘사랑하는 자여’로 시작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참으로 많이 합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9.11테러가 났을 때, 당시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사고가 나기 직전에 가족들에게 전화해서 모두가 한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이 ‘사랑해’였습니다. 왜 이들은 죽음을 앞둔 순간에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을까요? 평소에 잘 하지 않았던 말이기 때문에 그 순간에야 사랑한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참으로 많이 아낍니다. 저도 역시 사랑한다는 말을 잘 안합니다. “꼭 말로 해야 아나? 말보다 행동이 중요한 거 아닌가?” 하는 식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에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 민족이 워낙에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 감정 표현에 서툰 민족이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장로 요한은 달랐습니다.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이라는 표현에 헤픈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다기보다 사랑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 항상 그런 언어를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지금의 어린 아이들은 훗날 어떤 언어를 사용하게 될지 아직은 잘 알 수 없습니다. 작년 3월에 알파고의 등장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커다란 반향이 있은 이후에 마이크로소프트에서도 지식 습득이 가능한 채팅형 인공지능 테이를 공개했습니다. 테이는 트위터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지식을 습득하고 또 글을 올립니다.

그런데, 테이가 공개된 지 하루 만에 마이크로소프트는 이 인공지능 서비스를 중지해버립니다. 그 이유는 일부의 악의적인 사람들이 테이에게 이상한 지식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들로 인해서 테이가 트위터에 올린 글이 “나는 페미니스트를 정말로 싫어하며, 그들은 모두 지옥에서 죽어야 한다,” “히틀러는 옳았고 나는 유태인들을 증오한다.” 이런 글들이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한계를 여실하게 보여준 일이기도 하지만, 인공지능을 넘어서 우리의 자녀들, 또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는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다음 세대의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부모로부터 특정한 이야기만 들어왔던 자녀라면 그 부모와 동일한 생각을 갖고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기독교인들이 사랑의 언어를 퍼뜨려가는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언어가 세상을 바꾸고 생각을 바꿉니다. 서로가 사랑을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선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믿고 바라며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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