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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정 | 승인 2017.09.20 01:51

반갑습니다. 제가 4개월 전 향린교회에서 1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현재는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것은 잘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주로 부산의 믿음교회에 가서 하늘뜻펴기를 하고 있는데, 이 교회는 25년 전 노동자민중교회로 창립한 이래 20명이 넘어본 적이 없는 작은 믿음공동체입니다.

15년 전 저와 같은 시기에 한신대를 다니셨던 김영수 목사님이 갑작스레 돌아가신 이후 교회목회자가 없는 생활목회자(평신도) 교회로 지내오면서 인터넷에 올라온 여러 목사님들의 하늘뜻펴기를 함께 나누어 왔는데, 주로 저의 하늘뜻펴기를 함께 나누어 왔습니다. 이 사실을 2년이 지나서 감사카드를 받고 알게 되었는데, 이전에는 직접 방문한 적이 없었던 교회이지만, 십년 가까이 제 마음 속에 남아 있던 신앙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빚진 마음을 풀고자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부산을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The Luther Effect(루터의 영향)

올해 초 독일 종교청에서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THE LUTHER EFFECT>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루터의 기독교 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세계 개신교 역사를 정리한 책입니다. 첫 장은 독일을 중심한 유럽 내에서의 개혁교회 역사를 다루고 나머지 부분은 세계 개신교회를 다루고 있는데, 200개 이상 나라의 개신교회를 다 다룰 수가 없다보니, 대표적으로 대륙별로 네 나라를 선정하였는데, 유럽을 대표해서 스웨덴, 아메리카 대륙을 대표해서 미국, 아프리카를 대표해서 탄자니아, 그리고 아시아를 대표해서 남한이 선정되었습니다.

이 네 나라는 지역을 대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대로도 대표합니다. 스웨덴은 16,7세기를 대표하면서 유럽에서는 거의 유일한 루터교 국가입니다. 미국은 18,9세기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이주하여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교단만 세운 것이 아니라, 퀘이커로부터 메노타이트, 침례교 등등 새로운 교단들이 만들어 졌고, 이후 미국의 군사 정복 팽창주의와 맞물려 세계 선교에 앞장을 서게 됩니다. 그 영향으로 조선반도에도 기독교가 전해지고 교육과 의료, 민주주의 정신을 전파하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사드무기를 비롯한 남북분단의 직접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남한은 선교 130여년 만에 인구의 20% 이상 가톨릭과 더하면 인구 3분지 1이 넘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교회성장 역사는 세계에 그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물론 지금 마른 장작이 활활 타오르다가 쉬이 사라지듯이 교회 퇴보 또한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빨리 진행되고 있기는 합니다만, 하여간 현재 세계개신교회 역사를 얘기하면서 남한 교회를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 50대 대형교회 중 절반이 서울에 있으니 말입니다.

Beacons in a Divided Land(분단된 땅의 횃불들)

그래서 이 책은 남한교회에 대한 제목을 <Booming Land of Protestantism> 라고 명명하고 이어 오늘의 교회를 설명하는 장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습니다.“BEACONS IN A DIVIDED LAND” 한반도가 둘로 나누어졌듯이 남한의 교회 또한 둘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다른 나라와는 달리 남한의 5,6만개가 넘는 교회 중 딱 두 개의 교회만 소개합니다. 하나는 교인 등록수 48만 명의 세계 최대 교회인 여의도 순복음교회 그리고 이에 교인 숫자로는 천분지 1에 불과한 향린교회입니다. 

지금 베를린의 역사박물관에 가면 이 4개 나라의 개신교회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과 상징물이 지난 5월부터 11월까지 6개월간 전시되고 있습니다. 저는 가보지 못했지만, 5월 말에 2년마다 진행하는 교회의 날 행사에 저희 교회 교우들 약 20여명이 참석을 했고 이곳을 다녀왔습니다. 한국관을 들어가서 왼편으로 가면 대형화면에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가 설교하는 장면이 나오고, 그 아래에 영어와 독일어 자막이 나옵니다. 내용인즉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되고 무병장수(無病長壽)할 뿐더러 죽어서는 천국간다’고 하는 꿩 먹고 알 먹는 식의 설교를 보여줍니다. 

오른편으로 가면 향린교회를 소개하는 네 개의 전시물이 있습니다. 첫 게시물은 전통악기와 전통음악으로 예배를 드리는 국악예배 소개입니다. 두 번째는 향린교회에 와보신 분들은 이미 보셨겠지만, 교회 외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현수막 3개입니다. 하나는 1991년부터 걸어져 있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는 것이고 다른 두 개는 ‘정의를 심어 평화의 열매를’이라는 문구와‘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라는 문구입니다. 지난 봄 교회를 방문했던 전시 담당자가 이를 보더니 달라고 해서 당시 걸려 있던 현수막을 주고 같은 것을 다시 걸어놓았습니다.  

세 번째는 약 85cm x 75cm 크기의 보라색 천입니다. 여기에는 홍근수 목사님이 오랏줄에 매여 있는 그림에 <통일목사 홍근수 만세>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밑에 목사님의 석방을 촉구하는 이백 명의 교인들의 기도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제가 2008년부터 815 평화통일주일 예배 때에 했던 십자가입니다.

두꺼운 종이로 크기는 가로 1미터 50cm, 세로 90cm, 폭은 약 20cm 크기입니다, 가로 판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리고 세로 판에는 ‘대한민국’이라고 쓰여 있고 십자가 가운데는 한반도 그림이 붙어 있습니다. 지난 10년동안 저는 평화통일주일 하늘뜻펴기 마지막에 에스겔 선지자에게 내린 하느님의 명령, 곧 두 막대기에 하나는 북왕국 ‘에브라임’ 그리고 다른 하나에는 남왕국 ‘유다’라 쓰고 이를 하나로 붙들고 있으라는 곧 유대통일왕국의 예언의 말씀을 읽은 다음에 이 두 개를 하나의 십자가로 만들어 한반도 통일의 꿈을 나누어왔던 것입니다. 제 사무실 한쪽 벽에 세워 있었던 것인데, 이를 보더니 달라고 해서 지금 전시 중에 있습니다.

다른 세 개 나라의 경우에는 몇 개의 특정한 교회를 뽑아서 그 나라의 개신교회 현황을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남한의 교회를 설명하면서 ‘번영신학’에 기초하여 개인의 축복을 강조하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와 ‘민중신학’에 기초하여 민족과 사회의 평화와 정의 실현에 앞장서는 향린교회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향린교회가 갖고 있는 세계사적인 의미를 재확인하게 되었고, 우연히 저의 퇴임에 이 책이 교회에 전달되었기에 하늘이 주신 퇴임선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안병무 선생님과 홍근수 목사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또 이는 단순히 향린교회 한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매교회인 강남향린, 들꽃향린, 섬돌향린교회를 비롯하여 예수의 갈릴리 민중목회를 지향하는 여러 교회들을 포함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들은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약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각에서 보면 강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교회들은 예수의 십자가 정신을 따라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저항의 복음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24년동안 이 교회를 이끌어 오신 강남향린교우 여러분들에게도 주님의 이름으로 치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려면 넓고 크게 보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성공한 것 같아도 죽을 때 후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장이 아닌 영원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눈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야훼 하느님께서는 세계 사람들 모두 곧 불교신자도 모슬렘 신자도 모두 교회에 출석하는 기독교신자가 되길 원하실까요? 사실 유럽에서는 루터 이전에 그런 시대가 이미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중세시대를 ‘암흑시대(the Dark Age)’라고 부릅니다.

지금도 신의 이름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등에서 전쟁이 진행 중에 있고, 모슬렘 신앙인들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무차별 폭격에 저항해서 끊임없이 테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세 종교인들이 하나는 모세를, 다른 하나는 예수를 또 다른 하나는 알라를 자신들의 참 예언자로 받아들인다는 이유로 인해 서로 미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이게 진정 신앙인이 가져야 할 태도인가요? 아니면 모양은 달라도 우리 모두가 하나의 가족이 되어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예수가 꿈꾸었던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 주여! 주여! 손을 들고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일까요? 아니면 이 세상을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가치가 실현되는 곳으로 만들어가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일까요?

오늘의 성서 말씀은 성서 일과에 따른 말씀인데, 용서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든 사람

제1성서 구약성서의 얘기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위의 배다른 형들이 열 명이나 되었지만, 아버지는 돌아간 아내의 첫사랑을 잊지 못해 유독 그 만을 사랑했고, 그는 그 누구보다 꿈 많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사랑에 시샘을 낸 형들은 그를 지나가는 장사꾼들에게 돈을 받고 팔려버렸고, 그래서 그는 머나먼 외국 땅 어느 대궐 집에 노예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모든 꿈은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그는 살아 아버님을 만나야겠다는 희망을 품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주인의 총애를 입어 집의 모든 일을 관리하는 집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아 그는 안주인의 계속되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끝내 이를 거부하자 안주인은 오히려 그를 겁탈 죄로 뒤집어씌워 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쯤 되면 하느님을 원망하고 자포자기의 인생을 살만도 한데, 그는 자신은 신의 뜻에 의해 이 땅에 태어났고, 또 자신만의 독특한 선물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도 성실했기에 그는 간수장의 총애를 받아 그의 도우미가 되었고, 그래서 여러 죄수들을 만나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왕의 노여움을 산 두 사람의 대관이 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이 각기 다른 꿈을 꾸게 되는데, 그는 이 꿈을 해몽을 하여 주었는데, 그 해몽대로 한 대관이 복직이 되었고 다른 대관은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꿈을 꾸었는데, 그 나라의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 꿈을 해몽하지 못합니다.

그때 이 대관은 옥에 있을 때, 자기 꿈을 해몽해준 이 청년을 떠올리게 되고 이 청년은 왕 앞에 나가 명쾌하게 꿈을 해몽을 하자, 이 왕은 그 꿈을 해결하는 국정 책임을 맡깁니다. 지금 제 하는 말이 수수께끼로 들리는 사람들은 오늘 집에 가셔서 창세기 41장 이하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차저차 하여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저차이차 하여 유대 땅에 살던 형들을 만나게 되고 아버지 야곱을 포함한 모든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배다른 형들은 자기 동생을 팔았던 과거의 죄책에 매여 있습니다. 처음 요셉을 만났을 때, 자기들에게 복수하겠구나 생각했었습니다.

그때 요셉이 말했습니다. “형님들이 나를 팔아넘겼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목숨을 살리려고 이곳에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면 고난에 찬 자시의 과거를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죽자 형들은 또 다시 복수에 대한 두려움을 갖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자기가 당한 온갖 억울함을 앙갚음할지 모른다.’ 그래 요셉에게 나아가 ‘이제 우리의 목숨을 지탱해주고 차라리 종으로 삼아 달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오래 전에 이미 용서를 해 주었건만 요셉의 형들은 아직도 그 과거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건 그들 자신에게 주어진 자신만의 인생의 선물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경험만으로 동생 요셉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입니까?’

요셉은 그게 너무 슬펐습니다. “형님들 두려워하지 마세요. 내가 하느님입니까? 나에게 죽을 짓을 한 사람들은 형님들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를 선으로 만드셨습니다.” 요셉이 만약 비교 속에서 나오는 상대적 감사를 추구했다면 형들을 용서할 수는 있었겠지만, 이 순간 결코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형님들 염려하지 마세요. 쓰라린 과거 노예로 살았던 고통과 감옥에 갇혔던 억울함을 잊기는 정말 어렵지만, 저는 형님들에게 복수할 마음이 없습니다. 복수한다고 제 과거가 돌아오겠습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전 힘들지만 이미 과거를 잊기로 했고 마음으로 이미 용서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역사를 자기를 중심으로 바라보았다면 결코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의 주체를 하느님으로 보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불행을 통해 선을 행하셨다는 하느님 주체의 역사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혼의 소유자란 바로 이렇게 과거로부터 탈출할 뿐더러 미래에 대해 열려진 확신을 갖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상대 용서와 절대 용서

모세 율법의 핵심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입니다. 그런데 일부 개혁 율법학자들이 이웃사랑을 강조하며 세 번까지의 용서를 말했습니다. 한 번의 용서도 쉽지 않거든 세 번을 용서하다니요? 여러분의 자녀가 같은 실수를 세 번이나 반복했는데도 용서할 수 있다면 그 분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서 베드로는 자신이 세 번의 용서를 얘기한 율법학자보다 더 깨달은 사람임을 드러내고자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의 용서. 이는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도인의 경지입니다. 베드로의 경지 또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이는 무한대의 용서 곧 용서 자체를 넘어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용서의 주체가 내가 아님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 자체가 불신앙적인 일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누구냐? 너의 정체가 뭐냐? 너는 만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아니냐? 너의 목숨을 내논다고 한들, 네 가족을 다 종으로 판다고 한들 그 빚을 갚을 수 있느냐? 그런 네가 누구를 용서한다고? 야 이 놈아 주제 파악 좀 해라! 이런 말씀입니다.

용서에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의 핵심은 오늘날로 말하면 10조원의 빚을 탕감 받은 자가 10만원을 빚진 형제에게 으스대며 ‘자네의 형편을 보니 빚 갚을 형편이 안 되는 것 같구만. 자네가 나에게 진 그 빚 10만원 탕감하기로 마음을 먹었네. 나로부터 받은 자비를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게나.’ 예수께서는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렇게 ‘파렴치한 짓거리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분노를 통한 치유’

그런데 우리가 용서를 얘기할 때에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일어나는 고통과 집단과 집단 특히 국가권력이 개입된 집단 고통에 대해서는 달리 접근해야 합니다. 스티븐 체리라는 신학자가 쓴 『용서라는 고통』의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본래 제목은 『Healing Agony』입니다. 『분노를 통한 치유』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번역입니다.

이 책은 집단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518 광주항쟁의 피해자들에게 전두환을 용서하라고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고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이제는 모두 잊고 용서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요구하지 말라는 것이고 일본군 성폭행 할머님들에게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한일관계를 맺자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신을 빙자하여 국가 권력의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말하는 것은 성서뿐만 아니라 예수 말씀에 대한 곡해라는 것입니다.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도 분노를 적대시하지 않는다. 분노의 지속이나 악화에 대해서는 경고하지만 분노를 엄연한 삶의 한 단면으로 인정하다. (예수에게 있어) 분노는 하느님의 나라를 갈구하는 마음속에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116쪽)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여러 비유들은 모두 저항을 통한 사회적 해방이라는 주제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겨자씨 비유가 그러합니다.

신과의 인터뷰

어떤 사람이 신과 인터뷰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사람들을 보실 때 어떤 것이 가장 신기한지요?” 신이 대답했습니다. “어린 시절을 지루해 하는 것, 서둘러 자라나길 바라고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길 갈망하는 것, 돈을 벌기 위해서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돈을 잃어버리는 것, 미래를 염려하다가 현재를 놓쳐 버리는 것, 결국 미래에도 현재에도 살지 못하는 것,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더니, 결국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죽는 것.” 신은 나의 손을 잡았고, 우리는 잠시 침묵에 빠졌습니다.

이어 질문했습니다. “어버이로서 어떤 교훈들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으신가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단지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너 스스로를 사랑받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부자는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적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너희에게 사랑을 표현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사람 중에서도 너희를 진실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다른 서신에서는 이렇게 풀어서 말합니다.“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서로 도와주고 피차에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

나마스테

톨스토이의 책을 읽다가 한 구절에서 갑자기 누가 제 뒤통수를 망치로 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가장 잔인한 말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가장 잔인한 말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란 말이다. 가까운 사람 사이에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인도나 네팔에서 하는 인사말은 무엇인가요? 나마스테! 나마스테의 뜻이 무엇인가요? 내 안의 신이 그대 안의 신에게 인사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나는 이 세상과 우주를 모두 담고 있는 당신을 존중합니다.”라는 뜻이며, 결국 그래서 우리는 모두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 떼어낼 수 없는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신이 하나여서 하나님이 아니라, 같은 신이 우리 모두 안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여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형상을 띠고 태어났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제 옆에 있는 분을 향해 손을 합장하며 ‘나마스테’라고 인사를 한번 하시기 바랍니다.

너와 내가 이 깨달음 안에 있게 된다면 우리들의 삶은 자연히 ‘신’이 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이 내안에 들어왔고 그래서 신과 내가 하나가 되었기에 ‘신’이 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 신이 나면 세상이 걸림돌이라고 부르는 악조건들은 서로를 더욱 단단하게 엮어주는 디딤돌로 변해가게 됩니다. 이런 축복이 강남향린교회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씀]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왜냐하면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림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

조헌정  choshalo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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