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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삶: <살인자의 기억법> 영화와 소설기억과 은총: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②
최병학 기자 | 승인 2017.10.03 04:12

그렇다. 김병수(설경구 분)는 살인자였으나, ‘보편적인 인간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었다. 여기서 ‘보편적 인간’이란 오늘을 버리고 내일을 사는 별종 사피엔스를 뜻한다. 김영하 작가의 원작 소설은 김병수가 비록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지만, 몸과 손이 기억하는 살인의 기억으로 자신을 보살피는 요양보호사 은희(설현 분)를 죽인 것으로, 머리의 기억보다 몸과 손의 기억으로 니체적 성향을 드러낸다면(사실 소설가 김영하는 소설에서 니체를 많이도 인용한다), 영화는 좀 더 복선을 깔아 기억과 시간의 문제로 방정식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든다. 아니면 김남길이 그 배역을 너무나 잘 소화했기 때문인가? 아무튼 결국 이 영화도 딸을 살리려는 부성애를 통해 종족 보존이라는 별종 사피엔스의 현실을 여지없이 잘 보여준다. 

병수의 아버지(정인겸 분)는 1971년에 집에 돌아왔다(이 시대는 박정희 군사정권 치하이다). 오자마자 엄마와 누나를 개 패듯이 두들겨 김치 국물로 뒤범벅이 되게 만들었다. 병수를 때리던 아버지의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짐승의 눈빛이었다. 국가의 폭력이 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쳐 가정 폭력으로 이어지고, 전체주의라는 제도가 구성원 각 개인의 눈빛을 짐승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일까?

▲ 김영하 작가의 원작 <살인자의 기억법>

따라서 아버지를 살해한 이후 병수는 세상엔 꼭 필요한 살인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부친살해의 오이디푸스는 자기합리화의 길을 찾는다. ‘처자식 패는 횟집주인’도 죽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살인이 아니라, 청소다. ‘다이야 삼킨 개를 죽인 여자’도 죽어야 하고, ‘노숙자’는 물론 ‘사채업자’도 죽어야 한다. 존재할 이유가 없는 쓰레기들. 이들은 대부분 병수의 집 뒤 대나무 숲에 묻혔다. 그러나 병수는 죽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동물들 목숨을 사람을 죽인 것 보다 더 많이 살리기도 했다. 보라! 병수는 오이디푸스를 넘어섰다. 

물론 영화와 달리 소설은 그 첫 페이지에 병수의 살인을 ‘아쉬움’, 혹은 예술로 승화시켜놓고 있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살인의 기억을 나만의 기록으로 남겨두기 위해 일기를 쓰는 병수는 시(詩)를 배운다. 시를 가르쳐주는 문화센터의 강사(이병준 분)는 이렇게 말한다.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입니다.” 시 선생에 의하면 병수의 시어는 ‘날것의 언어와 죽음의 무상함’이 깃든 아주 괜찮은 시라고 한다. 감정표현은 없지만, 유머에 시간차로 반응하는 병수는 메타포가 아닌 경험담을 통해 날것의 시를 생산한다. 그리고 이렇게 ‘냉철한 복기’를 통해 자신의 살인의 모든 과정과 느낌을 기록해 놓는다. 수험생들이 오답노트를 만들 듯이. 그래야만 뼈아픈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또 다른 연쇄살인범이 병수의 구역에 침범한 것이다. 병수의 본능은 살인범을 알아본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경찰들은 병신들이다.” 알려줘도 제대로 잡지를 못한다. 살인범을 향해 병수는 말한다. “누굴 죽이든지 상관 안해. 내 딸만 아니라면.” 딸을 지키기 위해 상체근육 운동을 한다. 손아귀의 힘을 기르기 위해 사과를 쪼개려 한다. 그러나 알츠하이머로 기억은 사라지고 사과가 쪼개지는 것은 입으로 깨물었을 때이다. “머리가 죽어가. 쪼그라들고 구멍이 숭숭 뚫려서, 자꾸 잊어버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의 습관은 남아있다. 따라서 사라져 가는 기억에 외친다. “은희가 내 딸임을 기억하라.” ‘잊어서는 안되는 기억’과 그럴수록 ‘잊혀져 가는 현실’ 사이에 병수는 처절하다. 이제 시간은 병수를 점 점 더 극한으로 밀고 간다. 깨달음의 경지인지, 전적 포기인지, 아포케(apoche, 판단유보)인지… 소설은 반야심경의 한 구절로 매듭짓는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임이 다함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잊어버리려 했던 기억을 잊어버리면 누나의 말대로 15살 이전으로 돌아갈 것인가, 착하고 순진했던 시절로 돌아갈 것인가? 그러나 기억은 ‘목 메달아 죽은 누나’와 ‘17년 전 바람을 핀 아내와 은희가 내 딸이 아니구나.’로 돌아온다. 살인자의 삶은 이래저래 처절하다. 알츠하이머가 잠시 시간을 유예시키지만, 거기에 평안은 없다. 영화는 소설과 달리 공(空)의 단계 대신, 반복되는 기억 속의 살인자의 실존을 수미쌍관으로 보여준다.

최병학 기자  hak99@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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