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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라 주실 것이요(마태복음 7:7-12)하나님 나라는 우리 이웃에서
이성훈 | 승인 2017.10.04 01:16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은혜로우면서 모호한 말씀

오늘의 성경 본문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라도 마음에 붙들고 사는 말씀이며, 크신 은혜의 말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제 아내가 가장 사랑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을 때면 때때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몇 가지 요소들은 말씀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혼란을 줍니다.

먼저 이 말씀은 마태복음 7장과 누가복음 11장에 나옵니다만 말씀의 맥락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우리가 산상수훈이라고 부르는 말씀 모음의 끝부분에 오늘의 본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앞선 말씀은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가르침이고, 뒤이어지는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과 좋은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우리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구원 또한 사람에 대한 선한 행위라는 흐름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의 경우는 오늘의 본문이 주기도문 뒤에 나옵니다. 거기에 마태복음에는 없었던 비유도 한 가지 추가되어 있고, 마태복음 7장 12절의 황금률은 11장이 아닌 6장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눅6:27-38)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 뒤에 오늘의 본문이 이어져 있는 누가복음 11장은 ‘하나님에 대한 간구’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간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말씀이 핵심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납니다. 마태복음 7장도 누가복음 11장과 같이 ‘간구와 은혜’라는 주제로 단정 짓기가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흐름으로는 그렇게 단정할 수 있겠지만, 마지막 12절,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황금률이 오히려 본문의 의미를 어렵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렇기에 이 문제를 포함하여 오늘 본문이 가지고 있는 애매함을 생각해보고, 결국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마태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간구와 구원?

오늘의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구하라(아이테이테)’, ‘찾으라(제테이테)’, ‘문을 두드리라(크루에테)’ 모두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저 필요한 게 있으면 생겨나고, 잃어버린 것을 찾게 되고, 들어갈 문이 열린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받기 위해서는 간구해야 하고 찾아내기 위해서는 찾아야 하고, 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노크를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으로만 이루어진 도마복음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도마복음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구하는 사람은 찾을 것이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릴 것이다(도마 94).” 구하는 사람이 찾게 되고, 문을 두드린 사람에게만 문이 열립니다.

▲ 산상수훈을 전하시는 예수 ⓒGood News Bible 삽화

그렇기에 우리는 이 본문을 기도에 대한 명령, 하나님께 끊임없이 간구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간구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것이라면, 세 가지의 명령이 모두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구하라’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에서와 같이 끈질기게 간구하는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도 함께 하셨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해석을 적용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이 본문에 적용시키게 됩니다. 이 말씀에 하나님 나라를 적용시키는 해석 방법이 잘못되지는 않았습니다. 뒤따르는 14절에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라고 말씀하시며 구원의 길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21절에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행위와 천국에 들어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말씀에 적용시켜보면, 하나님 나라를 찾고, 하나님 나라의 문을 두드리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구원의 이야기로 풀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정리해본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간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찾고 그 문을 두드리는 일입니다. 이를 두 단어로 바꿔보자면 ‘간구와 구원’입니다.

이 해석은 지금까지 우리가 흔히 들어왔던 말씀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을 뒤이어지는 본문들과 연결해보았을 때,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앞선 ‘남을 비판하는 문제’와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으며, 오늘의 본문 자체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게다가 앞서도 제기했듯이 ‘하나님께 간구함’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으로 이 말씀을 정리하기에는 12절 황금률의 위치가 애매합니다.

현실 속에서 관계의 이야기

여기에서 오히려 누가복음 11장으로 눈을 돌려보게 됩니다.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 나타나지 않은 비유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한밤중에 근처에 사는 친구가 집에 찾아와 떡을 빌려달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여행 중인 친구가 왔는데, 자신의 집에는 대접할 음식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순간에 그 사람이 과연 시간이 늦었다는 이유로 친구를 문전박대하겠느냐고 예수님께서는 질문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놓고 보면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행동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순서는 좀 다르기는 합니다만, 자신의 주변에서 떡 빌려줄 사람을 찾고, 그의 집 문을 두드리고, 그에게 떡을 요구하였을 때, 자신의 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한 떡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이 비유는 주기도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와 유사한 맥락에 있습니다만, 이 비유의 상황을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의 말씀에 적용시켜본다면 마태복음의 말씀은 상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추상적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이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요구했을 때에 간구했을 때에 나를 돕는 것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될 것이 하나님 없어도 주변 사람들에게 간청하면 그들이 다 해줄 수 있다거나 그렇기에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둘 다 이 말씀 바로 아래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라는 말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정리해서 다시 말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떤 문제에 직면하여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도움을 요구할 사람을 찾고, 그 사람에게 다가가고, 도움을 요청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시며, 그를 통하여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가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실제적인 우리가 마주하고 대하며 도움을 받은 것은 우리 주변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오늘 본문과 한 단락으로 묶여있는 마지막 절 12절의 말씀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여기에서 ‘남’은 헬라어로 ‘안드로포이’, 즉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사람들을 대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실제적 도움을 주도록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분명 그들에게 마찬가지의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를 바꿔 말하면 그들에게 도움을 받고자 하는 만큼 우리도 도움을 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본다면, 내가 남을 도왔던 만큼만, 또는 내가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만큼만 나도 남에게 요구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야고보서 4장 3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이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람에게 도움을 요구할 때에도 적용할 수 있어 보입니다. 나에게 과분한 것들, 내 욕심에 의한 것들을 남에게 요구하는 행동은 결국 내가 남에게 하지 못하는 요구일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남들에게 그런 도움도 주지 않았고, 앞으로도 주지 않을 것이면서 나의 욕심에 의해 남에게는 과분한 요구를 하게 됩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에게나 사람들에게 그런 요구를 해보았자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간구와 구원’이라는 주제와 뒤에 살펴본 ‘현실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성과 도움’이라는 주제는 전혀 다른 주제처럼 보이지만, 사실 마태복음은 이를 융합하려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이 두 가지 주제를 모두 느낄 수 있도록 말씀을 구성해놓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이웃을 향한 사랑, 이 두 가지가 모두 있어야 그곳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음을 전해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두 가지 중 한 가지 방법만으로 오늘의 본문을 읽어나갈 때에는 언제나 애매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 후의 기쁨

마태복음이 전하는 이야기, 구하면 얻으리라는 말씀은 아마 여기에서 정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라는 말씀에 대해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볼 때면 항상 누가복음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가 떠오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사람’,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모두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양을 잃어버린 주인은 찾아 헤맨 끝에 양을 찾습니다.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도 부지런히 찾아서 드라크마를 찾습니다. 잃어버린 아들, 우리가 탕자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가장 비천해졌던 순간에 아버지를 찾아가고 아버지의 집 문을 두드립니다. 그리고 자신을 노예로 받아주기를 간구합니다. 그때에 그는 다시 아들의 자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비유들의 핵심은 기쁨입니다. 찾아낸 기쁨, 회복된 기쁨, 얻어진 기쁨, 그리고 그 기쁨을 이웃과 나누는데 핵심이 있습니다. 물론 마태복음에서는 이 세 가지 비유 중 두 가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얻어낸 기쁨, 찾은 기쁨, 문이 열린 기쁨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더욱이 기쁨을 나누라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신 이야기가 무엇일까? 그 전체적인 말씀들의 맥락을 헤아려보면 그 기쁨을 누리고 나누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계신다고 생각이 됩니다. 내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얻고, 발견하고, 문이 열리는 기쁨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나 홀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 특히나 나에게 도움을 준 이들, 나와 함께 해준 이들과 나누기 위함입니다. 또한 이 기쁨을 나누는 장소, 넘치는 기쁨을 나누는 그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기도 합니다.

말씀 정리

말씀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얻기 위해서, 찾기 위해서, 문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간구해야 하고 찾아야 하고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끊임없이 간구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고 찾으며 그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하나님 나라’라는 먼 곳만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이웃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현실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우리로 얻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먼저 도움을 주고 그들이 또한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행해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기 때문에 그 사람이 도울 수 있는 만큼의 것들을 요구해야 합니다. 말도 안되는 것들을 요구하거나 찾아서는 결국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서 얻게 되는 것은 참된 기쁨입니다. 생명과 구원의 기쁨이면서 또한 나눔의 기쁨입니다. 나 혼자 즐기는 기쁨이 아니라 도움을 준 사람과 또한 도움을 주지는 않았더라도 함께 했던 사람들과 나누게 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시며 살아가시고, 거기에만 집중하지 마시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도움만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기도를 부탁한다고 한다면, 나 역시도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왔어야만 했고 지금까지 못했다면 기도를 부탁한 이후라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해 줄 것입니다. 먼저 도움이 되시고, 그 후에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곳에 은혜를 내리셔서 구하는 바를 얻을 수 있게, 찾는 바를 찾을 수 있게, 그 문안으로 들어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여러분도 도움을 받게 되길 바라고, 또한 그 안에서 큰 기쁨을 누리시며 그 기쁨을 나누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기쁨 주실 줄 믿고 바라며 그렇게 되길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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