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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잔치 비유 - 주인의 치욕, 관리인의 당황농심과 해학으로 읽는 예수의 민담 4
김재현 | 승인 2017.10.13 00:41

농심과 해학으로 예수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주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읽고 있다. 주인은 지주이며, 예수 민담의 청중들인 농민들이 부담스럽고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이번에는 흔히 큰 잔치 비유(눅14:16-24)라고 불리는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1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17 잔치 시간이 되어, 그는 자기 종을 보내서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말하게 하였다. 
18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은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보아야 하겠소.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였다. 
19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고 말하였다. 
20 또 다른 사람은 ‘내가 장가를 들어서, 아내를 맞이하였소. 그러니 가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1 그 종이 돌아와서, 이것을 그대로 자기 주인에게 일렀다. 그러자 집주인(지주)이 노하여 종더러 말하기를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하였다. 
22 얼마 뒤에 종이 돌아 와서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다 했읍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았읍니다.’ 하고 말하니 
23 주인은 다시 종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러면 어서 나가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
24 잘 들어라.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내 잔치에 참여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가장 오래된 출전은 예수말씀복음서 Q이다. 이 이야기는 Q복음서 중에서도 초기의 전승으로 간주된다. 클로펜보그(J. S. Kloppenborg)는 그의 Q1의 지혜 전승에 본문을 편입시켰다.(각주 1) 제이콥슨(A. D. Jacobson)에 의하면 “비유의 본문은 누가에서 가장 잘 보존되었다.”(각주 2) 마태는 대부분의 주인의 비유를 임금의 비유로 바꾸며 잔치를 혼인 잔치로 바꾸는 경향이 있다. 반면 누가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누가의 “어떤 사람”이 역사적 예수에게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각주 3) 누가에는 손님들의 거절의 이유가 삼중구조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마태에게는 거절의 이유가 없고 거절한 사실만 중요하다. 21-23절은 누가의 편집이 가미되었지만 어록의 본래적인 구조에 속해 있었다고 판단된다.(각주 4)

“어떤 사람”(눅14:16)은 지주(οἰκοδεσπότης)이다. 지주는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초대할 정도의 재력”을 가지고 있다.(각주 5) 아마도 관리인으로 생각되는 종(δούλος)은 이 이야기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절한 손님들은 중요한 등장인물들이다. 이들은 도마복음서 어록 64와 같이 도시에 있었던 부유한 자들이 아니라 농촌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부유한 자들이다. 소 다섯 겨리는 상당한 토지를 소유한 농부임을 암시한다.(각주 6) 앞의 두 사람의 거절은 상업적 거래로 인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초대된 민중들(거지들, 장애인들,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주된 줄거리는 부유한 지주가 마련한 잔치의 실패다. 하루에 세 번 식사를 하는 헬라인, 하루에 네 번 식사를 하는 로마인과 달리 유대인들은 하루에 두 번 식사를 한다.(각주 7) 첫 번째 식사는 오전 10시경, 두 번째 식사는 어두워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저녁에 행해진다. 잔치는 저녁에 베풀어지는 것이 관례이다. “잔치”는 종종 “저녁식사”로도 번역된다. 그 잔치에는 남자들만이 초대되었다. 손님을 청하기 위해서는 두 차례에 걸친 초청이 이루어진다.(각주 8) “잔치가 시작되는 때에 재차 초대하는 것이 예루살렘 상류층에서 실행되던 특별한 예의였던 까닭이다”(Jeremias). 처음에 초청된 세 명의 부유층이라고 추청되는 손님들은 모두 초청을 거절했다. 당시의 문화로 볼 때 잔치 초청의 거절은 엄청난 불명예를 의미했다. 주인은 다시 종을 시켜서 이제 민중들로 잔치를 가득 채웠다.

 예수의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로 시작되는 것이 많다. 민담의 상황을 가정하면, “엣날 옛날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라고 운을 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본문 말씀에도 “어떤 사람이”로 시작하는데, 이야기의 후반부에 그 사람의 정체가 밝혀진다(21절). 그는 지주였던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서 “집주인”이라고 하는 말은 “지주”의 또 다른 번역이다. 지주는 동시에 부자이기 때문에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할 재력을 가지고 있다. 초대받은 사람들도 역시 재력을 가진 지주 그룹이었을 것이다. 식탁교제는 사회적인 신분이 드러나는 자리였고 큰 잔치를 개최함으로써 주인은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려고 했을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가난한 사람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부자들은 호화롭게 잔치를 벌이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초대받은 손님들이 잔치에 오기를 거부한다. “누가복음에서 초대받은 사람들은 밭을 산 사람, 소 다섯 겨리를 산 사람, 방금 장가를 든 사람입니다. 밭을 사거나 소를 살 수 있는 사람들, 장가를 드는 사람들은 유족한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김창락)

▲ 주인이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청했지만, 초청받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거부하였다.

예레미아스에 따르면, 소 다섯 겨리를 산 농부는 아마도 45헥타르(111에이크)가 넘는 땅을 소유하고 있는 대지주이다.(각주 9) 이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요한 사업에 몰두한다. 어떤 사람은 밭을 사고, 어떤 사람은 소를 사고, 또 다른 사람은 장가를 간다. 우리는 배우자를 구하는 일을 오늘날과 같이 낭만적인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대의 결혼은 일종의 거래였고 그래서 결혼은 토지를 구매하는 행위나 가축을 구매하는 행위와 비슷한 일종의 거래 행위로 그려진다.(각주 10) 잔치가 부자들의 결속을 돈독하게 하는 행위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들의 연대가 깨어지고 초청했던 부자가 곤경에 처하는 것은 예수의 청중들에게는 큰 기쁨과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주인과 청지기의 당황하는 얼굴을 보고 뒤에서 얼마나 웃었겠는가?

지중해 문명의 ‘명예와 수치’를 고려할 때 부유한 지주가 개최한 잔치의 실패는 엄청난 불명예와 수치를 의미했을 것이다. 주인은 분노했다. 이는 당연하다. 왜냐하면 1차 초대를 수락하고 잔치가 준비된 다음 2차 초대를 거부하는 것은 엄청난 사회적 결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손님들의 변명도 주인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키스트메어커(S. J. Kistemaker)는 손님들의 변명이 매우 웃긴 이야기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각주 11)

이들의 변명은 스스로 급소를 찌르고 있다. 오찬 말씀 중에 예수님은 유머 감각을 십분 발휘하셨다. 밭은 산 첫 번째 사람의 경우는 부당성을 드러내고 있다. 즉, 구매자가 밭을 검사하는 것은 사기 전에 하는 것이지 산 다음에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 사람의 변명도 불합리하다. 소 다섯 겨리를 다음 날 시험해 볼 수도 있을 뿐 아니라 더욱이 이 농부가 소를 사기 전에 시험해 보지 않았다면 자신의 치명적인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세 번째 예는 예 중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하루 저녁만이라도 자기 아내 곁을 떠나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고 하는 이 신혼 남편의 변명은 수많은 웃음거리를 자아내게 한다.

예수의 입에서 손님들의 거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청중들에게서는 폭소가 터져나왔을 것이며, 걸죽한 결혼 이야기에서는 그야말로 웃음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주인은 분노해서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21절)라고 관리인에게 말한다.

사실 관리인은 이 모든 일의 진행과정에서 계속해서 그야말로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 눈먼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을 데려왔으나 자리를 채우지 못했다. 그는 다시 보고를 해야 했고, 또 고통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결국에 그는 길거리나 울타리 밖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부탁을 해야 했다. 여기에서 강권하라는 말은 강제나 강압이 아니라 “절박하게 권유해야 할 필요성”을 말한다. 이것 또한 못할 짓이었을 것이다.(각주 12) 주인이 큰 망신을 당하는 이야기는 온 동네의 즐거운 웃음거리였고, 예수의 청중들인 농민들은 그것을 즐겁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각주 1) J. S. Kloppenborg, The Formation of Q - Trajectories in Ancient wisdom Collection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9), 229. 
(각주 2) Arland D. Jacobson, The First Gospel - An introduction to Q (Sonoma CA: Polebridge press, 1992), 216. 그렇지만 제이콥슨은 누가와 도마복음 어록64 사이의 유사성은 이 비유가 누가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없으며 Q에 있었다고 판단하게 한다고 보았다.
(각주 3) 조태연, “나의 식탁에서 먹게 하라: 큰 잔치 비유의 해석을 통해 본 역사적 예수와 식탁교제의 문제”, 『신학사상』82집(1993): 178.
(각주 4) Jacobson,. op. cit., 216. 누가의 “가난한 자들과 불구자들과 봉사들과 저는 자들”(눅14:21)은 아마도 누가의 편집이다. 왜냐하면 눅14:13에서도 동일한 목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주인이 다시 종을 보내고 종이 새로운 손님들로 잔치를 채운 것은 Q의 구조에 속한다.
(각주 5) George R. Beasley-Murray, 『예수와 하나님 나라』, 박문재 역(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8), 214.
(각주 6) I. H. Marshall, 『루가복음Ⅱ』(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4), 228.
(각주 7) R. H. Stein, 『비유해석학』, 오광만 역(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88), 138.
(각주 8) Ibid., 139.
(각주 9) J. Jeremias, 『예수의 비유』, 허혁 역(왜관: 분도출판사, 2011), 171-172. 
(각주 10) 김선정, “큰 잔치 비유 다시 읽기,” 구제홍, 김선정 외, 『예수의 비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176-177.
(각주 11) S. J. Kistemaker, 『예수님의 비유』, 김근수, 최갑종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254-255.
(각주 12) K. E. Bailey,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고대 중동의 삶, 역사, 문화를 통해 본 복음서』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495.

김재현  verticalk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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