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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과 뽑힘의 단절(사 25:1-9; 마 22:1-14)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일들
조헌정 | 승인 2017.10.17 01:10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을 부르심과 뽑힘의 단절이라고 붙여 보았습니다. 마태복음 본문의 끝 절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공동번역)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개역)”는 구절을 짧게 줄여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 모두가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것이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 “교회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다.”라고 확대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구원의 확신?

사실 이 선택의 논리는 소위 말하는 구원파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 다닌다고 모두가 구원받는거 아닙니다. 먼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 있으세요? 그러면 언제 구원받았는지 말해 보세요. 사람이 태어나면 생시가 있듯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중생의 경험도 생시가 있어요?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그 시간과 장소를 얘기해 보세요. 여기서 머뭇머뭇거리면 낚시 밥에 걸려드는 겁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름을 말하면 여러분도 알만한 친구 목사가 있는데, 저도 잘 알고 있는 그 친구의 남동생이 뒤늦게 신학을 공부해서 어느 교회에 담임목사 지원서를 내는데, 서류에 구원받은 날짜를 적으라는 항목이 나온 겁니다. 아버님이 목사님이셨으니 태어나면서부터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구원받은 날짜를 적으라는 항목에 대해서 어떻게 할지를 모른 겁니다.

그래서 목회를 오래 한 형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본 겁니다. ‘형 이거 어떻게 해?’ ‘5월 24일이라고 써.’ ‘형, 5월 24일이라고? 그날이 무슨 날인데?’ ‘야, 내 생일이잖아!’ 그런데 진짜 그렇게 써넣었고, 그래서 그랬는지 그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을 해서 몇 년간 목회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보통 구원파에서 말하는 구원받은 날짜란 방언을 시작한 날, 혹은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병 고침을 받은 날, 혹은 환상 중에 무슨 계시를 받은 날 등등을 의미합니다. 제가 이런 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학생 시절부터 목사되겠다고 부흥회는 물론 새벽기도회에 열심이었던 저에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오랫동안 목사로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만나고 보니 이런게 그렇게 중요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오히려 구원의 확신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주장이 강하여 교회 공동체의 일치와 화합을 깨는 경향이 많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구원파를 만나 구원받은 날짜를 대라고 요구받으면 자기 생일을 되시든가 아니면 목사님의 생일을 되시든가 하시기 바랍니다.

마태의 모순투성이

오늘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혼인 잔치 비유 말씀은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 숙청을 감행하시고 나서 성전 안에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보는 가운데 말한 세 개의 비유 중 마지막 비유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십자가 처형을 5일 앞두고 하신 유언과 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 말씀을 이해함에 있어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빼놓고 읽으면 이 비유 말씀은 도대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덩어리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마치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잔치와 같다. 오늘 이사야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잔치 자리로 말씀하고 있고, 예수께서도 처음 표적으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시어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꺼져가는 흥을 되살리신 것처럼 혼인잔치를 하느님 나라에 비유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모순은 이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거절하는데에 있습니다. 그것도 보통의 혼인 잔치자리가 아닌 임금의 아들 말하자면 다음번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될 사람의 혼인잔치를 거부하기에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청와대에서 있는 대통령의 아들 결혼식 초청을 거부했다. 물론 저는 이번 대북정책에 실망한 나머지 청와대의 한가위 선물을 거절하긴 했습니다만, 이들이 거절한 이유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농사일과 개인 일 때문에 평생에 한번 올까말까한 초대를 거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이들은 이 초대장을 들고 온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입니다. 비유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너무나 비합리적입니다. 억지와 비약이 너무 심합니다. 

이와 거의 흡사한 비유 이야기가 누가복음 14장에 나오는데, 이를 비교해보면 왜 이런 비합리적인 얘기가 생기는지에 대한 해답이 나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임금이 초청한 자리가 아닌 그냥 어떤 사람이고 그것도 혼인잔치가 아닙니다. 이야기의 전개가 훨씬 더 사실적이고 합리적입니다. 거기에는 상식에서 벗어나는 모순이 없습니다.

우선 여러분이 이미 들어보셨겠지만, 마태ㆍ마가ㆍ누가의 세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고 말합니다. 관점이 같다는 말입니다. 마태와 누가는 복음서를 쓸 때, 마가복음과 ‘예수 어록’(Quelle)이라고 불리는 Q복음서를 함께 놓고 각기 다른 복음서를 썼습니다. 그런데 Q복음서는 전해지고 있지 않으니까 어느 쪽이 Q복음서를 더 잘 따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여러 경우를 비교해 볼 때, 대체로 누가가 Q복음서를 마태보다 잘 따르고 있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결론입니다.

Q, 마태 그리고 누가

예를 들면. 마태는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니라.’라고 말하는데 반해 누가는 ‘마음’을 빼고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니라.’ 말하고 이어 부자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복과 화를 동시에 선포합니다. 마태공동체에 부자들이 많았던 이유로 마태가 본래의 Q의 말에 살을 붙인 것입니다.

또 주기도에 있어서도 우리는 마태가 전하는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있는데, 실은 누가의 주기도가 더 예수의 본래 기도문에 가깝다고 보는데, 그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란 구절을 누가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주듯이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옵시고’라고 하고,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라는 마지막 구절이 없습니다. 이는 후대에 첨가된 교회의 고백입니다. 일반적으로 짧은 쪽이 원본에 가깝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가가 마태보다 본래의 예수의 뜻을 더 잘 전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누가 자신은 예수에 관해 여러 글들이 있지만, 자기 글이 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왜냐하면 Q복음서의 저자 또한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Q 또한 마가나 마태나 누가의 경우와 같이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예수의 말씀을 재해석하여 편집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비유가 그런 것같이 누가복음 또한 마태복음에서와 같이 백성들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는 앞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시기와 자리가 전연 다릅니다. 누가는 어느 안식일이라는 말만 나오고 장소도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그냥 한 바리새파 사람의 집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시기적으로 성전 숙청 후 이 일로 체포와 재판을 통해 마침내 십자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주간에 행한 말씀입니다. 같은 내용이지만, 그 서 있는 자리가 완연히 다릅니다. 누가가 평시상황이라면 마태는 전시상황입니다. 같은 ‘불바다’라는 말도 언제 어떤 상황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그 긴박성과 중압감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누가와 마태는 모두 잔치자리의 초대를 얘기하지만, 강조점이 사뭇 다릅니다. 누가는 한 바리새인의 잔치 자리에 초대를 받아 두 개의 잔치 비유를 연달아 말하는데, 그 결론은 이렇습니다. 잔치 자리에 초대를 받았거든 처음부터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 후에 너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오면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수모를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자리에 앉았다면 혹 주인이 와서 너를 높은 자리로 앉힐 수 있지 않겠느냐?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높아지리라. 그리고 잔치를 베풀려거든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기보다는 갚을 길이 없는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과 눈 먼 사람들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도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과 눈 먼 사람들이 잔치자리의 기쁨을 누리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마태의 속셈

그런데 마태는 “예수께서 단순히 낮은 나리에 앉으라는 겸손을 말하고 부자들로 하여금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와 자비를 베풀도록 하기 위해 예수께서 비유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비록 Q가 그렇게 얘기했다 할지라도 예수의 진짜 속셈은 훨씬 더 근본적인 사회 변혁에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판단을 하고 이 얘기를 훨씬 더 극적인 상황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 바로 앞에 이 비유 말씀을 갖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왕의 아들 혼인잔치 자리로 만든 다음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이 그로 인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를 무시하고 경멸했던 그런 몰상식한 친구들은 그냥 숨을 쉬도록 놔두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마태는 Q와 달리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성의 함락을 보고 그게 바로 그 뜻이라고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마태는 전체로는 Q복음서를 따라가지만 그 의도가 전연 다르다보니 군데군데 억지와 비약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밭일과 사업일은 임금의 초청을 거부하기에는 명목이 너무 약합니다. 그리고 누가가 Q를 따라 기록한 약간의 거절의 명분이 될 수도 있었던 제3의 핑계를 아예 삭제하고 맙니다. 그건 장가들어 못 간다는 구절입니다. 아무리 왕의 초청이라 하더라도 새장가를 들었기에 못 간다는 것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도 있지만, 전쟁이 일어나 군인을 징집하더라도 막 결혼을 한 사람은 면제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각박한 세상이 되다 보니 결혼식에 참석을 하게 되면 봉투를 내밀고 그래서 주는 식권을 받아들고 가야 잔치자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렸을 때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혼인잔치는 말할 것도 없지만, 도시라 하더라도 그냥 말끔하게 신사복하나 걸치고 가면 봉투없이도 누구나 결혼식장에 들어갔고, 그리고 나올 때에 주는 수건이나 조그만 떡박스를 다 받았습니다. 토요일 오후 그렇게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며 선물을 챙기는 전문꾼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이지만, 밀려오는 청첩장을 받아들면 고민하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만사 제치고 가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정쩡한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두 개 혹은 세 개의 결혼식이 겹치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봉투만 대신하기도 합니다. 하여간 혼인잔치 참석은 장례식의 참여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바쁜 일상 속에서도 가능한 한 챙겨야 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공동체 정신이 충만했던 그 옛날에 그것도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 자리 초청을 5절 말씀과 같이 초청장을 들고 온 종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더 나아가 ‘그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는’ 경우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 입장에서는 하느님의 아들 메시야 예수를 무시하고 그를 핍박하고 결국 십자가 죽음으로 몰아간 저들을 그냥 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비합리적인 결론을 끄집어내고 그러자 당연히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임금이 군대를 보내 저들을 진멸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도 초청을 거절한 그들만 죽인다는 얘기로 끝나면 좋은데, 그들이 살고 있었던 동네까지 불사른다는 것은 너무나 무자비하고 비상식적인 얘기입니다. 우리로서는 아무 관계도 없는 어린이들은 물론 동네 전체를 불사른다는 말은 결코 말이 안 되는 결론이지만, 예루살렘 성의 파괴를 직접 목격한 마태로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비유 얘기였던 것입니다.

선한 자? 악한 자?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또 하나의 잘 풀리지 않는 구절은 이후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누구든지 데려오라’고 하는 임금의 명령입니다. 도대체 지금 자신의 초청을 거부한 악한 자들을 멸한 임금이 또 다시 악한 자들을 초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말하는 악한 사람은 누구이고 선한 사람은 누구인가?

사실 마태는 5장에서도 하느님은 햇빛과 비를 악한 자나 선한 자 모두에게 내리신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하면 하느님에게는 악과 선의 기준이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선과 악의 판단의 문제. 참으로 어렵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말이 있듯이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은 모호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지금 한신대도 이사회와 총회를 통과한 총장 선출을 두고 신학생 34명이 집단 자퇴서를 낼 정도로 심각한 상황입니다. 상호비방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사실 이는 한신대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신학대들이 비슷비슷한 분규를 겪고 있습니다.

이 사람 얘기 들으면 이쪽이 옳고 저 사람 얘기 들으면 저쪽이 옳습니다. 법리적 해석 또한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선과 악이 왔다갔다합니다. 1심에서 무죄가 2심에서 유죄로, 1심에서 유죄가 2심에서 무죄가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3심 대법원까지 가서 최종 결정이 되었더라도 시간이 지나 정권이 바뀌고 대법관의 구성원이 바뀌면 판결이 뒤집혀지는 경우도 생겨납니다.

법이 이러할진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선과 악을 구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일까? 성서의 첫 장 창조 이야기에서는 우리 인간은 모두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의 후예들로서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왜 야훼 하느님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아이들 앞에 꿀단지를 두고 내 나갔다올 동안 잘 지키고 있으라는 것처럼 시험들만한 것이라면 애당초 곁에 두지 말든가? 뭐 인간의 자율적 책임성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어떤 이는 말하기도 하는데, 그런 시험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나 오지 저한테는 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불만입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으면 안 되는지? 이게 의문입니다. 교육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쉽게 말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그 기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요? 십계명은 뭡니까?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본 계명입니다. 제가 신이라면 오히려 선악과를 많이 많이 따먹어서 선악을 제대로 구분할 줄 아는 인간이 되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사실 이 선악과나무 구절은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와 같이 그 역사적 맥락에서 출발을 해야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의 에덴 이야기는 문명의 발상지 유브라데강을 언급하는데 이는 바빌론제국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신학자들이 말하는 2장의 J문서는 다윗 왕 시대에 사가들에 의해 편집이 되었습니다. 곧 그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말씀인 것입니다.

전제군주시대에서 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루이 14세가 “짐의 말이 곧 법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선과 악의 기준은 왕 그 자신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은 아담과 하와로 상징되는 모든 인류에게 공통으로 준 계명이 아니라 선과 악의 주체가 되는 군주에게 준 계명이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네가 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이긴 하지만, 신이 아니다.”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애굽이나 바벨론 왕의 오만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다윗왕 또한 충직한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합니다. 이는 전제군주시대에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새 하늘 새 땅을 꿈꾸며 노예생활에서 해방을 받아 새롭게 출발한 하느님의 백성 히브리 후예들에게 있어서는 어떤 왕이라도 하느님의 법 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선악과 금지 계명은 다윗을 향한 계명이었습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은 대통령을 너무 많이 보아왔습니다. 영구독재를 꾀하며 정적들을 암살하고 이 땅의 진실을 왜곡하고 백성을 짓밟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자신이 곧 선악의 기준인양 블랙리스트를 양산해냈던 박근혜 그리고 정보부와 군사이버부대를 통해 감시와 댓글공작을 진행했던 이명박과 그 일당들, 이들은 모두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은 군주의 본보기들입니다.

사실 이 선악과를 따먹는 부패 권력자들은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형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목사가 단상에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죄를 들먹이면서 단상 뒤에서는 자신들의 권력을 사유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모양의 선악과를 따먹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이고 그래서 이를 경험한 이백만이 넘는 가나안 성도들이 오늘도 갈 교회를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습니다.

마태공동체의 과제와 우리의 과제

선과 악은 권력자들의 문제이지 사실 눌린 자, 약한 자들에게 있어서 그 구분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마태가 악한 자 그리고 선한 자를 언급한 의도는 결말에서 드러납니다. 임금이 베푼 혼인잔치 자리에 모두가 예복을 입었는데,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있었습니다. 왕이 그 이유를 물었는데, 답이 없습니다.

자격 없는 사람이 혼인잔치 자리에 나왔다면 그 은혜에 감사하여 궁궐에서 제공하는 예복을 기쁘게 입었어야 했는데, 그는 이를 거부한 것입니다. 마태가 보는 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손발이 묶인 채 어두운 곳에 던져집니다. 예복하나 입지 않았다 해서 이렇게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궁궐에 들어와서 궁궐의 법도를 따르지 않는 불복종은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왜 한사람뿐이었을까? 이는 아마도 당시 마태공동체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어느 한 개인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율법 체제를 거부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예수 공동체에 왔다 할지라도 그 공동체가 추구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이는 용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공동체가 추구하는 일이란 바로 예수께서 갈릴리의 민중들과 함께 추구하셨던 정의, 평화, 생명, 그리고 사랑과 평등의 하느님 나라 건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부르심과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값없이 부르시는 은혜 체험도 중요하지만, 이 값없이 베푼 은혜에 대한 값비싼 응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의 은혜 감격에만 머문다면 우리는 초청을 거부했던 저들과 같이 자만과 오만 속에서 멸망을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첫째가 꼴찌되는 일은 잠시 순간에 일어납니다. 길거리의 버림받은 사람들이 결국은 임금의 혼인잔치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씀은 앞서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다는 말씀과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지금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를 마감하는 의미에서 이 비유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그냥 듣고 기뻐하는 소식이 아니라 역사 변혁의 길로 나아가는 초청이라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기쁜 소식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내기에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사회의 기득권자라면 어떻게 해서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약자들의 곁으로 다가가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고, 만약 약자라면 부르심의 기쁨에만 머물지 말고 하느님 나라 건설에 함께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2주 후면 루터의 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데, 그 목표가 교회 개혁이든 사회 변혁이든 그게 신학적으로 95개조가 되든 950개조가 되든 그 목표는 언제든지 인간 해방 곧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 회복입니다. 약자들이 사회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한에 가득 찬 민중들이 역사의 주체로 나서도록 하는 그게 바로 루터가 추구했던 신앙 개혁이고 그게 바로 예수께서 본을 보이셨던 하느님 나라 변혁 운동인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흑백 인종차별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교회도 백인교회와 흑인교회로 철저하게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성목요일을 맞아 흑인교회인 성시온교회(Saint Zion Church)에서 세족식을 진행하기로 하면서 돌아오는 목요일에는 누구든 자신이 정말 고맙게 생각하는 그 사람의 발을 씻어주자고 얘기했습니다.

그날 저녁 그 흑인교회에 한 백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당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판사로 대법원장에 내정된 올리버(Oliver) 판사였습니다. 그는 자기 집 흑인 여종 ‘마르다 포트윈’에게서 이 얘기를 듣고 그녀의 발을 씻기겠다고 온 것입니다. 그리곤 그는 그 흑인 여종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정성껏 씻길 뿐더러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렇잖아도 그의 등장으로 술렁이던 교회는 그 순간 숨이 멎고 정적이 일었습니다.

그러자 올리버 판사가 일어서서 말합니다. “마르다는 내 집에서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면서 내 자녀들을 돌보아왔습니다. 내 자녀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정말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 사건으로 내정됐던 대법원장 자리가 취소됐으며 판사직도 박탈을 당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성시온교회 흑인 목사님이 그를 위로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그는 말합니다. “판사직도 사회의 다른 지위도 무덤에 갈 때는 먼지가 아닙니까? 그런 먼지보다 하느님이 주신 사랑과 감사가 더 소중합니다.”

매주일 성찬을 행하는 교회도 있지만, 매주일 세족식을 행하는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남의 더러운 발을 씻는 행위,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택함을 받은 사람이 적은 오늘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신앙의 가치가 아닐까요?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조헌정  choshalo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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