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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향기(살전1:1-10, 마22:15-22)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이 그저 말만으로
조헌정 | 승인 2017.10.24 18:37

예수의 직업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이 문장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올가미에 집어넣기 위해 던진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자의 입을 닫아버린 기가 막힌 답입니다. 만약 이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 ‘옳다!’고 답변하면 이는 식민지 정복자 로마를 인정하고 황제숭배를 인정하는 얘기가 되기에 백성들로부터 거짓 예언자로 외면을 받게 될 것이고, 만약 반대로 ‘옳지 않다!’고 답변하면 이는 로마 정부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에 정치적인 문제가 되어 저들이 던진 올가미에 얽히게 됩니다.

사실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은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하는 문제를 갖고 논쟁을 벌여오고 있었습니다. 같은 유대교 안에서도 로마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던 에세네파를 비롯한 일부 그룹에서는 세금 납부를 거부했었고, 사두개파 사람들과 같은 현실파들은 로마의 지배를 인정하고 세금을 내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과 삶에 있어 이 양 그룹 사이에 존재했던 바리새파가 세금을 냈는지, 안냈는지는 단정하여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만, 당시에 율법 해석에 있어 개방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던 힐렐파와 보수적 입장을 띠고 있었던 샴마이파가 대립하고 있었기에 추측컨대, 힐렐파는 찬성쪽으로 샴마이파는 반대쪽에 있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사실 자신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예수에게 던졌던 것인데, 그러면 예수 자신은 찬성 쪽이었을까? 아니면 반대쪽이었을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는 답변은 세금 납부 옹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 얘기하겠지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라는 말은 그 반대로도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우선 세금은 정규 직업을 가졌을 때, 발생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예수의 직업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흔히 아버지 요셉을 따라 목수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목수로 번역된 희랍어 ‘테크논’은 꼭 목수만을 뜻하는 단어는 아닙니다. 오히려 막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16세기 틴데일이라는 사람이 목수(carpenter)라고 번역을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아버지 요셉 밑에서 목수 일을 하는 성화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는 우선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팔레스타인 땅은 나무가 거의 없는 광야지역입니다. 당시 집이나 건물은 모두 돌로 지어졌습니다. 성전용 나무는 레바논에서 수입을 했고 만약 나무가 자랐다면 대부분 땔감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목수보다는 오히려 석공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한 번역입니다.

2세기 교부였던 유스티누스는 “예수는 농기구를 만드는 일을 했다”고 말하는데, 이는 예수가 주로 했던 일이 당시 나사렛 사람이 다 그랬던 것처럼 예수를 농사꾼으로 본 것입니다. 3주 전 우리는 포도원주인과 일꾼의 비유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새벽에 일한 사람이나 정오에 일한 사람이나 저녁 늦게 일한 사람이나 다 똑같은 하루 일당을 받는다는 얘기. 어쩌면 이는 예수님께서 직접 겪으셨던 일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건강하였으니 아마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하고 그래서 한 데나리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오에 온 사람들, 그리고 오후에 온 사람들, 그들은 저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던 것인데, 아마도 나이가 많거나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일한 시간에 따라서 반 데나리온 혹은 4분지 1 데나리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것 같고 우리 여섯 식구가 어떻게 먹고 살꼬?” 어떤 사람들은 주인에게 요청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주인님, 이 돈으로는 우리 식구가 도저히 하루끼니를 이어갈 수 없으니 더 줄 수 없겠습니까?’

비유에서는 모두에게 다 똑같은 한 데나리온을 준 것으로 나옵니다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아무리 인자한 주인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시간을 일한 일꾼들에게 똑같은 임금을 지불하는 것은 노동 규칙을 깨는 일이라 다른 포도원 주인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고, 둘째는 만약 이렇게 한다면 다음 날 누가 일찍부터 일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임하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수익을 나눠 갖는 사랑과 평등의 공동체를 상상하신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이런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가 일꾼으로 일을 하였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고 봅니다. 성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매우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는 아주 구체적으로 실감나게 얘기를 했을 것입니다.

이외 씨 뿌리는 비유 또한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을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제자들 다수가 어부 출신이었다는 사실 또한 예수가 어떤 형태로든 저들과 삶에 직접 관계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예수는 일정한 직업이 있었다기보다는 필요에 따라 일을 하는 막노동꾼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본래 ‘테크논’의 원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세금을 내는 어떤 일정한 직업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당시 율법에 의하면 성인 남성들은 매년 성전세를 내도록 되어 있었는데, 복음서에 보면 예수는 베드로를 시켜 물고기 입에 들어가 있던 한 세겔의 동전을 찾아 드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주머니에서 낸 것이 아니라, 주어서 냈다는 얘기는 그 의도하는 바가 사뭇 다른데 이는 성전세를 내긴 내지만 마지못해 트집을 잡히기 싫어서 내는 듯 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남한 종교인들의 납세 문제

최근 몇 년동안 종교인들의 납세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라 여러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선 한국교회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찬성 입장을 보여 왔고, 저 또한 목사가 된 이후 30년 이상을 미국이나 한국에서 세금을 계속 내어 왔기에 저 개인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전연 없는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대다수 한국의 종교인들은 그간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기에 이는 생소한 일이고, 또 달리 생각하면 국가가 종교를 간섭하는 일로 이해되어져 왔던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전연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 한국 내에서만 문제가 된 이유는 종교인들의 자기 정체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종사자들을 다른 말로 聖職者라고 부릅니다. 성스러운 직분을 맡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사실 이는 인간의 자율적 사고가 깨어나기 이전의 고대 개념입니다. 이는 이미 500년 전 루터와 깔뱅의 프로테스탄트라는 새로운 신앙 운동에 의해 깨어졌던 사고입니다. 목사나 신부만 거룩한 직업이 아니라 모든 직업이 하느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거룩한 직업이라는 것이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신앙의 성직 개념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가톨릭의 교황제나 보수 교회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개념입니다. 간혹 어떤 목사님들은 자신들을 구약시대의 성전 일을 전담했던 레위 지파 사람들에 비유하기도 합니다만, 당시의 레위지파 사람들은 그랬기에 다른 11지파가 받았던 땅의 분배에서 제외되었고, 오직 저들이 내는 헌금(성전세)에 의해 삶을 유지했었습니다. 만약 자신을 레위 지파로 자처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 사람은 차나 아파트를 소유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특히 개신교 목사님들이 자신들은 성직자로서 일반 백성이 내는 정부 세금납부 의무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모두가 같다고 하는 개신교의 근본 신앙을 부정하는 일일뿐더러 사회 제도에도 전연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목사들의 삶이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차를 굴리면 도로를 사용하고 자녀들은 공교육을 받습니다. 도로나 학교는 모두 일반 백성들이 내는 세금으로 운영이 됩니다. 의료 혜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목사가 독신으로 살면서 아예 홀로 산속에 들어가 수행만 한다면 납세를 거부할 최소한의 명분이라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바치라’는 예수님의 답변 속에는 또 다른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신앙에 의하면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야훼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법적으로 말하면 가이사의 것과 하느님의 것은 구분이 될 수 있었지만, 신앙적으로 본다면 가이사의 것은 따로 있을 수가 없기에 이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가 아닌 실은 로마라는 국가 권력에 대한 부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해석입니다.

감사의 유익

납세와 관련한 마태복음의 얘기는 여기서 그치고 오늘 데살로니가전서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바울의 첫 번째 편지이자 신약성서에서는 가장 먼저 쓰인 글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당시 큰 상업도시로서 수많은 지역의 상품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종교들의 집합소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자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바울을 거짓 고발하는 바람에 급히 이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와 실라를 보내 이 교회를 방문하도록 하고, 그들의 보고를 받고나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이들이 갖고 있었던 가장 큰 저들의 고민은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자신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지만, 자기들 가운데서 이미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우 여러분,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 여러분이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 그럴뿐더러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그들이 먼저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니 죽은 사람들의 문제는 고민하지 말고 여러분 스스로의 삶에 대해 염려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처럼 목적 없이 살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선을 행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서 우리가 익히 아는 말씀을 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사실 이 세 구절의 말씀은 매우 간략하지만, 신앙의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로 질문하고 머리로 답변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실천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쁨과 기도와 감사. 저는 이 셋 중에서 감사의 생활이 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감사 없이는 기쁨이 나올 수가 없고, 감사 없는 기도는 이기와 욕심으로 가득 찬 잘못된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공동기도문도 너무 진솔하고 다시금 듣고 싶은 기도인지라 가끔 제가 페북에 올리기도 합니다만, 지난 주 향린교회 한 집사님이 드린 감사기도를 나누고 싶습니다. 누구나 갖는 고민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저귀는 새소리에 졸린 눈을 비비며 창밖을 바라보니
찬란한 햇살이 비쳐오고 단풍이 붉게 달아오르게 하시며
푸른 가을 하늘이 펼쳐지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몸도 피곤하고, 할 일도 많은데,,,, 오늘은 교회 가지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에는 교회에 오게 하시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주님께 예배를 드리게 하심에 또 감사를 드립니다.

예배가 끝나면 일주일동안 그리워했던 교우들과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면서
서로에게 위로를 받고, 또 위안이 되게도 하시며
새로운 한 주를 살아낼 힘을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이해하기도 힘들고,
너무 말을 쎄게 해서 내 마음의 상처가 되기도 하여
굳이 말을 섞기도 싫은 교우들도 있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래도 참 열심히 봉사하는 교우인데.... 좋은 교우지!”라는 생각을 하게 하시고
“다음주에 만나면 살갑게 얘기를 건네야지”하는 마음을 갖게 하심에 한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전교인 수련회를 다음 주에 간다는데... 이번에는 빠져야지” 생각을 했다가도
“그래도 새로운 목사님이 오시고 나서 처음 있는 수련회인데 친한 집사님에게 전화를 걸어서
같이 가자고 해야지“라고 결심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바쁜 아침에 은행에 갈 시간도 없고, 헌금내기가 조금은 아깝기도 하고
쓸 돈은 갈수록 많아지고 수입은 한정되어 있는데...” 생각하며 헌금을 드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다음 주에는 꼭 헌금을 해야지. 그래야 향린도 유지되고 이 헌금이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도록 사용되겠지.”라는 생각이 들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경제적으로 그리 부유하지도 않게 하시고, 지식적으로도 풍족히 채워주지 않으시고, 큰 명예나 권력도 주지 않으시고, 건강도 염려하게 하셔서... 우리가 잘난 것도 없고 으시댈 것도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알게 하시어 겸손하게 하심에 더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내세울 것도 없고, 보잘 것도 없고, 믿음도 많이 부족한 사람이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을 의지하여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멘.

뇌 학자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뇌 좌측에 있는 긍정의 전두피질이 활성화되면서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주고 행복감을 가져다준다고 말합니다. 감사의 마음은 컴퓨터의 ‘리셋트(재설정)’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아 고민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마음을 갖게 한다고도 말합니다. 

 『감사의 과학』이란 책을 집필한 로버트 에몬스교수는 12살에서 80살 사이의 사람들을 상대로, 한쪽 사람들에게는 감사 일기를 매일 또는 매주 쓰도록 하고, 또 다른 한쪽 사람들에게는 하루에 일어났던 사건을 기록하도록 했습니다. 한 달 후 차이가 발생했는데, 감사 일기를 쓴 사람 중 4분의 3은 행복지수가 높게 나타났고, 수면이나 일, 운동 등에서 보다 좋은 성과를 냈습니다. 그저 마음으로 감사했을 뿐인데 뇌의 화학구조와 호르몬이 변하고 신경전달물질들이 바뀐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나만의 선물

우리는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지에 대해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은 운명 혹은 숙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 있어 내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삶은 전연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같은 유전자, 같은 날,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쌍둥이들 또한 전연 다른 삶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운명이 아닌 각자의 삶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벗어날 자유와 창조성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을 띄고 태어났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운명은 우리의 외부 곧 경험의 세계를 만들도록 하지만, 동시에 신의 형상을 받은 우리는 이러한 운명을 딛고 일어설 내면의 영적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지구를 거쳐 간 인구가 수백억쯤 될 테인데 모든 인간은 다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창조성을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만의 선물을 갖고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물론 때때로 이 선물은 고통과 아픔일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 이유를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고, 중요한 것은 어찌되었든... 그것을 고통이라 부르든 아픔이라 부르든 혹은 행복이라 부르든... 중요한 것은 나에게는 그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만의 선물이 있다는 것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그런 선물이 있는지도 모른 채, 그래서 포장 그대로 놔두고 세상을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 박스는 오직 그 사람만의 지문에 의해 열리기에 만약 그 사람이 그 선물 박스를 열지 않는다면 그건 그대로 역사 속으로 흘러가고 마는 것입니다. 신은 나만이 열수 있는 선물을 주셨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전연 다른 삶으로 펼쳐지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삶에 대해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된다면 우리들의 삶은 자연히 ‘신’이 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이 내안에 들어왔고 그래서 신과 내가 하나가 되었기에 신이 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이 나면 자신 앞에 놓여 있던 걸림돌은 디딤돌로 변합니다.

미래에 대한 열려진 확신, 경험의 굴레라는 자아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자신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자유혼의 철저한 자각 속에서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게 되고 이 감사의 샘을 통해 어느 누구도 용서할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천년 전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바울의 칭찬과 감사의 서문이 오늘 부산의 믿음교회 공동체를 향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제가 다른 교회에 가서 여러분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모두 놀랍니다. 그런 교회도 있나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여러분을 하나로 묶어 오늘까지 주님의 이름을 드높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개인으로 보면 여러분 모두가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고 있기 때문이고, 공동체로 보면 주님의 영 곧 성령이 여러분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교회와 같이 예수의 향기를 품어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데살로니카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택해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이 그저 말만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굳은 확신으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많은 환난 중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을 가지고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뿐만 아니라 주님까지 본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에 있는 모든 신도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고 마케도니아는 부산과 같고 아카이아는 남한과 같습니다. 주님의 평화의 영이 내내토록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조헌정  choshalo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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