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일할 때 가끔 사람들이 내가 ‘호구’ 취급을 당한다는 말을 했다. 나의 무분별한 환대와 나눔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는 분들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인도 사람들에 대하여 주의와 분별이 필요하다고 충고하였다. 심지어는 인도인들조차도 나를 ‘호구’로 여기는 사람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였다.

그런 주변 사람들의 충고에 대하여 ‘세상에 어디에 나를 이용해서 사사로운 이익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어차피 주려고 온 사람이니 비록 한 줌이라 할지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일일진대 자진해서 도움을 요청하니 내 일감을 덜어주어서 고마운데 ~’ 하면서 개의치 않았다. 생명까지 달라고 하면 주어야 하는 사람이 손에 쥔 한 줌의 것을 주는데 이런 조건, 저런 이유를 달고 따지면 언제 나누며 섬길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나는 ‘호구’로 사는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부탁받은 순서대로 나누고 섬긴다는 것이다. 순서대로 배정하고 순서대로 방문하며 순서대로 연결시켜 주었다. 물론 때로는 급한 일로 순서가 뒤바뀔 때도 있었지만 나는 순서대로 한다는 나의 원칙을 거의 고수하였다. 좀 힘 있고 서열이 높은 분들이 부탁을 해도 별 볼일 없는 초라한 이들이 부탁을 해도 순서를 거의 그대로 지켰다.

▲ 호구로 살기로 작정하신 이옥희 선교사님 ⓒ에큐메니안

사람들이 내게로 와서 뭔가 도움을 요청하면 나는 그들이 내게로 온 배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나에게 보내실 때는 분명히 계획이 있고 뜻이 있어서 보냈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서 필요한 것을 예비해두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도움을 요청하는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디에 준비해 놓으셨는지 모르니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

당장에 내가 가진 것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NO”하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막는 자가 될 수 있으니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것을 찾자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나는 20년 세월을 신념을 가지고 ‘호구’로 살아 왔고 지금도 ‘호구’로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대로 ‘호구’로 살 것 같다.

비자문제로 인도에 못 들어간 지 어느덧 3년이 다되어 가고 있다. 한국에 머물면서 인도형제자매들이 나를 직접 만나지 못하므로 더 이상 부탁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메일과 카톡과 문자메시지로 도움 요청이 쇄도하였다. 요구도 다양하였다.

학비, 교회 건축, 자녀 결혼, 자기 집 건축, 재판 비용, 병원 입원, 자녀 문제, 고아사역, 기타 프로젝을 알리면서 도움과 기도를 호소하였다. 내용을 파악하면서 가끔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내가 모르는 속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서 공적으로 사적으로 나누었다.

어느 날 친구가 인도인들이 나를 진짜 ‘호구’로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며 진위 파악에 신경을 쓰라는 충고를 주었다. 특별히 친한 친구요, 분별력과 통찰력이 있는 친구의 말이어서 그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 머리와 가슴에서 맴돌고 있을 때 인도에서 카톡으로 도움 요청이 왔다.

어느 분이 작년 12월 초에 고아들 100여 명에게 성탄 선물로 새 옷을 선물하기로 했다며 3,000달러를 요청해 온 것이었다. 그 내용을 읽는 순간 그 분이 나를 진짜 ‘호구’로 취급한다는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3,000불이 누구네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내가 돈을 팡팡 버는 기업인도 아니고, 쌓아 놓고 사는 부자도 아닌데 어쩜 이렇게 당당하게 돈을 달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한 달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안에 달라고 하다니.’ ‘그 돈을 마련하려면 적어도 한 달 이상은 계속 전화질하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이메일로 정중히 부탁하는 일을 몇 차례 반복하면서 혀가 닳고 목이 아프고 속이 타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내가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는 줄 아시나!’

뿔이 났지만 화가 난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에둘러서 카톡과 메일을 보냈다. ‘고아들을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만 저는 지금 빈손입니다. 때가 때인지라 그런 돈을 마련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니 저로서는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당신의 기도가 속히 응답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답신을 보냈다.  나의 시큰둥한 반응에 그 쪽에서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성탄을 보내고 싶다.’는 답신이 왔다.

나는 속으로 꿍얼거렸다. ‘정말로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성탄을 보내고 싶으시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팔아서 쓰세요. 멀리 있는 사람에게 무리한 부담주지 마시고요.’
  
며칠 후, 우리 고아원 ‘샨띠홈’에 아이들 성탄절 용돈을 챙겨 보낼 때 아이들의 활짝 웃는 모습이 보였다. 환호성을 지르면서 즐거워할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가난한 어머니가 모처럼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서 자식을 먹이는 행복감에 도취하였다. 그런데 그 행복감 끝에 우울한 얼굴들이 따라 나왔다. 3,000불을 마련하는 일이 고단하고 그가 괘씸해서 그를 위해서는 ‘호구’가 되지 않기로 작정했으나 그 분이 돌보는 고아들 생각으로 그 동안 마음이 불편하였던 것이다.

내가 아는 대로 고아들은 명절이나 경축일, 휴일, 방학이면 더욱 외롭고 서럽다. 온 세상이 명절 분위기로 떠들썩해도 맛있는 음식도 없고, 입고 싶은 옷도 없고, 함께 지낼 가족도 없고, 마땅히 놀러 갈 곳도 없는 고아들은 명절에 더욱 외롭고 슬프다. 자꾸 떠오르는 슬픈 얼굴을 보면서 내 책임이 아니라고 도리질 치며 눈을 감았지만 아이들의 큰 눈망울이 나를 따라 다녔다.

인도에서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생기 없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었는데 해쓱한 아이들의 얼굴이 나를 몰아 쳤다. 350만 원 정도의 돈이라는 것이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돈인데 그 돈이 비록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기쁨과 사랑받는 기쁨을 느끼게 한다면 무엇을 아까우랴! 하는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떠올랐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아의 아버지인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예비해놓은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인데 나는 인도 형제의 태도와 자세가 눈에 거슬려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NO' 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과 생각, 평화와 기쁨을 생각하지 않고 모금해야 하는 나 자신의 불편과 어려움만 생각하고 종이 주인처럼 행동했던 나의 교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는 일반 후원금으로 성탄 선물비를 송금하도록 사무실에 요청을 하였다.

아이들 마음을 생각하며 비록 한 순간일지라도 그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서 ‘호구’가 되기로 하였지만 하나님의 도움이 어디서 올 것인지는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 두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인근 시골에 있는 어느 교회의 목회자로부터 온 전화였다. 전화의 요지는 성도님들이 ‘선교 후원금’으로 자진해서 바친 헌금이 400만 원 정도가 되는데 그 헌금을 나에게 보내기로 조금 전에 결정하였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기가 자르르 흘렀다. 그 시간이 내가 고아들의 선물비로 송금을 결정하였던 시간이었던 것이다. 내 영혼이 고아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동의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세상이 무어라고 하든지,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든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자세가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호구’로 사는 은혜를 인생 끝 날까지 살기를 빌었다.

지난 주 기장 총회기간에 4일 동안 부족한 장학금을 마련하고자 책을 판매하였고 어제와 그제도 여신도회 연합회 모임에 가서 책을 팔았다. 책을 팔아서 얼마나 수익금을 낸다고? 하면서도 한 권이라도 더 팔아서 우리 아이들 장학금도 보내고 성탄절 용돈도 보내려는 마음에 아침부터 모임이 끝나는 시간까지 최선을 다하였다. 어제는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려서 마음이 무거웠고 연합회 총회가 열리는 본당 앞 로비가 비좁아서 책을 진열할 수가 없어 자포자기 심정이 되었다.

‘그래 억지로 되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히 가지고 예배에 참석하고 인사나 하고 가자.’고 자위를 하며 예배에 참석하였다. 참으로 고맙게 회장과 연합회 임원들의 배려로 회원들에게 인사를 하였고 나는 그것으로 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뜻밖에 시골에 사시는 성도님들이 자진해서 책을 사주었다.

해 마다 가을이 되면 우리 아이들의 장학금과 성탄 선물이 나의 당면 과제가 되다. 장학금은 모금의 명분이 되지만 성탄 선물은 따로 모금하기가 어려워서 경비를 절약해서 남은 돈으로 마련하였다. 2009년에 시작한 샨띠홈!

그 때 10살이었던 아이들 3명이 19살이 되었고 전문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 아이들이 인편을 통해서 노트북 컴퓨터와 스마트 폰을 선물해달라고 연락을 해왔다. 뿐만 아니라 사고 싶은 것도 많아졌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아졌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참으로 당혹스러웠고 그 말을 전해주는 분에게 은근슬쩍 짜증이 났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어려운 것은 지혜롭게 그 자리에서 딱 잘라 말해주어야지. 어쩌자고 나에게 일일이 다 전달하는 것일까!

나는 아이들의 의식주 해결과 학비를 대주는 외에는 다른 것을 해줄 여력이 없으므로 아이들의 희망사항에 ‘YES'라고 대답하지 못 하였다. 뿐만 아니라 현재 남자 아이들을 위해서 새집을 신축 중에 있고 그 새집에 영어교육과 직업훈련을 위해 컴퓨터를 여러 대 설치하도록 설계를 했기 때문에 개개인에게 컴퓨터를 사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스마트 폰 문제는 전화요금을 매월 계속해서 내야하므로 단순하지가 않다. 언젠가는 모든 아이들이 스마트 폰을 갖게 되겠지만 지금 나로서는 전화비를 감당해줄 수가 없어서 ‘NO'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노트북과 스마트 폰을 갖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알기에 그들의 욕구를 언제까지 무시할 수는 없으므로 하나씩 차례대로 풀어가야 할 것이다.

올해 성탄절 선물로 용돈을 보내려고 한다. 그 돈이 어디서 오든지 오지 않든지 보내기로 하였다. 샨띠홈 아이들의 용돈을 보내려니 ‘믿음의 집’ 아이들이 걸린다. 희망공동체 ‘공부방’ 아이들의 선물도 빠트리고 싶지 않다. 하여 백여 명의 아이들에게 줄 선물비가 어디서 올 것인가? 생각하며 가능하면 책 판매 수익금으로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런데 어제 책을 사신 어느 분이 뜻밖의 소식을 주었다.

“목사님, 우리가 올해 목사님께 보내드리려고 생각하면서 ‘선교 후원금’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기백만 원을 모았습니다. 목사님께 우리 헌금이 전달되어서 그 고아들을 위해서 쓰여 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목사님을 본 순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가맣게 그을린 작은 얼굴이 평화로웠고 나직한 음성이 따스하였다. 그분의 말끝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분들과 함께 일하고 계셨고 그 분들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다. 그 사실을 모르는 나는 온갖 궁리를 하면서 나 혼자만 수고하는 것으로 피곤에 지쳐 있었다. 그 분의 말이 하나님의 메시지가 되어 정곡을 찔렀다. ‘내 딸아, 나는 자녀들을 위해서 준비하는 아버지다. 나는 밥을 짓고 너는 밥을 나르는 사람이다. 너무 마음 상하지 말고 되어지는 대로 감사함으로 하여라.’

하나님은 지난 20년 동안 마음 약한 나로 하여금 ‘호구’로 살도록 하셨고 ‘호구’로 살면서 부족함이 없도록 때에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공급해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호구’로 사는 것이지 내가 선하고 자비로워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으며 '호구'로 불러 주시고 써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렇다. 나는 호구다! 기꺼이 호구가 되어 먹히고 짓밟히며 이용당하고 싶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호구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이 기쁘다. 자신을 챙기지 못하고 보살피지 못하고 때로는 속임 당하며 업신여김 받으며 의심받으며 차별당하며 남의 밥이 되고 물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호구’가 좋다.

이옥희  yiso57@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