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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은 성도 자각으로부터(레 19;1-2, 15-18; 마 5:1-12)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교회, 루터 대개혁의 정신
조헌정 | 승인 2017.10.31 23:10

용어의 폐단-종교개혁

오늘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 당시 신학대 교수였던 말틴 루터 신부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로마 교황청에서 베드로 성당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 판매를 하였는데, 이를 비판하는 95개조의 신학선언을 한 날입니다.

중세 가톨릭은 종교라기보다는 유럽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정치권력이었고, 잘못된 천동설을 믿도록 강요하고 영원의 세계까지도 지배하는 거대한 이념체계였습니다. 결국 루터의 비판과 저항은 인간을 노예화했던 ‘신 절대 세계’에서 ‘인간 상대 세계’로 바뀌어 가는 정신 변혁운동이었으며,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역사변혁 사건이었습니다. 루터의 개혁운동을 단순히 가톨릭으로부터 개신교가 새롭게 시작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근시안적인 역사이해입니다. 그의 성공 배후에는 당시 독일민족이 갖고 있었던 로마교황권력에 대한 제후들과 농민들의 강력한 저항이 있었던 것입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어떤 역사적 사건에 이름을 붙일 때에는 정확하게 붙여야 합니다. ‘518 광주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전연 다른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종교개혁이라는 명칭 또한 우리에게 잘못된 전제를 갖게 합니다. 첫째는 이것이 마치 기독교 내부의 개혁운동만으로 보인다는 것이고, 둘째는 종교는 큰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지금은 여러 이웃종교를 총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용어는 본의 아니게 이웃종교를 무시하게 됩니다. 어느 교회 모임에서 어떤 스님이 이를 지적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서양에서도 이를 그냥 ‘대개혁’(the Reformation)이라 부르지 여기에 종교(Religion)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이라는 단어는 명치유신시대 일본학자들이 서양의 큰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의역한 단어입니다.

셋째는 ‘개혁’이라고 부르는 것과 ‘종교개혁’이라고 부를 때의 주는 어감의 차이가 또 있습니다. 개혁이라고 말할 때는 자기도 포함이 되지만, ‘종교개혁’이라고 말하면, 교회정치 제도 개혁으로 이해될 소지가 많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개신교회들이 종교개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말틴 루터를 언급하며 중세 가톨릭교회의 면죄부판매를 비판할 것입니다. 여기에 개신교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교황무오설이나 성모마리아 숭배 같은 교리도 비판할 것입니다.

최근 일부 보수장로교회에서는 가톨릭교회를 아예 이단으로 정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면죄부판매 다시 말하면 지나친 십일조 강조나 성수주일 그리고 죄인강요 등등의 교인을 옥죄이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어 선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대개혁’혹은 ‘기독교개혁’으로 바꿔 부르고자 합니다.

중세교회가 타락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의 변질에 있었습니다. 본래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로마제국의 힘에 기초한 거짓 평화를 거부하고 갈릴리의 가난한 자, 빼앗긴 자, 곧 약자들이 역사의 중심이 되는 반제국으로서의 역사 변혁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기독교를 국교화한 이후 전 유럽이 기독교왕국(Christendom)이 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을 억누르는 어둠의 시대(the Dark Age)로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개신교가 루터의 주장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두 가지 오류가 발생하는데, 하나는 형제 교단이자 어머니 교단인 가톨릭을 부정하는 것이고 둘째는 구원 교리에 있어 하느님의 은총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신앙의 실천이 부정되는데, 이는 오늘의 남한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을 신앙의 동반자로 보는 미국과 유럽의 개신교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오늘을 ‘종교개혁주일’이라 부르지 않고,‘만민성도주일’(All Saints Day)로 바꿔 부르고 있습니다. 만민성도라는 용어는 루터의 주장 가운데 핵심이자 예수운동의 중심 사상인 ‘만인사제’ 교리를 개신교 개혁운동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삼자는 것입니다.

중개 신앙에서 만인사제(생활신도) 신앙으로

루터를 비롯한 쯔빙글리, 깔뱅, 그 이전의 위클리프, 후스와 같은 교회 개혁가들의 주장은 대체로 다섯 솔라(Five Solas)로 요약이 됩니다. Sola Scriptura (오직 성서) 진리냐 아니냐의 최종 권위는 교황이 아닌 오직 성서에만 있다.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Sola Fide (오직 믿음) Sola Gratia (오직 은혜)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이 믿음 또한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 오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에 기초하지 않는다. Soli Deo Gloria (오직 주께만 영광) 이 주장들은 여전히 유효한 주장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오직 믿음의 교리는 당시 가톨릭의 행위 강조의 구원 교리를 지적하는 일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성례전을 포함한 예배 의식만 놓고 본다면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의 가르침은 가톨릭이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개신교는 모든 잘못을 은혜로 덮어가는 잘못된 적용으로 말미암아 교권이 더욱 강화되고 이로 인한 부패상이 하늘에 달하고 있습니다.

최근 서울 강남의 모 대형교회의 아들 세습은 이를 방지하는 교단의 법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묘히 이를 피하여 결정되고 말았습니다.  아마 이를 찬성한 목사들은 ‘은혜’롭게(?) 처리하였다고 말할 것입니다.

루터와 쯔빙글리, 깔뱅이 추구했던 개혁의 핵심은 교황과 사제만이 하느님의 대리인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직접 대리인이 될 수 있다는 만인사제 신앙에 있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8절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숙청 이유도 예루살렘의 사제들을 통한 간접대리 신앙 체제를 비판한 것입니다. 이를 신학 용어로는 중개인(브로커)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새삼스러운 애기는 아니지만, 종교계에 대한 일반인의 신뢰도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여론조사에 의하면 남한사회기관에 대한 신뢰도 조사에 있어 의료계가 21.9%로 가장 높았고, 이어 시민단체가 21.5%, 금융기관 20.5%로 1,2,3위를 차지했고 종교계는 6위로 11.8%의 신뢰도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그 내용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종교가 다함께 하락한 것이 아니고 천주교는 39.8% 불교는 32.8%로 예전 수준을 유지하였는데, 개신교만 10.2%로 대폭 추락한 것입니다. 지금 개신교 내에 새로운 교회를 찾고 있는 가나안성도(?)가 2백만에 달하고 있습니다.

지금 개신교회는 ‘예수천당 불신지옥’만 외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천박하고 해괴한 믿음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본훼퍼목사님이 지적한대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얻은 값비싼 구원 은혜를 ‘십자가 없는 값싼 은혜’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루터가 성서를 독일어로 그것도 민중들이 사용하는 일상 언어로 번역함으로 성서를 신부들의 손에서 신도들에게 돌려준 일은 엄청난 업적입니다. 그러나 루터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잘한 것은 아닙니다. 개혁의 과정 속에서 영주들과 농민들이 서로 갈라졌을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민중들 편에 섰듯이 농민들 편에 서지 않고 영주들 편에 서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국가 권력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선으로 보았고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유대인과 여성들을 차별하는 일을 당연히 여겼습니다.

또한 은혜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행위가 없는 믿음은 마치 육체 없는 영혼과 같이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폄훼하였고, 어거스틴을 따라 정치와 종교의 영역을 구분하는 두 나라 설을 주장함으로 교회의 사회 참여를 외면함으로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라는 주님의 명령을 위배하는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만민성도/평신도목회신학

그렇다면 오늘 우리 개신교회가 루터의 대개혁을 기억하며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건 예수께서 강조하셨듯이 교회 안에서 칭찬받는 교인, 곧 교회의 빛과 소금이 아닌,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곧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교인이 되도록 하는 일입니다. 성장 일변도의 자본주의 방식에서 탈피하여 정의평화생명운동의 사회 참여 신앙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 비텐베르크의 마르크트 광장. 루터와 멜란히톤의 동상이 서 있다. ⓒ에큐메니안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신앙이 만민성도신앙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평신도목회 신학의 정립입니다. 루터가 성서를 신부들의 독점을 깨고 신도들에게 돌려주었듯이 이제는 목회를 목사들의 독점을 깨고 평신도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퐁이라는 미국 감리교 감독은 『기독교 변화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을 멀어져 가게 하는 각종 전통적 기독교의 교리와 사상들, 곧 고립된 개개인의 자아 중심적 무관심과 생각없이 고백하는 무뇌적(brainless) 사고와 행위의 질곡으로부터 ‘나’와 ‘우리’를 해방시켜야 할 것이다. 치열한 고뇌의 늪을 지나는 용기 있고 정직한 믿음만이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일 수 있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의 기독교인들은 종교기관을 건설하고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심지어 우리들이 하느님을 대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생명을 북돋우는 것이 아니라, 현상유지를 축복하고 성직자들의 권력을 증진시키고, 지배계급의 재산과 권력을 확장시킨 국가의 주장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용되어 왔다. 존재의 근거인 하느님은 모든 생명을 뒷받침하는 보편적인 현존이다.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기 발로 당당하게 설 것을 요청하고 계신다.”

지금은 신앙의 주제가 천당이냐 지옥이냐 하는 구원의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중세시대의 교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관심해야 할 과제는 인간됨을 억누르는 오늘의 경제구조, 새로운 물건으로 끊임없이 우리의 탐욕을 자극하는 시장자본주의 그리고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성공한다고 하는 성공지상주의에 대해 바른 답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잘못된 세상 물결에 대해 교회가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만 외치고 있다가는 자연 도태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The Luther Effect(루터의 영향)

올해 독일 종교청 산하의 역사박물관에서 루터 500주년을 맞아 세계 개신교회 역사를 조명하는 특별전시회와 ‘The Luther Effect’(루터의 영향)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처음 3분지 1은 초기 유럽 개신교회 역사를 서술하고 있고, 나머지 3분지 2는 오늘의 세계개신교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 모든 나라를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니, 시대별, 대륙별로 4개의 나라만을 선택했습니다.

16,17세기의 유럽을 대표하는 루터국가인 스웨덴, 18,19세기의 아메리카 대륙을 대표하여 다양한 교단들이 생성하고 발전해 온 미국, 그리고 피선교국으로 탄자니아와 남한교회를 선택했습니다. 탄자니아는 다른 아프리카 교회들에 비해 루터교가 매우 강하면서 동시에 서구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된 교회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한이 아시아를 대표해서 선택된 것은 누구나 인정하듯이 135년의 짧은 선교 역사에 비해 엄청난 교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 최대의 50개 교회 중 절반이 있을 만큼 성장한 것으로 세계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에 서술된 남한교회의 선교역사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양반들의 언어인 한자가 아닌 한글로 성서를 번역하고 학교와 병원설립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하여 왔다는 것과 예수에게 전통 도포를 입히고 갓을 씌운 모습으로 그려진 그림을 통해 한국문화 전통에 접근하려는 토착화의 노력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의 남한 교회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제목은 이러합니다. <분단된 땅, 분단된 교회(Divided Land, Divided Church>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었듯이 교회 또한 둘로 나뉘어져 있다고 말하면서, 남한의 6만개가 넘는 교회 중 딱 두 교회만을 언급하는데, 양을 대표하여 50만 등록교인인 세계에서 제일 큰 여의도 순복음교회 그리고 질을 대표하여 제가 담임하였던 향린교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향린교회는 숫자로 말하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천분지 일에 해당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분단된 땅, 분단된 교회

그런데 이 책에서 소개하는 결과는 전연 딴판입니다. 올 5월부터 11월말까지 베를린 역사박물관에서 지금 말한 유럽과 네 나라의 교회를 여러 그림과 상징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저는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다녀온 교인들의 얘기에 의하면 한국관에 들어서면 커다란 스크린이 있고 거기에 순복음교회 목사가 설교하는 동영상과 함께 독일어와 영어 자막이 나오는데, 쉽게 말해 예수 믿어 이 땅에서 부자되고 건강하고 장수할뿐더러, 죽어서는 천당간다는 꿩먹고 알먹는 축복론입니다. 사실 이런 주장은 예수의 입에서는 한마디도 나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어 더 들어가면 향린교회의 국악을 소개하는 큰 현수막이 입구에 걸려 있고, 이어 향린교회 외벽에 20년 넘게 걸려 있던 커다란 현수막 3개가 놓여 있습니다. 향린교회에 오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세 개의 현수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정의를 심어 평화의 열매를’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여기에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는 구호는 고 홍근수목사께서 국가보안법으로 1년반 옥살이를 하던 1991년 이후부터 오늘까지 26년간 걸려있었습니다. 작년 12월 박물관 전시담당자가 교회를 방문하였는데, 들어오면서 현수막을 보더니 그걸 빌려줄 수 없겠느냐고 해서 그걸 주고 저희는 새 것으로 갈아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분이 제 사무실에 들어왔는데, 벽에 홍근수목사님께서 국가보안법으로 투옥 당했을 때, 커다란 보라색 천에 ‘통일목사 석방하라’는 큰 글씨 밑에 교인들이 서명한 것을 액자에 넣어 걸어놓았는데, 이를 보더니 또 달라 하여 주었고 그리고 그 옆에는 제가 매년 815평화통일 주일 때마다 에스겔에게 임한 남북의 통일왕국에 대한 비전 말씀을 읽고 이에 따라 제가 행하던 큰 십자가가 있었는데 이 또한 달라고 해서 주었습니다. 가로 판대기에는 ‘대한민국’ 그리고 세로판대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쓰여 있는데, 지금 독일 역사박물관에 전시 중에 있습니다.

성도 자각은 작은 교회운동에서

사실 기장 안에서조차 향린교회는 일종의 ‘특수교회’로 보고 있지, 일반 교회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기장 교회들도 여의도순복음교회처럼 교회성장이 목표이지 이 사회를 보다 정의롭고 평화가 넘치는 사회로 바꾸어가는 현장 참여에는 소극적입니다. 그런데 천년 이상의 기독교역사를 갖고 있고, 개신교의 발상지이자 오늘날 세계 평화의 선두주자인 독일에서 오늘의 남한 교회를 이렇게 평가하였다는 사실에서 오늘의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교회성장이라는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과거 왕으로부터 백성 모두가 한명 빠짐없이 교회를 다 나갔던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태어나면 자동으로 세례를 받고 결혼식은 교회에서 죽으면 목사가 장례를 집례합니다. 정기적인 교회 출석은 약하지만, 여전히 기독교 국가들이고 자신들은 기독교인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럽 교회에 모인 숫자를 보고 죽었다고 말하지만, 그들에게는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숫자에 따라 크다 작다 말하는 건 그들에게는 무의미한 말입니다. 오히려 모든 백성들이 한 사람 빠짐없이 교회에 출석했던 그 최고의 교회성장축복시대 곧 기독교왕국시대(Christendom)를 오늘의 역사에서는 ‘암흑시대(the Dark Age)’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은 평신도들이 많이 깨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초 4회째를 맞는 <작은교회한마당>이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있었는데, 이는 교인인 채 백 명이 되지 않는 여러 작은 교회들, 마을교회, 농촌교회,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특수선교교회, 공동체교회들이 자신들이 하는 목회 사역을 알리는 축제마당이었습니다. 70여 교회가 참가를 했는데, 매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고무적인 일입니다.

숫자로 자신의 교회를 평가하지 않고, 그 내용으로 자신들을 세상에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서울의 20여개 교회는 매년 루터의 개혁을 생각하며 강단교류를 하는데, 목사들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바로 루터의 개혁사상을 이어가는 오늘의 개혁운동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만 간단히 살피고 마치겠습니다. 레위기의 말씀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거룩한 사람이란 세상 사람과 구별된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구별이 되느냐? 일요일 교회에 나가는 것이 구별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말씀처럼 “공정한 재판, 곧 정의를 행하는 일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아끼는 일입니다.” 여기서 이웃은 옆집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옛날 한 마을의 이웃은 모두 10촌 내외의 자기 집안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집안사람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웃은 다른 부족 요즘말로 하면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 이웃나라, 우리로 말하면 북한을 말합니다. 북한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를 예수께서는 더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곧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의 말씀 9가지 축복 말씀이 모두 중요한데,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무얼 고르시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모든 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아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바라기는 광주무등교회는 지금까지도 계속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헌정  choshalo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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