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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동안 하나였다, 분단은 고작 70년이다한반도 통일과 교회의 책임 ①
조헌정 | 승인 2017.11.02 02:09

통일문제에 천착하는 이유

난 초등학교 1학년 때 419를 경험하고 다음해 516을 맞이한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어 사회 현실에 눈을 뜨기까지 매일 아침 교실 정면에 붙어 있는 박정희의 사진을 향해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며 하루를 시작했고, 집에 와서는 저녁 뉴스에 처음 등장하는 그의 활동과 어록을 통해 그리고 잊을만하면 일 년에 몇 번씩 언론을 뜨겁게 달궜던 대형 간첩단 사건을 접하면서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형성되어 갔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목총을 들고 멸! 공! 을 외쳤다. 난 소위 말하는 박정희키드 세대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들었던 갈릴리 예수 이야기는 까마득한 옛 신화 이야기로 들렸고, 박정희의 이야기는 우리 민족을 구원한 살아 있는 메시야의 이야기였다.

▲ 남북한이 해외에서 개최되는 국제 경기에 단일팀으로 출전하게 되면 종종 볼 수 있는 한반도기 ⓒ에큐메니안

그러던 고등학교 1학년 쌀쌀한 기운이 일던 어느 가을 첫 수업을 기다리던 우리들에게 갑작스레 3학년 상급생들이 오더니 모두 강당으로 모이라고 해서 영문도 모른 채 우리는 우르르 몰려갔다. 학생회장이 나오더니 엊그제 야밤에 여당의원들만 몰래 모인 비밀 국회에서 통과한 삼선개헌의 부당성을 언급하며 모두 교문 밖으로 나가자고 하였다. 그러자 우리는 상급생을 쫓아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나섰다. 몇몇 선생님들이 막았지만, 인과부족. 우리는 신설동에서부터 동대문까지 삼선개헌반대를 외치며 뛰어갔다. 그리곤 진압경찰이 막아서자 우리는 다시 교내로 돌아왔다. 이 일로 고등학교로는 처음 한 달간의 휴업령을 맞이했다.

그때부터 사회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선배의 학습(?)을 통해 박정희가 여순민중항쟁시 공산주의자와 한패였지만, 동료들의 명단을 넘기고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로부터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 장교로 독립군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는 이야기와 함께 복사된 신문 기사를 보여주었다. 이때 나는 도끼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심한 충격을 받았고 이후 역사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한신대 1학년 아직 유신 데모가 시작하기 전 당시 강제 폐간된 <사상계>의 김지하의 오적 시, 그리고 <씨알의 소리>와 함께 함석헌 선생의 동양사상 강의를 접하면서 민족 모순에 차츰 눈뜨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는 60년대 북한 공산당 회의 모습을 담은 16미리 흑백 필름을 상영하였다. 이는 정치적 위기에 몰리고 있던 정부가 정보부로 하여금 함석헌과 함께 ‘삼선개헌반대국민운동본부’의 공동대표였던 김재준 목사의 영향력을 반감시키고 반공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강제로 상영토록 한 것이다.

그런데 저들의 기대와는 달리 난 난생 처음으로 접한 북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필름을 통해 충격을 받게 된다. 김일성주석을 향한 주민들의 광적인 모습에도 충격을 받았지만, 더 큰 충격은 빨갱이의 두목 김일성의 머리에 뿔도 없었을 뿐더러, 나와 똑같은 한국말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어떻게 악마인 북의 악마가 남의 천사와 같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나의 아버님도 북한에서 태어나셨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당시 나의 머리속에는 북한은 예전에는 같은 민족이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정치도 사상도 언어도 문화도 전연 다른 별개의 민족으로 내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메시야 신화는 깨졌지만, 북한에 대한 빨갱이 악마 신화는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었던 것이다. (이 신화는 1997년 미국에서 목회하며 교회가 모은 옥수수 10만톤을 전달하기 위해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면서 산산이 깨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나의 대학 3년간은 반유신 투쟁으로 점철되었고, 졸업 후 3년 동안 매일 밤 철책선 근무를 서면서 분단 모순과 신의 형상을 타고난 자유 인간을 획일화, 노예화하는 국가지상주의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된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와 목회 24년을 보내면서 그간의 잘못된 일방적인 교육으로부터 벗어나 남과 북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갖게 된다.

만나는 외국인들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백이면 백 모두 이렇게 묻는다. From North Korea or from South Korea?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이는 저들이 몰라서 묻는 질문이라기보다는 ‘너는 너의 조국이 둘로 나뉘어 저렇게 다투고 있는데, 여기 와서 무엇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조롱과 핀잔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외국생활은 나에게 남북통일의 과제는 내가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한 절대 필수 사항이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님을 깨닫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지천명(知天命) 나이 오십에 향린교회로 오게 된다.

평화통일 가능한가?

요즘의 젊은이들은 통일에 대한 생각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 어른 세대와는 달리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 북한은 어느 아프리카보다 더 먼 나라와 같다. 왜냐하면 방문은 물론 인터넷마저 통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남이다.

북한이 가난하다는데, 우리 가진 것을 나눠주면서 굳이 통일할 필요가 있는가? 각자의 삶의 방식대로 따로따로 살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하고 반문하고 있다. 교육 부족으로 자신들에게 임하는 분단의 폐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남한의 경제력은 세계 15위권이지만, 세계 최고의 자살률국가이다. 자살을 개인으로 보면 경제, 건강, 가정 갈등 등등 나름의 이유가 다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라고 해서 이런 문제나 갈등이 없겠는가? 왜 우리만이 10년 이상 그리고 2위와의 큰 격차로 계속 최고의 자살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집단적으로 보면 그 이유는 북에 대한 증오와 미움이 일으키는 집단 강박증과 생명 경시 사상으로 인한 후유증이다. 자살률 2위 국가는 지중해에 있는 섬나라 사이프러스이다. 한국과 사이프러스의 공통점은 외세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 국가라는 점이다.

유대인들의 속담에 이런 얘기가 있다.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한 사람인가? 두 사람인가? 한국은 반도의 나라로 고조선 이후 삼국시대 그리고 통일신라와 발해왕국 이후 나라의 이름은 바뀌어도 그 안에 사는 백성은 거의 동일하였다. 중국은 나라가 바뀌면 지배민족이 바뀌었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혈족의 같은 백성들이었다.

이전 시대는 제하더라도 고려와 조선왕국만 합쳐도 천년이다. 세계 역사에 천년동안을 같은 국경선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백성, 하나의 문화로 유지되어온 왕국은 없다. 이것이 우리의 살아 있는 한반도의 역사이다. 천년 이상 (단기로 따지면 오천년이다!) 하나였다가 이제 갈라선지 불과 70년이다. 

조헌정  choshalo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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